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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_ 이정의 '풍죽'과 신사임당의 '초충도수병'을보며 이미지

대상_ 이정의 '풍죽'과 신사임당의 '초충도수병'을보며

2010-12-10

 사람들은 끝없이 자연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렇다면, 옛날 선인들은 어땠을까? 물론 그들도 마찬가지로 큰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우리의 선인들은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고 여기고, 그 자연을 닮으려 했다. 계발활동 문화재탐사 시간에 배운 탄은 이정(1541-1622)의 <삼청첩>에 실린 ’풍죽’과 동아대 박물관에서 감상했던 신사임당의 ’초충도수병’ 역시 자연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며 그 속에는 선인들의 삶의 가치관이 담겨 있었다.  담당 선생님께선 작품 ’풍죽’을 TV화면으로 보여주시며 나름대로 감상해보라고 하셨다. 내 눈엔 그냥 대나무 한 그루가 바위에 자라는 모습이었다. 너무나 흔하고 밋밋하게 보여 뭘 감상하라는지 몰랐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자 아이들은 이내 떠들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선생님은 감상할 시간을 더 주셨다.  아이들이 더는 감상할 여지가 없어졌을 때 선생님께서 질문을 하셨다. "얘들아! 이 그림 뭘 그린 그림이니?" 하고 물으시자 우리들은 일제히 "대나무요!" 했다. 그리고 이내 교실은 소란스러워졌다. 선생님께선 또 말씀이 없으셨고, 아이들은 ’도데체 뭐하는 거야.’ 하는 생각을 가지고 뚱한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앉아있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선생님의 질문들!  "얘들아, 대나무가 처한 상황을 말해볼까?"  그랬다. 이 작품은 말 그대로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를 표현한 그림이다. 짙은 안개가 낀 어느 날, 거센 바람이 대나무를 덮쳤다. 단단한 바위에 돋아난 대나무의 아랫부분 바람에 굴하지 않고 꼿꼿하게 45도 각도로 바람에 정면응수하며 강하고 굳건하게 버티고 있고, 그에 비해 윗부분은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낭창낭창 흔들리고 있었다. 선비의 꺾이지 않는 기상을 상징하는 이정이 ’풍죽’  그림의 가장 오른쪽 부분에 있는 가느다란 가지는 강한 바람에 꺾일 듯 말 듯 흔들려 아슬아슬 위태했고, 내 손바닥에 땀을 쥐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무성한 잎들! 어디서 저런 무성한 생명력과 강인함이 솟아날까? 짙은 안개와 세찬 비바람은 모진 세태를 뜻한다 들었다. 이런 대나무는 곧 그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선인들의 선비 정신의 표상이자, 교훈적 대상이었다.  이정은 세종의 현손으로, 선조 때의 인물이다. 그의 생애에는 큰 전란이 있었다. 임진왜란! 이 전란에서 작가 이정도 비켜갈 수는 없었다. 그림으로 심신을 수양했던 이정이 왜인들 칼에 오른팔이 찔리게 되었고,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시련을 겪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상처를 극복하고 왼손으로 붓을 다시 잡고 수많은 수련을 거쳐 <삼정첩>을 만들어 내니, 이는 곧 시련 속에 더욱 강인해진 이정 자신의 삶을 형상화한 그림 같았다.  ’풍죽’ 감상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또 한 편의 작품을 감상할 기회를 가졌다. 이번엔 동아대 박물관을 직접 관람하여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초충도수병’을 만날 T 있었다. 예술작품 감상에 문외한인 나는 ’시커먼 바탕에 풀과 꽃, 나비나 벌을 수놓은 작품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8폭의 검은 비단 바탕에 얌전하고 차분한 색실로 소박하게 수놓아져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자꾸 눈이 갔고, 관심이 갔고, 생각이 났다.  제1폭에는 오이, 산국, 개구리, 잠자리, 벌, 제2폭에는 맨드라미, 도라지꽃, 도마뱀이, 제3폭에는 굴잎원추리, 산국, 여치가, 제4폭에는 꽈리, 나비, 들쥐가 자수되어있다. 제5폭에는 민들레, 패랭이꽃, 벌, 나비, 제6폭에는 수박, 산국, 여치, 벌, 제7폭에는 가지, 벌, 나비가, 그리고 마지막인 제8폭에는 국화류가 자수 속을 노닐고 있다.  검은 비단(묵공단墨貢緞)에 색실로 풀, 꽃, 벌레, 나비 등을 아름답게 수놓아 만든 8폭 병풍이다. 수본(繡本), 수사(繡絲), 침법(針法) 등 한국의 전통적인 자수기법으로 만들어져 아름답고 섬세하며, 정성을 다한 사실적인 초충도수병의 가작(佳作)이다.  조선 전기의 작품도 간혹 남아있지만 대부분의 자수품이 그렇듯이 이 자수병풍도 18세기 이후의 병풍이다. 고상하고 청아하면서도 사실적이어서 궁중이나 대가택(大家宅)에서 쓰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이것과 비슷한 자수병풍이 여러 틀 창덕궁에 남아있음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야? 화려함도 아니고, 현란함도 아니고, 대작도, 기작(奇作)도 아니잖아! 그냥 풀 속에 노는 여치고 나비고 그런 것들일 뿐인데… 뭔가 읽으려고 애를 썼지만, 술술 새로움이 묻어나지 않았다. 선생님과 함께 설명을 들으며 감상할 때처럼 감동할 그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나는 이 8폭의 자수들 중에서 7번째 마당에 마음이 쏠렸다. 검은 흙 속에서 기다란 가지가 흰 꽃을 피우더니 꽃이 지기도 전에 보라색 열매를 풍선처럼 토해냈다. 열매는 아래쪽으로 갈수록 향기를 뿜었고 진보라색 그라데이션 기법으로 성숙한 여인의 봉긋한 가슴같이 교태롭게 익어가고 있었다.  줄기 끝에는 몇 개 더 하얀 통꽃이 달려있었다. 가지와 잎은 가지를 품어 숨기려는 듯 갈수록 큼직큼직해지고, 넓적한 잎 위에는 나비와 벌이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붕붕거려서 마치 가지꽃과 가지 열매와 벌들이 숨바꼭질 하는 것 같았다. "가~아~지 꽃이 피었습니다!" 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초충도수병’ 사소한 자연에도 큰 의미 부여한 조상의 정신 엿보여  가지는 ’다산기자’를 상징하는 식물 중 하나라고 한다. 다산은 아이를 많이 낳는다는 뜻이고, 기자는 아들 낳기를 기원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곧 아들을 많이 낳기를 기원한다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마치 다산을 실현하는 풍만한 여인의 가슴 같은 가지! 게다가 나비는 부부의 금슬이나 백년영화를 상징하는데, 이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에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짝을 찾는 나비가 앉을 때 양 날개를 접어 한 몸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뜻을 조합해보면, 이 자수는 부부의 좋은 금슬과 다산기자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은 자수가 아닌가싶다.  내가 8폭 중에 일곱 번째 마당을 보며 놀이의 마당으로 여기고 있을 때, 우리 조상들은 사소한 자연물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유희의 마당이든 삶의 소망을 간절히 담았든, 오늘 나에게 이 작품들은 즐거움을 주었고 이 박물관은 다시 내 생각에 깊이를 더해주었다.  숨바꼭질의 짜릿함을 뒤로 하고 박물관을 나서며 나머지 일곱 마당을 다시 생각하기로 한다. 9월 만물이 무르익는 한 가을에 동아대 캠퍼스가 풍성하다.

