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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도깨비 문화유산여행] 알쓸신잡 따라잡기 - 공주, 부여, 세종 스크랩

도깨비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알.쓸.신.잡!

공주•세종•부여로 떠난 네 명의 박사님들. 백제의 땅에서 박사님들은 오늘도 우리에게 지식을 전수해주시는데요,


그중에서도 문화유산채널에서 선정한 문화유산키워드는 세 가지!






백제의 땅 공주•세종•부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도깨비와 함께 자세히 알아볼까요!





#동학농민운동

기나긴 밤이었거든 압제의 밤이었거든
우금치 마루에 흐르던 소리 없는 통곡이어든


충청도로 향하는 차 안에서 유시민 박사님과 김영하 박사님은 노래를 한 곡 부르는데요.
이 노래에는 ‘우금치 전투’가 등장합니다. 우금치 전투는 농민군과 조선•일본 연합군이공주 우금치에서 벌인 전투로, 동학농민운동의 가장 큰 전투이자 격전이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이란 부패한 정부를 개혁하고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 동학을 믿는 사람들과 농민들이 일으킨 무장 운동입니다.
신분과 계급을 넘어 평등한 사회로 가고자 하던 농민들의 꿈은, 이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조선군의 총 앞에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맙니다. 우리나라의 근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동학농민운동.
그 시절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던 사람들이 남긴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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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 프롤로그 # 풍전등화 NA 그 때, 나라의 운명은 바람앞의 등불, 풍전등화와 같았다. # 일본군 이미지 NA 밖으로는 청나라와 일본, 열강의 침략을 눈 앞에 두고 안으로는 시대변화에 대한 갈망이 들끓고 있었다. # 사발통문 NA 이제 우리의 새 세상을 만들자. 전북 고부지방에서 시작돼 순식간에 번져갔던 농민들의 혁명, 동학. # 쓰는 이미지 NA 뜨거웠던 혁명의 맹세가 담긴 동학기록물. 그것은 새 세상을 향한 꿈이기도 했다. ---------------------------------------------------------- 타이틀 사람이 하늘이 되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잠정목록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 # 동학자료 NA 동학혁명의 시작은 전북 고부지역에서부터였다. 탐관오리의 축출을 넘어 봉건주의를 타파하고 국권을 수호하자는 것으로까지 이어진 농민혁명. 이것은 반봉건, 반외세를 표방은 최초의 민족운동이었다. 인터뷰 홍성덕 /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동학농민혁명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는 기본적으로는 한국 사회에서 근대의 출발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근대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 가문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개인의 능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사회를 말합니다. 즉 사람이 곧 하늘이다 라고 하는 동학농민혁명 사상이 보급되면서 휴머니티가 재발견되고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근대사회를 열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혁명기념관 외경 NA 현재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물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은 기념관. #내부 PAN 나무 NA 기념관 초입에는 오래된 고목한그루가 전시되어 있다. # 나무 TD /SK NA 당시 농민들의 첫 봉기가 일어났던 곳은 고부의 말목장터, 그 장터를 지키고 있던 나무다. # 기록물 SK NA 동학농민혁명의 기록물은 다양하다. # 기록물 SK NA 1894년에서 95년 사이 동학농민혁명에 관해 기록된 것들을 통칭해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라 부른다. 동학군과 정부뿐 아니라 관료와 민간지식인,일본공사관등 다양한 주체가 각각의 관점에서 기록한 내용이기 때문에 한 사건을 기록하는 기록물로서 완전성과 희귀성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인터뷰 이병규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1894년 단 1년 동안의 사건이지만 이 동학농민혁명을 여러 주체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기록해놓았다 그런 의미가 있고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것이 지금까지 123년이 되었는데 그 123년 동안 계속 그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 기록하고 그 기록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이러한 기록의 축적 과정이다. 그런 측면에서도 상당히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 PAN NA 동학의 전적지 유적 중 황토현전적지는 그중에서도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다. # 구경하는 사람들 NA 유적지 기념관에는 해마다 찾는 사람이 끊이질 않는데 최근 몇 해 관람객 수는 더 늘어났다. # 유물들 NA 오래전 전투의 흔적이 남아있는 기념관.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사람처럼 살아보겠다 일어선 농민들, 동학군이 치렀던 전투다. # 보는 사람 NA 그 동학혁명에 대해 다시 사람들의 관심이 몰리고 있다. 