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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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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세 안동시장 인터뷰

2010-08-01

권영세(58) 안동시장은 1일 일요일 아침을 그 어떤 휴일보다 상쾌하게 맞았다. 멀리 브라질에서 희소식이 날라들었던 이날 새벽까지 잠 못 이뤘을 것 같은데 피곤한 기색 없이, 이날 오전 11시 하회마을로 향했다. 그리고는 하회탈 목걸이를 한 움큼 쥐고서는 하회마을 입장객들에게 선물로 증정했다. 마을 어귀에 현수막과 애드벌룬이 내걸린 가운데, 관광객들은 세계유산 등재 기념으로 입장료 50% 할인에다 하회탈 목걸이까지 받는 기쁨에 맞장구를 치면서 하회마을의 세계유산 등재를 축하했다. 하회마을 보존회 회원들과 기쁨을 나누고, 방송카메라에 둘러싸여 인터뷰를 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낸 권영세 시장에게 이날 오후 3시쯤 전화를 걸어 소감과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행정고시 21회 출신으로 줄곧 공직자로 일 해온 권 시장은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 불리는 안동의 시정을 맡아 나름대로의 분명한 소신을 밝혔다. 관광객 유치도 좋지만, 보존이야말로 시(市)의 사명이란 설명이다. "(1999년)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하회마을을 다녀간 이후, 하회마을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연간 100명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이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으니, 더 많은 분들이 올 것입니다만,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지켜나가야 할 책무가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하회마을을 후세에게 물려줘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지요." 현재 하회마을은 하루 입장객을 5000명으로 제한하는 인원통제를 하고 있는데, 권 시장은 이 통제가 이번 세계유산 등재로 인해 완화될 가능성이 없음을 시사했다. "(세계유산이 되었다고 해서)하루 수 만 명이 들어오면 훼손될 우려가 있어요. 수용능력을 감안해서 적절하게 (통제)해야 한다고 봅니다. (페루 남부 쿠스코시 북서쪽 계곡의 잉카 유적지인)마추픽추의 경우 하루 입장객을 3000명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관광객들은 마추픽추를 보기 위해 2~3일 머물면서 자기 차례가 오면 그 때 입장하지요." 하회마을에서 4km 떨어진 곳에 병산서원이 있다. 병산서원은 이번에 하회마을과 함께 세계유산 등재대상이 되었는데, 이곳의 입장객도 1일 100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그렇다면, 안동시는 세계유산 등재가 가져온 관광산업 육성의 호기를 스스로 포기하겠다는 말인가? 권 시장은 오히려 그 반대이며, 문화재 보존과 관광산업 육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을 계획을 털어놓았다. "안동시티 투어와 연계할 것입니다.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의 입장객 통제로 인해)못 들어가는 분들이 다른 관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요. 안동은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고 합니다. 고가옥을 비롯해 역사적인 문화자원이 참 많지요." 현재 안동시는 고택(古宅) 지원사업과 함께, 외부 관광객들이 고택에서 묵으면서 전통체험을 할 수 있도록 80여 고택을 지정했는데, 매주말 지정 고택들의 방이 꽉꽉 찬다는 것이다. 예약 없이는 하룻밤 자기가 어려운 주택이 되었는데, 권 시장은 "한 여름 밤에 즐길 수 있는 고택음악회를 개최함으로써 고택을 전통과 현대의 융합 문화체험장으로 발전시키겠다"고 말했다. 권 시장의 계획은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하회마을의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안동지방의 음식, 한지, 한복 등의 전통문화를 널리 알림으로써 안동을 ’한문화 산업특구’로 조성할 것입니다." 음식 얘기가 나오자 권 시장은 한걸음 더 내디뎠다. 그는 "안동에는 일반 사람들이 모르는 좋은 음식이 참 많습니다. 이런 음식을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가공하는 연구를 해서 음식문화를 산업화할 것입니다." 권 시장의 설명을 듣고 보니, 안동에는 ’안동식혜’ ’안동간고등어’ ’안동국수’ ’안동찜닭’ ’안동소주’ 등의 별미가 많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권 시장은 하회마을의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안동 전체의 문화산업 발전을 꾀하고 있음이 명확해졌다. "하회마을은 보통 (관광객들이)하루 시간을 내서 다녀가시곤 합니다. 앞으로는 며칠 계시면서 안동의 이모저모를 두루 경험하고 돌아가실 것입니다." 한편,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하회와 양동마을의 세계유산 등재를 보류(refer)해야 한다는 의견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제출함으로써, 한때 세계유산 등재의 꿈이 깨지는 게 아닌가 걱정했던 사실을 토로했다. 권 시장은 "(경주에 있는)양동마을과는 행정구역이 달라 문화재 관리체계가 이원화됨으로써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이 있었다"며 "그러나 우리는 경상북도, 경주시 등과 역사마을보존위원회를 만들어 관리체계의 일원화 및 효율화 계획을 세웠고, 이를 세계유산위원회 위원들에게 적극적으로 설명한 것이 통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글=헤리티지채널콘텐츠제작운영단  

세계유산적 가치분석 (下) 이미지

세계유산적 가치분석 (下)

