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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작가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명성황후 시해, 을미왜변의 현장 경복궁 건청궁을 가다 스크랩

작가와 함께하는 문화유산 여행(강희갑 작가,홍찬선 작가)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정궁이다.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고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600년 사직의 터로 삼을 때 맨 먼저 지은 궁궐이다. 그만큼 경복궁이 갖는 의의와 위엄은 크다. 하지만 경복궁은 수많은 비극을 안고 있다. 건국한 지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보름 만에 한양을 뺏기면서 경복궁은 불에 타고 말았다. 6~7년을 끈 전란으로 살림살이가 핍박해져 불탄 경복궁을 복원은 꿈도 꾸지 못했다. 300년 가까이 지난 고종 때, 흥선대원군 때서야 여러 문제를 안고서 복원됐다. 그마저도 완전하지 못했다. 60년 넘게 이어진 안동 김가 세도정치와 삼정문란으로 조선의 국운은 약해지기만 했다. 1870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경복궁은 수많은 역사를 지켜봐야 했다. 때론 눈물로, 때론 핏물로, 행복한 웃음을 지은 날은 그다지 많지 못했다.

 




영추문(迎秋門); 서문

<영추문(迎秋門); 서문>





경복궁의 정문은 남문인 광화문(光化門)이다. 하지만 이번엔 광화문이 아니라 서문인 영추문부터 경복궁을 살펴본다. 영추문은 1896211일에 있었던 아관망명의 첫 사선(死線)이었다. 이날 새벽, 고종은 사실상 포로로 잡혀있던 건청궁에서 빠져나와 상궁용 가마를 타고 영추문을 빠져나와 아관(러시아공사관)으로 망명했다. 친일 괴뢰로 전락한 시위대가 지키고 있는 영추문을 벗어나기 위해 여장(女裝) 상궁 가마를 이용했다. 아직까지 한국역사교과서에서는 아관파천이라고 가르치고 있지만, 이날 고종의 이필주어(移蹕駐御)는 정치적 박해를 벗어나기 위해 치외법권이 적용되는 아관으로 옮긴 망명이다.

 




근정전(勤政殿); 경복궁 정전

<근정전(勤政殿); 경복궁 정전>




영추문을 들어와 광화문 쪽으로 직진하면 넓은 마당이 나오고 왼쪽으로 홍례문이 보인다. 이곳이 일제강점기 때 경복궁을 훼손하고 조선총독부를 지은 곳이다. 문민정부 때 조선총독부를 허물고 예전 모습으로 복원해놓았다. 홍례문을 지나면 근정문이 나오고 그 안에 있는 큰 건물이 근정전이다. 왕의 즉위식과 세자 책봉식 등 큰 정무가 행해지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근정전에 일장기가 걸리는 수모를 겪었다.

 




경회루(慶會樓); 경복궁 연회장

<경회루(慶會樓); 경복궁 연회장>





근정전 왼쪽에 아름다운 연못 속에 우뚝 서 있는 건물이 경회루다. 백악산(북악산)과 인왕산의 경치를 빌려온 차경(借景)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1412년에 건축돼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을 1867년에 재건했다. 국보 224호다. 경회(慶會)란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 만나는 것을 뜻한다. <慶會樓> 글씨는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이 썼다. 경회루는 어린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옥새와 왕권을 넘겨준 비극의 장소였다. 연산군 때는 전국에서 뽑혀온 기생인 흥청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하다 쫓겨나 흥청망청(興淸亡淸)’이란 말이 생기게 된 곳이기도 하다.

 




신무문에서 본 청와대

<신무문에서 본 청와대>




경회루에서 북쪽으로 나아가면 향원지(香遠池)라는 연못이 있다. 향원지 왼쪽 편으로 직진하다 왼쪽으로 나 있는 문으로 나가면 오른쪽에 신무문(神武門)이 나온다. 경복궁의 북문으로, 이곳에서 청와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과거에는 신무문이 폐쇄돼 있었으나, 민주화된 이후에는 문 밖으로 나갈 수도 있다.

 




건청궁(乾淸宮)

<건청궁(乾淸宮)>





신무문으로 다시 들어와 직진하면 왼쪽에 건청궁(乾淸宮)이 나온다. 고종이 1873, 흥선대원군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하면서 새로 지은 경복궁 내 궁궐이다. 고종은 아관망명을 하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건청궁은 1887, 조선에서 가장 먼저 전기가 가설됐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 궁정보다 2년이나 앞선 것이다. 1895108, 일제가 군인과 깡패들을 동원해 불법적으로 침입해 명성왕후를 시해한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헐렸다가 2007년에 복원되었다.

 




종묘

<종묘>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으로 창덕궁과 창경궁 앞에 있다. 13959월에 완성돼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광해군 때 중건했다.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은 왕이 정사를 행하는 궁궐 왼쪽에 종묘를 만들고 오른쪽에 토지신과 곡물신에게 제사지내는 사직단을 만들었다.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는 중국과 일본 및 동아시아에도 남아있지 않아, 유네스코는 1995년에 종묘를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다.