우수상_건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율곡 이이 선생가 분재기(分財記) 이미지

우수상_건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율곡 이이 선생가 분재기(分財記)

2010-12-10

 5천 원권 지폐에 등장하여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 이이(李珥, 1536 중종31~1584 선조17)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다. 사람들은 흔히 율곡을 말하면 강릉의 오죽헌과 어머니인 신사임당을 떠올린다. 그런데 바로 여기!! 건국대 박물관에는 아직 일반인들에게는 낯설 수도 있는 율곡과 관련된 문화재가 숨어 있다. 보물 제477호로 지정되었으리만큼 그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박물관 건물 2층에 올라가면 눈에 띄게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문서가 보인다. 이것이 ’율곡 이이 선생가 분재기’이다. 분재기는 재산상속을 문서화하여 나타낸 것이다. 재산분배를 둘러싼 분쟁이 조선시대에도 있었기에, 후에 논란이 생길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작성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상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 그 자녀들이 모여 합의하여 작성하였는데, 율곡의 분재기도 그러했다.  미리 상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대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3년 상을 마친 뒤에 작성하였다. 그런데 성종실록(성종17년 11월8일) 기사를 보면 이심이라는 사람 등이 부친상 직후 바로 슬픔을 잊은 채 재산을 나누고, 그 과정에서 재산의 분배가 고르지 못함을 분하게 여겨 삼촌을 고소하는 일이 벌어져 논죄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시대에도 재산만을 탐하는 철없는 사람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균분 상속 전통 고려조까지 거슬러 올라가  율곡 분재기의 내용은 어떠할까? 초서로 빼곡히 들어 찬 글자들을 보고 겁을 먹을지도 모르지만, 이 내용을 안다면 그냥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율곡 분재기를 살펴보면, 맨 첫째 줄에는 명종 21년(1566)에 남매들이 모여 합의한 결과의 증서임을 밝히고 있다.  다음으로 선조들의 제사와 묘를 지키기 위한 가옥·토지·노비를 배정한 다음, 이를 4남 3녀(율곡은 셋째 아들)와 서모(庶母, 아버지의 첩)인 권씨(權氏)가 나눠 가질 것을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말미에는 문서작성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수결(手決, 지금의 서명)을 표시하였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딸·아들 구별 없이 재산을 균등하게 상속했다는 점이다. 율곡의 집안에서만 그런 것일까?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려면,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을 참고할 수 있다. ’형전’에는 이런 규정이 있다. <적처의 소생일 경우 장자ㆍ차자ㆍ딸의 성별 구분 없이 모두에게 같은 양의 재산을 분배하고, 그 가운데 제사를 지내는 자식에 한해서 상속분의 5분의 1을 더해준다. 첩에게서 난 자식은 그가 양인여자 첩의 소생이면 적자에의 7분의 1을, 천인 여자 첩의 소생일 경우에는 10분의 1만을 상속한다. 또한 첩의 경우에도 아들, 딸 간의 차등은 없다.>  이러한 균분상속의 시행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시대에 호적에도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출생 순서로 기재했고, 혼인을 해서도 여성의 재산은 남편에게 흡수되지 않았다. 조선이 국초부터 유교적 사회로의 전환을 강조하였으나, ’주자가례’의 원칙과 일치하는 생활이 율곡이 살던 시대에 적용되지 못했고, 이보다는 고려 말부터 이어져오던 관습에 더 가까운 생활이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재산을 동등하게 받았던 여성들은 그만큼 경제력을 가질 수 있었다. 혼례를 올리고 처가에서 거주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신사임당과 율곡이 강릉에서 지낸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또, 조선중기에 쓰여진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보면 여성이 재산증식에 관여하고, 남성과 장기를 두고 술을 마시기도 하고, 창작활동을 하는 등 조선후기의 여성들보다는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이 가능하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설씨부인, 신사임당, 허난설헌, 이매창, 황진이, 이옥봉 등 이름난 여인들이 이 시기에 많았던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17세기 이전까지는 유교적 주자가례가 조선사회에 정착되지 못했음을 율곡의 분재기는 명확하게 보여준다. 전통적인 여성은 수동적이기만 하다는 편견을 깨어줄 수 있는 가치 있는 기록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율곡 분재기는 양반층의 재산보유 상태를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임진왜란 이전 유일한 분재기  특히 상속에는 토지와 노비가 주요대상이 되므로 분재기를 통해 지역별 토지와 노비 분포까지 파악할 수 있다. 현존하는 분재기는 수없이 많지만, 임진왜란 이전의 것은 율곡의 분재기만 전해지기에, 그 의의가 더 크다.  건국대 박물관에는 이밖에도 국보인 동국정운(東國正韻)을 비롯하여, 고려시대 석탑, 조선시대 도자기 떡살, 연천 구석기시대 출토 유물 등 다양한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건물 자체도 1908년 안창호 등이 주도한 항일 민족운동 단체인 ’서북학회(西北學會)’의 회관으로 유서가 깊다.  다양한 전시물과 함께, 율곡의 분재기를 보며 역사와 현재 속의 여성을 비교해 보는 시간을 갖는 건 어떨까? 은행나무 길을 옆으로 하고, 건대의 호수가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한 운치있는 이곳에서 말이다.