2010-08-01

<상(上)편에 이어서> 3. 역사적 건축물 두 마을의 종가인 하회마을의 양진당은 16세기, 양동마을의 서백당은 15세기에 건립되었다. 두 종가는 한국 주거건축 역사상 가장 오래된 예에 속한다. 마을 내의 다른 건축물들도 17세기 이후에 지어진 것들로 수백 년에 걸친 마을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하회·양동마을에 있는 가옥들은 목구조와 관련된 기술적 진보와 유학자들의 예제를 수용하면서 주거건축이 변화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남녀유별의 사상에 의한 안채와 사랑채의 분화, 조상 숭배와 종법질서에 따른 사랑채의 별설 과정 등은 조선시대 유학의 영향으로 가옥 배치가 변화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이 마을에 남아있는 18세기 이전의 가옥은 다른 마을에서 찾아보기 힘든 학술적 참조의 대상이 된다. 하회마을에는 보물로 지정된 가옥이 2건(양진당, 충효당), 양동마을은 4건(향단, 관가정, 무첨당, 독락당)으로서, 한국 전통 가옥의 가장 우수한 사례가 두 마을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된 건축물은 하회 9건, 양동 12건 이다. 한 마을에 이렇게 많은 수의 국가 지정 문화재가 있는 것은 하회·양동마을을 제외한 다른 마을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유교건축 중에서 하회의 병산서원과 양동의 옥산서원은 각각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둘은 조선시대 향촌 사회의 대표적인 유교경관 요소인 서원의 가장 뛰어난 사례이다. 생활의 편리를 위주로 지역에서 생산되는 재료와 기술을 사용한 다양한 형식의 초가집은 지역의 주거문화와 건축 기법을 보여주는 귀중한 증거이다. 기와집으로 짓는 양반집들이 유가 예제의 질서를 반영하여 형식화되는 것과는 달리, 최소의 기능적 요구를 수용하는 초가집들은 오랜 세월 그 지역의 기후와 관습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지역성을 보여주는 건축이다. 하회와 양동 두 마을의 초가집들이 서로 다른 형식을 갖는 것도 이와 같은 지역적 차이가 반영된 결과이다. 4. 빼어난 인물들과 학술적·문화적 성과물 하회·양동마을의 조상은 고려 말, 조선 초에 각각 입향하였으며, 이러한 역사는 족보와 문헌자료로 증명된다. 두 마을에는 조선시대의 족보가 남아있으며, 마을의 재산과 관련된 문서나, 서신들도 남아있다. 류성룡의 필사 원본인 하회의『 징비록(懲毖錄)』은 임진왜란 전후의 상황을 체험적으로 기록한 귀중한 역사 자료이며, 양동의『 통감속편(通鑑續編)』은 금속활자로 인쇄한 매우 이른 시기의 증거로써 인쇄술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양동의 손 씨 가문이 보관하고 있는’ 손소 영정’( 보물 제1216호)은 15세기 말에 그려진 초상화로써 가장 이른 시기에 그려진 인물화이다. 두 마을의 전적은 그 양이 많고, 일부는 나무책판으로도 남아있으며, 정사와 정자에는 문인들이 남긴 많은 기문과 시문이 걸려있다. 이러한 탁월한 문헌자료가 많이 남아있는 것은 두 마을에서 뛰어난 유학자를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다. 훌륭한 유학자가 사망한 뒤 후손과 다른 학자들이 그의 유적을 모으고 전기와 추도문을 모아 출판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관례였기 때문에 하회·양 동마을에는 선조가 남긴 많은 문집들을 많이 보관하고 있다. 하회에서는 류운룡, 류성룡을 화천서원, 병산서원에서 각각 배향하고 있으며, 양동은 손중돈을 동강서원에서, 이언적을 옥산서원에서 배향하고 있는데, 이들 서원은 전적을 출판, 수집, 보관하는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고문서로는 개인 간에 서로 주고받은 간찰, 매매 등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계약 문서, 혹은 관혼상제 관계 문서, 각종 분쟁에 관련된 소송문서, 재산상속에 관한 문서, 관청에 대한 민의 청원서 등이 있다. 일부의 전적과 달리 이들 문서는 유일본이라는 점, 가공되지 않은 1차 사료라는 점에서 한국 향촌사회의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5. 탁월한 가치의 무형문화 하회·양동마을의 집안에서는 전통방식의 관혼상제가 이어져오고 있다. 조선시대의 관혼상제는 일생에 있어 중요한 통과의례로 취급되었으며, 각각의 의례에 대한 절차가 정해져 있었는데, 오늘날 도시와 농촌에서 이러한 전통적 풍습은 많이 사라진 상태이다. 두 마을에서는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의 관혼상제가 유지되고 있으며, 그 중 가장 중시되는 제례는 진설되는 음식과 절차에서 높은 수준을 보인다. 이 두 마을에는 4대조 봉사 외에 불천위 제사가 행해지고 있으며, 전국적으로 유생들이 참가하는 서원 향사가 매년 봄가을에 행해진다. 이러한 제례가 지속되고 있는 것은 이를 뒷받침하는 문중 조직이 하회·양동마을에 지금까지 잘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마을에는 또한 조선시대의 농촌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마을 민속신앙과 민속놀이가 이어져오고 있다. 마을의 수호신에게 매년 마을의 무사 안녕을 비는 동제가 이루어지며, 동제의 중심은 마을 내의 오래된 나무나 사당이 된다. 두 마을의 민속놀이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하는 동체놀이와 세시풍속으로 이어지는 놀이들이 있다. 공동체놀이는 하회의 경우, 선유줄불놀이가, 양동의 경우 줄다리기가 대표적이다. 이 놀이들은 마을 내의 양반과 상민이 함께 어울리는 기회가 되어 마을공동체로서 지연적 유대를 강화하는 구실을 하며, 혈연 중심의 제례문화가 지닌 한계를 보완해 주기도 한다. 이 밖에 하회에서는 부녀자들이 봄에 화전을 부치는 화전놀이가 있고, 양동에서는 윷놀이, 호미씻기, 서래씻기 등의 민속놀이가 전해진다. 마을신앙과 민속놀이는 오락적인 측면과 함께 마을의 무사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주술적 행위와도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점은 특히 하회마을에서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회별신굿탈놀이’에서 확인된다. 12세기 중엽부터 상민(常民)들에 의해 연희(演戱)되어온 ’ 하회별신굿탈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는 전통 연희의 원초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희귀한 사례이며, 여기서 사용되는 ’하회탈 및 병산탈’(국보 제121호)은 예술적인 가치가 높다. 정리=헤리티지채널콘텐츠제작운영단    

세계유산적 가치분석 (上) 이미지

세계유산적 가치분석 (上)

