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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전통의 음식이 현대인을 찾는다 스크랩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with 이철호 작가



전통의 음식이 현대인을 찾는다

 

-수운잡방과 안동 군자마을-

-음식디미방과 영양 두들마을-



언제부터인가 여행과 만남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소위 먹방의 추억이 되어버린 듯하다.

블로그와 인스타그램 등 개인의 생활을 담는 창들은 온갖 음식과 카페 등으로 경쟁을 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20151월 마이리틀텔레비전에서 요리연구가 백종원이 먹방 전성시대의 화려한 막을 올렸다고도 이야기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행은 끝나지 않고 있다. 이제 유행은 우리의 전통까지 다시 보게 하고 있다.

최근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수운잡방이 조리서로는 처음으로 보물로 지정된 것이다.

사실 어쩌면 먹는 것에서 맛과 함께 멋과 건강을 찾는 먹방의 시대는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놀라운 가짓수와 재료에 대한 풍부한 지식이 오래된 조리서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 보물과 같은 전통을 찾아 길을 떠난다.

음식이 만들어진 곳들은 어느 샌가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어 있기도 하다.

 

 

조선 전기의 요리법, 김유 <수운잡방>

 

  수운잡방 需雲雜方 Soowoonjapbang 조선중종(1540) 김유(金綏)가 쓴 요리서로 술만드는 방법, 음식 만드는 방법 등을 정리하여 기록한 책 소곡주의역사 小麴酒 歷史 History of Sogokju

<수운잡방>


옛 전통요리의 조리법을 기록한 책을 일컬어 고조리서古調理書라고 한다.

조리調理 라는 명칭에서부터 사실 요리와 음식에 대한 선조들의 애정이 듬뿍 느껴진다.

이치를 조화롭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선조들이 생각한 요리였던 것이다.

전해지는 가장 오래된 고조리서는 1400년대 중반 어의를 지낸 전순의 선생이 주로 한양 중심의 요리법이 기록한 <산가요록>이다.

그 다음으로 중종 때인 1540년경 안동의 유학자인 김유 선생이 쓴 <수운잡방>을 대표적인 고조리서로 꼽는다.

제목의 '수운(需雲)'은 주역(周易)'구름이 하늘로 오르는 것이 수(, 즉 수괘需卦)이니 군자가 이로써 마시고 먹으며

잔치를 벌여 즐긴다(雲上于天, , 君子以飮食宴樂)'에서 유래한 것으로 연회를 베풀어 즐긴다는 의미이다.

 

요리를 직접 하지 않는 남성 유학자가 요리책을 쓰다니?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기록을 중시하는 유학자의 특징이 일상을 담게 된 것이라 생각하면 절로 납득이 된다.

어쨌든 김유선생은 <수운잡방>에 조선 전기의 다채로운 요리법 87가지를 기록하였고,

손자인 김령이 35가지를 더해 총 121가지의 음식 조리법이 그 책에 남겨지게 되었다.

이 기록들은 먼저 쓰인 <산가요록>을 참고한 듯한데,

기록들을 일별하며 음식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두루 살폈고 그 색과 형태에도 심혈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이나 조선의 다른 요리서를 참조한 예도 있지만 '오천양법(烏川釀法, 안동 오천지방의 술 빚는 법)'

조선시대 안동지역 양반가에서 만든 음식법이 여럿 포함돼 있다.

조선시대 양반들이 제사를 받드는 문화인 '봉제사(奉祭祀)'와 손님을 모시는 문화인 '접빈객(接賓客)'도 잘 보여주는 자료인 것이다.

우리나라 전통 조리법과 저장법의 기원과 역사, 조선 전기 음식 관련 용어 등도 살펴볼 수 있는데,

조선 전기에 이미 매우 과학적인 형태의 조리서를 저술한 것이다.

 군자마을 전경

<군자마을 전경>


현재 <수운잡방>은 안동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보관 중이며,

김유 선생과 그의 가족에 관한 기록과 자취는 차로 약 20~30분 정도 떨어진 안동 군자마을에 고스란히 남이 있다.

가는 길에는 수운잡방체험관이라는 일반음식점도 만날 수 있는데,

이곳에서는 수운잡방의 요리를 직접 맛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좀 더 들어가면 도산서원과 퇴계의 자취가 서려있는 예안면 바로 전에 와룡면 오천유적지라는 군자마을에 다다른다.

