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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도깨비 문화유산여행] 알쓸신잡 따라잡기 - 경주 (1) 스크랩

도깨비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알.쓸.신.잡 시즌1!

이번 여행에서는 500년 뒤에도 가장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곳, 경주로 떠납니다~





문화유산으로 가득한 경주이기에 이번 문화유산 키워드는 평소보다 많은 5개!
#천마총 #신라금관 #처용 #성덕대왕신종 #첨성대


그러면 이제 문화유산 이야기로 떠나볼까요~?






잠깐, 먼저 영상으로 경주를 한 바퀴 돌면서 같이 여행해볼까요?
KBS 6시 내고향 임혁필 개그맨과 함께 경주를 여행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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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동영상 소스코드 정보
대본보기 # <내고향 문화재> 타이틀
# 내려다 본 대릉원/천마총 12" 신라의 유일한 수도였던,
천년고도 경주.
왕과 왕족들이 잠들어 있는
커다란 무덤들 가운데
천마총이 있습니다.
# 대릉원 터 모습 발굴 당시 ~ 10" 1973년,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천마총의 등장!
하지만 놀라운 발견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 유리잔 묻혀 있는 ~ 10" 천마총 안에 숨겨져 있던,
그리고 오랜 세월을 지나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신라의 비밀!
# 로만글라스와 유리잔 10" 이 푸른 유리잔 안에는
대체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요?
그 미스터리를 파헤쳐 봅니다!
- 서브타이틀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 – 유리잔의 비밀>
# 경주역~ 5" 오늘의 여정은 경주의 중심,
경주역에서 시작합니다.
- 경주역 앞에 리포터
리/ 경주입니다. 제가 경주는 어렸을 때 수학여행으로도 와보고
가족들하고도 한두 번 와 보고 꽤 왔죠.
경주. 제가 다른 건 다 몰라도 문화재가 많다는 건 잘~ 압니다
그래서 문제에요!
- 경주역 관광안내소로 걷고 5"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땐
관광안내소가 최고죠!
리/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경주에는 문화재가 정말 많이 있잖아요.
어디서 어떻게 봐야 할지~
박/ 여기 경주는 시티투어 버스가 있고요.
아니면 자전거를 렌트해서 다니는 방법과 스쿠터도 있고요.
월성 지구를 이동하는 비단벌레차도 있습니다.
- 관광안내지도 보이고 7" 맞춤형 코스로
추천까지 해주시더라고요.
김재원) 아휴, 들어가길 잘 했네요~
# 자전거 타는 리포터 5" 날도 좋겠다, 자전거를 타고
달려보기로 했습니다.
# 교촌한옥마을 전경 9" 먼저 최씨 고택, 경주향교 등이
자리 잡고 있는
교촌한옥마을로 향했는데요.
참 아름답죠?
- 자전거 타는 모습 F.S 9" 자전거를 타고 여유롭게 돌아보기에
안성맞춤이었어요.
담장 너머로 멋진 한옥들을
실컷 구경한 다음엔,
# 도로 달리는 자전거 5" 어디로 향했을까~요?
김솔희) 경주역사유적지구네요.
# 첨성대~ 13" 그렇습니다. 이곳엔 경주를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재,
첨성대가 있거든요!
어렸을 땐 무척 커보였는데,
지금 보니 생각보다 아담하더라고요~
# 해설사 등장
해/ 혁필 씨~ 경주는 웬일이세요.
리/ 제가 시청자분들에게 좋은 정보를 알려드려야 하는데
사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경주에는 수학여행으로 자주 와 봐요~
그래도 두 가지 정도 여기는 꼭 가봐야 된다 하는 곳을 알려주세요.
해/ 예~ 참 잘 오셨습니다. 지금 월성에 올라가면요.
# 월성 전경
해/ 1,500년 만에 왕궁터를 발굴하고 있거든요.
- 월성 보는 두 사람
해/ 신라 궁궐의 실체의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뭐냐면은~
# 월정교 S.K
해/ 왕이 월성을 나와서 문화재의 보고인 경주 남산에 올라갈 때 사용했던
월정교라는 다리가 99% 복원돼 있으니까 그 모습도 하나의 장관이 될 거예요.
# 월정교 안내도 앞
리/ 월정교까지 다 봤으니까 고등학교 때부터
경주에 있는 문화재를 싹~ 다 본 거 아니겠습니까?
해/ 155개 고분 중에서 가장 원형대로 남아있는 고분을 아세요?
리/ 네? 다 똑같이 생겼던데요.
해/ 아니죠. 155개 고분 중에서 가장 원형대로 남아있는 고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원성왕릉. 또는 괘릉이라고도 합니다.
