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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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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강경공립상업학교관사 이미지

구 강경공립상업학교관사

2010-07-07

- 등록번호 : 제322호 (2007년 4월 30일 등록) - 소유자 : 충남 논산교육청 - 설 계 자 : 미상 - 건립연도 : 1931년 12월 - 면적 : 대지면적 40.968㎡, 건축면적 143.43㎡ 연면적 143.43㎡ - 위치 :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남교리 1번지 - 현용도 : 교육시설 - 구조 : 적벽돌 조적조(지상 1층) - 문의 : 논산시청 관광과(www.nonsan.go.kr) 041-730-3224 구 한일(韓一)은행 강경지점, 강경 화교학교 교사.사택 2010.7.13 | 지도 크게 보기 ⓒ NHN Corp. 강경공립상업학교는 1920년 3월 강경면간이농업학교에서 상업학교로 인가를 받고, 같은 해 5월 강경공립보통학교 교사 일부를 차용하여 개교했다. 1923년 현재 학교 본관인 남교동 신축교사로 이전했고, 1944년 공업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46년 6년제 상업중학교로 복구되었다. 당시 강경공립상업학교는 충남 지역의 대표적인 중등교육기관이었다. 1950년 학제 변경으로 4년제 상업중과 3년제 상고로 분리되었고, 1999년 현재의 교명인 강경상업정보고등학교로 변경되었다. 현재 강경상업정보고등학교는 400여명의 학생이 재학 중인 강경읍의 대표적인 학교다. 등록문화재 제322호 구 강경공립상업학교 관사는 학교개방시간 중에는 언제든지 외부를 관람할 수 있다. 내부 관람을 위해서는 학교 행정실의 협조를 얻으면 된다. 관사는 학교 본관에서 50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학생들의 활동공간과 분리되어있다. 학교의 가장 큰 어른이신 교장 선생님의 생활공간인 만큼 주변에 충분한 공간을 두었는데, 학교건물이라는 사실을 떼어놓고 건물과 주변 공간만을 보면 일본 옛 도시의 개인주택을 보는듯한 느낌이 든다. 때마침 수업종이 울리고 쉬는 시간이 되자 멀리서 학생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린다. 강경상고 교장 관사는 1931년, 지상 1층의 붉은 벽돌로 지어진 조적조 건축물이다. 1920~30년대 학교 관사의 성격과 근대적 주택 건축 기술의 여러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관사는 대지면적 40.968㎡, 연면적 143.43㎡의 건축물로 지붕은 일본 전통식의 가파른 경사로 처리되어 독특한 시각적 효과를 내고 있다. 관사 입구는 석재로 마감되었으며 개인 주택에서는 잘 쓰지 않는 포치가 사용되었다. 관사의 외부는 지붕의 진회색 기와, 외벽의 붉은 벽돌, 입구의 커다란 돌, 창문의 목재 틀이 독특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건물의 창문은 모두 이중으로 처리되어 있는데 두 장의 유리창 사이에 충분한 공간을 둔 것이 특징이다. 관사 내부는 높게 설계된 천장과 미로처럼 좁은 복도가 눈에 띈다. 지난해 내부공사를 거치면서 현대식 부엌과 욕실이 깔끔하게 일본식 다다미방도 1실이 꾸며져 있다. 건물은 현재 강경상업정보고등학교 교장이 실제로 관사로 사용하고 있다. 구 강경공립상업학교 교장관사는 1920~30년대 근대적 기술을 주택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건물로 보존상태가 매우 우수하여 지난 2007년 4월 30일, 등록문화재 제322호로 등록·관리되고 있다. 현재(2010.6.24) 강경상업정보고등학교는 400여명의 학생이 재학 중인 강경읍의 대표적인 학교다. 등록문화재 제322호 구 강경공립상업학교 관사는 학교개방시간 중에는 언제든지 외부를 관람할 수 있다. 내부 관람을 위해서는 학교 행정실의 협조를 얻으면 된다. 관사는 학교 본관에서 50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학생들의 활동공간과 분리되어있다. 학교의 가장 큰 어른이신 교장 선생님의 생활공간인 만큼 주변에 충분한 공간을 두었는데, 학교건물이라는 사실을 떼어놓고 건물과 주변 공간만을 보면 일본 옛 도시의 개인주택을 보는듯한 느낌이 든다. 때마침 수업종이 울리고 쉬는 시간이 되자 멀리서 학생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린다. 글 = 헤리티지채널콘텐츠제작운영단 ’위 글은 문화재청이 저작권을 소유한 ’한국의 근대문화유산’(2004.2007년 문화재청 刊)을 토대로 현장 방문을 거쳐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광주 수피아여학교 커티스메모리얼 홀 이미지

