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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통일의 이유를 만나다 스크랩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with 이철호 작가



통일의 이유를 만나다

 

-철원 노동당사-

-고석정과 임꺽정-

-꺼먹다리와 평화의 댐-

 

 

지난 몇 년간 가장 논란이 심한 것이 부동산이었다면,

가장 드라마틱한 것은 바로 한반도의 통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비록 지금은 잠잠해졌지만, 한때 우리는 종전과 통일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에 들뜨기도 했었다.

마치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처럼, 아득하기만 했던 통일은 우리에게 그런 존재인 듯하다.

거의 잊고 살고, 왜 필요한지는 모르지만 실재 이루어질 듯 하면 어느새 감격하고, 기대하게 만드는.

다시 기대와 기원이 잠잠해지는 이때, 통일의 이유를 찾아 강원도의 들판을 향해본다.

그곳에는 여전히 아픈 기억들이 우리 기원이 이유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노동당사가 상징하는 것

 

철원제일감리교회

<철원제일감리교회>


철원으로 가는 길은 산과 산 사이의 너른 평야를 달리는 길이고,

그 위를 가로지르는 철새들의 힘찬 날갯짓과 함께 하는 길이며,

또 영화와 역사책에서 봤던 각종 전적지와 유적들의 표지판을 헤아리는 길이기도 하다.

백마고지전적지로 향하는 안내판을 따라 한참을 달리다보면 주변이 넓게 뚫려 있는 공간을 만나게 된다.

백마고지전적지로 안내하는 표지판이 있고, 오른편으로 제일감리교회와 노동당사가,

왼쪽으로는 높은 철탑 주변으로 공사로 분주한 곳이다.

이곳 역시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공원으로 조성하는 공사가 한창인 듯하다.

그 모습을 남로당사가 담담히 내려다보고 있다.

 노동당사

<노동당사>


해방의 감격과 함께 한반도는 38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었다.

아마 당시에도 이 분단이 이리 오래 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철원은 강원도의 도청이 있던 곳이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통치하던 곳이었다.

194612월 도청이 원산시로 이전하였고, 철원읍 관전리에 3층짜리 조선노동당사를 건설하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북한의 노동당사로 이용되던 곳이다.

지금은 전쟁 때 입은 피해로 건물 전체가 검게 그을리고 포탄과 총탄 자국이 촘촘하게 나있고, 골격만 제외하고 거의 허물어진 상태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구철원은 대한민국에 속하게 되면서 노동당사가 남한에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사연으로 인해 노동당사는 한국의 분단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대표적인 상징공간이 되었다.

덕분에 1994년 발표된 서태지와 아이들 3집 타이틀곡 '발해를 꿈꾸며' 뮤직비디오 촬영 장소로 이용되었으며,

최근에는 영화 강철비에서 남한 측 안보실장과 북한 측 대표가 만나는 장소로 나오기도 하였다.

철원군(鐵原郡) 역시 이곳을 안보관광코스로 운영하고 있으며, 20012월에는 근대문화유산에 등록되기도 하였다.

최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노동당사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노동당사

<노동당사>


그러자 바로 서태지와 아이들 뮤직비디오에 나왔던 곳이라고 덧붙여진다.

서태지의 시대를 살았던 이들에게는 남로당사는 발해를 꿈꾸며라는 노래의 뮤직비디오로 자동적으로 이어지는 듯했다.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 자리의 가장 선배격인 한 사람이 문득 이야기한다.

근데 왜 그 뮤직비디오를 남로당사에서 찍었죠?” 그때부터 쭉 의문이라고 한다.

노동당사와 발해가 무슨 연관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 그분은 서태지의 세대는 아니었던 듯하다.

가사를 한 번도 제대로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발해를 꿈꾸며 / 서태지와아이들(1994)

진정 나에겐 단 한 가지 내가 소망하는 게 있어

갈려진 땅의 친구들을 언제쯤 볼 수가 있을까

망설일 시간에 우리를 잃어요

한민족인 형제인 우리가 서로를 겨누고 있고

우리가 만든 큰 욕심에 내가 먼저 죽는걸

진정 너는 알고는 있나 전 인류가 살고 죽고

처절한 그날을 잊었던 건 아니었겠지 ...


당연히 남쪽 땅에서 전쟁과 분단의 가장 상징적인 공간, 하지만 적대와 정복이 아닌 만남을

이야기하기 위한 가장 격정적인 장소는 남로당사일 수밖에 없을 듯하다.