과연 신라인들의 1,300년 전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보시면 아주 놀라실 거예요
# 원성왕릉 F.S 16" 그래서 바로 찾아왔습니다.
신라의 38대 왕, 원성왕이
잠들어있다고 추정되는 원성왕릉!
중심지에서 좀 떨어져 있어,
한적하니 좋긴 했는데~
어디 특별한 점이 있어야 말이죠.
- 리포터 이동하며
-
리/ 이제까지 봐 온 왕릉하고 똑같네~ 뭐가 미스터리하다는 거죠?
음? 잠깐만. 어??
- 석상으로 P.L 10" 제 날카로운 눈에 포착된 이것!
원성왕릉을 지키고 있는
석상들인데요, 자세히 보세요.
좀 이상하게 생겼어요!
- 이어 말하는 리포터
-
리/ 이야~ 완전 외국인이네.
# 김호상 연구원장 등장
리/ 엇. 누구세요.
해/ 낯설지요? 설명해드리려고 왔습니다.
리/ 아, 그러시군요~
# 무인석 발에서 T.U
리/ 신라인들은 원래 저렇게 부리부리하게 생겼나 봐요
해/ 아닙니다. 신라는 다문화시대가 아니라서 지금 보게 되면
머리 위에 터번은 중앙아시아식이고
눈매, 콧대, 턱수염들은 저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은 서역인입니다.
신라시대 당시에 교류해서 (서역인들이) 경주에 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경주 대릉원~ 천마총~ 11" 김재원) 서양인들이 직접 신라 경주에 왔다고요?
못 믿으시겠죠?
하지만 뒷받침할 증거가
바로 여기, 천마총에도 있습니다.
# 천마총 전시실 내부
리/ 이야~ 무슨 하나의 돔 형식의 경기장 같기도 하고요.
안에는 이렇게 어마어마하군요. 아~
# 천마총 무덤 모형 10" 천마총에선 무려
1600여 점의 유물들이 발굴됐는데요.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건,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 금관이었죠.
# 천마총 금관 T.U 17" 금을 이용해 왕의 절대적인 권력을
표현했던 신라는,
그야말로 ‘황금의 나라’였는데요.
오죽하면 전 세계에서 출토된
10개의 금관 중 무려 6개가
신라의 것일 정돕니다. 그런데 말이죠~
# 설명하는 연구원장
해/ 금 제품도 많이 나왔지만 발굴 조사할 때 학자들이 깜짝 놀란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요. 푸르스름한 유리잔이 나왔습니다. 유리잔.
푸르스름한 유리잔은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 계통에서 만들었던 유리 제품을 수입해서
실크로드를 따라서 신라까지 도착했다는 그 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리/ 로마요? 그 그리스로마신화의 그 로마요?
여기서 되게 먼 그 로마?
# 발굴 당시 화면
NA/ 73년 8월 30일. 천마도 발굴에 이어 금동그릇 등이 드러났는데
그 가운데서 발견된 유리컵은 발굴 조사단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 유리잔, 컬러로 바뀌며 5" 원형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던
이 문제적 유리잔은,
# 경주 국립박물관 전경 4"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요.
- 박물관 내부의 두 사람
리/ 이겁니까?
해/ 예~
# 유리잔 13" 김솔희) 색이 정말 아름답네요~
그렇죠? 실제로 보니,
지금도 유럽 어딘가에서
이 유리잔을 쓰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지 뭡니까~
# 남분 유리병 10" 뿐만 아니라,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유리병 역시
천마총 유리잔처럼
이국적인 느낌을 풍기는데요.
- 로만글라스와 비교 7" 당시 지중해 연안에서 만들던
유리 제품들, 일명 ‘로만글라스’와
똑같습니다.
# 유리잔 앞에 서서
해/ 로만글라스를 제외하고도 서역과의 교류를 증명할 수 있는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리/ 또 있어요?
해/ 네. 이쪽으로 가보실까요?
- 왼쪽으로 이동
리/ 오~ 이야~
# 계림로 보검 15" 김재원) 이게 검이에요?
네. 미추왕릉 지구에서 발견된 건데요,
흔히 보던 검과는 많이 다르죠?
이 검에 들어있는 붉은 빛의 보석과
소용돌이무늬는
동유럽에서 사용되던 것이고요,
- 서역 보검과 비교 5" 전체적인 모양은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유행하던 형태였다고 합니다.
# 걸어 나오는
리/ 신라가 유리잔 같은 것을 받았다면
과연 신라는 외국에 어떤 물건들을 수출했을까요?
해/ 아마 신라는 인삼, 비단, 약재, 이런 걸 수출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동궁과 월지 S.K 14" 원성왕릉의 서양인 석상과
천마총의 유리잔,
그리고 황금 보검까지…
경주에는, 외국과의 교류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신라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었는데요.