광주 수피아여학교 커티스메모리얼 홀

2010-07-07

- 등록번호 : 제159호(2005. 4. 15. 등록) - 소유자(관리자) : 학교법인 호남기독학원 - 설 계 자 : 미상 - 건립연도 : 1900년대 - 면 적 : 연면적 172.38㎡ - 위 치 :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238-1 - 현 용 도 : 예배당 및 동아리방 - 구 조 : 벽돌 조적조(지상1층, 지하1층) - 연 락 처 :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www.speer.hs.kr) 062-652-0041 - 주변 갈만한 곳: 전남도청 본관, 조선대학교 본관 광주교대 본관, 전남대 인문대 1호관 2010.7.13 | 지도 크게 보기 ⓒ NHN Corp. 차로 김제에서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1시간 20분정도 내려가면 광주광역시가 나온다. 1919년, 광주 3.1독립 만세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광주 수피아 여학교를 찾았다. 광주시내 외곽의 주택가 끝부분에 위치한 수피아여중고는 찾기는 어렵지 않았으나, 가는 길이 좁아 조금 힘이 들었다. 광주 남구 양림동에 자리한 수피아 여중고는 선교와 여성교육을 기치로 1908년 4월1일 미국인 선교사 유진 벨(Dr. Eugene Bell,1868-1925)에 의해 설립돼 초대 교장으로 엘라 그레험(한국명 배유지) 선교사가 취임했다. 이후 1911년 미화 5000달러의 기금으로 ’스피어 홀(Speer Hall)’이라는 3층 회색 벽돌교사가 처음 준공됐고, 이때부터 교명을 ’수피아여학교’로 부르게 됐다. 개교 11년만인 1919년에는 기미년 독립운동에 전교생이 참가해 교사 2명과 학생 21명 등 모두 23명이 투옥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0년 뒤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동참하고, 1937년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이후 8년간 폐교되는 시련을 겪는 등 일제 강점기 민족적 아픔과 슬픔을 늘 함께 했다. 수피아 여학교 정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앞에 수피아 대강당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우측 언덕위로 2층짜리 서양식 건물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설립자 배유지(Dr.Eugene Bell, 1868-1925)목사를 기념하기 위한 곳이다. 배유지 목사는 미국 켄터키출신으로 목사 안수를 받은 신학박사이다. 1895년 한국에 들어왔고 1896년 나주에 선교부가 설치되자 그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가 광주에 들어온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그가 쓴 개인선교보고에 의하면 1904년 12월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1903년 목포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를 세웠고, 광주에 와서는 북문안 교회를 설립하고 초대당회장이 되었으며 1908년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처럼 수많은 사업을 수행한 배목사는 1925년 57세를 일기로 광주에서 별세하여 양림동 선교회 묘지에 묻히게 되었다. 커티스메모리얼 홀은 아래에서 보면 2층 건물이나 뒷면에서는 단층 건물로 보인다. 경사지를 이용하여 윗단으로는 2층을 드나들고, 아랫단에서는 1층으로 드나들어 실내에 특별히 2층으로 오르내리는 계단이 필요 없는 점이 특이하다. 이 건물의 평면형식은 직사각형으로 출입은 폭이 좁은 측면방향으로 진입하게 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서양건축에서 정형화 되어 있는 것으로 한국건축과는 정반대로 다른 모습이다. 정면은 다소 급한 지붕을 둔 박공형의 입면으로 중앙부에 현관문이 없이 안으로 들어가는 벽면을 만들고 대칭적으로 양쪽에 현관문을 두었다. 1층의 평면은 좌우방향으로 난 복도를 두고 그 앞, 뒤 측에 실을 배치했다. 2층은 현관의 전실을 통해서만 출입을 할 수 있다. 또한 2층은 넓은 하나의 실로 되어 있는데 바닥은 널판을 깔았다. 천정은 합판으로 된 평반자를 덮었다. 외벽은 하부에 쑥색의 돌을 2단 쌓아 벽면 하부를 견고히 만들고 그 위에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회색벽돌로 네덜란드식 벽돌쌓기를 하였다. 네덜란드식 벽돌쌓기란 길이쌓기와 마구리쌓기가 반복되는 방법이다. 특히 외벽에는 좌우측면에 2개씩, 배면에는 1개의 보강기둥을 두어 구조체계가 되며 건축벽면을 보강하였다. 이들 기둥 중에 일부는 내부실에 난방을 하는 굴뚝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벽을 보강하는 방법은 조적식 건물에서 흔히 사용하는 수법이다. 이 건물의 현관과는 반대 방향인 아래 면에는 1층에 환기와 채광을 위한 겹창형식의 유리창을 4개소 두었고 2층에는 넓은 벽면에 원형의 고정창을 두었을 뿐이다. 창호는 서양식 건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겹창인데 바깥 창은 윗부분에 경첩을 두어 밀어 젖히게 하였고, 그 안의 창은 오르내리게 하였다. 특히 2층의 창은 두 짝인데 아치 벽돌로 첨두아치를 만들었고, 그리고 1층의 창과 문은 평아치를 만들었는데 첨두아치의 Key Stone부분은 화강석 대신에 5개의 아치벽돌을 사용하였다. 또 정면과 배면의 원형창은 고정창으로 되어있는데, 변화와 포인트를 주고 있다. 1897년 목포항이 개항되고 나서 광주에는 수많은 외국인들이 드나들었다. 그 중 서양선교사들은 대개 의료와 교육, 그리고 선교 사업을 주로 하였다. 1905년 광주읍성의 북문안쪽에 북문안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 건물은 1층 한옥으로 평면은‘ㄱ’자 형태로 남녀가 엄격히 구분되었다. 같은 해부터 10년에 걸쳐 광주읍성의 서편으로 광주천을 건너 완만한 광산군 효천면 양림리 동산에 선교와 교육, 의료를 위한 시설들이 9동의 주택, 2개의 학교, 1동의 병원, 1개의 성경학교가 들어섰다. 이들 중에서 수피아홀을 중심으로 한 수피아 여학교 관련시설과 제중병원, 오웬기념관, 벨기념관, 선교사 사택 등이 현존하고 있다. 이들 이외에도 북문밖교회, 양림교회, 향사리교회, 북동천주교회 등이 건립되었다. 커티스메모리얼의 건립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수피아 홀(1911년)과 오웬기념관(1911년),그리고 선교사 사택(1920년)과 동일한 회색벽돌을 사용한 점과 배유지 목사가 초기에는 한국목조 주택을 개조하여 살았던 점, 그리고 당시의 사진에 나타나는 건물의 모습으로 보아 1911년에서 1927년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서양식 건물로 단순명쾌하고 단아하여 2005년 4월 15일 등록문화재 159호로 등록 · 관리되고 있다. 2010. 6.24일 오후에 학교를 방문 했을 당시 수업시간이었다. 날씨가 더워 모든 교실의 창문을 열어놓고 수업에 열중하는 선생님들의 카랑 카랑한 목소리, 졸린 눈을 억누르고 똘방 똘방 선생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여학생들의 모습과 간간히 들려오는 웃음소리들은 그 옛날 나의 학창시절을 떠올리게 하며 여행 중 지친 나의 몸과 마음을 잠시 동안이라도 풀어주는 활력소가 되었다. 글 = 헤리티지채널콘텐츠제작운영단 ’위 글은 문화재청이 저작권을 소유한 ’한국의 근대문화유산’(2004.2007년 문화재청 刊)을 토대로 현장 방문을 거쳐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구 영광 법성리 일본식 여관 이미지

