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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작가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퇴계와 이육사의 나라사랑 월영교에 비치다 스크랩

작가와 함께하는 문화유산 여행(강희갑 작가,홍찬선 작가)

 


 

경북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에 들어가면 추로지향(鄒魯之鄕)이란 비석이 방문객을 맞는다. ()는 공자의 고향이며 추()는 맹자의 고향이다. 추로지향은 공맹의 예절을 알고 유학이 왕성한 곳이라는 뜻이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숨결이 남아있는 도산서원이 갖는 의미를 고스란히 드러내주는 비석이다. 이런 도산서원마저 안동댐으로 물에 잠길 위기에 처했었다. 다행히 앞마당 밑까지만 물이 올라왔지만 시사단(試士壇)은 물에 잠겨 섬처럼 남았다.

도산서원을 나와 3km 정도 가면 퇴계가 살던 종택이 나오고 그보다 더 가면 퇴계 묘소가 있다. 묘소를 지나 고개를 휘돌아 넘으면 육사 이원록(陸史 李源祿) 시인의 문학관과 묘소, 그리고 생가터가 나온다. 이 시인의 본래 생가터는 안동댐으로 수몰돼 현재 청포도 시비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옮겼다. 그 뒤 안동 시내로 이전했다가 지금은 이육사문학관 옆에 복원돼 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던 육사의 죽음이 이제야 편안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도산서원 전경

<도산서원 전경>




도산서원 앞에 서면 넓은 마당이 반갑게 맞이한다. 원래 이곳은 도산서원에서 흘러나온 물이 낙동강으로 들어가는 계곡이었는데, 안동댐으로 물이 차오르자 흙을 쏟아 부어 마당으로 돋은 곳이다. 마당 한 가운데 네 가지로 뻗은 느티나무가 있다. 원래 한 나무인데 흙으로 밑동을 덮었음을 온 몸으로 보여준다. 마당 왼쪽에는 커다란 버드나무 두 그루가 1574년에 세워진 도산서원의 역사를 말해주듯 우람하게 서 있다. 마당에서 올라보면 영지산(靈芝山) 품에 포근하게 안겨 있는 도산서원이 한 폭의 풍경화 같다. 도산서원 전교당(典敎堂) 건물에 있는 陶山書院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쓴 것이다.




도산서원 시사단 

<도산서원 시사단>




마당에서 뒤돌아보면 안동호가 보이고, 가운데에 섬이 하나 있다. 그 섬에 산뜻하게 가꾸어진 소나무 숲이 조그마한 정자 같은 건물을 감싸고 있다. 이 건물이 시사단(試士壇)이다. 정조가 1792년에 이황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기 위해 도산별과(陶山別科)라는 과거를 이곳에 치르게 했다. 당시 도산별과를 시행하고 기념하던 장소가 시사단이다. 도산별과는 급제와 진사 2, 초시 7인 및 상격(賞格) 14인을 선발한 특별과거였다. 당시 과거를 보던 벌판은 물에 잠겼고, 시사단도 원위치에 10m 높이의 축대를 쌓은 뒤 원형대로 옮겨지었다.

 



도산서원 열정(冽井)

<도산서원 열정(冽井)>




도산서원 마당 오른쪽 구석에 돌로 자로 쌓은 우물이 있다. 우물 앞에는 <冽井>이라고 쓴 조그마한 표지석이 있다. 맑은 우물이란 뜻이다. 퇴계가 우물 이름을 직접 짓고 화강석으로 표지석을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 이 우물은 이곳 밭을 농사짓던 농부가 사용하던 것인데, 퇴계가 이 돌우물 맛이 감미로워(石井甘冽) 머물러 살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라고 해서 이곳에 도산서당을 지었다고 한다. 퇴계는 이 우물에 대해 세상에서 물러난 사람 여기 터 잡고 엎드려 사니, 한 바가지의 물로 샘과 내가 서로의 마음을 얻었구나라는 싯구를 남겼다.