# 그림 그리는 리포터 15" 잠시 자리에 앉아
당시의 모습을 상상해봤습니다.
아마도 이런 풍경이었겠죠?
뭔가 어색하면서도 재미있는 모습에
그리는 저도 웃음이 나더라고요~
# 해설사 설명
해/ 신라가 반도의 동남쪽에 조그마한 나라로 위치하고 있지만
1,000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실크로드를 따라서
세계 각국의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이 있기 때문에
안압지 같은 독창적인 정원들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게 아마 신라인들의 가장 큰 진취적인 힘, 포용력이
신라인들의 모티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지도 ~ 10" 활발한 교류 속에서
살아 숨 쉬던 도시, 경주.
그 속에 담긴
신라의 강한 힘을,
확실히 느껴본 시간이었습니다!



다 보셨나요?
정말 흥미진진한 비밀로 가득한 경주였습니다.

특히, 경주의 고분 천마총이 인상 깊었는데요.
이곳에서 지중해 연안에서 만들던 유리 제품인 일명 ‘로만글라스’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저도 처음 알게 되었어요.
푸르스름한 유리잔의 모습이 지금 유럽에서 쓰는 유리잔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유리잔 외에도 천마총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있을까요?





#천마총

1973년 4월 16일, 천마총 발굴이 시작되었습니다.
그후로부터 6개월간 진행된 천마총 발굴 과정에서 총 1만 5천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하는데요. 그야말로 세기의 발견입니다.

이 무수히 많은 유물 중에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금관”과 “천마도장니”입니다. 먼저, 금관을 살펴볼까요?
금관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시대 금관 가운데 금판이 가장 두껍고 금의 성분도 우수하다고 합니다. 신라시대 장인의 뛰어난 미적 감각이 녹아있는 신라 금관은 전 세계 고대 금관 13점 중 6점이나 된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하죠?

다음으로, 천마도장니를 알아볼까요? '천마도장니' 했을 때 이게 뭐겠다 감이 딱 오시나요?

천마도장니는 “천마도”가 그려진 “장니”입니다. 이게 바로 천마도인데요,
워낙 유명하다보니 익숙한 그림이죠?

그럼 장니는 뭘까요?





장니란, 말 양쪽 배에 가리는 가리개로, 흙이나 먼지를 막는 외에 장식물로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지금까지 회화 자료가 발견되지 않았던 고신라의 유일한 미술품이라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이 고분의 이름이 “천마총”이 된 것도 바로 이 천마도장니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천마총의 발굴과정부터 금관과 천마도장니까지 영상으로 생생하게 감상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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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국립경주박물관.
고고관에 들어서자마자천마총 발굴 유물과 마주한다.
천년고도 신라의 흔적들이고스란히 전시돼 있는 공간.
화려한 신라 문화의 극치를 보여주는금관도 볼 수 있고, 희대의 발굴이라 할 만한 천마도장니는신라 최고의 회화 작품으로 손꼽힌다.
실크로드를 따라 신라 땅에 도착한 유리잔은영롱한 푸른빛이 아직도 살아있다.
5~6세기 신라 왕실의 삶을 엿볼 수 있는천마총.과연 그 비밀의 열쇠는 무엇일까.
천마총의 발굴은 6개월 동안 진행됐다.
장신구류 8,766점.무기류 1,234점, 마구류 504점.그릇류 226점 등모두 1만 1,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된천마총.그야말로 세기의 발굴이었다.
화수분처럼 쏟아지는 유물들 중눈길을 끈 것은단연 금빛 찬란한 장신구였다.1,500년 전 사용했던 모습 그대로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나비모양의 관장식은 물론, 무덤의 부장품으로 엄청난 양의황금 제품을 사용했던 신라.
과연 그 숨은 이유는 무엇일까.
대릉원에 위치한 천마총.1973년 발굴 조사 이후무덤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돔 형태의 무덤을 빙 둘러당시 발굴된 유물 중 일부를전시하고 있는 천마총.
그중 금관이 있다.
신라 장인의 뛰어난 미적 감각이녹아있는 신라 금관.전 세계 고대 금관 중절반 이상이 신라의 것이고,우리나라에서도 오직신라 땅에서만 출토됐다.
특히 천마총 금관은신라 금관 중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이는 당시 신라의 국력과 왕의 절대 권력을상징한다.
이외에도 천마총에서는새 날개 모양과 나비 모양의금관 장식품을 비롯해 모자, 귀걸이, 팔찌 등수많은 황금 장신구들이 발굴됐다.
이러한 황금 제품들은발굴된 신라 무덤마다적지 않은 수량이 출토됐다.
죽은 자의 무덤 위에서새롭게 이어가는 산 자의 권력을 나타내는국가의 상징물, 왕릉.(pause)이러한 권력의 상징은또 다른 유물에서도 엿볼 수 있다.
어떤 물건들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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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타이틀 2 : 실크로드 종착지는 신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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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 발굴 6개월째.지금까지 신라에서 발견되지 않았던유리잔이 출토됐다.
(현장음 살리고)
높이 7.4cm의 작은 유리잔.
실크로드를 거쳐 신라로 들어온아름다운 유리 제품.1500년 전 신라가국제사회와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증거다.
5~6세기 신라의 다른 무덤에서도국제교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색적인 문양이 장식된 보검은페르시아와의 교류를 짐작케 한다.
이런 서역의 물건들은왕족 및 귀족에게귀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먼 곳에서 온 희귀한 물건인 만큼위세품으로서의 가치가 상당했다.이는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반도 끝에 위치한 작은 나라, 신라.하지만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데주저하지 않았던 열린 국가였다.