인터뷰 이선화 / 광주광역시 동구 사실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왜곡되었던 것들이 다시금 제대로 잡혀서 성인들뿐만 아니라 배우는 학생들한테도 그렇게 전달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명진 / 광주광역시 동구 동학의 사상이 모든 인간은 다 평등하고 모든 인간의 존엄함을 나타내는 사상이기 때문에 한번 와서 경험해보고자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 그림 NA 그렇다면 오늘날 남아있는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기록물은 어떤 것이 있을까? # 사발통문 NA 사발통문에는 주도자들의 이름은 물론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던 당시의 분위기, 탐관오리의 처벌에 관한 지령,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까지도 나타나 있다. # 전봉준 사진과 이름 NA 둥글게 쓰여진 이름 한켠에는 녹두장군이라 불렸던 대장 전봉준의 이름은 물론, # 최경선 NA 전봉준과 함께 고부민란을 이끌었던 영솔장 최경선의 이름도 보인다. #사발통문 발췌 NA 났네 났네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되었지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것 전주영을 함락하고 곧바로 서울로 향할 것 인터뷰 이병규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단순히 고부 또는 전라도에 국한하지 않고 서울까지 진격하겠다는 분명한 목표의식이 있었고 대규모 민중 농민봉기를 기획하고 있었습니다 #전주부 지도 NA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당시 전주부, 지금의 전북지역으로 점차 퍼져갔다. 조직이 만들어지고 점차 군대의 모습도 갖춰갔다. # 임명장들 NA 각 지역마다 책임자를 두었고 조직의 체계를 만들어갔다. 이 때 만들어진 임명장 역시 중요한 기록물이다. # 흥선대원군 효유문 NA 당시 실세였던 흥선대원군은 밀지를 내려 동학군을 지원했지만 겉으로는 효유문을 내려 해산을 종용하기도 했다 # 효유글자 NA 효유란 알아듣도록 타이른다는 뜻이다 # 효유문 발췌 NA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세도가 흥선대원군의 관심과 회유는 이후 동학농민군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반란세력이었지만 다독여 회유할만큼 반란세력이었지만 다독여 회유할만큼 당시 동학군의 세력은 위협적이었다. # 홍계훈 유서 NA 정부측 기록물로는 홍계훈 유서가 있다. 고종이 군권책임자인 홍계훈에게 내린 동학군 관련 명령서로 당시 관련 책임자가 홍계훈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양호전기 NA 이에 홍계훈은 동학군 진압과 관련해 각 기관과 전보를 주고 받았는데 이를 날짜별로 정리해놓은 것이 양호전기다. # 그림 NA 동학군과 정부측 기록물만 전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 유회성책 NA 전해지는 기록물중에는 갑오년 당시 동학혁명에 참여했던 이와 참여하지 않은 이를 구분해 작성한 마을 성분조사서, 유회성책은 물론 # 겸산유고 NA 동학혁명을 겪었던 개인이 남긴 기록물 역시 남아있다. 겸산유고는 겸산 이병수가 편찬한 것으로 동학군의 활약에 대한 내용이 남아있다. # 사진 당시 일본공사관 역시 동학혁명을 주시하고 있었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 NA 일본측 기록물로는 1894년부터 1910년까지 일본의 각 기관과 주고받은 공문, 또 선각급기관에 발송한 통유문이 남아있다. 동학혁명군은 일본을 외세침략세력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동학군의 움직임은 일본에게도 중요한 정보였다. 인터뷰 홍성덕 /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기본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이 남겼다고 하는 원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원본성은 그 안에 담긴 내용과 역사적인 사실들이 위조 또는 변조되지 않은 구체적인 증거자료로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록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우리는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하는 역사적 사건을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우금치 전적비 NA 동학군의 마지막 전투는 우금치에서였다. # 사람 걸어가는 NA 우금치는 지금의 공주지역이다. # 전적지 NA 1894년 가을, 관군 및 일본군과 치렀던 이 전투에서 동학군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고 그 최후를 맞았다. 이 전투에서 이겼다면 공주를 넘어 서울로 북상, 혁명의 양상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우금치는 동학군이 끝내 넘지 못했던 혁명의 고빗길. 그렇게 그들의 혁명은 미완으로 끝이 났다. 인터뷰 홍성덕 /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참다운 인간상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것 인간이 자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라는 건 어떤 것인가 이러한 기록물을 통해서 우리는 동학농민혁명이 세계사적으로 그리고 국내적으로 역사적으로 우리의 미래를 설명해줄 수 있는 현재의 가장 중요한 기록의 자산이라고 하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에필로그 NA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했던 이름없는 이들의 혁명. NA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NA 평등한 새세상을 꿈꾸었던 그들의 혁명. 당시 조선에서는 반란군의 역사였던 그날의 기록이 이제 민중혁명의 역사로 다시 거듭나고 있다.