2010-08-01

style="text-align: justify;"> style="margin-top: 30px;">하회와 양동마을은 현재에도 사람들이 거주하는 ’살아있는 유산’(Living Heritage)이다. 멋 옛날에 남겨진 죽은 유산이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이 앞집과 옆집, 같은 성(姓)씨의 가깝거나 먼 친척으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공간이며, 앞으로도 죽 그럴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문화재청은 ’마을’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사례는 드문 경우라고 설명했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세렝게티 평원, 이집트의 피라미드, 호주의 산호초와 남미대륙의 바로크 성당 등 모은 세계유산은 나름의 가치가 있겠지만, 한반도의 작은 마을이 그 진정성과 ’탁월한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의 헤리티지’가 되었다면, 분명 그럴 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style="margin-top: 30px;">모름지기 유산이란 우리가 선조로부터 물려받아 오늘날 그 속에 살고 있으며, 앞으로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할 자산이며, 우리들의 삶과 영감의 원천인 것이다.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이 세계유산으로 당당히 등재될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봤다. style="margin-top: 30px;">1. 600년 역사의 씨족마을 style="margin-top: 30px;">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마을 유형은 ’씨족마을’이었다. 그리고 하회와 양동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씨족마을의 원형이 남아있는 대표적인 마을로 꼽힌다. 씨족마을은 성(姓)씨를 매개로 하는 부계의 혈연집단이 대를 이어 한 곳에 정착하여 이뤄진 정주형태로 하나 혹은 두 성씨의 양반이 마을주민의 다수를 차지하면서 의사결정에 주도권을 가지며, 벼농사가 경제적인 기반이 된다. style="margin-top: 30px;">하회와 양동마을은 조선 전기 씨족마을 형성기의 두 가지 전형을 각각 대표한다. 하회는 주변지역으로부터 새로운 정주지를 찾아 이주하면서 정착하게 되는 ’개척입향’의 경우이고, 양동은 혼인으로 처가에 들어와 살면서 자리를 잡은 ’처가입향’의 경우이다. style="margin-top: 30px;">이 두 마을에서는 입향 이래 학식과 덕망이 높은 인물들이 다수 배출됨으로써 조선시대 명망 높은 씨족마을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특히 이 두 마을의 입향 초기 선조들은 국가와 유림에서 인정하는 불천위(不遷位)로 추대되었기 때문에, 마을의 씨족적 결속이 강화되어 현대까지 그 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천위’란 나라에 큰 공을 세웠거나 도덕성과 학문이 높은 분에 대해서는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모시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를 말한다. 본래 제사는 고조(할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 4대를 지냈는데, 불천위에 봉해지면 영구히 제사를 지내게 된다. 퇴계 이황,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등이 그 예인데, 가문에 불천위를 모신다는 것은 큰 영광이었다. 하회ㆍ양동마을은 이런 불천위의 전통을 지켜온 명문 씨족마을의 대표적인 케이스인 것이다. style="margin-top: 30px;">2. 한국 풍수(風水)의 전형 style="margin-top: 30px;">하회ㆍ양동마을은 외견상 서로 다른 형태를 취하지만 모두 길지(吉地)가 아닐 수 없다. 하회의 경우 물이 마을을 섬처럼 둘러싸는 ’연화부수형’의 터이고, 양동의 경우 작은 골짜기가 여럿 나란히 있는 ’勿(물)’자형의 형국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 유명한 지리지인 ’택리지(擇里志)’는 하회를 길지라고 언급했는데, 두 마을은 ’삼남의 사대길지’에 포함되었다고 한다. style="margin-top: 30px;">두 마을의 가옥과 건물들은 이와 같은 지형과 잘 조화를 이루고, 마을 안의 길은 자연지형과 물길을 따라 조성되었다. 인위적인 조작을 가하지 않고, 기본적인 풍수의 도식을 따르되, 건축물과 주변 경관의 시각적 연계를 통해 자연과의 일체화된 경관을 이룸으로써 한국 풍수의 특징을 보여준 지역이 이 두 마을이다. style="text-align: center; margin-top: 30 style="margin-top: 30px;">두 마을의 가옥과 건물들은 이와 같은 지형과 잘 조화를 이루고, 마을 안의 길은 자연지형과 물길을 따라 조성되었다. 인위적인 조작을 가하지 않고, 기본적인 풍수의 도식을 따르되, 건축물과 주변 경관의 시각적 연계를 통해 자연과의 일체화된 경관을 이룸으로써 한국 풍수의 특징을 보여준 지역이 이 두 마을이다. style="margin-top: 30px;">마을 전체는 농경지(생산공간), 거주지(생활공간), 유보지(의식공간)로 구성되어 있다. 경작지와 생활지를 나누는 마을 입구에는 대개 외부세계로부터의 시각적 차폐를 위한 인공의 조림과 지형적 장치가 마련되고, 동구와 종가를 연결하는 길이 마을 내 큰 길이 된다. 각 집들은 큰 길로부터 나뭇가지가 뻗어나가는 것처럼 작은 길들로 연결되어 있다. 각 주거지는 우물, 빨래터를 중심으로 지형과 길 등에 의하여 여러 개의 작은 생활단위로 구분되어 있다. 마을 구성원들의 관계는 각 가옥들의 입지와 의장에도 반영되어있다. 가옥들의 입지는 종가가 가장 좋은 위치에 놓이고, 그 주변으로 다른 양반 가옥들이 있으며, 양반 가옥의 주변에는 그에 부속된 상민들의 가옥이 위치한다. style="margin-top: 30px;">마을의 주거지역과 조금 떨어진 강변, 산기슭 등에 위치하는 서원과 정자, 정사는 양반 학자들의 자기 수양공간으로서, 마을을 조망하거나 마을을 둘러싼 자연을 바라볼 수 있는 의식공간의 요충에 지어졌다. 많은 정사와 정자는 살림집에서 분리되어 따로 마을 내에 설치되었던 선비들의 공간을 보여주며, 유교건축물들을 통해 나타나는 마을 내 의식영역의 강조는 한국의 씨족마을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정사와 정자의 건설은 풍광이 좋은 곳을 꾸미고 문학의 대상으로 삼아 이상화하였던 조선시대 양반 학자들의 자연관을 반영할 뿐 아니라, 은일하고 자적하는 유학자의 향촌생활의 근거지가 된다. 이곳은 그 주인과 교류하는 동류 양반 문인들과 그 후손들의 학문과 교육, 사교의 장소가 되었고, 그들이 남긴 시나 기문을 새긴 목판이 지금도 남아있다. 하회마을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시로 나타낸 ’하회16경(河回十六景)’이나, 이언적이 독락당과 계정을 끼고 흐른 개울 주변의 경관을 시로 읊은 ’임거15영(林居十五詠)’은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style="text-align: center; margin-top: 30px;"> align="center"> align="center"> style="float: left;"> align="left">정리=헤리티지채널콘텐츠제작운영단 align="center">   