오천 유적지라는 안내판과 자연석에 군자리라고 새긴 표석이 연이어 기둥처럼 서있는 입구를 지나면 넓은 주차장이 나온다.

그리고 주차장 위로 여러 채의 고택들이 반기듯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곳이 조선조 초기부터 광산김씨 예안파가 20여 대 600여 년 동안 세거해 온 건축물 1974

안동댐 조성에 따른 수몰을 피해 문화재로 지정된 것과 그 밖의 고가들을 새로 옮겨 놓은 오천유적지이다.

안동 군자마을이라고도 불리는데, 둘러싸듯 자리한 산의 중턱에 날렵한 처마의 고택들이 부드럽게 자리하고 있으며,

마을의 끝인 주차장 앞으로는 골짜기가 호수를 이루고 있어 풍광이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숭원각

<숭원각>


오른쪽 경사면을 따라 오른 후 건물들을 따라 왼편으로 한 바퀴를 돌 듯 하나씩 둘러보면 마지막에는

선대 유물, 고문서, 서적 수백 점이 전시되어 있는 유물전시관인 숭원각에 다다르게 된다.

가장 먼저 梅園(매원) 金光繼(김광계, 15801646)枕洛亭(침락정)이 나오고, 그 위로 연못과 탁청정과 탁청정 종가가 이어진다.

그 옆으로 설월당과 후조당과 함께 숭원각이 당시 이곳을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침락정은 조선 현종 13(1672)에 건립하여 의병출신의 선비들을 모아 회의를 열던 정자이며,

매원은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피해 이 곳에 숨어 지냈다고 한다.

군자마을에서 가장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탁청정은 탁청정 김유(1491~1555)가 조선 중종 36(1541) 지은

가옥에 딸린 정자로서 개인 정자 중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듣고 있다.

김유는 문무를 겸비하고 효성이 지극한 인물이었다 하는데, 섬세한 정자와 그 배치는 그의 지극한 성격을 엿보는 듯하다.

그 옆 설월당(雪月堂)은 김부륜 선생의 정자 이름이자 선생의 호이다.

당호의 유래는 김부륜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오천에 정자를 지어 藏修(장수)의 터로 삼고자 하였는데,

스승인 퇴계 선생이 친필로 '雪月堂(설월당)'이란 편액을 하사하였다고 하면서 이름과 호를 그와 같게 했다는 것이다.

김부륜 선생은 일찍이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經學(경학)道學(도학)을 닦아 동문인 鶴峯(학봉) 金誠一(김성일)

으뜸으로 추대할 만큼 훌륭한 인품과 학문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 옆으로는 후조당後彫堂이 있다.


설월당

<설월당>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15161577)은 어려서부터 이미 문예에 높은 재주가 보였는데,

1537(중종 2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태학太學에 있으면서도 동료들 사이에 두터운 신뢰와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상을 벗은 다음해에 조부상을 당하고,

임금마저 승하하면서 연달아 닥치는 슬픔으로 인한 마음의 충격으로 벼슬길에 나가

출세하려는 청운의 뜻마저 버리고 이곳에 안돈한 채 생을 보냈다고 한다.

 

탁청정 종가

<탁청정 종가>


군자마을은 다른 유명한 전통마을에 비해 정말 작고 한가롭다.

그렇지만 그곳에 머무는 시간과 눈과 마음이 느끼는 충족감은 결코 작지 않은 것은

그 풍경의 섬세한 아름다움과 집마다 새겨진 이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특히 처음 마을에 도착해 전체를 둘러볼 때의 안온함, 연못과 어우러지는 탁청정의 화려함,

작은 문을 통해 이어지는 고택들의 친근감과 더불어 마지막에 들리게 되는

후조당의 매끈한 배치와 만듦새는 시선과 발길을 좀처럼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결국 이곳은 선비들이 만든 은둔의 계곡이며, 지성의 요람인 셈이다.

높은 학문과 곧은 자세는 건축물에 그대로 담겨 있고, 또한 그 관심이 일상에까지 닿으니

<수운잡방>과 같은 독특한 기록을 남겨 후세의 보물이 되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된다.