#무령왕릉



김영하, 유희열, 황교익 박사님은 공주 시내 중심에 위치한 송산리 고분군을 찾았습니다.
삼국시대 백제는 수도를 두 번 옮기는데, 두 번째 수도인 웅진이 바로 지금의 공주시입니다.

약 80년 간 백제의 수도 역할을 했던 공주에 백제왕실의 무덤이 만들어졌고, 일곱 개의 무덤이 송산리 고분군을 구성합니다. 이 무덤들 중 유일하게 주인이 밝혀진 것이 바로 무령왕릉인데요,
그럼 잠시 무령왕릉으로 떠나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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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주인을 알 수 없는 7개 무덤의 발굴 과연,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백제의 비밀’을 밝혀낸 무덤, 무령왕릉 백제의 비밀을 품은 도시, 공주(公州) 를 만나다 NA. 이번 여행길의 첫 여정은 공주 공산성입니다공산성은 문화재이자 공주사람들에게는 매우 친근한 공원입니다. 공주 공산성 (사적 제12호) 백제시대 때 성의 이름은 웅진성,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조선시대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렸다 NA. 금강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공산성은 백제 시대의 왕성입니다. NA. 백제 때는 토성과 토심석축으로 축조된 후, 여러 차례 고친 결과, 지금은 일부만 토성이고 대부분이 석성의 형태입니다 NA.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한강 유역을 뺏긴 백제는 입지적으로 방어기능을 갖춘 공주로 옮겨오면서 웅진시대를 열었는데요. NA. 부여로 천도하기 전까지 5대에 걸쳐 백제왕이 공산성 안 왕궁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왕궁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오랜 세월을 버텨온 건물지들 뿐입니다. NA. 공산성 안에는 4방에 문터가 남아있는데요. 그중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았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았던 것을 지난 1993년에 복원했습니다 공산성 진남루(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8호) 공산성 공북루(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7호) 금서루 공산성의 서문 영동루 공산성의 동문 NA. 공산성에 오르면 제일 먼저 맞이하는 건,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입니다. 깃발은 성벽의 동, 서, 남, 북에 배치돼 있는데, 공주 송산리 고분군 6호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재현해 놓은겁니다. 지금도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을 보면 그 옛날 백제인의 기상을 느껴볼 수 있습니다. NA. 쌍수정은 조선 영조 때 세워진 정자인데요. 조선영조11년(1735)에 세워진 정자 아름다운 금강이 한눈에 훤하게 내다보이는 이곳은 그 옛날 백제의 분위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장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NA. 그 옛날 백제를 기억하는 건 금강입니다. 그래서 해마다 공주에서는 금강 유등축제를 열면서 백제의 문화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NA. 공산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야트막한 언덕처럼 보이는 이것은 웅진시대의 무덤입니다 공주 송산리 고분군(사적 제13호) NA. 왕과 왕족의 무덤일거라고 추정은 했지만 주인을 알 수 없어서 번호를 매겨놓았던 곳이죠. NA. 그러다 마지막 7호 무덤의 주인이 밝혀졌는데요, 바로 그분이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입니다. NA. 그렇게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고분 중 누가 묻혔는지 확실하게 아는 첫 번째 왕릉이 되었습니다. 김종만-국립공주 박물관장 무령왕릉은 1971년도에 발굴조사가 이뤄졌는데 당시에 전세계인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유물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묘지석인데, 이 묘지석에 무덤의 주인공 무령왕의 생전이름인 사마왕과 무령왕이 돌아가신 년대가 적혀있었기 때문에 무덤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습니다 NA. 무덤양식에도 차이가 있는데요. 송산리 고분 대부분이 굴식 돌방무덤인 것과 달리 6호분과 7호분인 무령왕릉은 벽돌무덤입니다. 굴식 돌방무덤 벽돌 무덤 [송산리 6호분] [무령왕릉] NA. 무령왕릉은 연꽃무늬 벽돌로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반복해 벽을 쌓았는데요. 바로 방으로 연결되는 형태가 아니라 널방 앞에 터널형 널길이 있으며 긴 배수로까지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런 형식의 벽돌무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NA. 통로 중앙에서 밖을 향하는 곳에 놓인 것은 석수입니다 무덤을 수호하는 뜻에서 만든 석수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라, 그 의미가 매우 크죠 무령왕릉 석수(국보 제162호) NA. 아쉽게도 현재, 무령왕릉은 훼손을 막기 위해 내부 관람이 금지되어 있는데요. 그 대신 무령왕릉의 모습을 그대로 꾸며놓은 모형 전시관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당시의 생생한 느낌을 전해줍니다 NA. 고분에서 출토된 유품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은 국립공주 박물관입니다. NA. 무령왕과 왕비가 사용했던 금, 은제 장식품을 비롯해 석수, 묘지석과 중국제 도자기 등 약 4,600여 점의 유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김종만-국립공주 박물관장 웅진시기의 백제 문화는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물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실성에 바탕을 두고 유물을 우아하고 화려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백제화가 완성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NA.무령왕릉과 함께 묻힌 이야기들은 왕릉 발굴과 함께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백제의 문화를 다시 찾게 했는데요백제의 비밀을 품고 있는 공주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요?