우수상_언더우드상을 보면 대한민국과 연세대의 역사가 보인다 이미지

우수상_언더우드상을 보면 대한민국과 연세대의 역사가 보인다

2010-12-10

 연세대학교의 연세는 ’연희전문학교’ 의 ’연’ 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의 ’세’ 를 합쳐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세브란스는 H.N.알렌 과 O.R.에비슨 이 설립했습니다. 두 사람을 기리기 위해 학교에는 알렌관과 에비슨관 이라는 건물도 있지요. 그렇다면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자는 누구일까요?  바로 이 분,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7.19~1916.10.12) 라는 분이 설립하셨습니다. 한국어 이름은 ’원두우(元杜尤)’ 라고 하지요. 평생을 조선(한국)과 연세대학교를 위해 바치신 이 분을 기리기 위해 학교는 총장님의 집무가 이루어지는 본관의 이름을 ’언더우드관’ 이라고 지었으며, 언더우드관 앞에는 이 분의 동상인 ’언더우드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림에서 보이는 37번 구조물이 위에서 말한 언더우드상으로 학교의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건물은 역시 앞에서 말한 언더우드관이구요. 좌우에 위치한 건물은 각각 스팀슨관, 아펜첼러관으로 이 건물들 역시 연세대학교의 건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신 두 분을 기리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주목하려 하는 것은 제목에도 썼듯이 37번, 언더우드상 입니다.  언더우드상은 실제로 보면 상당히 큰 동상입니다. 언더우드관을 배경으로 한 사진입니다. 보다시피 상당히 거대함을 알 수 있지요. 돌로 구성된 기단부의 높이만 2미터 50cm 가까이 됩니다. 멀리서 보면 모를까 가까이 다가가면 웬만한 사람들은 목을 하늘로 꺾고 봐야만 하지요. 뿐만 아니라 동상 자체의 키도 2미터 가까이 됩니다. 어마어마하지요. 현재의 동상은 세 번째로 건립된 것  당연히 저 위에까지 올라가기는 매우 힘들지만, 학기 초나 말에 보면 술기운에 간혹 올라가서 객기를 부리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단 위의 부분은 매우 좁거니와, 동상 역시 매우 오래되어서 혹시 부러질지도 모릅니다.  여튼 어느 학교에나 으례 있는 동상에 대한 전설 역시 연세대학교에도 존재합니다. 새벽 세시 즈음에 언더우드상이 걸어 내려와서 산책을 한다 등등 말이지요. 하지만 제가 이 언더우드상에서 주목하고 싶은 점은 그런 것이 아니고 이 동상 자체의 역사입니다.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동상 앞면에는 어떤 글씨가 써진 동판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자이자 동상의 주인공인 원두우 박사를 기리는 내용과 그의 생몰년도, 이 동상의 건립일자가 적혀있습니다. 이를 읽고 있노라면 다소간 충격적인 내용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그 내용은 바로 이 동상의 건립일자가 1927년 10월 30일 이라는 것입니다.  무려 80살 이상 나이를 먹은 동상이라는 것이지요. 나이가 오래된 동상이니만큼 이 동판에 쓰여진 문장들도 평소에 우리들이 쓰고 있는 한글과는 달리 수업시간에 배웠을 법 한 고어들로 이루어진 문장들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어떻게 청동재질로 된 동상이, 그것도 통짜 청동이 아닌 다소간 위태롭게 팔을 들고 있는 자세를 가진 동상이 아직까지 이렇게 튼튼하게 남아있느냐는 것이지요.  그 해답은 동상의 뒤에 붙어있는 또 다른 동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동판에는 이 동상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언더우드상은 ’세번 째’로 만들어진 동상이라는 것입니다. 동판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연희 학원 창설 은인의 동상은 당시 이 학원의 한인 직원으로 조직된 우애회 발기와 일반 사회의 협동으로 1928년 4월 24일에 세웠더니, 왜정 말기에 그네의 손에 빼앗기었고, 피난 후 동문 및 사회 유지 일동의 손으로 1948년 10월 16일에 두 번째 세웠더니, 6.25 사변으로 공산군의 손에 또 파괴되었다. 이에 동문 유지 일동은 힘을 모아 이를 세 번째 세우노니, 이제부터 영구한 평안이 있을지어다. 1955년 4월 22일. 연희 동문, 유지 일동>  보다시피 1955년에 세 번 째로 세워진 동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올해가 2010년이니 인간으로 치면 56살인 동상입니다. 대한민국의, 통합된 연세대학교의 역사와 자신의 역사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이지요.  비록 동상은 본의아니게 교체되었다지만 기단부는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기단부에는 역사의 질곡이 그대로 녹아있습니다. 기단부에 한국전쟁 당시 총탄 추정 흔적 선명해  오른쪽의 사진은 언더우드상의 오른손 아래쪽 기단부를 찍은 사진입니다. 갈색 동그라미를 친 부분들을 직접 살펴보면 작게는 새끼손가락 한 마디, 크게는 엄지손가락 한 마디의 크기 수준으로 대리석 기단부가 파여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혹자는 민주화의 불꽃이 한참 타오르고 있던 60년대~80년대 사이에 상한 것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6.25 사변이 있던 50년대 초에 총알을 맞아 생긴 탄흔이라고도 합니다만 확실한 정보라던가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6.25 사변 당시 실제로 연세대학교의 몇몇 건물들이 북한군에 의해 사용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저 흔적들을 탄흔이라 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설명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위에 쓴 대로 언더우드상이 대한민국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면, 기단부는 대한민국뿐만이 아닌 일제 강점기 시대의 우리 한민족의 역사까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할 수 있겠네요. 언더우드 박사의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고 연세대학교 교정 내에서 남아있던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평범한 동상, 그저 학교의 설립자의 동상인 것만 같아 보였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 안에는 반백 년 이상의 역사를 우리와 함께 했다는 사연이 녹아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우리 곁의 유물들은 비단 연세대학 뿐만 아니라 전국 어느 대학 안에라도 존재할 것입니다. 매일 다니는 학교라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치기보다는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학교에 대한 역사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는 기회를 갖는 것이 어떨까요?

