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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근대의 잔잔한 부활 목포 근대역사거리 스크랩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with 이철호 작가



근대의 잔잔한 부활 목포 근대역사거리

 


목포 적산가옥거리

<목포 적산가옥거리>


목포는 항구다. 항구는 마치 고유의 DNA를 가진 것처럼 내륙의 도시와는 전혀 다른 색과 풍경을 보여준다.

특히 근대 이후 문화와 문물의 통로 역할을 하던 항구는 그 나라에서 역사의 중심에 있을 때가 적지 않다.

당시의 풍경에 항구의 고유한 색이 더해지면서 독특한 문화를 간직한 도시가 되기 마련이다.

인천, 군산, 부산이 그러한데, 목포 역시 그 도시들과 같은 시간을 간직하고 있지만, 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남아 있다는 점이 매력인 도시이다.

사실 한반도의 구석구석에 무시무시한 개발 열풍이 몰아치고, 도로와 세상이 빠르게 변해가면서 역사도시와 문물은 추억의 공간이자 기록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딱딱하고 거대하고 너무 빠른 세상에 지친 이들은 기억 속 공간에서 위로를 찾기 시작했고,

덕분에 유명한 개항장이나 항구도시들은 관광과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먼지와 녹은 닦아내고, 부족하고 허물어진 곳은 다시 채우고, 세워졌다. 옛것인 듯 아닌 듯한 모습이 그곳에 남겨졌는데,

목포는 그 도시들에 비해 보다 한적하고,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낡아보고, 초라해 보이지만 더욱 살갑고, 생생한 도시가 된 것이다.

천천히, 느린 손길로 낡고 먼지가 쌓인 시간과 풍경을 조심스럽게 닦아내면서 오래된 풍경을 새롭게 부활하고 있는 목포의 도심을 걸어본다.

 

 

근대를 간직한 목포의 공간들

 

 눈 내리는 목포구도심

<눈 내리는 목포구도심>


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호남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헐값으로 사들여 목포항을 통해 가져갔다.

목포는 물류 항구로 빠르게 성장하였고, 일본 사람들이 이 도시로 몰려들었으며 도시의 풍경은 전혀 다르게 변해갔다.

사실 목포항은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에 의해 개항된 부산, 원산, 인천과 다르게 대한제국 정부의 필요에 의해 고종의 칙령으로 1897년 개항된 곳이다.

당시 조선은 경제적 재원이 필요했고, 무역을 장려하여 지주와 상인들을 자본가로 성장시키기 위해 목포를 개항한 것이다.

개항 이전 이미 무안감리서와 목포해관을 설치되어 있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목포의 개항과 시가지 건설은 자체적인 필요와 목표에 의해 움직였던 것이다.

그래서 1905년까지 아주 잠시 한국인이 자주권을 행사하는 도시이기도 했다.

물론 급속하고 폭력적인 일제는 목포를 단지 수탈의 물류항으로 빠르게 바꿔버렸다.

 

목포 유달산

<목포 유달산>


치욕의 역사이기도 한 당시의 모습은 목포의 구도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목포역을 나서면 왼쪽으로 유달산이 솟아 있다.

그 아래로 뻗어 있는 길고 넓은 길로 들어서면 바로 구도심이다.

입구에는 전국 10대 빵집(이라고 불리거나, 주장하는) 코롬방 제과가 있고,

안으로는 문화의 중심지였던 오거리가 옛 풍경을 벽에 새긴 상가와 함께 나타난다.

그 사이 골목은 목포의 자랑인 다양한 음식점이 있으며, 근대역사문화관과 적산가옥 그리고 목포진이 차례로 이어진다.

또 길 아래로 내려가면 홍어 등으로 유명한 목포수산시장과 선구점 그리고 항구와 여객선터미널이 차례로 나타난다.

그야말로 작은 동네 안에 현대부터 근대의 시간 그리고 내륙과 항구의 문화와 삶까지 파노라마처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하나하나 만나기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가 있기에 근대의 시간을 보여주는 공간을 통해 목포의 시간을 먼저 만나보고자 한다.


근대역사1관 

<근대역사1관>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옛 목포영사관 아래의 국도 1.2호선 원점기념비이다.

길가에 커다란 바위 비석이 있고 그곳에 국도 1.2호선 기점이라고 쓰여 있다.

1911년 개통된 1번 국도는 여기에서 출발해 신의주까지가 939.1km가 이어지는 길이다.