거기에다 당시 서태지 음악이 가지는 우리 대중문화에서의 전복적이고, 혁명적인 역할을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우리 사회의 가장 근원적인 모순을 간직한 공간이자, 기성세대의 뿌리에 이전과는 너무도 다른

세대와 문화가 당당히 외치는 것이었다. 우리는 다르다고.

 노동당사와 군인들

<노동당사와 군인들>


지금의 노동당사는 이런 세대의 전복도 흘러가고, 한산한 안보관광지의 하나가 된 듯하다.

어쩌면 건너편 공터에 만들어지고 있는 관광지 또는 역사공원이 완성되면 좀 더 활발한 이야기가 이곳을 채울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길이 막혀 있는 동안 이곳은 여전히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하는 공간일 수밖에 없을 듯하다.

노동당사 역시 예전에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곳으로 기억하는데,

이제는 주변을 난간으로 막아 놓아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더 황량해보이기도 하는데, 어쩌면 시간을 계속 흐르지만

우리는 그 시간이 바꾸고 있는 것을 잊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둘러보고 나가는데 한 무리의 군인이 들어서고 있었다.

노동당사를 마주보며 와본 사람이 있는지그때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를 묻고 있었다.

여전히 우리는 전쟁 중인 것이다.

 

 

안보관광과 고석정 그리고 임꺽정

 

고석정

<고석정>


이어 월정리역을 찾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코로나로 사전 예약자에 한해 오전 10, 오후 2시에만 입장이 가능하고,

그 예약은 고석정관광지 주변의 센터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센터는 다른 박물관과 다르게 화요일에 휴무였다. 다음에 찾는 이들은 이걸 참조하길 바란다.

마침 고석정관광지에 들른 김에 임꺽정이 활약했다는 고석정으로 내려가 본다.

고석정은 한탄강 변에 있는 정자이다.

세운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신라 진평왕(재위 579632)과 고려 충숙왕(재위 12941339)

여기에서 머물렀다고 하니 아득한 시절부터 절경으로 유명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고석정 주변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선정된 한탄강 지질공원에 속해 있다.

고려나 신라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시절일 수밖에 없는 원시시대 지구의 활달한 지각활동으로 만들어진 자연의 예술품인 것이다.

 

고석정 입구 임꺽정상

<고석정 입구 임꺽정상>


고석정 앞 광장에는 임꺽정 동상이 세워져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의적 임꺽정이 고석정 앞에 솟아 있는 고석바위의 큰 구멍 안에 숨어 지냈다고 하는데,

이 바위에는 성지, 도력이 새겨져 있고 구멍 안의 벽면에는 유명대, 본읍금만이라고 새겨 있다고 한다.

임꺽정의 다른 이름은 임거정, 임거질정이다.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의 3대 도적으로 일컬어진다.

경기도 양주에서 백정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1559년경 황해도, 경기도, 평안도, 강원도까지 세를 확장했었다.

빼앗은 재물을 빈민들에게 나누어주어 의적으로 알려졌지만, 15621월 부상을 입고 체포당해,

15일 만에 죽음을 당했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도적이자 의협이다.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임꺽정 집단의 치열하고 오랜 활동은 핍박받던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던 것이다.

그래서 그에 관한 많은 설화가 민간에 유포되었고, 그의 행적이 소설로 그려지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게 벽초 홍명희의 소설이 아닌가 싶다.


고석정

<고석정>


예전에 읽고 여전히 그 소설을 잊지 못하는 건 임꺽정과 그 형제들의 놀라운 재주와 시원해지는 활약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속에 담긴 조선 사람들의 감칠맛 나는 언어와 표현 그리고 생생하게 그려진 질박하고 정겨운 생활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래서 임꺽정이 도적이 아니라 우리 이웃의 힘센 아저씨로 느껴지고,

또 관군에 쫓길 때 오히려 그와 형제를 응원하게 된 듯하다.

그 활달한 임꺽정의 모습이 그려지기를 기대하며 고석정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들어선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드라마 촬영이 한참이고, 정자는 천으로 덮여 있다.

이마저도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져 1971년에 콘크리트로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나마 한쪽에서만 볼 수 있었던 지질공원의 놀라운 모습은 충분히 감상할만한 것이었다.

계곡을 잔잔히 흐르는 강물 위로 기묘하게 솟은 바위와 깎아 내린 듯한 벼랑을

장식한 소나무 등은 보는 이들을 감탄시키기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꺼먹다리와 평화의 댐이 알려주는 것

 

꺼먹다리

<꺼먹다리>


아쉬움에 화천으로 길을 나선다.

전적지가 많은 철원과 화천이지만 그중 특이한 곳이 꺼먹다리라는 곳이다.