특별상_서울과학기술대학의 등록문화재 다산관과 창학관 이미지

특별상_서울과학기술대학의 등록문화재 다산관과 창학관

2010-12-10

서울과학기술대학의 등록문화재 다산관과 창학관을 회상하며  서울과학기술대학(구 서울산업대학교)는 저의 모교입니다. 저는 이 대학교에 1997년도에 입학하였습니다. 현재는 현대식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지만, 그 당시에는 거의 대부분이 오래된 건물들이었습니다. 특히나 우리 학교에는 많은 드라마 촬영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제3공화국’ 등 시대극이 많았습니다. 그만큼 오래된 건물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입학식 날 식을 거행하고 학과로 갔을 때 제가 처음 맞이하였던 건물은 전기전자관(현재는 창학관으로 바뀜)이었습니다. 당시 ‘참 오래된 건물이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급기야 2002년에는 우리학교의 ‘본관’과 ‘전기전자관’이 근대문화유산 보존등록문화재로 지정되는 일까지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2008년에는 대륙관이 문화재로 추가 등록되었습니다. 그 후로 세월이 참 오래 지났지만, 다시 찾은 창학관 만큼은 변한 게 없었습니다.  학교의 발전과 더불어 그 주변에는 신식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습니다. 모교의 발전을 볼 수 있어서 너무 뿌듯했습니다. 졸업 후 가끔 학교에 가면 엄숙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학교에 문화유산이 많아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부터 저는 우리 학교의 문화유산에 대해서 안내하고자 합니다.  서울과학기술대학은 일제시대 경성제국대학으로 불렸던 학교입니다. 전통이 오래된 학교여서 그런지 학교는 상당히 큽니다. 저는 학교 다닐 때 야간에 학교를 순찰하는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일은 새벽 2~3시 정도에 학교를 순찰하는 일이었습니다.  한번 순찰할 때 학교 전체를 도는데 최소한 1시간 이상이 걸렸습니다. 그만큼 우리학교는 컸습니다. 또한, 제가 가보지 못한 서울대학교를 제외하고 웬만한 수도권 소재 대학에 비해 저희 학교만큼 큰 학교를 보지 못했습니다. 다산관,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지정  넓은 캠퍼스에는 지은 지 오래되어서 문화재로 등록됐거나 문화재적 가치가 인정되는 건물들이 여럿입니다. 이 중 먼저 다산관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과거에는 본관이라고 불렸습니다. 다산관은 정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보이는 건물입니다. 현재 보도블럭이 깔린 자리에는 전에는 아스팔트 도로가 깔려 있었습니다. 입학했을 때 다산관 내의 탑에 꼭 올라가 보고 싶었습니다만 그 소원을 이루진 못했습니다.  다산관은 2002년 5월 31일 근대문화유산 보존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현재는 내부를 수리 중이어서 안에까지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밖에서 보면 내부 수리를 위해서 건물의 일부를 철거한 모습이 보입니다.  다산관은 그 크기가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서 가장 큽니다. 입학 당시에는 이 다산관에 높은 분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산관의 외부 벽면만 보더라도 오래된 건물이란 느낌이 금방 듭니다. 한편으로는 그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 건물임에도 별다른 손상 없이 보존되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땅거미가 꺼진 이후의 다산관은 그 분위기가 명물입니다. 전에 한 CF에서 다산관을 배경으로 두 친구가 농구하는 모습이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 CF가 이슈거리가 되었습니다.  다산관에 이어 창학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저한테는 전기전자관이란 명칭이 더 편하지만, 이름이 바뀌었기 때문에 창학관으로 통일합니다. 저는 입학식 이후로 대부분의 학창 시절을 이 창학관에서 보냈습니다. 연구실 내 친구들도 많아서 한 때는 이 창학관에서 숙박까지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다시 찾은 창학관은 역시나 평온하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저를 맞았습니다. 창학관 정자 그늘을 벗 삼아 잠을 청하곤 하던 추억 살아나  건물 형태가 큰 직사각형이고, 그 안이 뻥 뚫린 형태 입니다. 이런 점이 최근의 건물들과는 다소 다른 모습입니다. 참 재미있는 건 그 뻥 뚫려 있는 곳에 있으면, 정말 고요하다는 것 입니다. 특히나 방학이나 학생들이 수업에 다 들어가 있는 시간에는 세상에 나만 있는 것처럼 고요했습니다. 그 내부에는 그늘진 정자가 있는데, 저는 특별히 할 일이 없을 때는 그 고요함을 벗 삼아 정자 그늘에서 잠을 청하곤 했습니다.  창학관은 제가 입학할 당시에는 전기전자 학생들이 수업을 받던 곳이었습니다. 저는 이 건물 구석구석을 다 다녀봤습니다. 단 한군데 못 가본 곳은 지하실입니다. 지하실은 제가 학교를 다니면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또 창학관은 참 많은 TV방송에도 출연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1990년대 말 크게 히트를 쳤던 ‘남자 셋 여자 셋’ 등 많은 드라마에 창학관이 노출되었습니다. 당시 구본승이라는 인기 연예인이 있었는데, 그 연예인이 창학관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배경이 창학관이다! 다산관이다! 이렇게 의견이 분분했었습니다. 창학관과 다산관 드라마 촬영 장소로도 각광  그런 창학관이 2002년에는 우리학교의 다산관과 더불어 근대문화유산 보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는 경사가 납니다. 저는 복도에서 뛰어다니는 걸 좋아하는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문화재로 보존되고 나서는 뛰어다니지 않았습니다. 또한, 강의실에 낙서조차 안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공부하는 곳이 문화재라니 ‘급’ 부담이 생기더군요.  이렇게 추억 속의 구 전기전자관(현 창학관)은 졸업 이후 학교 근처를 올 때마다 들르는 단골 명소가 되었습니다. 정말 이 창학관 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화가 없습니다. 원고에 쓰기 위한 사진을 촬영하고 있는 현재 조차도 옆에 같은 학번 친구가 말 걸어 올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서울과학기술대학이 상당히 많이 변해도 이 창학관 만큼은 옛 모습 그대로였으면 하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특별상_600년 전통의 성균관을 샅샅이 뒤진다 이미지

특별상_600년 전통의 성균관을 샅샅이 뒤진다

2010-12-10

  600년 전통의 성균관을 샅샅이 뒤진다  성균관대는 교목이 은행나무이고 상징 역시도 은행잎이다. 학교를 올라가는 길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도 무척 아름답다. 하지만 역시나 눈부실 정도로 샛노란 은행잎과 발그레해져 수줍은 듯 빨개진 단풍잎들이 사뿐 사뿐히 떨어지는 가을과 겨울에 더욱 운치 있고 정감 있는 것은 그러한 학교의 전통에서 왔을까? 더욱이나 이 길을 과거 600년 전에도 성균관 선비들이 거닐며, 학문 정진에 힘썼다는 것을 생각하면 감동은 배가 된다.  학교 정문에 들어서면 좌측에 한 누각과 비가 세워진 것을 볼 수 있다. 누각 안에는 탕평비가 세워져 있는데, 붕당정치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던 영조시대 만들어졌다고 한다. 특히나 이 비의 글자는 영조의 친필이라고 하니 당시 붕당정치의 폐해가 얼마나 영조를 괴롭혔던 것인지 알 수 있다. 영조 친필 탕평비 현재에도 귀감  이 탕평비가 성균관 앞에 있는 것은 부디 새로 자라날 후학들이 붕당에 좌지우지되지 않기를 바랐음이겠다. 간절한 바람에 성균관 앞에다 비석을 세운 영조의 골치 아픔이 잘 느껴진다. 아직 굳건히 서있는 탕평비는 현재에도 많은 귀감이 된다. 그 옆을 차지하고 있는 비석은 하마비이다. 고관대작을 막론하고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전하는 비석으로 지엄한 장소에 설치됐다.  고개를 들어 우측을 바라보면 커다란 외삼문이 우리를 반긴다. 이것이 바로 600년 조선의 교육을 담당했던 성균관의 정문이다. 사실 성균관은 단순히 교육의 기능 이외에도 문묘로서의 기능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외삼문 옆의 팻말에는 서울 문묘일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현재는 수리공사중이어서 외관이 약간은 완전치 않은 모습이다.  굳게 닫혀 있던 외삼문의 문이 오늘은 열려있다. 외삼문의 문턱을 넘으면 대성전이 나온다. 현재 성균관은 보수공사중이라 많은 인력들이 일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대성전은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향사 역할을 했던 곳이다. 한편 대성전의 현판은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명필가 한석봉이 썼다하여 더욱 유명하다. 필체에서 좌중을 압도하는 힘이 느껴진다.  묘정비는 거북받침으로 된 비좌를 중심에 두고 세워진 비석이다. 몸돌의 앞면 ‘문묘비명’이란 제액 아래의 비문은 조선 초기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변계량이 지은 것이고 뒷면의 음기는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의 한사람으로 뽑히는 월사 이정구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하던 날 마침, 명륜당 앞에서는 선남선녀 한 쌍이 전통혼례를 올리고 있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성균관에서 전통혼례를 치르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명륜당 앞 500년 된 은행나무 성균관 역사 대변  사실 성균관은 지은 지 불과 1년이 넘었던 정종 때에도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이후 임진왜란 때도 화재로 잿더미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명륜당 앞을 굳게 지키는 엄청난 이 두 그루의 나무는 오백년이 더된 것이라고 하니 새삼 감회가 새롭게 느껴진다. 은행나무에서 느껴지는 향은 곧 성균관의 전통이 아닐까. 명륜당 앞의 은행나무는 원래 암나무였으나 은행 열매의 냄새가 지독하여 제를 올리고 수나무로 바꿨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교육의 중심을 담당하고 있었던 명륜당의 좌우에는 유생들의 기숙사로 쓰이던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있다. 시대에 따라 달랐지만 보통 백 명 조금 더되는 유생들이 거처하던 곳이니 제법 공간을 차지한다. 1990년대 말까지는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의 학생들의 기숙사로 실제로 쓰이고 있었다니 그들이 부러워진다.  명륜당 뒤편에는 조선시대 국립도서관이라 할 수 있는 존경각이 있고 그 옆에는 육일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육일각은 왕이 성균관에 나와 활을 쏘며 예식을 올리는 대사례를 거행할 때 왕이 쓰던 활과 여러 도구를 보관하는 곳이라고 한다. 육일각 앞에 핀 한 송이의 보랏빛 꽃이 현판의 글씨와 절묘하게 어울린다. 600주년 기념관에는 이황, 이이, 정약용의 이름이 역대 총장으로 등장  명륜당 뒤쪽으로 건물이 있는데, 현판이 없어 자세히 어떤 건물인지 확인은 어려우나 향관청, 정록청, 서리청, 비복청 등의 이름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동쪽으로 난 문을 나오면 임금이 가마를 대고 오르내릴 수 있게끔 한 시설인 하연대 자리가 남아 있다.  외삼문을 나와 학교 쪽으로 가다보면 넓은 공터에 비천당이 있다. 비천당 앞에서는 조선시대 내내 과거시험이 열렸다고 하니, 공터도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600주년 기념관은 이름 그대로 성균관이 학교로서 기능을 시작한 1398년으로부터 600년이 지난 1998년에 지어진 현대식건물이다. 문화재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라 소개해 본다. 600주년 기념관 안에는 역대 600여 년 간의 성균관 총장의 이름을 새긴 것도 있다. 잘 찾아보면 우리가 잘 아는 이황, 이이, 정약용 등도 찾을 수 있다.  해방이후 성균관 대학교를 다시 설립한 심산 김창숙 선생의 동상도 성균관의 유산에서 빼놓을 수 없다. 전통 성균관을 다시 근대적 대학으로 탈바꿈하여 민족의 얼을 되살렸다는 데 큰 의의를 둘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심산 역시 일제 강점기에는 해방을 위해, 해방 이후에는 민주화를 위해 쉼 없이 달렸으니 학교의 큰 어른 되심이 마땅하다 하겠다.  교내에서 이 서리게 찬 물 색으로 높디높은 가을하늘에 살랑살랑 떨어지는 노랑 단풍잎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감상에 빠져든다. 과거 500년 간 국가의 교육을 담당했던 이 곳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 너무도 감격스럽고 영광스럽게 느껴진다. 세계 어느 대학에 비교해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전통을 기점으로 앞으로도 무한히 성장하여 민족의 큰 발전을 담당할 성균관 대학교를 무한 응원한다.