 

 

한글에 담은 조선 중기의 요리법, 장계향 <음식디미방>

 

 음식디미방 체험관

<음식디미방 체험관>


조선 중기의 조리를 기록한 <음식디미방>은 조리를 실제로 담당했던 여성이 기록한 아시아 최초의 고조리서로 평가 받고 있다.

여중군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그 자신이 상당한 유학적 지식과 인품을 겸비했던 장계향이

73세 평생 동안 갈고 닦은 요리의 비전을 후대에게 전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상당히 상세하며 정확한 조리법이 담겨 있어, 오늘날에도 재료만 구해진다면 곧바로 구현이 가능한 수준이다.

실제로 장계향 선생이 살았던 경북 영양 두들마을에서는 <음식디미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음식들을 오늘날 직접 먹어볼 수도 있다.

<음식디미방>을 그대로 해석하면 음식의 맛을 아는 법이다.


 음식디미방 생활문화체험관

<음식디미방 생활문화체험관>


<음식디미방>보다 앞서 <수운잡방>이 있었다. 둘 사이에는 약 100년의 격차가 있다.

두 고조리서 간에는 이런 시대의 차이 외에도 또 다른 차이가 존재한다.

<수운잡방>이 시중의 보편적인 요리법들을 집대성한 일종의 조선 요리입문서라고 한다면,

<음식디미방>은 보다 독특한 별미들을 소개한 중고급 요리책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장계향은 어렸을 때부터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익혀

 이미 한문의 대가였지만 일부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게 하기 위해 한글로 조리서를 썼다고 전한다.

당시 언문을 사용하는 것은 사회적 통념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장계향은 이에 개의치 않고

실용적인 면을 중시하여 글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의 필사본은 유일하게 1권이 남아 있고 경북대학교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런데 <음식디미방>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재미있는 가설이 하나 전해지고 있다.

장계향이 열아홉에 시집 갈 때 친정인 장씨 집안의 음식문화를 익힌 채로 가게 된다.

시댁인 재령 이씨 집안은 영덕의 손꼽는 대부호 집이었는데, 매 끼니 수십 명의 식솔이 음식을 먹는 집안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재령 이씨의 음식을 배우는데, 시집가기 전 이시명 선생과 함께 산 첫 부인이 <수운잡방>을 지은 김유라는 분의 손녀였다고 한다.

그 첫 부인이 남매를 낳고 돌아가실 때까지 이씨 집안에 광산 김씨와 <수운잡방> 요리가 접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장씨 집안의 음식이 모아지면서 <음식디미방>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놀랍고도 신기하고 또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음식디미방 전시장 장계향

<음식디미방 전시장 장계향>


장계향이 태어난 해는 159811월로 임진왜란이 끝나가던 시기였다.

아버지는 장흥효, 어머니는 안동 권씨이다.

아버지는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등 당대의 뛰어난 유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운 대학자였고,

장계향은 부부에게 늦깎이 자식이었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자란 장계향은 일찍부터 남다른 책임감과 독립적인 의식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운 그녀는 열 살이 넘은 소녀 때에 이미 시, , 화에 무르익은 실력을 드러냈다.

한시 12편을 남겼는데, 그중 출가 후에 쓴 <수국춘색>은 현재까지도 일부 지역에서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또한 장계향은 서예 실력도 뛰어났다. 어느 날 당대 서예의 대가 정윤목이 아버지를 찾아왔다.

장계향이 옮겨 쓴 <적벽부>를 보고 크게 놀라 장흥효에게 누가 쓴 글씨냐고 물었다.

조선 사람의 글씨 같지 않고 중국인의 글씨 같았다고 한다. 그녀가 쓴 <적벽부>는 전하고 있지 않지만

이 일화를 통해 장계향이 이미 어린 나이에 서예에서 개성을 획득했음은 물론 출중한 실력을 겸비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영양의 두들마을은 여섯 번이나 집을 옮긴 장계향이 시아버지인 운곡 이함이 세상을 떠난 후 43세에 영덕을 떠나 자리 잡은 마을이다.

지금 두들마을은 그야말로 음식디미방과 장계향의 마을이 되고 있다.

예전에는 마을 한 구석, 석계고택과 몇 채의 고택 사이에 음식디미방 체험관과 교육관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규모도 커지고 그 주변으로 다양한 고택과 문화시설로 더욱 풍성해졌다.