구 영광 법성리 일본식 여관

2010-07-07

- 등록번호 : 제119호(2004. 12. 31. 등록) - 소유자(관리자) : 오대근 - 설 계 자 : 미상 - 건립연도 : 1931년 - 면적 : 건축면적 114.2㎡, 연면적 215.21㎡ - 위치 : 전남 영광군 법성면 법성리 705-1 - 현용도 : 주거시설 - 구조 : 일본식 목조건축(지상2층) - 입 장 : 없음 - 운영시간 : 개인 소유로 개방시간 미정 - 주변 갈만한 곳: 영광 신천리 삼층석탑, 영광향교 2010.7.13 | 지도 크게 보기 ⓒ NHN Corp. 목포에서 서해안고속도로를 따라가면 굴비로 유명한 곳, 영광이 나온다. 서해안의 조그마한 항구인 영광군 법성포는 예전부터 굴비를 비롯한 건어물을 중심으로 발전한 곳이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드나들었고,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도 이곳을 통하여 물류 소통을 하였다. 따라서 현재 법성포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건립한 상가, 창고, 주거, 관리시설 등 다양한 기능을 하고 있는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일본인들이 머물 여관도 필요했을 텐데 이곳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이 있다. 바로 구 법성리 일본식 여관. 법성포항 바닷가 평지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는 일본식 건물인 구 법성리 일본식 여관을 찾았다. 2010년 6월의 뜨거운 태양 속에 시원한 바닷바람을 안고 찾아간 법성포 구 법성리 일본식 여관은, 주택가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아 찾기가 만만치 않았다. 주위 마을 분들께 여쭈어 보아도 전혀 알 수가 없었고, 결국 법성면 사무소를 방문하여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했으나, 이 또한 자동차로 움직이기 힘들어 도보로 찾을 수밖에 없었다. 힘들게 찾은 정성이 있었는지 해방 무렵 이 여관을 일본인들한테 구입하여, 현재까지 살고 계시는 할머니께서는, 도시에서 찾아온 손주들을 맞이하듯 아주 반갑게 맞아 주셨고, 이 여관을 구입하게 된 과정, 선주이셨던 할아버지, 굴비장사 등 여러 가지 사연들을 옛날이야기 하시듯 정감 있게 말씀해 주셨다.   구 영광 법성리 일본식 여관은 누가 보아도 이국적 양식의 일본건축임을 쉽게 알 수 있는 모습이다. 여관으로 사용하다 일본이 패망하자 한국인이 인수하여 현재는 주택으로 사용하고 있다. 외부의 모습은 예전처럼 일본식 건축 그대로 잘 남아 있으나 내부의 일부는 약간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일본식 건물은 크지 않는 방형목재기둥과 보로 구조체를 조립하는 가구식구조이다. 물론 지붕은 일본식 기와를 얹었고, 벽면은 외를 엮은 구조체에 흙으로 얇게 바른 형식이며 외벽의 마감은 얇은 판자를 비늘모양으로 마감한 모습이다. 넓은 대지의 남쪽에 약간 치우쳐 자리하고 뒤편은 넓은 마당이 마련되어 있다. 건물에서 약간 튀어 나온 포치형식으로 현관을 만들었다. 낮고 조그마한 현관을 들어서면 1층 복도와 2층으로 오르는 목조계단이 보인다. ㄱ 자 형태의 1층 복도를 따라 양쪽으로 방이 자리하고 복도의 일부를 급경사의 계단이 차지하고 있다. 1층은 3개의 방과 욕실 및 화장실, 창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래 다다미방이었던 것을 현재는 온돌방으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1층 바닥은 장마루를 깔았고, 천정은 얇은 합판을 반자틀로 받쳐 가설하였다. 방의 출입문은 낮고 창호지를 바른 얇은 미닫이문을 달았다. 이처럼 얇은 벽과 홑 문인 창호, 특히 난방방식으로 온돌을 채용하지 않아 당시에는 아마 추웠을 것이다. 급한 목조계단으로 오르는 2층에는 남북방향으로 2개의 다다미방이 있고, 그 방을ㄱ 자형으로 감고 돌아가는 좁은 복도가 이어져 있다. 복도의 외부는 벽이나 유리창으로 마감하였다. 2층은 1층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장마루를 깔았고, 천정은 얇은 합판을 가는 반자틀로 받쳐 가설하였다. 지붕의 모습은 마치 한국의 팔작지붕과 비슷하나 주로 직선적인 조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소 무거운 느낌을 주고 있다. 특히 출입문이나 창호가 있는 3면에 일본건축 특유의 차양(일본에서는 한자로 裳階, 모꼬시라 함)이 설치되어 있다. 지붕재료는 원래 일본식 기와였으나, 지금은 골슬레이트로 교체되어 있다. 1층과 2층의 각 방에는 여느 일본식 주택에서와 같이 벽면에 조그마한 감실형 실을 만든 도꼬노마와 오시이레가 조성되어 있다. 이 건물은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귀한 일본식 여관으로 이국적인 조형과 정서로 만들어졌으며 일제강점기에 일인들이 머물었던 장소성이 나타나고 있는 곳으로 2004년 12월 31일 등록문화재 119호로 등록 ·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점차 노후화 되어 가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글 = 헤리티지채널콘텐츠제작운영단 ’위 글은 문화재청이 저작권을 소유한 한국의 근대문화유산 (2004.2007년 문화재청 刊)을 토대로 현장 방문을 거쳐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구 김제 농업기반공사 죽산지소 이미지