 



도산서당

<도산서당>




열정 옆의 계단을 올라가면 도산서당(陶山書堂)이 나온다. 도산서당은 퇴계가 직접 설계해서 짓고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3칸 밖에 안 되는 작은 규모다. 서쪽 1칸은 골방이 딸린 부엌, 가운데 온돌방은 퇴계가 거쳐하던 완락재(玩樂齎), 동쪽 대청마루 1칸은 암서헌(巖棲軒)이다. 학생이 늘어나자 암서헌 동쪽에 툇마루 형식으로 1칸을 증축했다. 도산서원 안에서 퇴계 생존 때에 있었던 건물은 도산서당과 기숙사인 농운정사(隴雲精舍), 그리고 역락서재(亦樂書齋) 등이다. 나머지 건물은 퇴계 사후에 도산서원을 세우면서 새로 건축한 것이다. 서당은 배우고 가르치는 곳이고, 서원은 배우고 가르치는 것 외에 제사 기능을 함께 갖춘 곳이다. 도산서당이 도산서원이 되면서 규모가 커지면서 학문이 깊어진 측면도 있지만, 제사기능이 강조되면서 집단이기주의로 변질되는 부작용이 있었다. 조선 말,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린 것은 이런 부작용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다. 도산서원은 훼절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다.

 



매화원

<매화원>




도산서당 서쪽 문을 나오면 매화원이 펼쳐진다. 선비들은 매화를 사군자의 하나로 좋아한다. 추운 겨울에 눈발을 뚫고 피는 기개와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절개를 칭송한다는 뜻이다. 퇴계는 매화와 특히 인연이 깊다. 단양 군수 시절에 시와 그림에 능한 두향(杜香)이라는 기생이 매화가 심어진 화분을 퇴계에게 선물했다. 퇴계는 이 매분(梅盆)을 정성껏 가꾸었으며, 임종할 때 매형(梅兄)에게 물을 주어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퇴계 후손들이 단양에 있는 두향 묘를 찾아 매년 벌초하고 제사 지내는 것은 이를 따른 것이다. 서원에 가면 매화가 한 두 그루 있지만, 매화 동산이 있는 것은 도산서원의 특색이다.

 



이주부공사적

<이주부공사적>




매화원에서 도산서원의 중심인 전교당으로 들어가는 문 양 옆에 누각 비슷한 건물이 광명실(光明室)이다. 전교당 마당에서 동쪽 광명실 처마를 보면 <이주부공사적(李主簿公事蹟)>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내용은 대체로 이 주부(주부는 벼슬 이름)는 임진왜란 때 도산서원의 사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 광명실에 있던 책과 서원의 위패를 후미지고 정갈한 곳에 숨겨 안전하게 보존했다. 전쟁 통에서도 의로운 행동을 보인 것을 기리기 위해 여기에 적어 그 행적을 밝힌다는 것이다. 광명실은 도산서원의 서책을 보관하던 장서각이다. 광명실에 있던 책은 보존을 위해 인근의 국학연구원으로 옮겨져 지금은 비어 있다.

 



퇴계종택

<퇴계종택>




퇴계 이황(1501~1570)이 살다 돌아가신 집이다. 원래의 집은 없어졌고 현재의 종택은 퇴계의 13대 손인 하정공(霞汀公) 이충호가 1926~1929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종택은 34칸으로 ㅁ자형이며 전체 면적은 2119(650)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으나, 황금색으로 익어가는 벼와 함께 서 있는 종택은 아름다운 풍경화였다. 종택을 지나 1km 정도 가면 퇴계의 묘가 있다. 선생의 유언에 따라 신도비(神道碑)와 의물(儀物) 없이 묘비만 세워져 있다.

 



이육사 문학관

<이육사 문학관>




퇴계종택과 퇴계묘소를 지나 언덕 하나를 넘으면 이육사문학관(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706)이 길 왼쪽에 있다. 안동시가 20002, 이육사기념사업회를 결성한 뒤, 200110월에 착공해 2004731일에 개관했다. 문학관 입구에는 이육사 동상과 함께 대표적인 시, <絶頂(절정)> 시비가 세워져 있다. 코로나19로 안에는 들어갈 수 없었는데, 1층에는 문학의 세계 코너와 독립운동사 코너가 있고, 2층에는 영상실 겸 세미나실 등이 있다고 한다. 문학관 뒤 산, 2.8km 떨어진 곳에 이육사 묘소가 있다.

