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뛰기링크

문화유산여행

[작가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찬란했던 백제 문화의 마지막 도읍지, 사비성을 가다 스크랩

 작가와 함께하는 문화유산 여행(강희갑 작가,홍찬선 작가)





사비성은 700여년의 백제 역사 가운데 마지막 122년의 도읍이었다. 백제 26대 왕인 성왕(재외 523~554)538년에 도읍을 옮겼다. 좁은 웅진(공주)에서 넓은 사비(부여)로 천도하면서 나라이름도 남부여로 바꿨다. 고구려에 밀려 한강유역을 잃고 웅진으로 천도했는데, 이제는 빠르게 성장하는 신라에 대응하는 것이 시급했다. 백제인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고 경제적 기반을 다져 위축돼 가는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했다.

하지만 하늘은 성왕을 버렸다. 신라와 연합해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한강유역을 되찾았으나, 진흥왕(재위 540~576)의 배신으로 신라에게 다시 뺏겼다. 화가 난 성왕은 전군을 동원해 신라를 공격했지만 관산성(옥천)에서 전사했다. 이때부터 백제와 신라는 앙숙이 되었다. 훗날 서동과 선화공주의 아름다운 전설을 남긴 무왕의 치세가 있었다. 하지만,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전쟁을 치렀다. 그 중심에 사비성이 있다.

 




부소산문

<부소산문>




부여에 가면 처음 찾는 낙화암과 고란사다. 이곳에 가려면 부소산성에 들어가야 하고, 부소산문은 부소산성의 출입문이다. 관북리 왕궁터 뒤가 부소산(扶蘇山, 106m)이고 이곳에 있는 부소산성에서 백제가 마지막 전투를 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소산성 주차장 오른쪽 끝에서 계단을 오르면 왼쪽에 장승과 할아버지 할머니 조각상에 <공예품판매장>이라고 쓰인 집 옆으로 올라가면 곧 나온다. 부소산문을 들어서면 본격적인 백제 마지막이 어찌했는지를 알아보는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삼충사(三忠祠)

<삼충사(三忠祠)>





부소문을 지나 직진하다 세 갈래 길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가면 왼쪽에 삼충사가 있다. 백제 마지막 의자왕 때 세 충신이었던 성충(成忠, ?~656)과 흥수(興首, ?~?) 및 계백(階伯, ?~660)을 기리는 사당이다. 1957년에 세워졌으며, 1981년에 중건됐다.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를 지낸다. 의자왕이 이들 세 충신의 말을 잘 들었으면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안타까운 마음에 부질없는 가정을 해보지만 헛헛함을 지울 수 없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이곳에 일본 신사를 지으려다가 갑자기 패망해 중단된 것으로 전해진다.

 



영일루(迎日樓)

<영일루(迎日樓)>




부소산 동쪽 산봉우리에 있는 누각이다. 삼충사를 지나 산책하기 좋은 숲길을 따라 걷다보면 만난다. 아침 일찍 계룡산(鷄龍山) 연천봉(連天峰, 739m)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누각이란 뜻이다. 하지만 지금은 나무가 많아 해돋이를 보기는 쉽지 않다. 또 능산리고분 부근의 청마산성과 임천면에 있는 성흥산성 및 구룡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지만, 나무가 많아 시야가 가린다. 현재 건물은 홍산(鴻山)에 있던 조선시대 관아문을 19645월에 옮겨와 세운 것이다. 이곳은 부소산성의 동쪽 지휘소인 동대(東臺) 터로, 영일루를 세우기 위해 땅을 고를 때 백제의 기와 조각이 많이 나왔다.

 



군창지(軍倉址)

<군창지(軍倉址)>




영일루 옆에 부소산성을 지키는 군인들을 위한 식량과 난방용품 등을 저장하던 넓은 창고 터가 있다. 1915년 이곳에서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됨으로써 백제시대 군량을 비축해두었던 창고로 알려졌다. 전체 구조는 ㅁ자 모양으로 가운데 공간을 두고 동서남북으로 건물이 배치돼 있다. 길이 70m, 넓이 7m, 깊이 47cm 정도로 꽤 넓다. 지금도 이 일대를 파면 불에 탄 곡식들이 나와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부소산성이 불탔을 때, 이곳을 지키던 병사들도 곡식과 함께 타 죽었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프다.

 



반월루(半月樓)

<반월루(半月樓)>




부소산은 백마강이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반달 모양으로 끼고 도는 형상이다. 그 모양을 따서 이름붙인 반월루는 부소산의 남쪽 마루에 있어 부여 시가지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바로 앞에 정림사지가 보이고(여름에는 나뭇가지로 잘 보이지 않는다), 왼쪽 너머에는 나성과 능산리 왕릉을 볼 수 있다. 오른쪽에는 백마강이 흐른다. 남서쪽 멀리는 사비성 외곽을 지키던 성흥산성도 한눈에 들어온다.