구 김제 농업기반공사 죽산지소

2010-07-07

- 등록번호 : 제61호(2003년 6월 30일 등록) - 소유자(관리자) : 농업기반공사 동진지부 - 설 계 자 : 미상 - 건립연도 : 1926년 9월 20일 - 면적 : 건축면적 97㎡, 연면적 97㎡ - 위치 :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죽산리 570-6 - 현용도 : 업무시설 (현 김제농업기반공사 동진지부 죽산지소) - 구조 : 지상 1층 - 개방시간 : 24시간 개방. - 연 락 처 : 063-540-1114 - 주변 갈만한 곳: 김제 구 백구 금융조합 2010.7.13 | 지도 크게 보기 ⓒ NHN Corp. 익산에서 23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면 김제시가 나온다. 민경강과 동지낭 사이에 자리 잡은 전라북도 김제시는 만경평야와 김제평야 등의 충적평야가 발달하여 호남평야의 중심부를 이루는 지역이다. 예로부터 쌀농사를 중심으로 한 전국 최대의 미작지대를 형성하여 왔다. 김제시의 별칭을 ‘벼고을’이라고 할 정도이다. 특히 삼국시대에 축조된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인 ‘벽골제’는 쌀농사와 관련된 김제시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고대의 문화유산이다. 쌀농사와 관련된 김제의 근대 문화유산으로서는 등록문화재 61호로 등록된 ‘김제농업기반공사 동진지부 죽산지소’와 220호인 ‘김제 종신리 황병주 가옥’이 있다. 두개의 근대문화유산 모두 일제강점기 쌀 수탈을 위해 전라북도에 만들어졌던 일본인 농장과 관련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일본인 지주들이 농장을 설립하고 대규모로 쌀을 수탈하여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일본에 의한 토지 침탈이 처음 시작된 것은 1894년 청일전쟁 직후부터다. 이후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부터 토지 침탈은 더욱 빠른 속도로 대규모적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인 지주에 의한 토지 침탈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곳이 전북지역인데, 이미 1900년대 초부터 대규모 농장들이 설립되고 있었다. 김제의 역사와 동시에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보여주는 곳. 김제농업기반공사 동진지부 죽산지소와 황병주 가옥을 찾았다. 먼저 찾은 김제농업기반공사 동진지부 죽산지소‘는 과거 하시모토(橋本)’의 농장 사무실이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전라북도에서 농장을 경영하였던 일본인 대지주 하시모토는 1906년 군산을 통해 전라북도에 들어왔다. 그리고 1911년 동지낭 일대의 개간지를 불하 받아 개간에 착수하여 이듬해 공사를 완공하였다. 그 후 이곳 죽산으로 거주지를 이전하면서 1916년 5월부터 농장 경영을 시작하였다. 1931년 3월에는 죽산면 죽산리 농장을 자본금 50만원의 법인 ’주식회사 하시모토 농장’으로 개칭하고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농장 사무실은 1926년 9월 20일에 완공되었다. 이 건물은 일본인이 서양식 석조 건축을 모방하여 지은 단층 건물이다. 상아색의 벽돌로 된 외벽의 하부에는 인조석을 붙였고 상부는 요철을 두어 장식적으로 처리하였다. 지붕 처마의 아래쪽에도 서양의 고전 건축에서 사용되는 장식을 모방하고 있다. 지붕은 2단으로 경사진 맨사드(mansard)형 지붕에 슬레이트를 얹었고 정면과 배면에는 각각 2개씩의 창문을 두었다. 빨간색 테두리의 지붕이 인상적이다. 정면 중앙에는 주출입구를 돌출시켰고 그 좌우에 2개씩의 수직 창을 두어 대칭적인 정면을 구성하고 있다. 건물의 내부는 넓은 사무공간으로 구성하였는데 그 좌측에 작은방 2개를 두었다. 이 방들은 임원실과 숙직실의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시모토 농장 사무실은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이 감내해야 했던 수탈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현장이다. 동시에 전라북도의 근대사가 갖는 지역적 특수성을 대변해주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3년 6월 30일 등록문화재 제61호로 등록 · 관리되고 있다. 등록문화재 61호로 지정된 이후에는 비어 있다. 비록 자랑스럽지 못한 과거일지라도 그것이 역사로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건축물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단순히 글이나 말로 배우는 역사를 넘어서서 보다 구체적으로 과거와 만날 수 있는 공간적 경험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일제시대는 어떤 규모였는지 모르겠지만 2010. 6.23일 현재 죽산면의 규모는 예전의 모습을 유지한 채, 초라한 소규모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전경을 보여 주고 있었다. 넓은 대지위에 우뚝 솟아 있는 죽산지소 건물은, 조그만 죽산면의 현재 모습과 대비되면서, 그 옛날 일제시대 일본인들의 막강한 힘을 보여 주는 듯 해 마음이 착잡하였다. 글 = 헤리티지채널콘텐츠제작운영단 ’위 글은 문화재청이 저작권을 소유한 ’한국의 근대문화유산’(2004.2007년 문화재청 刊)을 토대로 현장 방문을 거쳐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구 목포 사범학교 본관 이미지