세계유산이란 이미지

세계유산이란

2010-08-01

세계유산(World Heritage)은 유네스코(UNESCO: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가 1972년 채택한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전 인류가 공동으로 보존하고 후세에게 전수해야 할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 유산을 말한다. 또 세계유산은 ’문화유산’, ’자연유산’과 문화ㆍ자연유산의 특징 섞인 ’복합유산’의 3가지로 구분된다. 양동ㆍ하회마을은 이중 문화유산에 해당한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려면 유산(遺産)의 진정성과 가치의 탁월함과 함께 해당 국가의 보존관리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최근 들어서는 세계유산의 우수성과 독창성으로 인해 국제적인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세계유산을 보유한 국가의 자국민들에게는 문화적 자부심의 상징으로 인식되면서, 각국의 세계유산 등재 노력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유산 등재 심사도 매우 엄격해지는 추세다.   2010년 6월 현재 전 세계적으로 총 890건의 유산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돼 있으며, 우리나라는 ’한국 역사마을-하회와 양동’까지 포함해 모두 10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나머지 9건의 세계유산은 1995년 등재된 석굴암, 불국사와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와 1997년 등재된 창덕궁, 화성, 2000년 등재된 경주 역사유적지구, 고창ㆍ화순ㆍ강화 고인돌 유적, 2009년 등재된 조선왕릉 등 문화유산과 2007년 최초의 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등이다. ’한국의 역사마을-하회와 양동’의 세계유산 등재는 한국인의 전통적 생활공간이며 주민들이 세대를 이어가며 삶을 영위하는 ’살아있는 유산(Living Heritage)’이 세계적인 가치가 있는 유산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큰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다음은 우리나라가 보유한 세계유산들이다.       글=헤리티지채널콘텐츠제작운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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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

2010-07-16

  ‘대학캠퍼스 문화유산 탐방’의 첫 번째 방문지는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에 자리 잡은 이화여자대학교 신촌캠퍼스입니다. 올해 창립 124주년을 맞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고등교육기관이지요. 스크랜튼여사 이화여대의 전신 이화학당의 시초는 1886년 5월31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미국 선교사 메리 F.스크랜튼(사진)여사가 서울 정동의 자택에서 단 한명의 학생을 앞에 앉혀 놓고 수업을 시작했지요. 그 해 11월, 이화학당은 서울 정동에 건평 200여 평에 이르는 한식 기와집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것이 이화 교사(校舍) 건축의 시작이지요. 그리고 해방 직후인 1945년, 이화여대는 문교부 제1호로 종합대학교 인가를 받았습니다.   여사가 서울 정동의 자택에서 단 한명의 학생을 앞에 앉혀 놓고 수업을 시작했지요. 그 해 11월, 이화학당은 서울 정동에 건평 200여 평에 이르는 한식 기와집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이것이 이화 교사(校舍) 건축의 시작이지요. 그리고 해방 직후인 1945년, 이화여대는 문교부 제1호로 종합대학교 인가를 받았습니다. 한 세기 이상의 역사를 가진 이화여대는 현대적인 건물과 전통적인 건물들이 어우러져 있는 참으로 아름다운 캠퍼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화여대 정문을 통과해 100m 정도 들어가면 우측으로 은색의 지하공간이 보입니다. 이곳이 2008년 ‘서울시건축상’ 대상을 수상한 ECC(Ewha Campus Complex)입니다. ‘땅을 재단하는 건축가’로 알려진 프랑스 태생의 도미니크 페로(Dominique Perrau)가 설계했지요. ECC는 2만여 평의 면적에 총 6개 층의 지하캠퍼스 공간으로 디자인 되었습니다. 이곳에는 강의실 뿐 아니라 피트니스 센터, 음식점, 편의점, 주차장, 영화관 등의 시설들이 들어와 있지요. 이화여대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초현대식의 ECC 위쪽으로 올라갔습니다. 이화여대 최초의 건물이 일직선으로 자리를 잡고 있군요. 바로 이화여대의 본관인 ‘파이퍼 홀 (Pfeiffer Hall)’입니다. 파이퍼 홀은 우리나라 최초 여성고등교육기관의 대표적 건물이라는 점이 인정되어 2002년 5월31일 ‘등록문화재 14호’로 지정됐습니다. 이 건물은 이화여대가 신촌 캠퍼스로 옮겨갔던 1935년에 완공됐으며, 신촌의 이화대학을 건축할 때 개인으로는 가장 많은 기부금을 희사한 미국인 파이퍼 부부를 기념하여 ‘파이퍼 홀’이라는 이름이 명명되었습니다. 그 밖에, 이화여자대학교는 4년 전 창립 120주년을 맞아 정릉의 ‘한옥 교사’를 신촌 캠퍼스에 복원했지요. 비록 복원이지만, 18만평 신촌 캠퍼스의 한 켠에 자리한 200여 평의 한옥교사는 이화여대가 앞장서 일구어낸 근ㆍ현대 여성고등교육의 역사를 온전하게 전달해주는 캠퍼스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이곳에 들러 한옥 교사의 내부를 들여도 보노라면 선배 이화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만 같습니다. ‘시간이 숨 쉬고 있는 공간으로서의 이화여대’는 그 존재만으로도 가치가 있습니다. 청춘의 뜨거운 기운에다 역사의 온유한 향기가 더해져, 이화여대 신촌캠퍼스는 오늘도 미래의 역사를 꾸준히 만들고 있습니다.   글 = 윤우리 사진제공 = 이화여대 ’이화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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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의 언더우드·스팀스·아펜젤러관