마을 입구에는 음식디미방 주류체험관이 조성되어 있고, 옛 음식디미방 체험관 너머로 석간고택,

유우당 등 고택들과 광산문학연구소를 연결하는 산책길과 함께 그 사이에 또 다른 예절교육관과 북 카페 등이 조성되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을 만날 수 있다.

교육, 체험, 숙박 등을 할 수 있는 종합 문화단지가 조성된 것이다.


홍도관 음식디미방 생활문화체험관

<館道弘(홍도관) 음식디미방 생활문화체험관>


먼저 체험관에 들어선다. 체험관 입구의 글씨가 익숙한 필체인데,

<음식디미방>에 있는 글자를 집자한 것이라 적혀 있다.

<음식디미방>의 요리를 체험할 수 있는 식당이기도 하다.

전체 음식 중 51가지가 술 만드는 법을 적어두었다.

양반집 여성들의 중요한 일이 술 만드는 일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음식디미방>엔 음식 재료로 고추가 없는데 이는 장계향 사후 영약 지역에 고추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음식디미방>의 요리법 그대로라고 한다.

<음식디미방> 보존회는 책을 함께 읽고 연구하며 레시피 그대로 따라하며 요리를 현대에 맞게 복원해 왔는데,

어떤 요리는 재료를 구할 수 없어 포기한 것도 있다고 한다.


두들마을 음식디미방 술체험관

<두들마을 음식디미방 술체험관>


곰이 들어가는 요리도 그렇고, 전복, 자라, 참새 등 요즘엔 사용하지 않는 요리 재료들이 많다.

자주 등장하는 꿩도 요즘은 예전만큼 흔한 재료가 아닌데,

<음식디미방>의 만두 요리를 보면 대구 생선을 껍질만 벗겨 만두처럼

속을 만들어 싸가지고 쪄서 꿩 육수에 소스를 끼얹어 먹는 것도 있다고 한다.

재료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담백한 입맛도 당시와 지금의 차이를 느끼게 해준다.

사실 요즘 음식은 아무리 건강식이라 하더라도 각종 조미료나

천연이나 인공의 향신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예전 음식에 비해 자극적일 수밖에 없다.

<음식디미방>에서 맛볼 수 있는 음식에는 집에서 만든 참기름과 된장 간장으로만 간을 하고,

고추장이나 고춧가루도 전혀 안 들어간다.

새콤달콤한 음식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지나치게 담백한, 그야말로 건강식인 셈이다.

그렇다고 현대인들 입맛에 맞춰 간을 더 하진 않는다고 한다.

그에 맞출 수도 있는 게 <음식디미방>은 간을 어느 정도 넣어라 상세하게 적혀 있기 때문이다.

아마 당시의 식생활과 지금 우리의 먹거리를 비교할 수 있는 좋은 기준점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석간고택

<석간고택>


체험관을 나오면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고,

마치 야외 결혼식장과 같이 꾸며진 공원을 지나면

기와지붕이 계속 이어진다. 옛 건물도 많지만 근래 지은 기와집도 많다.

마을 골목을 따라 석계고택에 들어선다.

이 기와집이 장계향이 살던 300년 넘은 고택이다.

고택 뒤편엔 장계향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여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은 처음이다.


석천서당(堂書石川)

<석천서당>


장계향은 아들이 조정 일을 맡게 되어 불천위로 받들어졌다.

불천위란 나라에 공을 세운 이나 생전에 덕을 널리 베푼 이를 국가에서 지정해 영원히 제사지낼 수 있게 한 신위를 말한다.

그녀의 시아버지인 이함과 남편 이시명, 두 아들도 모두 불천위에 올랐다.

장계향은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세상을 떠나기 7년 전 그녀는 인생을 돌이켜보며 시 한 수를 남겼다.

자식들은 아들 현일이 이조판서에 오르는 등 적잖은 업적을 이루었고,

자신 역시 당시 천수를 누린다는 나이를 넘어서 장수하고 있음을 기뻐하며 남긴 <희우시>의 한 구절이다.


정부인 장씨 유적비 

<정부인 장씨 유적비>


드물고도 드문 중에서 드물고도 드문 일이네

 

장말 드물고도 드문 여인이었고, 그만큼 소중한 <음식디미방>인 듯하다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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