구 목포 사범학교 본관

2010-07-07

- 등록번호 : 제239호(2006. 3. 2. 등록) - 소유자(관리자) : 교육인적자원부 - 설 계 자 : 미상 - 건립연도 : 1954년 - 면 적 : 건축면적 955㎡, 연면적 2,042㎡ - 위 치 : 전남 목포시 용해동 산43 - 현 용 도 : 교육시설 - 구 조 : 석조(지상2층) - 연 락 처: 061)459-2114 / http://www.mokpo.ac.kr/ - 주변 갈만한 곳: 목포 양동교회, 목포 중앙교회 2010.7.13 | 지도 크게 보기 ⓒ NHN Corp. 광주에서 1번 국도를 타고 가면 목포대학교가 나온다. 목포대학교는 목포사범학교로 출발했다. 해방 다음해인 1946년 10월 31일에 개교하였고 이후 목포교육대학, 목포초급대학을 거쳐 1979년 3월 1일에 4년제 국립목포대학으로 승격되었다. 문화재로 등록된 건물이 있는 곳은 큰 노송들이 많이 있어 송림(松林) 캠퍼스라고도 부르며 현재 음악과, 미술과 및 경영행정대학원, 사회교육원이 있다. 기타 대학본부 및 대부분의 대학은 무안군 청계면의 도림캠퍼스에 위치하고 있다. 이번에 찾은 곳은 목포사범학교 본관으로 1950년 8월에 건립된 건물이다. 이 건물은 목포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양을산 남쪽 기슭 아래쪽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현재 창호와 지붕재료의 교체, 그리고 1970년대로 여겨지는 건물 우측에 일부 수평으로 증축된 부분을 제외하고는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어, 2006년 3월 2일 등록문화재 239호로 등록 · 관리하고 있다. 녹음의 덩쿨에 둘러쳐져 웅장한 모습 그대로, 아직도 완벽한 형태를 유지함은 물론, 상대적으로 작은 캠퍼스를 거느리는 듯한 위압감마저 느낄 수 있었다. 군데군데 깨어진 석조벽돌의 2010. 6월의 모습은 60년 세월의 흔적을 보여준다. 건물의 전체 형태는 중앙부분에 주 출입구를 둔‘ㅡ’자형 2층 석조건물이다. 또한 평면 및 입면이 좌·우 대칭으로 구성되어 있어 균형감이 있고 아울러 석조건물다운 중후감도 갖고 있다. 건물 평면은 정 중앙에 출입 홀이 있고 홀의 끝에 좌 · 우 복도를 두고 남쪽으로 원안대로 배치하였다. 출입 홀은 전면 벽체로부터 1.7m정도 앞쪽으로 돌출시켜 내부가 비교적 넓고(7×8m) 상부도 2층 부분까지 오픈시켜 개방감이 있도록 하였다. 현관 앞쪽 4.3m지점에 2개의 원형기둥을 세우고 지붕처리를 한 출입 캐노피를 두었다. 출입 홀 좌 · 우로는 각각 4 Bay 구조를 적용하여 1, 2층 모두에 각각 8개의 실(크기8.7×6.9m)을 두었다. 전면 모퉁이에는 방형으로 전면 벽체 선에서 30㎝정도 돌출되게 굴뚝을 좌 · 우로 각각 4개씩 설치했다. 이 굴뚝은 지붕 위까지 돌출되어 있어 단조로운 건물 입면 구성에 한 몫을 하고 있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실은 좌 · 우 맨 측면에 두었는데 폭이 4.15m로 상당히 넓다. 계단은 모두 24단인데 단 높이는 11~13㎝, 넓이는 27~31㎝로 요즘의 유치원 건물정도로 편안하다. 복도의 폭 역시 2.3m 정도로 최근에 짓는 학교의 중복도 정도로 매우 넓다. 벽체는 외부를 돌로 쌓았고 2층 바닥은 철근콘크리트보를 걸고 콘크리트 슬라브로 처리하였다. 보는 복도와 교실 모두에 헌치를 두어 구조적 안정성을 최대한 배려하였다. 보 간격은 약 2.3m로 매우 좁으며 복도 쪽은 중간에 하나씩을 줄여 4.6m간격으로 하였다. 광주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서양식 건물로 단순명쾌하고 단아하여 2005년 4월 15일 등록문화재 159호로 등록·관리되고 있다. 외부 돌 쌓기는 총 22켜로 되어있는데 수직 줄눈은 일정하지는 않다. 석재는 목포 인근에서 채석한 밝은 회색빛을 띄는 화강암 계열인데 강도가 강한 편은 아니다. 유사한 석재를 사용한 건물로는 목포 정명여자중학교 구 선교사 사택(등록문화재 제62호)과 목포 구 청년회관(등록문화재 제43호), 목포 양동교회(등록문화재 제114호) 등이 있으며 목포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지역 건축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석재 표면은 거친 혹두기로 되어 있는데 많이 돌출된 부분은 10㎝ 정도가 된다. 한편 4번째 켜와 창문 상 · 하 인방은 잔다듬으로 처리하여 입면구성에 변화를 주었다. 돌의 크기는 높이가 37㎝이고 깊이는 30㎝이며 길이는 44㎝, 48㎝, 71㎝, 91㎝, 104㎝, 109㎝, 120㎝, 128㎝ 등 매우 다양하다. 줄눈 폭은 가로 및 세로 모두 2㎝ 정도다. 실의 창호는 각 Bay별로 1, 2층 모두에 95×232㎝ 크기의 목재 세로창을 4개씩 두었는데 현재는 같은 크기의 플라스틱 창호로 교체되어 있다. 지붕의 양측면은 우진각형으로 되어 있고 중앙 출입홀 상부는 앞쪽으로 박공면을 둔 경사가 급한 맞배형으로 처리하였다. 우측의 증축 부분은 증축 당시 1, 2층이 하나의 큰 교실(강당)이었던 것을 1980년경에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개수한 것이다. 즉 중앙에 폭 1.7m의 중복도를 두고 위 아래로 각각 4개씩의 작은 실(4.0×4.2m)을 두었다. 외부는 전면만 본 건물과 같은 석재로 거친 혹두기 마감을 하였고 후면은 4켜까지만 돌로 쌓고 그 상부는 시멘트몰탈 뿜칠로 처리하였다. 본 건물은 전체적으로 중앙부의 높은 박공지붕을 중심으로 균형감을 둔 좌·우 대칭 건물이다. 수직창과 굴뚝이 입면 구성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석재의 거친 혹두기 마감으로 당시 사범학교 교사용 건물로서의 중후감을 갖도록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글 = 헤리티지채널콘텐츠제작운영단 ’위 글은 문화재청이 저작권을 소유한 ’한국의 근대문화유산’(2004.2007년 문화재청 刊)을 토대로 현장 방문을 거쳐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소록도 갱생원감금실 이미지