특별상_9개의 전시실마다 알찬 유물로 가득한 원광대 박물관 이미지

특별상_9개의 전시실마다 알찬 유물로 가득한 원광대 박물관

2010-12-10

9개의 전시실마다 알찬 유물로 가득한 원광대 박물관  원광대학교 박물관은 학교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학생들은 물론 외부 방문객들에게도 상시 개방한다. 원래 박물관은 총 4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2층부터 4층까지는 각 3개씩, 총 9개의 전시실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1층에는 입구가 있으며, 입구 앞의 넓은 공간은 역사 및 문화와 관련된 각종 전시 이벤트를 치를 수 있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필자가 원광대 박물관을 찾은 날은 예부터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다양한 옹기를 한 데 모아 전시회를 열고 있었다. 박물관의 입구에 들어서자 먼저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옹기그릇들이 눈에 들어왔고, 눈길에 따라 발길도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되었다.  이 옹기 전시회를 시작으로 2층의 제 1, 2, 3전시실, 3층의 제 4, 5, 6전시실, 그리고 4층의 제 7, 8, 9전시실까지 관람하였으며, 그 중에 가장 흥미롭고 관심 있게 보았던 유물 1가지를 선택하여 조사하였다.  제1전시실은 선사백제실이다. 이 곳에서는 선사시대에서 백제시대에 이르는 유물을 다양하게 전시하고 있다. 전시의 특징은 각종의 토기를 시대별로 구별하여 토기의 여러 형태와 변천과정을 살필 수 있도록 하였으며, 또한 원광대가 옛 백제 지역에 자리한 관계로 지역적 특성을 살려 익산지역에서 수습ㆍ출토된 유물도 전시하고 있다.  중ㆍ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보았던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의 도구들을 직접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지금으로부터 수 만 년 전에 사용하였던 칼, 창, 화살촉 등을 보고 있으니 시간을 초월하여 과거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청동검을 보면 그 시대 사람들의 체구가 보인다  전시된 유물들 중에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청동검이었다. 박물관의 유물들 중 가장 정교하고 세련되어 보였는데, 그 검의 길이와 폭, 그리고 손잡이가 작은 걸로 보아 당시 사람들의 체격이 작았던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제2전시실은 통일신라·고려 도자실이다. 이 곳에서는 통일신라 토기와 고려시대의 도기, 자기 및 청동제품을 전시하고 있는데, 고려자기의 발생과 변천과정을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토기 및 자기의 종류, 문양, 제작기법 등을 기준으로 분류하여 통일신라 도기, 고려 도기, 녹청자, 음ㆍ양각 청자, 순청자, 상감청자, 철화청자 등을 전시하고 있다. 고려도기의 상감색이 눈길을 끌었다.  제3전시실은 조선도자실이다. 이 곳에서는 분청자, 백자, 지석, 석간주자기, 흑갈유자기, 도기 등을 전시하였다. 분청이라는 제작기법에 따라 상감ㆍ박지ㆍ선각ㆍ인화ㆍ철화분청자로, 백자는 순백자ㆍ청화백자ㆍ철화백자ㆍ상감백자로 분류 전시하여 조선시대 자기의 종류, 문양, 제작기법, 용도 등을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흑갈유ㆍ석간주자기 및 막사발 등이 제작되어 일상생활 용기로 사용되었는데, 이들을 전시함으로써 일반 백성들의 식생활 문화의 일면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다양한 빛깔의 백자 전시도 일품  통일신라 및 고려의 도자기들보다 다수 수수하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백자가 단지 백색뿐만 아니라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단연 눈길을 사로잡았던 건 우리나라 백의민족을 대표하는 듯한 순백색의 단아한 백자였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사용되었던 흑갈유 등의 도자는 그 크기가 아주 작은 것부터 매우 큰 것까지 매우 다양하였고, 그 모양도 실생활에 맞게 디자인되었다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적어도 당시 서민들의 영향력이 조선후기에 크게 증대하였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다.  제4ㆍ5전시실은 생활민속실로서 의ㆍ식ㆍ주 생활상을 직접 1:1 스케일 모형을 이용해 재현해 놓았다. 생활민속실의 민속자료는 일상생활에서 사용되어진 모든 것, 삶의 기본인 의ㆍ식ㆍ주에 필요한 생활용품에서부터 각종의 생산도구, 공예품, 그리고 사람들의 삶 속에 자연스레 자리잡은 민간신앙, 민화나 생활문서에 이르기까지를 포함하여 농기구류, 식생활용품, 복식류, 장신구류, 각종 공예품, 한약기구, 총기류, 각종 나침반, 도량형기, 인장, 인쇄용품류로 분류하여 전시해 놓았다.  재래식 혼인모습부터 조선시대 양반 및 서민들의 주거생활까지 인형과 실제 도구를 잘 혼용하여 전시해 놓아 갖가지 생활도구들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잘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사대부들의 관복은 매우 훌륭하고 멋있었다. 눈을 감고 관복을 입은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제6전시실은 무속실이다. 무속실은 무속신앙에서의 주인공인 무당이 사용하는 각종 무신기와 무속화, 무신상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양이나 질적인 면에 있어서 전국적인 규모라 한다. 무속실에는 전국적 규모의 무신기, 무속화, 무신상 전시  무신기란 무당이 신을 부르고 신을 즐겁게 해주고 신을 제자리로 보내는 과정과 길흉화복을 점지하는데 사용하는 기구로서 방울, 악기, 부채, 언월도, 삼지창, 신칼 등이 있다. 무속화는 칠성ㆍ산신 등 자연신을 인격화시킨 것과 용왕, 삼신할미, 호구아씨, 별상애기씨, 손각씨 등 인격신을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인데, 현세에서 인간의 행복과 장수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 무신상이란 부처, 승려, 장군, 동자를 나무나 철제로 조각한 상인데, 입상과 좌상 등 주로 신체의 특성만을 살려 조형하여 제단 위에 설치한다고 한다.  무신기 중 볼만한 것은 언월도 등의 무신칼이었는데, 실망스럽게도 크기가 실제 장군들이 사용하였을 만큼 크지가 않고 단도 정도의 크기였다. 무속화 중에서는 두드러지게 유비, 관우, 장비, 제갈공명 등의 무속화가 많았다. 이는 우리의 무속신앙이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듯 했다. 무신화 속의 인물들은 모두 눈과 귀가 크고, 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사람을 압도하는 듯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제7전시실은 서화실, 기증유물실이다. 서(書)는 창암 이삼만, 노사 기정진, 효사 이광렬 등 향토작가를 중심으로 백하 윤순, 추사 김정희의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었고, 화(畵)는 지역출신 작가들을 위주로 학산 윤제홍의 산수화, 자하 신위의 죽도 등이 전시되고 있었다.  제8전시실은 불교미술실로 이곳에서는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식의 불상과 조선후기의 작품을 위주로 한 불화(감로, 아미타, 칠성, 지장, 신중탱화 등), 절에서 의식을 행할 때 사용되는 의식구(범종, 금고, 목어, 법고 등)와 각종 공예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제9전시실은 한수실이다. 이학 여사가 기증한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전시작품은 민간신앙에서 받들어 온 각종 신상과 우리나라의 민화, 그리고 소품들로 대별된다. 여사의 학, 소나무, 호랑이 등 신성한 자연물을 대상으로 한 한수작품들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건융15년명감로탱’ 절규와 회한 동시에 표현한 압도적 작품  관람 중 불교미술실에서 보았던 거대한 ‘건융15년명감로탱’(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85호, 1750년 제작)이라는 그림은 나의 시선을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위로는 천상, 아래로는 지옥, 절규와 회한을 동시에 간직한 이 그림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무수한 인물들로 인해 혼란스러웠으나, 지켜볼수록 중간의 인간세상을 구분으로 엄연한 질서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원광대 박물관을 관람하면서 아쉬운 점도 있었다. 박물관이 전체적으로 약간 어두워서 비가 오거나 날씨가 궂은 날에는 더욱 어둡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 전시물에 대한 설명문의 글자가 작아서 출입금지대에 바짝 붙지 않으면 읽기 힘들기도 했다. 음악을 틀어서 삭막한 분위기를 전환할 수 있다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특별상_천 번의 발길과 천 번의 마음이 머무는 곳 이미지