그렇지만 고석정에서 그곳을 가기 위해서는 민간이출입통제지역을 지나야 한다.

어느 순간 도로는 갈지자로 막혀 있었고, 차가 속도를 늦추자 어디선가 군인 3~4명이 다가와 차 번호를 적고 행선지를 묻는다.

군인들은 친절하고, 절차는 잠시였지만 낯설고 부담스러운 풍경으로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어떤 유적지보다 더 지금 우리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건 이런 일상이 아닌가 싶다.


꺼먹다리

<꺼먹다리>

 

검문소의 입구를 한참 지나 출구를 나서자 이제 화천이다.

읍내를 알려주는 조형물을 지나 강변도로를 잠시 달리니 꺼먹다리를 알리는 작은 표지판이 나온다.

화천댐이 준공되면서 1945년에 건설한 다리이다.

나무로 만든 상판에 검은색 타르를 칠해 꺼먹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건립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데, 한국전 당시 중동부전선을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교량이었기 때문에 전투도 치열했던 곳이며,

일제강점기 때에는 소양강과 화천을 모노레일을 이용해 수송물자를 이동하기도 했던 다리라고 한다.

치열한 전쟁이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처참했던 현장이었음에도 남과 북 모두가 이 다리가 필요했기에

다리는 무너지거나 파괴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게 해답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두가 필요하면 그것은 유지되고, 부활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 필요 때문인지 꺼먹다리는 난간도 없이 일부 침목이 훼손돼 수십 년간 방치되었다가,

2007년 문화재청의 승인을 받아 재정비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새 단장을 거친 꺼먹다리 위는 깔끔하고 까만 나무가 깔려 있었다.

그렇지만 그 아래 콘크리트 구조물은 세월에 부서지고, 전쟁에 상처 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 부조화의 아름다움이 더욱 인상 깊게 다가온다.

마침 할아버지가 손녀를 데리고 다리를 찾았다. 사진을 찍고, 놀이를 하는 그 모습이 정겹다.

 평화의 댐

<평화의 댐>


마지막으로 평화의 댐을 찾았다. 그리 멀지 않지만 이제 양구가 된다.

다리를 건너면 산길로 접어든다. 주변이 온통 산이지만,

평화의 댐으로 가는 길은 그중에서도 첩첩산중이라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인가는 없다. 오직 잘 닦인 도로만이 위태로운 산속의 유일한 흔적이다.

그렇게 한참을 구불거리며 달리고, 또 달리면 터널을 지나 쭉 뻗은 댐 위를 지나게 된다.

댐 저편으로 산 능선에는 평화의 댐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곳에는 각종 교육시설이 있고, 평화의 종 등이 전시되어 있다.


평화의 댐

<평화의 댐>

 

19861030일 건설부(지금의 건설교통부)장관이 북한에 대해

금강산댐의 건설계획을 중지하라는 '()북한 성명문'을 발표했다.

발표의 내용은 당시 북한은 휴전선 북방 10km 북한강 본류와 금강산이 만나는 곳에 대규모 댐을 건설하는데(금강산 댐),

그 댐에서 9t의 물이 방류되면 서울의 1/3이 침수하고,

최대 저수량인 200t이 방류될 경우 수위가 50m로 높아져 수도권이 황폐화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861126, 국방부·건설부·문화공보부(지금의 문화부통일원 장관이

합동담화문을 발표하고 금강산댐에 대한 대응으로 평화의 댐을 건설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남쪽의 사람들은 공포와 함께 분노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전 국민적인 모금이 이어졌다.

금강산댐의 공격을 막을 평화의 댐 건설을 위한 운동이 마치 국채보상운동처럼 퍼져나갔다.

유치원생부터 걸음이 힘 드신 어른들까지 모금장을 찾았고,

이 장면들은 TV에서 생방송으로 모든 이들에게 알려졌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 사실이 알려졌다.


평화의 댐

<평화의 댐>


금강산댐이 예측가능한 가장 많은 저수량을 한 번에 방류하더라도

장마나 홍수 때처럼 서울의 저지대 정도만 침수된다는 것이었다.

공포와 편견은 이리도 무서운 것이었다. 사실을 확인하려는 노력은 그 당시에 거의 없거나,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어려웠다. 어쩌면 분단의 공포는 우리의 편견을 먹고 사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를 무시하고 지나치면 신기루처럼 새로운 단계가 시작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어쩌면 평화의 댐은 사기가 아니라 봉이 김선달처럼 세상의 무지를 희롱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잘못을 하는지를 알려주는 날카로운 기념비일지도 모른다.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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