소록도 갱생원감금실

2010-07-07

- 등록번호 : 제67호(2004. 2. 6. 등록) - 소유자(관리자) : 보건복지부장관(국립소록도병원장) - 설 계 자 : 미상 - 시공자 : 한국인 목수 - 건립연도 : 1935. 5 - 면적 : 건축면적 139㎡, 연면적 139㎡ - 위치 :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 217 - 현용도 : 공가 - 구조 : 적벽돌 조적조(단층) - 입 장 : 무료 - 운영시간 : 09:00~18:00 - 연 락 처 : 061 - 840 - 0506 2010.7.13 | 지도 크게 보기 ⓒ NHN Corp.    27번 국도를 따라 가다 보면 2009년 3월 개통된 소록대교가 나온다. 예전처럼 녹동항으로 가 배를 탈 필요 없이 다리를 건너면 바로 소록도 국립공원 주차장에 다다르게 된다. 소록도 주차장부터는 일반인의 통행이 제한된다. 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커다란 안내판이 눈에 띈다. 바로 수탄장(愁嘆場)이다. 한센병 환자들과 그 가족이 서로 안아보지도 못한 채, 마주 보고 눈물의 상봉을 해야 했던 곳이 바로 이 곳이다. 수탄장을 지나 끊임없이 늘어선 소나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본격적으로 병원 건물과 검시실, 자료관, 역사관 등의 각 종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월 뜨거운 햇살 속에 황량하게 서있는 건물 대부분이 붉은 색 벽돌로 지어진 근대식 건물이다. 그 중에서도 감금실(監禁室)은 일제강점기 소록도 병원장이 법적 근거도 없이 한센병 환자를 강제로 구금하고 감식(減食) 처분, 체형(體刑) 등을 가하던 건물이다. 이 건물은 붉은 벽돌로 지은 단층의 박공집으로, 건축물의 형태가 간결하고 단순하다. 네모반듯한 대지의 남과 북에 각각 한 동의 건물을 나란하게 짓고, 두 건물 사이를 ‘一자형’ 회랑으로 연결하여 외관상 ‘H자형’을 이룬다. 감금실 주위에는 이곳에 수용된 한센병 환자를 외부와 철저히 격리시키기 위해 붉은 벽돌로 높은 담을 쌓아 밖에서 볼 때 마치 작은 교도소처럼 느껴진다.     <건물 외벽에 설치된 쇠창살> 건물의 내부는 한편에 복도를 두고, 그 맞은편에 모두 15칸의 작은 감금실을 만들어 놓았다. 건물의 내부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마루 바닥 밑에는 용변을 볼 수 있는 변기와 난방용 온돌아궁이가 시설되어 있다. 복도에 낸 작은 창 안쪽에는 탈출을 막기 위해 철창을 시설해 놓았다. 붉은 벽돌로 쌓은 외벽 위에 목재 삼각형 지붕틀을 짜 올리고, 지붕에 일본식 시멘트 평기와를 덮었다.   <방 한 켠에 설치된 변기> 감금실에 수용된 한센병 환자는 출감할 때, 가까이 있는 검시실(檢屍室)로 끌려가 강제로 단종수술(斷種手術, 정관수술)을 받아야 했다. 단종수술은 한센병 환자를 절멸시키기 위해 1927년 3월 일본 생리학회에 의해 제기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1936년 이후부터 감금실에 수용되었다가 출감하는 환자들은 강제로 단종수술을 받아야 했다. 아래 시(詩)는 소록도 병원의 제4대 수호원장 시절 그의 명(命)을 거역했다는 죄목으로 감금실에 갇혔던 이동이란 25세의 젊은이가 풀려나면서 단종수술을 받은 후 통곡하는 심정으로 쓴 것이다. 이 한편의 시는 당시 한센병 환자들이 감금실과 검시실에서 당했던 인권유린 상황을 생생히 증언해주고 있다.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갱생원 검시실 전경> <소록도 검시실 내부 사진> 이처럼 감금실은 소록도에 수용된 한센병 환자를 불법적으로 수감하던 교도소와 같은 건물로, 인권유린의 상징적인 건물이라 하겠다. 건축구조와 형태 및 건축양식상으로는 두드러진 특징이 없으나 일제강점기 소록도에 강제 수용된 한센병 환자들의 애환과 인권유린의 현장이라는데 큰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건물로 2004년 2월 6일, 등록문화재 제67호로 등록 · 관리되고 있다. 글 = 헤리티지채널콘텐츠제작운영단 ’위 글은 문화재청이 저작권을 소유한 ’한국의 근대문화유산’(2004.2007년 문화재청 刊)을 토대로 현장 방문을 거쳐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순천 남장로교회 조지와츠 기념관 이미지