특별상_천 번의 발길과 천 번의 마음이 머무는 곳

2010-12-10

천 번의 발길과 천 번의 마음이 머무는 곳  부산시 서구 부민동 동아대 박물관 2층 북쪽 회화실에 서면 벌레 소리들이 끊임없이 들립니다. 여치와 개구리, 엥엥거리는 벌들과 꾸르르 꾸르르 개골개골 개구리, 촤르르 비늘 터는 도마뱀까지 온갖 곤충들이 다 모였습니다.  맨드라미꽃, 오이꽃, 가지꽃, 소국, 수박에 원추리꽃, 민들레꽃까지 만개하고 달콤한 꽃들 주변엔 나비와 벌들이 분주합니다. 벌들의 노동에 귀를 귀울이면 그 소리가 점점 커져 귀 속에 공명을 울리고 한여름 나른한 낮잠이 달아날 듯합니다.  점잖은 여치는 벌들 가까지 가지 않고 위험천만 하게도 개구리와 도마뱀 가까이 앉았습니다. 여치는 땅바닥을 쓸면서 쓰르르쓰르르 날개를 부딪치며 부지런히 암컷을 불러들입니다. 언뜻 보아 연초록 이파리와 같아서 소리 내지 않았더라면 저런 곤충도 있었나 합니다.  그 조금 옆에는 도마뱀이 제 길가다 여치 소리를 들었을까요? 가던 길을 뒤돌아보며 꼬리를 팽팽히 세우고 목을 길게 빼들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여치는 가느다란 긴 앞발을 얌전히 접고 연신 머리를 땅으로 박으며 인사를 해댑니다. 한가하게 인사놀이 할 때가 아닌데 걱정입니다. 여치는 멸종위기 곤충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 알려야합니다. 그림 속에 담겨 있는 자연의 공평함 발견  도마뱀 맞은편에는 수박줄무늬 모양의 뻥 터질듯 부풀어 오른 배부른 개구리가 앞다리를 곧추 세우고 나비를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폴짝 뛰어 나비를 잡기에는 너무 몸이 무거운가 봅니다. 곤충들 중에 큰놈들은 긴 혓바닥이나 긴 꼬리를 가지고 언제든 적을 위협하고, 작고 힘없는 것들은 날개를 가졌습니다.  자연은 공평하고 꽃들은 만개했습니다. 한여름 뙤약볕에 달콤하게 익어가는 수박을 어떻게 다 먹어 치울까? 하고 생쥐는 골똘히 생각 중입니다. 제 몸에 비해 어마어마한 크기의 단단한 수박을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듯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생쥐의 수염과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내 잎에도 침이 고여 이빨 세웁니다. 향긋한 수박향이 식욕을 돋웁니다.  식물들은 모두 조용히 부지런합니다. 수박 줄기는 자꾸 늘어나 하늘까지 뻗을 작정입니다. 원추리도 긴 잎을 곧추 세우고 위로 쑥쑥 자라고 소국들의 가지들도 풍성하게 가지를 쳐 푸른 하늘을 소박하게 점유하고 있습니다. 맨드라미는 더위에 지쳐 게으르게 붉은 꽃 하나만 피운 것 같아도 그 크기에 질릴 듯 오만합니다.  곤충은 꽃들 속에 숨어 꽃들에 기대고 꽃들은 곤충을 불러 자신의 세력을 말없이 확장하며 자신을 즐거이 보아 줄 누군가를 향해 다양한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태와 개성을 가진 모델들은 세상에 다시없을 듯합니다. 사소한 신선함은 우주의 합창으로 화하고  나는 그들을 엿본 지 몇 달 만에야 그들의 존재를 조용히 소개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사소한 신선함이 시간이 흐를수록 우주의 합창이 되기까지는 잃어버린 세계를 되찾아 내는 집요한 인식의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조용하고 무력하게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그들의 부재 그 자체는 인간 생존의 위협이고 인간을 초라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그들은 내 망각의 무지를 두드리고 소리 지르고 발버둥 칩니다.  어느 날 밤 나는 그들의 발악하는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처음으로 행복한 밤을 지새웠습니다. 상처받은 그들은 나를 미워하지 않고 적요한 병풍의 첫 마당으로 초대했고 그 마당은 검은 공단의 매끄러운 토질과 암흑의 따뜻함으로 가득했습니다. 어둠의 세계에 익숙하고 편안했던 것은 태초의 인간 역시 어둠에서 잉태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세계에 누군가 인공의 불을 밝힌다면 일순간 타 버릴 것 같기도 하고 가시광선의 강열함에 하얗게 눈이 멀어 공포의 세계가 될 것도 같습니다. 다행히 빛 한 점 없는 광활한 우주에 나 역시 우주적 존재가 되어 그들이 초대한 이 밤의 축제를 기꺼이 향유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아는 상식과 달리 아무도 나를 해치지 않았고 오히려 나를 꿀이 흐르는 곳으로 초대합니다. 공존과 조화의 가르침 알게 하는 ‘초충도수병’  이 병풍 너머 수백 년 전 생명의 여신은 그들을 신의 손길로 한 땀 한 땀 수놓고 질서정연하고 조화롭게 미물을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여신의 무지한 후손이 맞이할 고독한 공포를 경계하고자 걱정을 담았을 것입니다.  조용히 존재하는 모든 조화로운 것들을 가장 소중히 하라! 그것이 공존이자 조화이고 인간이 살 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암흑의 공단 속에 빛을 발하는 사소한 것들을 바라보며 생명은 그 어느 것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들과 더불어 살 때 인간은 축복이라고!