  




정전

<정전>





조선 왕 19명의 신위를 모신 곳이 정전이다. 종묘를 처음 건축했을 때는 7칸에 불과했지만 점차 늘렸다. 현재 정전은 가로 109m, 세로 69m로 위풍당당함을 자랑한다. 정전을 마주하고 가장 왼쪽 제1실에 태조 신위가, 가장 오른쪽인 제19실에 순종 신위가 있다. 종묘 정전에서는 매년 봄 여름 가을 겨울 섣달(12), 다섯 차례 정기적으로 제사를 올렸다. 그 외에도 나라에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일어나면 임시 제사를 올렸다. 요즘도 매년 오월 첫째 주 일요일에 제사를 지낸다. 제사지낼 때는 월대(月臺)에서 종묘제례약을 연주한다. 월대는 정전 앞에 돌로 된 넓은 마당으로 가로가 101m나 된다. 종묘제례약 역시 2001년에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영유산 걸작으로 등록됐다.

 




영녕전 신위

<영녕전 신위>





영녕전은 정전이 좁아 모실 수 없는 왕과 추존된 왕 등의 신위를 모시는 곳이다. 조선시대 왕 가운데, 정종 단종 예종 인종 명종 경종 등 재위기간이 짧았거나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 왕의 신위가 이곳에 있다. 또 태조의 위 4대조와 덕종 목조 익조 도조 환조 원종 장조 등 왕으로 추존된 분들의 신위도 있다. 마지막 16실에는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 신위가 있다. 단종은 후에 복권이 돼 정전에 모셔졌지만,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정전은 물론 영녕전에도 없다.

 




공민왕신당

<공민왕신당>





종묘에는 의외로 고려 31대 왕이었던 공민왕 신당도 있다. 이곳에는 공민왕과 그의 왕비였던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이 있다. 공민왕은 고려인의 생활 속에 뿌리내린 몽골 족의 머리형태와 복장을 폐지하고 고려의 전통을 회복하고, 정치를 개혁해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이성계를 발탁해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훗날 이성계는 종묘에 공민왕 신당을 만들어 그를 중용한 것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직단 

<사직단>





사직단은 광화문 서쪽 사직터널 앞에 있다. 이곳은 나라의 발전과 백성들의 편안한 삶 및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땅의 신인 사()와 곡식의 신인 직()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극심한 가뭄이나 홍수가 났을 때도 제사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잿더미가 됐다가 1720년에 중건됐다. 현재는 입구에 세워진 문과 제단만 남아 있다.

 




곤녕합(坤寧閤); 건청궁 내전

<곤녕합(坤寧閤); 건청궁 내전>





을미왜변 명성왕후 시해/ 如心 홍찬선

 

보슬비 내린다 건청궁 곤녕합에

을미년 실 되어 나풀나풀 거린다

꾸미의 넋 눈물 되어 뿌리는가

백악산 봉우리에 문득 흰 구름 걸렸다

백이십오 년 흘렀어도 눈감지 못하는 혼 왔을까

 

1895년 을미년 108일 새벽

일제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 저질렀다

미야모토 소위 군도(軍刀)로 명성왕후 절명시키고

깡패들 시신 난도질해 연못에 던졌다가

불에 태워 묻었다 증거 없애기 위해

 

그날 새벽 어린 왕자 공포에 떨었고

고종 총칼 앞에 무너졌고 별 빛 잃었다

하늘 맑은 건청궁 땅 편안한 침실에서

조선 후기 유일한 남자 명성왕후

죽음의 존엄성마저 짓밟혔다

 

뜻 있는 사람은 일을 이루게 마련

몸 보이지 않아도 얼과 넋 그대로 살아

이천만 백성 국모 복수 의병의 불길로

목숨 건 아관망명으로 대한제국으로 부활했다

죽음으로 약해진 배달정신 되살렸다

 

군인이 비무장 민간인을 공격하는 건 전쟁범죄고

국가원수와 그 가족에 대한 범죄는 소멸시효가 없다

시간 아무리 흘러도 형사 처벌할 수 있는 세상,

보슬비 내리는 건청궁에서 일제의 을미왜변 책임

잊지 않고 굳세게 묻는다 일본에 역사에








 

 

: 종묘와 사직단은 경복궁과 함께 둘러보는 것이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의미를 깊게 이해할 수 있다. 동쪽에 있는 종묘에서 경복궁을 거쳐 사직단을 보는 게 동선이 좋다. 종묘는 시간대별로 입장권을 사서 안내원과 함께 돌아야 한다. 반면 사직단은 터만 남아 있어 늦더라도 볼 수 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에 서촌에 있는 이상이 살던 집과 윤동주 하숙집 등을 둘러본 뒤 통인시장이나 서촌먹거리골목에서 막걸리 한 잔 하면서 종묘와 경복궁 및 사직단의 의미를 되새김하는 것도 좋은 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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