 



사자루(泗‘水+此’樓)

<사자루(+)>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송월대(送月臺)가 있던 곳이다. 현재 누각 건물은 1824년에 세운 임천면 관아 정문이던 개산루(皆山樓)였는데, 1919년에 이곳으로 옮겨 세우며 이름도 사자루로 바꿨다. 건물 정면에 보이는 현판은 의친왕 이강(李堈)이 쓴 것이다. 낙화암과 함께 백마강 물줄기를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강 건너편에 있던 왕흥사는 지금은 흔적도 없이 농토로 바뀌어 있다.





 낙화암 백화정

<낙화암 백화정>





낙화암에 가 보면 3000궁녀가 백마강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를 금세 알 수 있다. 3000명이나 모일 정도로 넓지 않으며(두 줄로 서서 떨어졌다고 하는 것은 너무 억지스러우니), 절벽이라고 하나 투신하면 강물로 직접 떨어질 정도로 깎아지른 절벽도 아니다. 백제가 멸망한 뒤 나당연합군의 정당성을 만들기 위해 의자왕이 궁녀를 그렇게 많이 두었다며 폄하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백화정은 낙화암 위에 세운 육각정자 이름이다. 슬픈 전설과 다르게 소나무와 바위 사이에 세워져 매우 아름답다.

 




낙화암 노송

<낙화암 노송>





낙화암의 아픈 전설을 슬프게 하는 것은 절벽에 외롭게 서 있는 늙은 소나무다. 누가 심었는지, 나이가 얼마인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몸통줄기 절반 정도가 껍질이 벗겨진 채 썩어 들어가고 있다. 반쪽 껍질에 의지해 목숨을 이어가고 있고, 힘이 빠져 스스로 서있기조차 힘든 탓인지 철로 만든 받침대에 의지해 힘겹게 서 있다. 솔잎도 그다지 많지 않다. 백제 멸망의 고통을 온 몸으로 받아 잘 자라지 못하는 듯해서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고란사(皐蘭寺)

<고란사(皐蘭寺)>





낙화암에서 북쪽 비탈길을 내려가면 절벽 아래 절이 있다.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알 수 없는 고란사다. 백제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낙화암에서 투신한 3000 궁녀의 넋을 달래기 위해 1028년에 지었다는 말이 있으나, 3000 궁녀 자체가 꾸며낸 말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믿기 어렵다. 고란사라는 이름은 절 뒤에 있는 약수터 절벽 바위틈에 자라는 고란초라는 풀에서 나왔다. 이 약수는 사람을 젊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관북리 왕궁터

<관북리 왕궁터>





고란사에서 돌아 나오면 관북리 왕궁터를 만날 수 있다. 부소산성 남쪽 기슭 28000여 평 가운데 약650평은 백제왕궁지로 지정되어 있다. 고구려의 안학궁을 제외하면 신라와 백제의 왕국이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관북리 왕궁터는 사비도성의 일부에서 왕궁터가 발견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넓은 잔디밭에 각종 발굴 안내판을 보면서 둘러보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이다.




삼충신 영정 

<삼충신 영정>





삼충사에서/ 非心 홍찬선

 

부소산에 바람이 분다

고란사에서 낙화암 거쳐

삼충사를 휘감는 쓸쓸한 바람이다

 

아무리 나라와 백성을 살릴 묘책 있어도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아무런 쓸모없는 일

아니 쓸모없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내가 죽고 지도자도 죽고 백성들도

양떼처럼 이리저리 몰림빵 당하다 죽는다

 

충신이란 말이 무슨 소용인가

태어날 때 이미 죽음으로 가는 것

내 몸 하나 죽는 것은 하나도 슬프지 않으나

나에게 목숨 맡긴 5000 결사대의 헛된 죽음과

3000 궁녀 떨어져 죽었다는 역사 왜곡과

아름다웠던 문화가 깡그리 사라지는 것을

어찌 차마 눈뜨고 볼 수 있을까

 

패자는 말 할 수 없고 사자는 말이 없다

충신이라 해도 왕을 바로잡지 못하고

백성을 구하지 못한 죄는 가벼워지지 않는다

 

나라 망한 설움도 그저 우리들

셋이서 곱씹고, 곱씹고 곱씹을 수밖에

낙화암 넘어오는 바람 고스란히 맞을 수밖에

 








 

사비성 팁 : 부소산성을 돌아보는 마음가짐은 느긋함이다. 유적지를 스탬프 찍듯 바삐 돌아다니면 부소산성이 갖고 있는 맛과 멋을 느낄 수 없다. 유적지가 선이라면 부소산성의 맛과 멋은 면과 공간에 있다. 벽돌이 깔려 있는 길도 숲속을 걷는 맛이 있지만, 흙으로 된 토성길을 걷는 맛은 도시에선 느낄 수 없는 정취를 준다. 부소산성 광장에 있는 매점에서 도토리묵에 막걸리 한잔 하면 더욱 느긋하게 백제의 마지막을 상상할 수 있다. 관북리 왕성터도 그냥 눈으로만 쓱 훑어보지 말고 발로 느끼며 보는 게 좋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고란사 선창장에서 배를 타고 백마강에서 올려보는 낙화암의 맛도 느끼면 금상첨화다.

 




하단내용참조

 

댓글등록 비밀댓글

(0 / 300)

전체댓글수: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