순천 남장로교회 조지와츠 기념관

2010-07-07

- 등록번호 : 제127호(2004. 12. 31. 등록) - 소유자(관리자) : 재단법인 순천기독 결핵재활원 유지재단 - 설 계 자 : 스와인하트 - 건립연도 : 1910년 - 면적 : 건축면적/186.6㎡, 연면적/388.43㎡ - 위치 : 전남 순천시 매곡동 142-5 - 현용도 : 기념관 및 진료소 - 구조 : 조적조 - 운영시간 : 09:00 ~17:00 - 연 락 처 : (061)-752-2074 - 입 장 : 무료 - 주변 갈만한 곳: 순천 매산중학교 매산관 구 순천선교부 외국인 어린이집 순천 구 선교사 프레스턴 가옥 2010.7.13 | 지도 크게 보기 ⓒ NHN Corp.    <조지와츠 기념관 (현 순천기독진료소)의 전경> 우리나라에서의 최초 선교사 활동은 전남 지역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특히 전남 순천에는 순천 중앙교회, 순천 선교사 프레스턴 가옥 등 그 역사를 생생히 보여주는 건물이 현재 2010년 6월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물이 바로 조지와츠 기념관이다. 22번 국도를 따라 순천에 접어들면 순천 의료원이 보이는데, 이를 오른편에 두고 골목을 꺾으면 보이는 고풍적 건물이 바로 현 순천 기독진료소이다. 이 건물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더럼의 사업가 조지 와츠(George Watts) 장로가 순천지역 선교에 기여한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회에서 1928년 건립한 것이다. 미국남장로회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의 한국선교는 1892년 테이트(L. B. Tate), 레이놀즈(W. D. Reynolds), 전킨(W. M. Junkin) 등의 선교사가 내한하면서 시작되었다. 레이놀즈는 1894년 잠시 순천을 방문하였고, 테이트는 1898년 순천 장터에서 전도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선교활동은 1904년 광주에 선교부(mission station)가 설립되면서부터이다. 광주선교부의 오웬(C. C. Owen) 선교사는 순천 일대의 선교를 책임졌고, 이후 순천읍 교회, 대기리 교회, 구상리 교회 등이 설립되었다.   <위 건물은 방문객들의 휴식처로 쓰일 예정으로, 현재 내부공사가 진행 중이다> 1909년, 프레스턴(J. F. Preston)과 코잇(R. T. Coit)이 순천 일대를 시찰하였을 때, 이 지역에는 이미 97개 교회에서 6천여 명이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에 프레스턴은 순천선교부의 개설을 요청하여 1910년에 승인을 받았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순천 매곡동 언덕 2천여 평의 땅을 매입하여 건축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이 선교사와 건축비 부족으로 난관에 부딪히자 프레스턴은 1911년 귀국하여 모금을 위한 순회강연회를 열던 중 와츠를 소개받았다. 더럼장로교회의 장로였던 와츠는 전주에서 활동하던 선교사 전킨의 처남으로, 선교사 13명의 생활비로 매년 1만3천달러를 기부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따라 순천 선교는 활기를 띠게 되었고, 교세는 꾸준히 성장하여 1913년 순천선교부로 독립하였다. 이후에도 와츠는 약속한 선교비 지원은 물론 수시로 특별헌금을 하여 순천지역 선교를 후원하였고, 이와 같은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지와츠 기념관이 설립된 것이다.   <건물 옆에 마련된 선교사들의 기념비. 두 번째가 조지와츠 선교 기념비> 그러나 원래 이 건물이 세워진 것은 순천고등성경학교 교사로 쓰기 위하여 지어졌다. 1921년 ‘달성경학교’로 시작된 성경학교는 새로운 교사가 필요하였다. 이 교사의 건축 비용도 와츠가 부담하였다. 그는 1923년부터 매년 건축비를 보내왔고 이렇게 모금된 7천 달러로 1928년 건물을 완공하였고, 이 건물을 ‘왓츠기념성경학원 (The Watts Memorial Bible School)’이라 불렀다. 건물의 건립은 미국에서 철도국장과 사범학교장을 지냈으며 금융업에도 종사했던 토목기술자겸 건축가인 스와인하트(R. Swinehart)가 담당했다. 1911년 부인과 함께 남장로회 선교사로서 내한한 그는 광주선교부에 소속되어 교회·병원·학교 등을 건축하였으며, 교육활동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건물 외관은 벽돌 조적조에 박공형 지붕으로 되어 있다. 건물의 1층과 2층 사이의 세줄짜리 허리돌림(string course) 장식, 부분아치형 창문, 다락지붕의 도머창(domer window) 장식은 스와인하트가 건립했던 광주의 오웬기념각이나 수피아홀과 비슷하다. 조지와츠 기념관 역시 지나친 장식을 절제하여 화려하지 않지만 견고하며 단아한 르네상스풍 건물 분위기를 살리면서 실용성을 강조한 스와인하트 건축의 특성이 잘 드러나 있다. 이 건물 또한 한국 근·현대사의 변화와 궤를 같이 하였다. 일제강점기 성경학원은 일제의 탄압으로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돌아간 1943년에 문을 닫았다가 1946년 다시 문을 열었다. 이어 한국전쟁 후 학생 수가 급증하자 1952년 순천시 매곡동 179번지 언덕 위쪽에 새 교사를 지어 이전하였다. 이후 이 건물은 순천노회 사무실, 도사경회기숙사 등으로 사용되다가 순천기독진료소로 활용되었다. 순천기독진료소를 설립한 선교사는 휴 린턴(Hugh M. Linton)이다. 군산에서 활동한 선교사 윌리엄 린턴 (William A. Linton)과 광주에서 활동한 유진 벨(E. Bell)의 딸(Charlotte W. Bell)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난 그는 1954년부터 순천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그는 농촌 일대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결핵환자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여수애양원과 광주기독병원, 전주예수병원 등과 연계하여 결핵퇴치운동을 전개하였다.   <진료소로 운영중인 건물 1층의 내부> 현재 이 건물의 1층은 순천기독진료소, 2층은 선교사들의 유품과 사진을 전시한 한국기독교선교역사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지역의 등록문화재인 매산중학교 매산관(제123호), 구 순천선교부 외국인 어린이 학교(제124호), 순천 구 선교사 코잇가옥(전남 문화재자료 제259호), 순천 구 선교사 로저스가옥(제126호) 등과 함께 당시 이 지역이 선교 활동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건물로서 2004년 12월 31일 등록문화재 127호로 등록·관리되고 있다. 글 = 헤리티지채널콘텐츠제작운영단 ’위 글은 문화재청이 저작권을 소유한 ’한국의 근대문화유산’(2004.2007년 문화재청 刊)을 토대로 현장 방문을 거쳐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원불교 익산 성지 이미지