장려상_ 보물 7점 소장한 경북대 박물관 탐방기 이미지

장려상_ 보물 7점 소장한 경북대 박물관 탐방기

2010-12-10

보물 7점 소장한 경북대 박물관 탐방기  대구 경북에서 역사가 오래된 경북대학교를 방문했다. 캠퍼스 안에 위치한 경북대학교 박물관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1959년 개관한 경북대학교 박물관은 7개의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시청각실, 보존처리실, 수장고, 야외박물관인 월파원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사시대부타 최근의 민속자료에 이르기까지 약 7,000여 점의 수집품과 40,000여 점의 발굴유물이 소장돼 있으며, 이 가운데 7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버스를 타고 경북대학교 북문에 내려서 박물관까지 가는데는 도보로 5분정도 걸렸다. 본관 맞은편에 위치한 박물관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야외 박물관 월파원이었다.  야외 전시장인 월파원에서는 석탑, 부도, 불상, 문인석 등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각종 석조물과 청동기시대 고인돌, 삼국시대의 석곽묘 등을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었다. 고인돌은 언뜻 봐서는 고인돌인지 몰랐고, 안내문을 보고서야 유물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돌무더기 같았는데 아마 고인돌도 쌓는 양식이 여러 가지가 있는 듯싶었다. 돌무더기 형태의 고인돌 이채로워  고인돌하면 강화도에 있는 것처럼 높이가 3미터정도 되고 넓적하고 큰 돌이 올려져 있어야 한다고 여겨서인지 경북대 박물관에서 본 돌무더기는 고인돌 같지가 않았다. 원래 고인돌이란 거대한 돌을 이용하여 축조한 거석기념물의 하나로 지상이나 지하에 시신을 묻는 석실을 만들고 그 위에 큰 돌로 덮은 선사시대의 무덤을 말한다.  고인돌의 어원은 납작한 판석이나 괴석형 덩이돌 밑에 돌을 고여 지상에 들어내는 ‘고여 있는 돌’ 이란 뜻의 우리말 표현이다. 일본에서는 고인돌을 지석묘라 쓰고, 중국에서는 돌로 만든 집이란 의미로 석붕(石棚)이라 한다.  고인돌을 보고나자 특별한 설명이 없는 불상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널찍한 잔디밭 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석불이었다. 어떤 경위로 경북대 박물관에 전시가 되고 있는지, 어느 시대 유물인지에 대한 설명이 없어 좀 아쉬웠다.  박물관 건물 안으로 가는 길에 보물 제258호인 ‘석조부도’와 또 다른 석조부도가 있는데 보물 제135호로 보호받는 귀중한 문화재다. 불교가 국교로 융성한 고려시대의 것이라 한다. 이 석조부도는 신라 이래 팔각원모양의 기본 양식을 따르면서 보다 크고 화려하게 표현한 고려시대의 특징이 잘 나타난 걸작 중의 하나로 꼽힌다. 중간부분에 양각된 용과 구름의 모습이 기운차 보이고, 상층부분에 비해 아랫부분이 넓어 안정된 느낌을 준다. 높이는 270cm이다.  그렇게 석조부도를 지나고 박물관 내부로 들어가면 바로 입구에 반기는 유물이 하나 있다. 바로 석조비로자나불이다. 이 비로자나불은 보물 제335호로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중엽의 것으로 얼굴은 부드럽고 원만하며 도톰한 두 눈과 미소를 머금은 입가의 모습을 통해 환희에 가득 찬 내면세계를 보여준다. 비로자나는 산스크리트어로 ‘태양’이라는 뜻인데, 부처의 지혜가 넓고 커서 끝이 없음을 상징하는 불상이다. 이 불상의 높이는 196cm이다. 대작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로비에는 터치스크린으로 된 박물관 안내가 있었다. 전시실에는 신석시 시대의 빗살무늬 토기를 비롯하여 금동관, 고려청자, 조선시대 고서류, 국악기와 민속품, 교사(校史)자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들이 시대순으로 전시되어있다. 민속관에는 외국인들 발길도 이어져  관람객들은 다른 전시실보다 민속관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연세가 있는 어르신들과 외국인들도 있었는데, 어르신들은 전시품을 보고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외국인들은 이국적인 풍경에 신기해했다.  박물관 관람을 모두 끝내고 다시 밖으로 나와서 처음에 도착했던 곳과 반대쪽에 있는 야외 전시실 쪽을 보니 토기를 굽던 가마터가 있었다. 박물관과 전체적으로 어울리는 모습이 참으로 정겹고 아름다웠다.  학교 박물관을 관람하면서 아쉬운 점은 7전시실의 문이 잠겨져 있어서 보물로 지정된 유물들 중에서 상당수를 먼발치에서 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유물 보존을 위한 조치라고 이해는 하지만 다음 번에는 꼭 개방이 되어 있으면 좋겠다. 박물관을 관람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았다. 넉넉하게 한 시간 정도 여유롭게 둘러볼 수 있을 것 같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경북대 박물관을 찾아 우리의 소중한 문호유산을 접했으면 좋겠다.