평화의 꿈을 꾸는 사람들을 지켜준 건물, 세병관.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던 위풍당당한 건물입니다.


#의자왕

의자왕 하면 여러분은 어떤 것이 떠오르시나요?
'삼.천.궁.녀'라고 답하신 바로 당신!



의자왕이 들으면 억울할 일이라는 거, 알고 계셨나요?
유시민 박사님은 바로 이런 의자왕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낙화암을 방문했습니다.
의자왕은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 간에 우애가 깊었다고 합니다.

또, 신라의 수십 개의 성을 함락시킬 정도로 용맹하고 유능했는데,어찌된 일인지 현대에는 여색을 밝히고 방탕한 생활을 했으며 주색에 빠져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평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백제의 왕으로서 마지막 항전을 한 것이 낙화암입니다. 바로 이 낙화암에 얽힌 이야기가 삼천궁녀가 떨어져 죽었다는 것이죠.

저와 함께 진실은 무엇인지 알아보러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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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보기 백제의 최후를 지켜본 부소산성. 이곳에 작은 사당이 있다. 궁녀사. 이 사당은 백제 최후의 날, 백마강에 몸을 던진궁녀들의 한을 달래기 위한 곳.그들은 삼천궁녀라 불리며 의자왕과 함께 백제 멸망의 원인으로 알려져있다. 그런데....우리가 알고 있는 삼천궁녀와 의자왕이야기는 과연 진실된 역사의 기록일까? 백제의 최후, 그 역사의 진실은 무엇일까? 부소산 북쪽 절벽의 낙화암. 낙화암은 몸을 던지는 궁녀들이 떨어지는 꽃과 같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 낙화암 절벽 아래엔 고란사가 있다.고란사는 궁녀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고려때 지었다고 하는데...그곳에 눈길을 끄는 벽화가 한 점 있다. 낙화암에서 뛰어내리는 궁녀들을 그린 그림.그들은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부소산성으로 쫓겨갔고, 결국 낙화암으로 몰려 그곳에서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사람들은 이 때 죽은 궁녀들이 삼천명이라 하며 삼천궁녀라 불렀는데... 그런데 당시 백제는 과연 궁녀를 삼천명이나 둘 수 있었을까?당시 수도 사비의 인구는 5만여명.이중 반을 여성으로 치고그중 아이와 노인을 빼면 만 오천명정도.그렇다면 사비의 젊은 여성중 20%가 궁녀였다는 셈이다. 또 사비시대의 왕궁터를 봐도 삼천이나 되는 궁녀를 수용할 공간은 없었다. 조선시대 이익의 성호사설을 보면 영조때 궁녀의 수는 684명, 그러니 백제의 인구, 왕실의 규모 등을 생각해볼 때 삼천궁녀는 과장된 것이 분명하다. 또 삼국사기는 물론 역사책 어디에도 삼천궁녀의 기록은 없다. -----------------------------------------------------------------------------부소산성은 방어를 위한 성이기도 했지만왕궁의 후원이기도 했는데..의자왕 역시이곳을 이용했을 것이다. 의자왕의 칭호는 의롭고 자혜로운 왕이란 뜻.그런데...왕의 칭호는 왕의 사후 붙이는데,삼천궁녀와 여색을 즐긴 방탕한 왕에게 이런 칭호를 붙였을까? 