2010-07-14

‘캠퍼스 문화유산 탐방’의 네 번째 방문지는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의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입니다. 연세대학교는 설립이후 일제 강점기 때 일제에게 빼앗기고 다시 찾았다가 6.25전쟁 당시 공산군에 의해 반파되어 복구하는 등 세 차례에 걸쳐 다시 일어선 대학교입니다. 연세대학교의 모체는 1885년 궁정어의(宮廷御醫)였던 H.N.앨런이 고종의 명으로 설립한 제중원(濟衆院:초기의 이름은 광혜원)입니다. 이어 1899년 한국 최초의 의학교인 제중원의학교로 설립되었지요. 그 후 ‘세브란스의학교’를 바뀌었다가 광복이후 연희대학교와 통합하면서 지금의 연세대학교가 된 것이지요. 연세대학교는 긴 역사를 자랑하는 학교인 만큼 사적으로 지정된 소중한 문화유산이 여럿입니다. 연세대 정문을 지나 백양로를 따라 들어 가다보면 중앙도서관 앞 한글 탑이 보입니다. 이곳을 지나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가 적힌 석판이 있고, 그 위쪽에 연세대학교 본관인 ‘언더우드관’이 나타납니다. 또 언더우드관의 양 옆에는 각각 스팀스관과 아펜젤러관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들 세 건물이 ‘ㄷ’자 모양을 하고 있지요. 우선 중앙에 자리 잡은 언더우드관은 사적 제 276호로 지정돼있습니다. 옛 연희전문학교의 건물로 학관(學館)이라 불려왔지요. 언더우드관은 원래는 강의동으로 쓰였으나 지금은 대학본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건물전체가 담쟁이덩굴로 덮여 있어 이국적인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이 건물은 1921년 짓기 시작해 1924년 완성되었습니다. 돌로 지은 4층 건물로서 아펜젤러관과 함께 연세대학교에서 두 번째로 세워졌지요. 연희전문학교의 창설자인 언더우드(한국이름 원두우) 박사의 업적과 인격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그의 형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언더우드 목사의 장남인 원한경 교수가 초석을 놓았고 당시 화학과 교수인 밀러가 공사를 감독하였습니다. 고딕풍의 건물로 평면은 장방형이며 중앙에 튜더풍의 아치형인 현관이 있습니다. 지붕은 옆모습이 사람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요. 언더우드관을 중심으로 오른편에는 ‘스팀스관’이 있습니다. 사적 제275호지요. 1920년에 완공되었으니 연세대학교 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2층 건물인 스팀스관은 영국풍의 석조 건물로 간결하면서도 우아한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현재 이 건물은 대학원, 대학평의회 등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자인 언더우드 목사는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서 항구적으로 사용할 학교 건축을 위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했던 ‘찰스 스팀슨’의 기부금을 얻어놓고 세상을 떠납니다. 그 후 후임 연희전문학교의 교장인 에비슨이 그 기부금으로 건립한 것이 바로 이 스팀스관입니다. 미망인인 언더우드 부인이 초석을 놓았고 당시 화학과 교수인 밀러가 공사를 감독하였습니다. 설계자는 알 수 없으나 당시 미국인 건축가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설계와 기본계획을 작성하였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언더우드관과 마찬가지로 장방형의 평면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고딕양식의 건물이지요. 언더우드관의 왼편에 서 있는 ‘아펜젤러관’은 사적 제 277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입니다. 고딕풍의 단아함을 뽐내고 있는 이 건물은 배재학당을 설립한 아펜젤러를 기념하기 위한 건물로 미국 매사츠세츠주 피츠필드시의 기부금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화학과 교수 밀러의 감독 하에 1921년 짓기 시작해 1924년 완성했지요. 돌로 지은 3층 건물로 언더우드관과 함께 연세대학교에 두 번째로 역사가 깊은 건물입니다. 평면은 장방형이며 중앙에 현관과 계단실이 있고 나머지는 교실로 사용되었습니다. 현재는 사회복지대학원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이 건물도 입구는 튜더품의 아치로 꾸며져 있습니다. 언더우드관과는 달리 정면이 돌출되어 있지 않아 더욱 단아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연세대학교에는 위에서 소개한 ‘언더우드관’ ‘스팀스관’ ‘아펜젤러관’ 등 세 채의 옛 건물이 학교 중심에 위치해 있습니다. 다른 건물들이 이들 건물을 중심으로 세 채를 중심으로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있은 점을 보면, 연세대학교 캠퍼스가 매우 계획성 있게 조성되었음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근대 고등교육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옛 건물들과 초현대식 설비의 신식 건물들이 이뤄낸 캠퍼스의 조화야말로 21세기 연세대학교의 저력이 아닌가 합니다. 글 = 헤리티지채널콘텐츠제작운영단 ’위 글은 문화재청이 저작권을 소유한 ’한국의 근대문화유산’(2004.2007년 문화재청 刊)을 토대로 현장 방문을 거쳐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서울산업대의 옛 서울공과대학 이미지