 



이육사 생가

<이육사 생가>




문학관 앞쪽 언덕에 이육사(1904~1944) 생가가 <육우당(六友堂)>이란 이름으로 복원돼 있다. 이육사 생가는 원래 문학관 주차장 앞쪽의 낙동강 근처에 있었는데 안동댐으로 수몰돼 현재 <청포도 시비>가 세워진 곳(원촌리 831)으로 옮겼다가, 안동시 태화동 672-9로 이전됐으나, 소유주가 바뀌면서 형질이 변경돼 생가로서 기능이 훼손돼 현재 위치로 이전복원됐다. 이 집에서는 육사와 맏형 원기, 아우 원일 원조 원창 원홍 등 육형제가 태어났다. 육사는 이 집에서 열여섯 살까지 살았다.




이육사 생가터 청포도 

<이육사 생가터 청포도>




문학관에서 길을 따라 걷다보면 <청포도 시비공원>이 나온다. 이육사 생가가 처음으로 이전된 곳이다. 이 공원에는 이육사의 시 <청포도> <초가> 시비와 <육우당유허지비>가 세워져 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시작되는 <청포도>의 시비는 돌을 둥그렇게 깎아 포도송이처럼 앞에 장식하고 세웠다. <청포도샘>이 만들어져 있으나 물은 말라 있었다. <초가>는 자동차 도로 옆에 세웠다. 원촌(遠村) 마을의 유래에 대한 안내문이 외롭게 서 있다.

 



월영교(月映橋)와 달

<월영교(月映橋)와 달>




조선 중기의 원이엄마와 그 남편 사이의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이야기가 간직된 나무다리다. 먼저 귀천한 남편을 위해 머리카락을 뽑아 한 켤레의 미투리를 지어 사랑이 듬뿍 담긴 편지와 함께 남편의 관 속에 넣은 원이 엄마. 그의 애절하고 숭고한 사랑을 기념하기 위해 미투리 모양을 한 다리를 2003년에 개통했다. 월영교란 이름은 월영대(月映臺)라는 이름이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시민 공모 322점의 응모작 가운데서 뽑았다. 길이는 387m, 폭은 3.6m로 국내에서 가장 큰 목책교다. 월영교 가운데 월영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육사 시비 절정

<이육사 시비 절정>



 

그날 님에게/ 如心 홍찬선

 

그날 막걸리 한 잔 사들고

님에게 가겠읍니다

 

게으르고 게을러서

님께서 가신 지

님께서 일제 고문을 극복하려고

님께서 베이징 남의 나라 땅

남의 나라 옥에서 돌아가신지

예순여섯 해가 돼서야

쭈뼛쭈뼛 님의 발자취 찾았읍니다

님이 떠난 것처럼

님의 발자취는 시로만

님이 남기신 시의 시비로만

님이 태어난 집마저

님이 빼앗긴 나라 되찾으려

이리저리 돌아다니신 것처럼

몇 차례 옮기다 이제야 자리 잡았읍니다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춰 둔 구석진 두메산골

세간명리를 구름처럼 여겨 속진과 치욕을

멀리하는 마을에서 님은 태어났습니다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900,

안동댐 수몰지역에 있던 님의 생가가

이육사문학관과 함께 새롭게 태어난 곳,

그곳 뒷산 2.8km에 님이 계십니다

 

그날 막걸리 한 잔 사 들고 가겠읍니다

그날, 강철 무지개 뜬 그날, 님에게 가겠습니다





 

 


: 안동 여행은 크게 3개 권역으로 나눌 수 있다. 도산서원과 이육사문학관 및 봉정사를 묶는 동북권, 하회마을과 병산서원 및 부용대를 묶는 서남권, 그리고 임청각과 내앞마을 및 만휴정 등을 잇는 중남부권이다. 이렇게 많고 넓은 곳을 하루에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23일 정도 느긋한 일정으로, 시조의 창시자인 우탁 선생 묘소와 시내 곳곳에 있는 모전석탑 등을 꼼꼼히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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