삼국사기엔 의자왕이 호방하고, 결단력이 있으며, 효도가 극진했고,우애도 깊었다고 기록돼있다.그래서 해동증자라 불릴 정도였다. 금강 어귀에 있는 작은 산.왕이 머물렀다 해서 유왕산이란 이름이 붙었는데,바로 의자왕이 당나라로 끌려갈 때, 이 산에 머물렀던 것이다. 지금도 이곳에선 의자왕과 백제를 위해제사를 지내는데 그 당시 백제의 유민들은 통곡을 하며의자왕을 뒤따랐다고 한다. 그런데... 만약 의자왕이 방탕한 왕이었다면, 과연 백성들이 그의 뒤를 따르며 통곡했을까? 그렇다면 의자왕은 어떤 왕이었을까?의자왕은 642년 왕이 된 다음해, 신라의 수도 경주를 바로 코 앞에 둔대야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의자왕의 신라 공격은 계속됐다. - 삼국사기 내용+ 자막 스크롤 (34‘10“~24” 14“) - 왕은 신라를 습격하여 7개성을 빼앗았다. (의자왕 5년 645) - 의직이 신라의 10여개성을 빼앗았다. (의자왕 8년 648) - 왕이 신라의 일곱 성을 빼앗게 하였다. (의자왕 9년 649) - 왕이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의자왕 15년 655) 의자왕은 신라를 두렵게 한 용맹한 왕이었는데,그것은 의자왕이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기반으로강한 백제를 만들었기에 가능했다. 백제의 공격에 위협을 느낀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를 공격했고,결국 660년 백제는 나당연합군에 맞서 결사항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삼충사는 백제 말, 충신 세 분의 위패를 모신 사당. 삼국사기는 의자왕이 궁녀들과 향락에 빠져 술을 자주 마셨고,말리는 신하 성충을 의자왕이 옥에 가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단지 이 짧은 기록 하나만으로 의자왕은 타락해 백제를 멸망시킨 왕이 되어버렸다. 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 무왕의 화신인 용을 낚았다는 조룡대 전설처럼 백제 멸망과 관련된 전설은 과장된것이 많다. 정림사지5층석탑은 1940년대까지 평제탑,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이 세운 탑으로잘못알려져 있었다. 소정방이 탑에백제 정복 기록을 새겨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1942년 정림사라 쓰인 기와가 발견되면서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을 수 있었다. 이렇듯 백제의 역사에서 지금도 잘못전해지고 있는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 승자의 역사는 700년 역사와 찬란한 문화의백제를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로 왜곡해버렸다.실제 존재하지 않았던 삼천궁녀와방탕한 군주로 만든 의자왕...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잘못 알려진 백제의 역사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일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아니라 진실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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