천마총과 신라의 이야기도 좋지만, 저는 천마총이 발굴되는 과정이 흥미로웠습니다.
천마총 발굴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영상 제목이 발굴단과 기자들의 싸움인데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지금 바로 영상으로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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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신라의 고도 경주에 있는 대릉원은 신라의 왕과 왕비들이 잠들어 있는 거대한 무덤군이다. 그 무덤들 중의 하나인 천마총,
155호분으로 불리던 이 무덤이 천마총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1973년의 발굴 덕분이었다.
발굴단과 기자들과의 숨바꼭질속에서 신라 보물들의 쏟아져 나왔던 발굴
# 당시 기자 int
우병익>> 그 당시에는 토기 하나만 나와도 신문에 대서특필이 되었으니까..
# 당시 발굴단 int
윤근일>> 같이 막 (사진) 찍고 그러다가.. 우연히 사고라도 나면 이건 안 되잖아요. 아무튼 전쟁이었어요. 전쟁.
전쟁이라 불리웠던 1973년 천마총 발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신라 천년왕조의 비밀이 담겨 있는 거대한 무덤군 대릉원,1970년대, 신라 왕릉의 발굴사업은 국가정책 목표 중 하나였다.
박정희대통령이 경제개발과 함께 문화유산의 계승을 당면과제로 정하면서 가장 규모가 큰 황남대총이 첫 번째 발굴지로 선정된다.
그러나 발굴은 시작부터 문제가 있었다. 무덤의 규모가 너무 컸던 것이다.
# 발굴단 INT
윤근일>> 처음에는 황남대총 98호분을 발굴조사하기로 한 것인데 워낙 규모가 크다보니까 선뜻 달려들어 하기가 어렵잖아요.
또 하나, 발굴단의 발목을 잡은 건, 2년전 무령왕릉 발굴의 뼈아픈 경험 때문이었다.
무령왕릉은 발굴 첫날, 기자들이 무덤안까지 진입하면서 하루만에 발굴이 끝나버린 대표적인 졸속 발굴이었다.
이런 실책을 다시 반복할 수는 없었다. 이때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155호분을 먼저 발굴해보자는 것,155호분은 황남대총보다 규모도 작고, 무덤 옆에 민가까지 있어서 봉토도 허물어진 상태였다.시험 삼아 발굴해 보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대통령까지 현장에 방문할 정도로관심이 뜨거운 가운데~ 일본에서 고 건축학을 전공한 김정기 단장을 필두로 각계 전문가들로 발굴단이 꾸려졌다. 몇 안 되는 고고미술사 전공자인 윤근일씨도 있었다.
# 발굴단 int
윤근일>> 그 때 사실은 가슴도 설레죠. 이론적으로만 알고, 책으로만 봤던 신라 무덤을 발굴한다는 게, 사실은 행운이죠.
저 같은 입장에서는 그러니까 가슴도 두근거리고 설레고, 또 한편으로 조심스럽게도 하고 걱정도 되고...
하지만 민심이 문제였다. 그해 경주는 심한 가뭄을 겪고 있었는데 흥분한 시민들이 몰려온 것이다.
# 발굴단 int
남시진>> 가설 사무실에 있었는데 돌을 던지는 거에요. 이만한 돌을..
그리고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너희들이 무덤을 파서 비가 안 온다‘고, 우리 정서에 무덤급.. 그 정도 되면 왕릉으로 볼 수 있는데... 그 당시엔 그런 무덤에 상당히 손댄다는 것은 상당히 금기 상황이예요.
왕릉을 파헤쳐서 비가 안 온다는 민심 속에서 조심스럽게 무덤을 열기 시작했다.
봉토를 제거하자~겹겹이 쌓여있는 돌무층이 드러났고, 이어 내부 구조가 밝혀졌다.
즉, 천마총은 큰 나무곽 안에 시신을 넣은 나무관을 넣고, 돌무더기로 한번~흙으로 또 한 번 두텁게 봉해서 만든 적석목곽분이다,
발굴단은 봉토부터 고분 내부까지, 체계적으로 조사에 임했다. 일일이 구획을 나눠 길이를 재고 이를 도면화 시켰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발굴단 남시진 INT
남시진>> 도면을 필요로 하는 것을 느낀 사람이 당시 김정기 박사님.
도면이 있어야 크기라든지, 높이 이런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런 것을 인지하고 저를 거기다 투입 시킨 거죠.
그래서 무령왕릉에서 부족했던 것을 다 채워서 차근 차근해서 계획부터 잡지 않았나..
극심한 무더위 속에서 발굴단이 지쳐 갈 무렵,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흙 속에서 순금제의 귀걸이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가슴걸이와 허리띠, 칼 등 만 1500점이나 되는 유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발굴단은 또 다른 난관을 만나게 된다. 바로 언론과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 당시 기자 int