물론 지금은 중간까지만 갈 수 있다.

이어 만들어진 2번 도로는 부산까지 378.1km를 연결한 것이라 하니 당시 목포의 위상이 그 숫자에서 나타난다 하겠다.

현재 1번 국도는 목포대교의 개통과 더불어 고하도로 옮겨져 943.37km4.27km 늘어났다고 한다.

그 옆으로 바로 평화의 소녀상이 보이고, 그 뒤로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는 붉은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근대역사1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옛 일본영사관이 그곳이다.

근대역사1관 즉, 옛 영사관은 평지보다 높은 언덕 위에 경사를 이용하여 세워놓아 마치 진격의 거인이 벽 안으로 얼굴을 내민 것 같이 고압적이고 위협적으로 보인다.

분명 건축가와 시공자도 의도하지 않았을까 홀로 생각해본다.

일본 영사관은 최초엔 목포진의 건물을 빌려 사용하였지만 1900년에 지금의 위치에 경찰서와 우편국을 포함해서 완공하였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우리나라도 이 건물을 시청으로 도서관으로 또 문화원으로 사용하다 지금에 근대역사관이 되었다.

역사관 내부는 어디나 그렇듯 목포의 개항으로부터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다.

인상적인 곳은 건물의 뒤편에 있는 방공호이다.

1940년 이후로는 우리나라 주요지역에도 미군의 폭격이 이어졌는데, 일제는 그에 대비한 방공호를 여러 곳에 만들었다고 한다.

목포에서는 이곳이 대표적인 방공호이다.

방공호는 건물 뒤 유달산을 파고 들어간 동굴이며 전체 길이는 85m정도이고, 높이는 2m가량이다.

이 시대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땀 흘려 만든 것은 조선인이었지만 정작 폭격이 있을 때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목포에 사는 일본인들이었다.

그 힘든 여정과 시절의 풍경이 그곳에 전시되어 있다.

유리벽 안의 전시와 유품과 다르게 음습하고 컴컴한 동굴 속의 조형물은 당시의 끔찍함을 그대로 전달해주는 듯하다.


 이훈동 정원

<이훈동 정원>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이훈동 정원이 있다.

이 정원은 1930년대에 일본인 실업가 우치다니 만페이(內谷萬平)가 서양식으로 저택을 짓고 꾸몄던 곳이다.

광복 후에는 해군헌병대장 관사로 쓰이다가 해남 출신 국회의원 박기배가 이곳을 소유했다.

1950년대에는 조선내화의 창업자 이훈동의 소유가 된 이후 이훈동 정원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목포에 조성되었던 저택과 정원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내부는 한국적 거실과 서양식 응접실로 개조되었으나 외형은 일본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정원도 세월이 흐르면서 개·보수를 거듭하여 현재 입구 부분과 앞뜰 부분이 변형되었지만

상당 부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이 시기 조경문화까지 알려준다고 한다.

일본식 석등과 아담한 5층 석탑 및 7층 석탑이 있고, 일본식 다원정(茶苑庭)을 지을 때 꼭 들어가는 요소인 연못 분수도 배치되어 있다.

일단 오래되었지만 독특하고 잘 관리된 건물과 그 사이 113종이나 되는 온갖 나무와 화초가 조성되어 있어

잠시 시대를 넘어 휴식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목포문화원 건물

<목포문화원 건물>


오거리 아래쪽으로는 구 호남은행 목포지점에 머물고 있는 목포문화원을 만나게 된다.

호남은행은 1920년 순수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은행이다.

당시 호남은 풍부한 농산물과 특산품을 생산하고 있었으나 산업자금과 금융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호남의 부호들이 돈을 모아 150만원의 자본금으로 광주에 호남은행을 설립하였고, 1929년에 호남은행 목포지점으로 이 건물이 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일본인 자본의 참가를 거부하고 일본인을 직원으로 채용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1942년 호남은행을 동일은행에 합병시켜 버렸다.

해방 이후 이 건물은 조흥은행 목포지점이었다가 다시 신한은행 소유가 되었지만, 현재는 목포문화원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지금 정문에는 목포문화원 간판이 걸려 있지만 그 뒤에는 주식회사 조흥은행 목포지점(株式會社 朝興銀行木浦支店)’이 음각된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중에서 조흥두 글자는 원래 호남이었던 것을 후에 바꾸어 놓은 것이다.