원불교 익산 성지

2010-07-07

- 등록번호 : 제179호(2005년 6월 18일 등록) - 소유자(관리자) : 재단법인 원불교 - 설 계 자 : 미상 - 건립연도 : 1926년 - 면적 : 연면적 1,304.9㎡ - 위치 : 전라북도 익산시 신용동 344-2 외 3필지 - 구조 : 목구조 및 석조 - 입장료 : 없음 - 운영시간 : 24시간 개방. - 연락처 : 중앙총부 063-850-3261 문화사업부 063-850-3333 - 주변 갈 만한 곳: 원광대학교 2010.7.13 | 지도 크게 보기 ⓒ NHN Corp. 2010년 6월, 너무나도 뜨거웠던 태양을 머리에 이고 도착한 익산의 원불교 성지는, 지친 여행자의 몸을 시원하게 만져 주었다. 종교의 성지답게 넓은 대지 위에 과거와 현재의 건물들이 성스럽고 아주 정갈하게 잘 정리 정돈되어 있었다. 곳곳에 서있는 아름드리 나무, 벤치들과 성지의 건물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며, 아름다운 정원에 들어온 느낌을 받게했다. 원불교 익산성지는 도심내의 넓은 면적을 차지하면서 커다란 오픈스페이스의 역할을 하고 있다. 성지 내부에는 1924년 9월 익산총부를 건설하면서 최초로 지어진 본원실을 비롯, 1927년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의 처소로 지어진 금강원 등 8개의 건물과 2개의 탑이 초창기 모습 그대로 주변경관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2005년 6월 지정된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 179호로 등록된 익산성지 지정 목록은 구조물 8건과 조형물 2건이다. 구조물 8동은 대각전, 청하원, 구정원, 정신원, 본원실, 금강원, 종법실, 공회당 이고, 조형물은 대종사성탑과 대종사성비다. 구내에는 소태산 대종사와 선진들의 총부건설당시 초기교단의 역사가 그대로 보전되어 있는 보존구역과 원불교 개교반백년 기념사업 이후 총부 공동체 건설을 목적으로 확장한 두 지역 외에 원불교 대학원대학교, 수도원, 복지기관 등 많은 기관이 총 15만여 평의 면적위에 각종 기념물과 건물들이 건립되어 있다. 보존구역은 일제의 탄압과 생활의 곤궁 속에 낮에는 소작작농, 엿 장사, 고무공장 공원 등으로 일을 하고 밤에는 한 자리에 모여 소태산 대종사의 법설로 지도를 받으며 공부를 한 영육쌍전의 산 도량이었다. 곳곳에 당시 대중모임, 훈련, 공동생활 등의 목적으로 세웠던 도치원, 공회당을 비롯, 법신불 일원상을 최초로 봉안했던 대각전 등 소태산 대종사의 교화경륜과 선진들의 희생정신이 스며있는 각종 사적과 유물, 사료 등이 보전되어 있다. 또한 이곳에는 초기 교단의 역사적 발자취 이외에도 교단을 주재하는 종법사를 비롯하여 최고 의결기구인 수위단회, 중앙집행기관인 교정원, 감찰기관인 감찰원, 의결기구인 중앙교의회 등 원불교의 교화, 행정, 교육, 문화, 복지, 산업의 중심기관이 자리하고 있어 교단의 심장부라 할 수 있다. 19세기 이후 한국사회에서 나타난 급격한 봉건적 사회구조의 해체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역사적 격동기 속에서 우리 민족은 새로운 신앙 운동을 통하여 기존 전통 종교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종교적, 사상적 변화를 갈망하고 있었다.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처음 전래된 천주교가 전통 종교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에 대응하여 나타난 동학(東學)은 새로운 신앙 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1894년부터 1910년까지의 시기는 격심한 사회적 변화와 가치변동에 따라 한국종교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새로운 종교 활동이 활발하였다. 천도교와 대종교, 증산도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며, 원불교 역시 한국 근대기의 새로운 신앙운동의 과정에서 형성된 새로운 종교 중 하나이다. 원불교의 교조인 소태산 대종사 박중빈(朴重彬, 1891~1943)은 전라남도 영광에서 태어났으며, 20년 동안의 구도 고행 끝에 1916년 4월 28일 큰 깨달음(大覺)을 얻었다고 한다. 원불교에서는 이 날을 원불교가 시작된 날로 정하고 있다. 박중빈은 1917년에 저축조합을 만들어 금주, 금연, 소비절약, 공동출역 시민운동 등을 전개하여 상당한 기금을 마련하였고, 이 자금으로 1918년부터 1년간 바다를 막아 논을 만드는 방언공사(防堰工事)를 전개하여 2만 6천여 평의 농토를 마련함으로써 원불교 창립의 경제적 기초를 다졌다. 이후 1920년에는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에 들어가 5년 동안 교리 초안을 작성하였고, 1924년부터 전라북도 익산에서 불법 연구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교화활동을 시작하였다. 이곳이 현재 원불교 중앙총부와 원불교 익산 성지가 위치하고 있는 전라북도 익산시 신용동이다. 익산성지내 광복이전에 세워진 건축물을 건립연도 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본원실(1924) : 익산성지에 최초로 지어진 집으로 ‘불법연구회’간판이 처음 걸렸던 곳 - 세탁부(1924) : 본원실과 함께 건립되었으며 엿장사를 위해 엿 곱는 일을 해서 ‘엿집’이라 불리었고 1971년 이후 총부의 세탁 업무를 담당 - 금강원(1927) : 대종사의 처소와 제자 교육장소로 사용 - 종법실(1928) : 대종사가 1939년 이후 거처하던 곳 - 공회당(1929) : 대중 집회 장소로 사용했고, 대종사가 제자를 지도한 원불교 초기의 교역자 양성소 - 청하원(1932) : 개인주택으로 건립되어 소집회 장소로 사용 - 대각전(1935) : 원불교 신앙의 대상인 일원상(一圓相)을 최초로 봉안한 곳 - 구정원(1936) : 개인주택으로 건립되어 사무실로 사용 - 정신원(1941) : 개인주택으로 건립되어 외빈 응접장소로 사용 - 송 대(1941) : 대종사의 휴양과 원불교 정전집필이 이루어진 장소    <총부 대각전의 정면 모습이다.> 대각전(大覺殿)은 중앙총부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 종각을 지나 언덕에 세워진 건물로 총부에 대 집회를 위해 지은 현대식 건물이다. 원기19년 5월 9일(음3.26) 총대회에서 익산 대각전 건축기성회를 조직하고, 원기20년부터 복숭아 밭 위 언덕에 터를 다듬고 기념관 건축공사가 시작되어 4월 27일(음3.25)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공동생일 기념일에 기념관 준공식을 가졌다. 대각전 전면 중앙에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인 법신불 일원상을 최초로 정식 봉안하였다. 대각전이 건축됨으로 해서 공회당에서 행해졌던 예회나 선(禪)등을 이곳에서 하게 되었으며 특히 공동생일기념일(대각개교절)이나 정기총회 등 전국적인 행사 때에는 많은 대중이 운집했다. 당시에는 이리시내에도 이처럼 큰 집회장소 건물이 없을 정도여서 촌로들이 도시락을 싸들고 대각전을 구경 올 정도였다고 한다. 대각전은 건축 당시 84평이었으나 원기40년 확장 증축을 통하여 107여 평에 이른 현재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고 불단 옆에 있는 법좌는 소태산 대종사, 정산 종사 등이 앉아 법을 설한 법좌로 원래의 것은 역사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다. 대각전의 현판 글씨는 강암 송성용의 부친인 송재호의 글씨이다. 원기71년(1986년) 5월 2대말 성업봉찬사업회 사업의 일환으로 대각전 주위에 황등석을 깔았다. 원기19년 정기 총 대회에서 기념관 건축의 안이 발의되었다. 삼산 김기천의 제안으로 기념관 건축 기성위원회가 조직되어 유산 유허일, 구타원 이공주를 남녀 중앙위원장에 추천하고 건축성금은 권장한다든지 하는 방법은 없도록 하고 반드시 교도의 자발적 희사를 받도록 하였다. 원기20년 기념관 준공에 교도 공동생일기념일이라 500여명의 교도들이 참석하였다. 신축 기념관은 경성(서울)지부 회관을 신축한지 1년 만에 교단에서 가장 큰 규모로 지어진 대강당이었다. <총각전의 내부 모습이다.> 대각전 전면에 일원상 봉안은 불법연구회 창건사에 있어서 큰 의미를 가진다. 일원상 표현의 효시는 소태산 대종사의 대각에서부터 비롯하여 개념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여러 차례 표현하였으나 직접 형상으로 그려 보인 것은 원기4년 가을 잠시 머물렀던 모악산 금산사 송대 건물에서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원기28년(1943) 5월 16일 이곳에서 최후법문을 설하시었다. 또한 열반 후 발인식과 종재식을 대각전에서 가졌으며, 정산종법사 취임식과 대산 종법사 취임식도 대각전에서 행해졌다. 반백년 기념관이 건축될 때까지 각종 행사 등이 대각전에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