서울산업대의 옛 서울공과대학

2010-07-14

  ‘캠퍼스 문화유산 탐방’의 세 번째 방문지는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서울산업대학교입니다. 이곳에 한국 근대공업교육의 뿌리가 있습니다. 바로 1942년 일제강점기에 지어져 해방 전까지는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본관’으로,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의 공과대학’으로 사용된 건물이 있습니다. 서울산업대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정면에 마주치는 철근콘크리트 건물입니다. 건물 중앙에 8층짜리 타워가 우뚝 솟아 있고, 중앙 현관은 경성제국대학이 당대 최고 학부임을 과시하듯 권위적으로 높고 크며, 전체적으로 ㅁ자 배치의 근대건축 양식을 취하고 있는 이 특별한 건물은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지요.   서울산업대학교에 왜 경성제국대학 건물이 있는지 그 역사적 유래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1938년 4월 조선총독부는 칙령 제251호로 ‘경성제국대학 학부에 관한 건’을 개정하여 경성제국대학에 이공학부를 추가했습니다. 이어 1941년 3월에는 조선총독부령 제29호에 의해 물리학과, 화학과, 토목공학과, 기계공학과, 전기공학과, 응용화학과, 광산야금학과 등 7개 학과를 설치했습니다. 비록 일제 치하였지만,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도 이공(理工)분야의 근대 대학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으로 이름이 바뀝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46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추진계획에 따라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1980년 서울공대가 지금의 관악 캠퍼스로 이전할 때까지 이 건물이 서울대 공과대학 본관으로 사용되지요. 그러다 서울공대가 이전한 자리에는 ‘경기공업개방대학’이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이 대학이 오늘날의 ‘서울산업대학교’로 발전한 것입니다.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의 본관으로 건축된 이 건물은 근대건축 양식 및 상징성을 강조합니다. 8층 높이의 타워, 현관의 권위성, 중정(中庭)을 구성한 ‘ㅁ’자형 배치가 그것이지요. 건축에서 ‘중정(中庭)’이라 함은 건물 한 복판에 마당 같은 공간이 존재한다는 뜻으로, 한 복판의 마당을 중심으로 건물을 빙 둘러 구성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배치 형태를 ‘중정식 건물’이라고 하는데, 옛 경성제대 이공대 본관 건물은 한국 근대 고등공업교육의 최고학부가 위치했던 곳이라는 역사적 의미와 건축적 의미 또한 크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공학교육의 요람이어야 할 공대 건물이 건축 당시는 물론 해방이후에도 오랫동안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졌을까요?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는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가 설립된 시기와 그 이면에 담겨진 일제의 숨은 목적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938년은 일본이 대륙침략 욕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중일전쟁을 도발한지 1년 후이고, 이어서 보다 큰 전쟁인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던 시기였지요. 같은 시기에 일본의 최고학부인 동경제국대학 공학부가 확대되면서 제2공학부가 설립됩니다. 그런데, 제2공학부는 기존 공학부 캠퍼스와는 달리, 넓은 대지를 확보할 수 있는 니시치바(西千葉)에 위치하였을 뿐 아니라, 이곳에 군사시설도 함께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제2공학부의 설립목적이 전쟁수행을 위한 군사기술 개발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역시 기존의 캠퍼스인 동숭동에서 멀리 떨어진 태릉 가까이에 위치했습니다. 그 이유는 일제 강점기 말 태릉에 일본 군부대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현재 그곳에는 우리의 육군사관학교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동경제국대학 2공학부의 설립목적이나 운영의 맥락 속에서 경성제국대학의 이공학부가 살펴봐야 함을 얘기해줍니다. 두 공학시설의 설립 목적이 모두 전시체제하에서 전쟁수행을 위한 고급기술개발과 인력양성에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즉 고급기술자 양성과 함께 신기술의 실전 응용을 위해서는 실험장과 군부대가 필요했던 것이고, 이런 요건을 갖춘 지역은 도심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이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옛 경성제대 이공대 건물은 1호관과 2호관으로 다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두 건물은 위계에 따른 배치, 규모, 세부 표현에 있어 명확한 차이를 갖고 있습니다. 배치에서 1호관인 본관은 대학 정문과 마주하고 있어 매우 직설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지요. 하지만 2호관은 본관의 오른쪽 뒤편에 한걸음 물러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두 건물 모두 절제된 근대건축의 미학을 구사하고 있지만, 1호관 중앙의 높은 타워는 권위적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복되는 세로로 긴 사각형 창은 조적구법에서 나타나는 창호의 모습으로, 철근 콘크리트조에서는 적절한 건축어휘가 아니지요. 그러나 단순 어휘를 무한 반복시켜 모던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합리주의 경향은 동 시기 군국주의 일본과 동맹을 맺고 있던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이태리와 히틀러의 나찌 독일의 건축흐름과 맥을 같이합니다.   외관의 구성방식이나 현관로비의 구성방식 등은 양식적 변이와 재료사용에서 양식건축과 차이를 가질 뿐, 공간구성에 있어서는 이전의 양식건축의 그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것이 모더니즘 건물이면서도 권위적 이미지를 갖게 하는 한 원인이라 볼 수 있겠지요. 따라서 본 건물군은 구법은 모더니즘을 따르고 있지만,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의 입지로 교외가 선정된 점이나, 군부대와의 인접배치 등에서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일본의 군국주의의 목적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셈입니다.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의 흔적은 이렇게 옛 서울공과대학 건물에 새겨져 있습니다. 글 = 헤리티지채널콘텐츠제작운영단 ’위 글은 문화재청이 저작권을 소유한 ’한국의 근대문화유산’(2004.2007년 문화재청 刊)을 토대로 현장 방문을 거쳐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건국대 옛 서북학회 회관 이미지