우병익>> 취재 경쟁이 되니까 본사에서도 문화부기자, 사회부기자, 사진부 기자 다 내려왔어요. 경주는 한 때 고분 155호분 발굴 주위에는 기자들이 아침 저녁으로 굉장히 설쳤고...
발굴 속보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서 밤샘취재는 물론, 경비행기까지 동원될 정도로 보도경쟁은 치열해져갔다
# 당시 기자 int
우병익>> 원래 1월 1일자 신문은 제호 옆에 바로 대통령 신년사가 실리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문화재 기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대통령 신년사를 옆으로 미루고 제호 바로 옆에 문화재 기사가 나올 정도로 문화재 기사는 아주 중요하게 생각되었어요.
이런 가운데 도입된 것이 전체 브리핑 시간 외에는 기자들 출입을 제한 하는 것, 그러자 경쟁은 더 치열해져 갔다.
# 당시 기자 int,
우병익>> 상대 J 신문이나 D 신문에 기사가 없으면 그 위에서 야단나죠. 왜 한국일보는 났는데 너는 모르냐. 이렇게 되지..
# 발굴단 int
윤근일>> 강제로 촬영을 하려는 사람도 있었고, 어거지로..
철조망을 쳐 놓고 우리가 못 들어 하니까 어느 최 아무개 기자는 철조망에서 ‘니놈들 나오면 우리가 죽인다’ 이러기도 하고...
말 그대로 첩보전이었다. 기자들은 발굴지 근처에서 밤샘을 하고 망원경을 동원해서 발굴단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 당시 기자 int
우병익>> 기자들은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했지. 우리 회사 사진기자는 특종할 까 싶어서 밤에 천막 쳐 진 현장에 기어들어갔어요.
들어가서 보니 전부 덮어놓고, 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고..
(뭐가 뭔지) 몰라요. 욕심에서 들어가긴 했는데, 이렇게 밤에 살펴보니 뭔가 발에 까슬까슬 한 거예요. 보니 쥐가 이렇게...
# 발굴단 int
윤근일>> 그 기자분들도 자꾸 노련해 지는 거예요.
우리가 유물층에 들어가면 목재하고 그 안에 다른 이물질하고 콜타르처럼 끈적끈적한 그런 흙들이 돼요.
처음에는 우리가 모르고 운동화를 한 켤레만 가지고 들어갔다가 밥 먹으러 가면 신발에 묻어서 나오잖아요. 그러면 기자 분들 예리한 기자들은 ‘아, 지금쯤 유물층에 도달했구나‘ 하고 아는 거예요.
그래서 또 기사를 쓰고.. 그래서 우리도 머리를 쓴다고, 하나는 현장에서 신는 신발, 또 하나는 집에 갈 때 신는 신발, 한 수 더 하면 우리도 한 수 더하고 그렇게까지 조사를 한 건 없을 거예요. 그 당시에는 전쟁이야..
그런 가운데 발굴단은 충격적인 장면과 맞딱뜨리게 된다.매장부의 흙을 털어내는 순간, 눈앞에 순금제 금관이 드러난 것이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저 시험삼아 발굴한 작은 무덤에서 신라의 금관이 나오다니,
# 발굴단 int
윤근일>> 그 때는 정말 가슴이 쿵덕 쿵덕 거리고.. 흥분 되더라고요.
검은 것들이 범벅이 된 흙속에서 노란 금빛이 나올 때는 아주 휘황찬란했죠.
금관은 매장자의 얼굴부터 가슴에 걸쳐 고깔모양으로 다소곳이 덮혀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 발굴단 int
윤근일>> 그 햇빛이 나고 무덥던 그 여름에 금관을 수습할 때 갑자기 먹구름이 끼고 천둥번개가 치는 거야. 소낙비가 아니라 폭우야..
금관을 들고 나가다가 번개가 치니까 놓고 사무실로 내려가고 그랬다고요.
찬란한 문화를 자랑했던 신라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장례용품으로 금관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단서,신라가 화려한 황금의 나라였음이 이 금관발굴로 증명된 것이다. .
놀라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목곽 바깥 쪽 부장품 상자를 해체하던 중, 한 무더기로 뒤엉켜진 말 장식 마구들이 나온 것이다.
응급처치를 마치고, 마구 덩어리에서 말안장을 덮었던 흙다래를 떼어내 조심조심 흙을 털어내는 순간, 이번엔 그림이었다. 그 동안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것!
하늘을 가로지르며, 구름처럼 나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말의 그림, 천마도였다.
# 발굴단 int
윤근일>> 누구도 생각못했던 유물이에요. 사실은 그림 자체가...
신라시대의 그런 그림 자체가 있었다는 것도 아주 놀랍고 그래서 아마 단장님도 그 당시에는 약간 흥분된 어조로 조심해서 수습해야겠다고 했던 그런 기억이 나요.
세로 53cm, 가로 75cm, 약 6mm