장려상_근대의학의 중추역할을 했던 대한의원 이미지

장려상_근대의학의 중추역할을 했던 대한의원

2010-12-10

 우리나라 근대의학을 얘기함에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곳이 대한의원이다. 대한제국 시대인 1907년 착공되어 1908년 준공된 건물로 조선시대 창경궁의 동쪽에 있었던 함춘원(사적 제237호)이라는 정원이 있었던 마두봉(馬頭峰) 언덕에 있다. 사적 제248호다.  대한의원은 당시 국내 최고의 의료기관이었으며 근대 건축물이 세워지기 시작한 1900년대 초에 조선은행 본관과 동양척식주식회사와 더불어 경성(현 서울)의 3대 건축물로 꼽힐 정도로 이름난 건물이었다. 대한의원 본관은 병동 7동과 의학교, 해부실 등의 부속건물이 건립되었으나 지금은 대한의원 본관만 남아 있다. 조선총독부의원->경성제국대학 의대 부속의원->서울대학교 의대 부속병원 명칭 변경  대한의원 본관 건물은 전면과 후면이 각각 대칭을 이루고 건물 중앙부 위쪽에는 시계탑도 설치되어 있다. 그 어느 시기보다 격변의 시대였던 1900년대 초에 준공된 건물이기에 그 이후 온갖 우여곡절도 겪게 된다. 일제강점기 시기에는 조선총독부의원으로 바뀌고 경성제국대학의 의학부 부속의원이 되었다가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전면 출입구 우측에는 대한의원 본관의 역사를 설명한 표지석이 서 있다. 좌측에는 한글로 , 우측에는 영문으로 설명문이 쓰여 있다. 설명 표지석 옆쪽에 놓여 있는 기증기념비에는 건축 당시에는 동판으로 제작되었던 지붕을 일제가 걷어가게 돼 이를 함석으로 대체하였는데 2000년대 초에 국내기업이 이를 다시 원래의 모습인 동판 지붕으로 복원해 기증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대한의원 본관은 지상 2층에 현관을 중심으로 전면과 후면이 좌우대칭형 구조로 되어 있고 붉은 벽돌을 촘촘히 쌓아 올렸다. 붉은 색이 특별한 인상을 주지는 않는 것 같이 느껴지면서도 오랜 세월을 간직해서인지 고풍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통풍구 하나에도 세심한 신경 기울여  대한의원 본관 전면과 후면의 아래 부분에는 여러 개의 통풍구가 보인다. 환자를 치료하는 의료기관이다 보니 건축 당시부터 공기 정화기능에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작은 문 하나에도 장식성을 살려낸 모습이 눈에 띄인다.  통풍구의 위치에 따라 철제로 만든 장식문양 뒤에 철망을 댄 것, 같은 철제 장식문양 뒤에 철망 없이 벽돌을 댄 것, 통풍구를 판재 같은 것으로 막아 놓은 것 등 다양하다. 아마도 통풍구가 인접한 건물 내 공간의 성격-병실인지, 사무실이나 휴게실인지 등-에 따라 통풍의 정도를 조절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험동물공양탑에는 생명존중 사상 배어 있어  본관 후면에는 한자로 쓰여진 비석이 하나 이목을 집중시킨다. 한자로 實驗動物供養塔(실험동물공양탑)이라고 새겨져 있지만 탑이라고 하기에는 작은 크기다. 실험에 사용된 동물들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담긴 것으로 의학 발전을 위해 희생된 동물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일제 강점기인 1922년에 만들어진 것을 보면 우리나라에 서양 의학이 전래된 초창기에도 생명 존중 사상이 싹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겠다.

장려상_‘건국대학교 구 서북학회회관’ 이미지

장려상_‘건국대학교 구 서북학회회관’

2010-12-10

 지하철 2·7호선 건대입구역을 나와 건국대학교 교정에 들어서면 마음까지 확 트이는 넓은 호수, 일감호를 마주하게 된다. 이 일감호 옆으로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학교 안쪽으로 걷다보면 최신식 건물이 즐비한 교정 한 가운데 고풍스런 옛 건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건물은 건국대학교의 모태가 된 ’구 서북학회회관(등록문화재 제 53호)’이다.  현대적 건물 숲 속의 단아한 붉은 꽃처럼 솟아있는 이 건물은 단연 건국대 교정의 랜드마크이며, 한국 근·현대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현재 ’율곡이이 남매 분재기(보물 477호)’ 등을 소장ㆍ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으로서 기능하고 있지만, 교정에 이러한 르네상스식의 건축물이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은 어딘가 생소하다. 그러나 이 건물이 겪어온 약 1세기 남짓한 인생을 회고하면, 건재하게 남아 있는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1908년 1월 서울, 일제의 강압으로 국권회복운동이 어려움에 처하자, 이를 적극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가 통합되었다. 새로운 단체의 명칭은 ’서북학회’. 평안도ㆍ함경도ㆍ황해도민을 주축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안창호, 박은식, 유동열, 이동휘 등이 최초 건립  주요활동은 애국계몽운동이었으며, 구성원은 안창호, 박은식, 유동열, 이동휘 등이었다. 그들은 당시 종로2가에 있던 한성전기회사를 모델로 하여 서울 낙원동에 르네상스 양식 건물을 지었는데, 바로 건국대 내에 위치한 ’구 서북학회회관’이다. 그런데 어떻게 낙원동에 지은 건물이 광진구 화양동에 옮겨 오게 되었을까?  1910년 서북학회는 낙원동에 세운 이 건물에 신식교육기관인 ’오성학교’를 설립하였지만, 곧 일제의 강제병합과 서북학회의 강제해산으로 인해 폐쇄되는 아픔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이후 이 건물은 한국 근ㆍ현대 대학교육의 산실로 자리 잡는다. 1918년 현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가 1922년까지 4년 동안 교사(校舍)로 사용하였으며, 보성전문학교가 이전되자 서북학회의 산하교육기관이었던 협성학교와 협성실업학교의 교사로 운용되었다.  건국대가 ’서북학회회관’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이즈음이었다. 협성학교가 이전한 1939년, 당시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으로부터 민중병원(현 건국대병원)을 운영하던 상허 유석창 박사에게 본 건물의 소유권이 이전된 것이다. 해방 후 한때 한민당의 본부로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이 역시 이전하였고, 1946년 5월 유석창 박사는 현 건국대학교의 모체인 ’조선정치학관’을 설립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 신익희 등이 주축이 된 ’국민대학설립기성회’가 마땅한 교사가 없어 어려움을 겪던 중 본 서북학회회관에서 자주 회동하였고, 1947년 6월에는 조선정치학관 내 일부에서 단국대학교가 설립되었다. 한 건물 안에 3개의 대학이 설립된 것이다. 고려대, 건국대, 단국대의 모태 역할을 담당  한국전쟁 후인 1956년 건국대가 지금의 캠퍼스로 자리를 옮기자, 본 건물은 건국대 야간부 및 법인사무실로 사용되었다. 그러던 중 1976년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건물이 철거될 위험에 놓이자 1977년 해체, 건물의 부자재를 보관해 오던 것을 지난 1985년 현재의 캠퍼스에 옮겨와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국대를 비롯한 고려대, 국민대, 단국대의 전신이 거쳐 간 ’구 서북학회회관’은 현재 상허 유석창 박사의 호를 딴 ’상허기념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은 반지하가 도입된 지상 2층의 벽돌 건물로 중앙에 돌출된 현관부가 있고, 지붕은 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 오면서 일부 구조와 재료가 바뀌어 아쉬움이 남지만, 이전복원이라는 당시의 힘든 상황을 고려하면 값진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건국대 교정 내에 위치한 르네상스 양식의 근대식 건축물인 이 건물은 2003년 6월 근대문화유산의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었다. 지난 2008년에는 이 건물을 무대로 한 SBS드라마 ’가문의 영광’이 방영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