건국대 옛 서북학회 회관

2010-07-14

  낭만과 열정의 청춘(靑春) 공간을 돌아보는 ‘대학캠퍼스 문화유산 탐방’의 두 번째 방문지는 서울 광진구 화양동에 자리 잡은 건국대학교 서울캠퍼스입니다. 건국대학교의 출발은 19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의사이자 교육가이며 일제 강점시절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던 상허(尙虛) 유석창(劉錫昶ㆍ1900~1972) 선생이 1946년 ‘조선정치학관’을 세웠고, 조선정치학관이 건국대학교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건국대는 48년 ‘조선정치대학관’이란 명칭으로 인가를 받았다가, 1959년 지금의 이름(건국대학교)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찾아간 곳은 2003년6월30일 등록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된 ‘구(舊)서북학회 회관’입니다. 바로 건국대의 전신인 조선정치대학관으로 쓰였던 건물이지요. 건국대학교에 들어서면 캠퍼스 한 복판에 커다란 호수가 있습니다. 바로 건국대학교의 상징인 ’일감호’이지요. 왜가리와 청둥오리가 호수 위를 헤엄치는 왜가리와 청둥오리를 바라보면서 책도 읽고 수다도 떨 수 있는 이런 호수를 가진 건국대 학생들은 참 행복할 것 같습니다. 호수가를 따라 따스한 햇볕을 즐기면서 가다보면 호수 끝 왼편에 붉은색 벽돌 건물이 보입니다. 언뜻 보기만 해도 역사가 느껴지는 이 건물이 현재 박물관 겸 상허기념관으로 쓰이고 있는 ‘구 서북학회 회관’입니다. 사실 이 건물은 원래 서울 화양동의 건국대 캠퍼스가 아니라,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있었습니다. 1985년 지금의 건국대 자리로 이전ㆍ복원된 것이지요. ‘서북학회’를 잘 모르는 분들도 있으시겠네요. 서북학회는 도산 안창호(1878~1938), 박은식(1859~1925), 유동열(1879~1950), 이동휘(1873~1935) 등이 중심이 되어 1908년 조직한 문화 계몽운동을 위한 애국단체입니다. 관서지방의 서우학회(西友學會)와 관북지방의 한북학회(漢北學會)가 통합한 ‘서북’학회가 되었습니다. 서북학회는 <서북학회월보>를 간행하며, 계몽강연, 청년지도 등을 통하여 민중계몽운동, 민족실업진흥 및 항일교육구국운동 등을 전개했던 단체이지요. 그러다가 1910년 일진회가 한일합방을 지지하고 나서자, 이에 맞서 반대운동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그해 4월 강제로 해산되었습니다. 사실 관서ㆍ관북 지역은 예로부터 중앙집권의 지배세력이 차지했던 거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소외당하기 십상이었지요. 그러나 대한제국의 국운이 급속도로 기울어 가던 시기에, 서북 출신의 지식인들이 나섰고, 그 뜻이 모아져 1908년 서울의 한 복판인 운니동에 서북학회 건물이 지어졌습니다. 비록 서북학회는 해산되었지만, 서북학회회관 건물은 우리나라 근·현대 대학교육의 산실로 그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오늘날 종합대학교로 발전한 건국대학교, 단국대학교, 국민대학교가 바로 이 건물에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건물의 쓰임을 살펴보면 1918년 천도교가 운영하던 보성전문학교가 4년 동안 이곳을 교사로 사용했습니다. 보성전문학교가 다른 곳으로 옮겨간 이후에는 서북학회의 산하교육기관이었던 협성학교와 협성실업학교교사로도 쓰였습니다. 이후 화신백화점의 ‘박흥식’으로부터 1939년 당시 민중병원을 운영하던 ‘유석창’에게 소유권이 이전되면서 해방 후 건국대학교와 인연을 맺게 되는 것이지요. 해해방 후 서북학회회관은 한 때 ‘한민당’의 본부로 사용되다가, 1946년 5월 건국대학교의 모체가 된 ‘조선정치학관’이 개설되었습니다. 1947년에는 이 건물을 사용했던 단국대가 정규대학으로 발족하였고 국민대도 이곳을 거쳐 갔습니다. 한국전쟁 후인 1956년 건국대가 서울특별시 성동구 모진동 현 교사로 이전하면서, 이 건물은 건국대 야간부 및 법인 사무실로 쓰였습니다. 그러나 1976년에 도시계획으로 인해 철거될 위험에 처해졌고, 1977년 건물을 해체하였습니다. 이어 1985년. 지금의 건국대 서울캠퍼스에 이전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지요. 현재 건대 안에 복원된 구서북학회회관은 ‘상허기념관’으로 명명돼 박물관으로 사용되면서 각종 유물과 유품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서북학회회관은 동 시기 여느 벽돌건축물과 마찬가지로 중국인 기술자에 의해 건축되었다고 합니다. 벽돌건축을 짓는 전통이 우리에게 없었기 때문에, 20세기 초까지 대부분의 벽돌건축은 중국인에 의해 건축되었다고 합니다. 본 건물을 짓는 데는 ‘한성전기회사’가 모델이 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구서북학회회관의 돌출된 중앙현관부와 좌우 3개의 창호 배열 등 전체적인 구성은 한성전기회사사옥과 같습니다. 다만, 재료와 세부 표현기법에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구서북학회회관이 현 위치로 이전해 오면서 여러 부분에서 원형을 상실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우선 기단부를 형성하는 지하층 외벽 재료가 바뀌었습니다. 또 벽돌을 길이방향과 마구리방향으로 번갈아 쌓아 벽체가 구조성능을 갖게 하는 ‘영식 쌓기’로 지어졌던 외벽이 길이 방향만으로 쌓는 ‘미식 쌓기’로 바뀌었지요. 복원만으로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문화재급 건축물의 복원에서 발생한 실수가 문화재의 가치를 현저히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음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계몽운동의 역사와 타산지석의 교훈을 우리에게 남긴 건국대학교 서울캠퍼스는 오늘도 새로운 가르침을 주기위해 역사를 만들고 있습니다. 글 = 헤리티지채널콘텐츠제작운영단 ’위 글은 문화재청이 저작권을 소유한 ’한국의 근대문화유산’(2004.2007년 문화재청 刊)을 토대로 현장 방문을 거쳐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강경 북옥감리교회 이미지