#신라금관

천마총 키워드를 설명하면서 금관에 대한 설명을 어느 정도 했는데요,
신라금관은 세공기법과 장식, 문양 등 모든 면에서 화려하고 섬세하기 때문에 전무후무, 최대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신라금관은 꼭, 자세하게 알아봐야겠죠?
1975년, 사상 최대 규모의 무덤, 황남대총에서 두 사람, 부부가 발견됩니다. 놀라운 점은 이 부부와 함께 묻힌 보물인데요. 예상하셨다시피 바로 금관입니다. 금관, 어떻게 생겼는지 아시나요?


와, 정말 화려하네요. 금관에 달린 곡옥을 비롯한 장식은 공기의 미세한 흐름에도 흔들리면서 신비한 소리까지 낸다고 하니, 보면 볼수록 신비로운 금관입니다.

흠..그런데 장식이 많이 달려있어 무거워 보이는 이 금관을 과연 왕과 왕비가 썼을까요?

금관의 무게는 1kg이 넘는다고 하는데요. 이렇게 무거운 금관을 쓰고 다닐 수는 없었겠죠? 그럼 도대체 금관은 어디에 사용한 걸까요?

그 비밀을, 다음 영상에서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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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실로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대가 있었다!
그 화려한 역사를 증언하는 유물, 신라 금관.
그러나 발굴될 당시 금관은 우리의 상식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금관은 머리가 아닌 얼굴을 고깔모양으로 덮고 있었던 것이다.
1973년 경주시 대릉원에 있는 천마총에서 역사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1500년 동안 땅속에서 침묵하고 있던 유물들..그 속에서 신라황금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금관이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관은우리가 흔히보듯 위풍당당하게 위로 솟은 모양이 아닌 전체적으로 고깔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금관의 원래 형태가 이런 고깔모양이었던 건 아닐까!
금관의 외관이 간직하고 있는 진실은 무엇일까! 천마총 발굴 당시 금관의 위치를 다시 한번 살펴봤다.목관 안을 살펴보면 허리 쪽에서는 금제허리띠,가슴부터 어깨부근에 목걸이와 가슴걸이, 그리고 금관은 머리부분에서 고깔모양으로 발견됐다.
컴퓨터그래픽으로 실제모습을 복원해봤다.다른 유물들은 모두 제 위치에서 발견된 반면금관의 아랫부분은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다.피장자 얼굴 내지 머리전체에 금관을 덮어서 무덤 속에 넣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왕릉에서 금관이 발견된 모습 역시 동일했다.금관은 피장자의 턱밑까지 내려와 있었고,고깔모양을 하고 있었다.
1926년 발굴된 서봉총 금관도 천마총, 황남대총 금관과 똑같은 모습이었다결국 금관은 얼굴전체를 고깔모양으로 감싼 채 넣어졌던 것이다.공통적으로 보이는 금관의 출토 형태는 대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금관의 무게는 1KG이 넘는다. 모자처럼 가볍게 쓸 수 있는 무게가 아닌데, 이런 금관을 당시 신라왕들은 어떻게 썼을까? 과연 평상시에 쓰고 다녔던 것일까?
금관은 종이보다 얇은 두께로 만들어졌다. 게다가 수많은 장식의 무게와 높이 세운 세움장식의 구조 때문에 휘청거리고 불안정해 보인다.
실제로 금관을 쓰려면 세움장식을 고정시키고 안에 모자를 써야만겨우 금관을 머리에 쓸 수 있다.또한, 금관과 함께 출토된 유물들을 살펴보면 금관은 일상적으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무려 4kg에 이르는 순금 허리띠. 치렁치렁한 장식과 무게 때문에 실제로 허리에 차고 다니기엔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피장자의 발 위치에서 발견된 금동신발은 크기가 무려 342mm!
한국인 성인남자 평균 발 크기를 고려하면금동신발 역시 실제 신던 신발이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금관은 금제허리띠, 금동신발처럼 실용품이 아니었다. 무덤에 넣어주기 위해 만들어진 장송의례용이었던 것.
금관은 생전에 자신의 지위와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썼던 왕관이 아닌 죽은 후에 왕의 얼굴을 덮어주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이다.
화려하고 우아한 자태를 자랑하는 금관.신라인들이 죽은 자를 위해 귀한 금으로 금관을 만들어서 무덤 속에 넣어준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찬란한 빛이 영원히 바래지 않는 금처럼금관의 주인공이 현세에서 누렸던 지위와 권능이내세에서도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는 기원의 의미가 담겨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면, 여기서 잠깐. 이 금관의 주인공인 부부는 누구였을까요?