특이하게도 글자 중 한자 <> 한 획이 누락되어 있다.

그 사유로는 설립자인 현준호 선생이 우리가 일제로부터 독립하면 찍겠다.’고 말했다는 설과

목포지점이 자리를 잡아 번창하게 되면 찍겠다.’고 말했다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데, 아직까지도 그 한 획은 빈자리 그대로 남아 있다.


 

동명동77계단

<동명동77계단>


목포문화원 뒤쪽으로 목포의 건어물 시장을 바로 앞두고 특이한 길이 하나 있다.

동명동77계단으로 불리는 길로 원래 일제가 만든 송도신사로 가는 길이었다.

송도신사는 경술국치(1910)후 목포에 지은 최대 규모의 신사이다.

송도는 원래 소나무가 많은 섬이었으나, 일본인들은 소나무를 베어내고

이곳에 벚나무를 심은 뒤 정상부에 신사를 만들어 조선인에게도 참배하게 하였던 곳이다.

이후 주변이 매립되면서 섬은 현재 육지가 되었다.

사실 이것이 과거엔 섬이었단 걸 알 수 있는 것은 그 이름뿐이다.

해방 이후엔 신사가 있던 곳에 판잣집이 우후죽순 들어섰고 지금은 모두 벽돌집이 되었다.

그 모습은 바뀌었지만 작고 복잡한 골목과 집들이 당시의 급박했던 모습을 짐작하게 해주기는 한다.

해방 이후에는 신사의 모든 잔재는 철거되었고, 지금은 신사로 올라가던 계단만이 남아있다.

77계단은 일본인에게는 성스러운 계단이었고, 나라를 빼앗기고 신사참배를 강요받았던 조선인에게는

치욕의 계단이었지만, 힘겨운 역사의 흔적이기도 한 셈이다.


근대역사2관

<근대역사2관>


오거리와 각종 적산가옥 그리고 새롭게 조성되는 상가와 오래된 상가가 어우러지고 있는 구도심 거리의 끝에는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현 근대역사관 2관이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는 잘 알려져 있듯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모방해 만든 회사로

토지를 헐값에 거둬들이는 방법으로 식민지를 경영하고, 수탈하는 회사로 악명이 높은 곳이다.

창립 당시에는 한·일 양국의 이중국적을 가진 회사로 출발하였으나 1910년 한일합병과 더불어 일본국적을 가진 회사가 되었고,

식민지 경영의 수탈 창구 역할을 수행하면서 한국인의 피를 먹고 성장한 소위 괴물회사였다.

일본 도쿄에 본점을 두었던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영산포에 첫 지점을 설치한 후 각종 만행과 독점으로 한일 양국에서 농민과 상인의 원한을 사게 되었고,

1919년 일어난 3 1 독립만세운동 때 반일과 함께 반 동척 항쟁이 대두되면서 19206월 목포 상공회의소의 일부를 빌려 쫓기듯 목포로 옮겨 왔다고 한다.

동척 목포지점은 한때 전남 각지에 소유한 농장 17곳을 관리하며 전국에 위치했던 동척 지점 가운데에서도 가장 많은 소작료를 거두던 지점이었다.

가장 수익이 많은 지점이었다니 목포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착취를 당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1945년 광복 직후 신한공사가 깃들어 동척의 귀속농지를 관리하다가 1948년 신한공사가 해체된 후에는 해군이 이곳을 사용하였다.

1989년 이후에는 해군이 이전하여 빈 건물로 방치되었는데, 사진자료를 위주로 근대의 역사를 보여주는 목포 근대역사관 2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특히 2층에는 참혹하고, 잔인했던 일제의 만행이 전시되어 있다.

 

 

옥단이 길과 목포 근대의 풍성함

 

목포에서는 근대의 삶과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조성해 놓았다.

옥단이 길이라 불리는 이 길은 유달산 바로 아랫동네인 목원동에 있는 길로, 각 장소에 번호를 붙여 연결해 놓았다.

옥단이 길이 시작하는 지점은 노적봉인데, 사실 어디서 시작하더라도 상관없어 보인다.

약 3시간이면 그 길을 다 돌아볼 수 있다.

이 길을 소개하는 푯말의 글을 그대로 옮겨 적어본다.


 옥단이 길

<옥단이 >


“ ‘옥단이 길은 목원동의 역사골목 탐방로이다.