강경 북옥감리교회

2010-07-07

- 등록번호 : 제42호(2002년 9월 13일 등록) - 소유자 : 대한기독교감리교회 - 설 계 자 : 이인법 목사, 정달성 목사 - 시공자 : 한국인 목수 - 건립연도 : 1920년 - 면적 : 연면적 118.8㎡ - 위치 :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북옥리 96 - 현용도 : 종교시설 - 구조 : 목조 - 문의 : 논산시청 관광과(www.nonsan.go.kr) 041-730-3224 - 입장 : 무료 - 개방시간 : 24시간 개방 - 연 락 처 : 063-540-1114 - 주변볼거리 : 옥녀봉, 해조문, 덕유정, 강경갑문 2010.7.13 | 지도 크게 보기 ⓒ NHN Corp. 논산 8경 중 하나인 옥녀봉으로 오르는 길목에 위치한 북옥감리교회는 2010. 6월 현재에도 교회건물뿐 아니라 주변 골목도 굉장히 멋스럽다. 교회건물은 주변 골목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유심히 주변을 살피지 않으면 쉽게 지나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교회 양쪽 건물과 교회사이의 1m남짓한 공간에서 교회지붕을 올려다보면 한옥건물의 색다른 멋을 느낄 수 있다. 입구에 적혀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하면 교회내부에 들어가 볼 수 있다. 북옥감리교회는 기독교 감리재단 가운데 현존하는 유일한 한옥교회로 강단을 중심으로 좌·우로 벽체를 내고 오른쪽은 목사 준비실, 왼쪽은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초기의 한옥교회는 대부분 소멸되거나 개축 또는 신축되어 현존하는 한옥교회는 극히 드물며, 특히 감리교회로 남아있는 것으로서 그 희소적 가치가 크다. 평면은 정면 4칸, 측면 4칸 규모로 정면과 측면의 비율이 거의 1:1인 정방형의 평면으로, 중앙부분에 있는 나무 주초 위에 세워진 두 개의 고주로 남녀의 공간을 구분한 칸막이 교회이다. 또한 교회의 기능에 충실한 평면의 변화와 상부 가구구조의 구성기법 등은 초기 기독교 한옥교회의 근대화에 따른 건축적 변화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초기 한옥교회는 건물 전면에 별도의 문을 두어 남녀신자를 구분하였던 것이다. 가구 구조는 9량 구조로 일반적인 가구법에 따라 내부의 고주를 협칸의 기둥 열에 맞춰 세우고 대들보와 퇴보를 걸면 상부가구도 편리할 뿐만 아니라 내부도 신랑(nave)과 측랑(aisle)으로 구분되어 공간의 활용도 용이하다. 더욱이 강단 쪽의 고주 하나를 생략함으로써 회중석에서 강단을 향하는 시선의 장애를 없애고 강단 앞부분에 충분한 공간을 만들고 있는 것은 당시의 사회적 여건과 기능에 충실한 계획 수법으로 볼 수 있다. 목조 건축에 있어 이러한 감주법(減柱法)은 구조에 대한 기술적 축적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으로 당시의 기술 수준을 알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다. 지붕부는 고주에 결구되어 있는 대들보 위에 중보가 얹히고 그 상부에 종보가 얹히는 구조로 중앙의 고주는 종보 하단까지 이어져 종보를 직접 받는다. 보와 보 사이는 동자주로 받고, 종보 상부에는 판대공으로 종도리를 받도록 하였다. 서까래는 추녀에 뿌리를 결구시킨 말굽서까래 배열을 하고 있어 일제시대 한옥의 절충적인 배열기법을 보여준다. 처마는 부연을 단 겹처마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1923년 준공 당시는 기와지붕이었으나 함석지붕으로 교체되었다가 문화재로 등록된 후 기와지붕으로 복원되었다. 내벽은 회반죽으로 마감하고, 바닥은 목재 널마루를 깔아 신자들이 방석을 깔고 앉아 예배를 보도록 하였다. 내부의 붉은 벽돌 주위의 회반죽 마감과 서까래를 그대로 노출시킨 연등천장은 목조건축의 간결한 구조미를 보여주고 있다. 비록 정방형 평면을 취함에 따라 건물의 조형성이 전통적인 비례를 벗어나 있지만, 기능에 따른 평면구성과 상부의 가구 구조는 기독교의 토착화 과정에 나타난 한옥교회의 건축방법을 보여준다. 강경북옥감리교회는 처음에는 강경성결교회로 시작되었다. 1918년 가을, 이곳에 파송된 정달성 목사는 그해 12월부터 한옥 2칸을 얻어 집회를 시작하였다. 이후, 이인법 목사가 1923년 현 위치에 한식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고, 38년간 강경성결교회로 사용하였다. 이후, 교회의 규모가 커지면서 늘어난 신자수용을 위해 홍교동 소재의 구 은행청사를 매입하여 교회를 이전하고, 교회 건물은 개인에게 주택까지 겸하여 70만환에 매각하였다. 그 후 교회 건물만 당시 성결교회 시무였던 윤반임 목사가 다시 매수하여 1년간 성결교회로 사용하다가 송기섭 목사의 소개로 감리교로 교파를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북옥감리교회는 강경뿐 아니라 금강 연안 지역의 기독교 선교 역사를 상징하는 대표적 건축물이다. 강경에는 북옥감리교회 이외에도 우리나라 최초의 침례교회인 강경침례교회, 지역 최초의 사립학교를 세운 강경제일감리교회, 일제강점기에 최초로 신사참배를 거부한 강경성결교회, 6.25전쟁 때 공산군에 의해 66명이 순교한 병촌성결교회 등이 있다. 현재 논산시와 강경읍은 선교역사의 발자취를 쉽게 따라가 볼 수 있도록 ‘기독교성지순례코스’를 운영 중이다. 한옥교회는 기독교의 토착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건축양식으로 매우 독특한 건축구조와 평면구성을 보여준다. 특히 목재의 치목수법과 가구기법은 전통적 기법에서 근대시기 건축기술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한옥교회의 현존사례가 극히 드문 현실을 감안하면 이 건물의 희소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어 2002년 9월 13일 등록문화재 42호로 등록·관리하고 있다. 글 = 헤리티지채널콘텐츠제작운영단 ’위 글은 문화재청이 저작권을 소유한 ’한국의 근대문화유산’(2004.2007년 문화재청 刊)을 토대로 현장 방문을 거쳐 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