이 둘이 정확하게 누구인지는 미스테리로 남아있고, 단지 신라시대의 왕과 왕비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금관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추적해 나가는 영상, 확인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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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황금 문화를 꽃 피웠던 신라.그들은 찬란했던 역사를 황금 위에 새겨 놓았다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 금관은 모두 여섯 점이다. 1500년간 땅속에서 침묵하고 있던 금관!
황금왕국의 주인은 대체 누구였을까!
1500년 전 신라 왕들의 고분이 모여 있는 곳, 경주시 대릉원, 이곳에 높이 23m, 길이 120m!
사상 최대 규모의 황남대총이 있다。
황남대총은 돌과 흙을 덮어 만들어진 거대한 무덤구조를 가지고 있다. 신라에서만 발견되는 적석목곽분이라는 독특한 묘제다.
바닥에 시신을 안치한 목관을 놓고 머리쪽에 부장품을 넣어두는 상자를 놓는다
그 위에 다시 커다란 나무상자를 만들어 덮은 후에 돌을 쌓고 그 위에 다시 봉토를 쌓는다.
신라고분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황남대총은 두 개의 무덤이 이어져 있다.
남분과 북분, 무덤 두기를 이어 붙여서쌍분으로 조성한 것이다
발굴은 황남대총의 북쪽 봉우리, 북분에서부터 시작됐고, 화려하기 그지없는 금관은 이곳에서 발견됐다.
그리고 황남대총 금관은 왕이 쓰는 전유물이라는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는다.
고분은 황금의 지하 궁전이었다.무덤 안에서는 금관과 함께 화려한 황금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남분에서 출토된 금제 환두대도. 지배자의 상징인 환두대도가 출토된 것으로 봐서 남분의 주인공은 왕으로 추정된다.
고분 안에서 치아가 발견됐는데, 분석해 본 결과무덤의 주인공은 60대의 남자로 밝혀졌다.
금관이 발견된 곳은 북분이었다.신라 금관 가운데 가장 장식이 많고 화려한 금관이었다.
금관과 함께 출토된 허리띠에는 금관의 주인공을 추정할만한 단서가 있었다.
'부인대' 즉 여자가 사용하는 띠라는 뜻으로황남대총 금관의 주인공은 왕비였다.
금관이 왕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단서는 다른 고분에서도 발견 되었다.
1925년 발견된 금령총금관. 다른 금관의 지름에 비해 4cm나 작다. 한국 성인남성의 평균 머리크기에 비교하면 작은 편이다.
경주 교동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교동금관. 이 금관 역시 어린아이용으로 밝혀졌다.
금관은 왕뿐 아니라 왕과 가까운 왕족들의 전유물이었던 것이다.
추적2. 금관이 왕족들의 전유물이 된 까닭은?신라 금관은 4세기말에서 6세기 초 사이에 조성된 거대한 무덤에서만 발견된다.
금관이 출토된 무덤의 추정시기는 신라왕권이 김씨에게 있었던 시기와 일치한다.
금관이 등장하는 4세기 말은 신라의 김씨 세습왕조를 열어가던 내물왕 때였다.
김씨왕족과 금관은 어떤 상관이 있는걸까!삼국사기는 경주시 계림에서 탄생한 김알지탄생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해놓고 있다.김알지는 신라 김씨 왕족의 시조다.
나무가지에 금궤가 걸려있고 흰닭이 그 아래서 울고 있었다금궤를 열어보니 남자아이가 나왔고.금궤에서 나왔다하여 성을 김씨로 했다.
김알지탄생신화는 김씨왕족이 금을 바탕으로 한 세력이었음을 암시한다.
내물왕 이전의 신라에서는박,석,김 세 성씨에서 왕이 번갈아 나왔다. 그리고내물왕 때에 이르러서야 왕위쟁탈전 최후의 승자인김씨 왕족의 새로운 체제가 시작된다.
내물왕은 이사금 대신 마립간으로 왕의 칭호를 바꾸고자신이 첫 번째 마립간이 된다.
4세기에 신라의 강력한 지배자로 등장한 김씨왕족은 화려한 금관을 만들어 자신들의 거대한 무덤 속에 넣었다.
그렇게 자신들의 우월한 지위와 절대권력을 황금유물을 통해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금관은 4-6세기 신라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의 정치사회적인 배경을꿰뚫어 볼 수 있는 역사의 단초였던 것이다.



#태백산맥

여기서 하나 의문이 드는데요,

신라 금관은 왜 그 이후까지 이어지지 않았을까요? 금관은 어느 시점에 출연했다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왜 갑자기 금관이 사라진 걸까요? 이 답은 정치와 관련이 있습니다.

답이 궁금하시다면, 영상으로 확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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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옛 신라의 땅.. 대릉원에서만 발견된 금관!
그런데 금관은 역사적으로어느 시점에 출연했다가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금관사라지면 1500년의 시간을 넘어 신라금관이 간직해온 비밀은 무엇일까?왜 역사의 무대에서 갑자기 사라진 걸까?
경상북도 경산시 임당동. 나즈막한 구릉 위에 수십기의 무덤이 모여있다. 이 무덤들 속에서 금동관 하나가 출토된다.
신라금관과 비슷한 형태다.금동관은 구리에 금도금을 한 것으로 금관보다는 한 단계 아래지만 금관처럼 지위와 권능의 상징이었다.
금동관이 출토된 무덤에서는 순장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는금동관 주인공이 이 지역 최고의 통치자임을 말해준다.
금동관과 함께 출토된 유물을 살펴보면 허리띠, 금동신발, 그리고 지배자의 상징인 환두대도 등 경주의 무덤에서 발견된 것과 비슷한 형태다.
비록 재질이 다르지만똑같은 모양의 유물이 다른 지방에서 나온다는 것, 그것은 경주에서 똑같은 모양의 금동관이나신발을 만들어서 나눠줬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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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1. 왜 지방에 금동관을 나눠준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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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는 왜 지방에 금동관을 나눠준 것일까?금동관이 발견된 이곳 임당은 당시 경주와는 어떤 관계였을까?
압독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를 일으켜 평정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임당에 있던 독립국, 압독국을 평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동관은 경산 외에도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다.그런데 이들 지역은 신라가 4세기경부터 영토를 확장하면서 새로이 편입한 곳이다.
금동관은 신라가 지방의 독립세력들을 자국영토로 편입시키면서 그 지역의 지배자들에게 종속관계를 다짐하기 위해 하사한 것이었다.
금동관을 영토 확장에 효율적으로 활용했던 것이다.금동관은 신라가고대국가로서 기틀을 확립하던 시기의 정치적인 상징물이었다. 그런데!!!! 6세기 중엽 금관과 금동관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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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2. 금관은 왜 사라진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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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과 금동관이 사라진 흔적을 확인 할 수 있는 또 다른 곳, 법흥왕릉이다.
왕릉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작은 규모!더군다나 화려한 황금유물과 금관을 찾아볼 수 없다.
신라왕의 무덤에서 황금이 사라진 것이다.
당시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6세기 중엽 신라는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는 한강유역을 점령하고동해안으로는 함흥까지 영토를 확장한다.
이렇게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면서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져가던 시기에금관과 금동관은 사라진 것이다.
이 시기,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뜻으로 신라의 통치자는 마랍간에서 왕으로 칭호가 바뀐다.신라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렸다. 이는 보다 강력해진 왕권의 등장을 의미한다.
왕이 몸소 나라안의 주군현을 설치하고... -지증왕 6년 왕은 또 전 지역에 주군현을 설치했다.이는 곧 신라 전 지역을 왕의 통치권 아래 두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춘 신라로서는 더 이상 금관이나 금동관 같은 위세품, 즉 정치적인 상징물은 필요 없게 된 것이다.고대국가체계를 굳건히 한 6세기 중반신라의 김씨 왕족들은 금관을 내려놓았고그들의 과거도 금관과 함께 묻혔다.
신라왕관은 초원의 기억을 간직하던 마립간 시대에만 존재하던 유산이 된 것이다.
신라금관은 이처럼 잊혀진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주는역사의 블랙박스였던 것이다.



오늘의 경주 문화유산 키워드는 여기까지입니다~!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들로 가득했죠?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닙니다~

경주 문화유산 키워드는 다음 편에서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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