옥단이는 목포 원도심의 골목을 누비며 물장수로 살았던 실존 인물로 차범석 작가의 희곡 옥단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목원동은 목포역과 유달산 자락 사이에 형성된 근대도시 목포의 심장이자, 예향의 뿌리이다.

상가와 주거지를 연결하는 작은 골목길이 마치 심장의 혈관처럼 얽혀 있고, 그 안에는 다양한 근대역사유적이 남아 있다.

옥단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1897년 개항 이후 조선인들이 이룩한 근대도시 목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개항 이후 목포는 지형적 이유로 물이 부족했단다.

그래서 지개를 지며 물을 파는 장수가 있었는데, 옥단이는 바로 그 물장수였다.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 없는 그녀는 언제나 연지를 찍고 물지게를 이고 다녔던 모양이다.

, “옥단아하고 이름을 부르면 하모니카를 꺼내어 아무렇게나 불며 춤을 추었단다.

대장동무 꽃 꽂았습네다.” 라는 유명한 대사가 떠오르는 시점이다.


 옥단이길 성당

<옥단이길 성당>


먼저 위쪽으로 북교동성당과 김우진 거리를 만날 수 있다.

당시 목포를 대표하던 작가였던 김우진과 그의 가족이 살았던 성취원(성당 앞 팻말은 성취원이라 하는데,

백수제라 했다는 말도 있다)은 지금은 북교동 성당이 되어 있었다.

성당의 담장과 김우진 거리로 조성되어 있는 작은 골목길에 일제강점기 극작가였던 김우진에 대한 설명과 그의 가족에 대한 설명이 함께 있었다.

김우진의 아버지인 김성규는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이다.

외교사절로 유럽으로 떠났지만 중국정부가 반대하여 홍콩에서 1년을 머물다 귀국했다.

김성규는 고창군수와 무안 감리를 지냈고, 동학농민군과 협상하여 전라도 집강소를 설치하는 데 기여했다.

무안감리로 있을 때는 일본 낭인들의 행패에도 끝까지 조선인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여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다시 목포오거리로 나오면 코롬방 제과 옆에 오거리 문화센터로 쓰이는 건물이 있다.

약간 그 생경함 때문에 이질감을 느낄 수 있다.

사실 이 건물은 1905년 일본인이 만든 일본식 불교사원이며, 동본원사 목포별원이다.

정식명칭은 진동 대곡파 동본원사.

해방 후 주인이 사라진 일제의 불교사원은 대부분 국가의 소유로 되었는데,

개신교인이었던 이승만은 그것들을 개신교에 불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도 이런 이유로 2007년까지 교회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


목포 청년회관 

<목포 청년회관>


또 로데오광장의 끝으로 가서 좌측으로 가면 작은 골목을 만나는데, 그 길 끝에 노란색의 2층 건물이 언덕 위에 있다.

옛 노라노양복점이었던 이 건물은 지금은 지역 예술인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미술관이다.

그 위쪽으로 담이 없는 사찰인 정광정혜원이 있다.

절엔 담 대신 포교 승려였던 고은과 법정스님이 되기 전 자연인이었던

박재철의 만남을 형상화한 동상이 보이고, 안에는 옥단이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정광정혜원을 지나서 나오는 오르막길에는 세계 미술 거장들의 인물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밖에 옥단이 길을 따라 걸으면 목포청년회관을 비롯한 다양한 목포의 근대를 만날 수 있고,

노적봉과 유달산을 오르면 목포의 눈물시비와 함께 일제가 세운 흥법대사와 부동명왕상과 함께 88개의 불상을 잔재 또한 볼 수 있다.

일본불교의 성지가 여기에 조성된 것인데, 이를 유달산팔십팔소영장(儒達山八十八所靈場)으로 불렀다고 한다.

 

평화의 소녀상과 구 일본영사관

<평화의 소녀상과 구 일본영사관>


간혹 시대가 혼란스러울 정도로 조선부터 일제강점기 그리고 근대화의 시대가 혼재되어 있는 목포의 거리이고,

거기는 이제 청년과 예술이 새로운 손길을 더하고 있다.

짧은 거리에 너무 많은 시간이 있고, 그것들이 손대지 않은 날것의 모습으로 남아 있으니 어쩌면 시간의 보물상자가 그곳인지도 모른다.

그 상자를 어떻게 열고, 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가는 순전히 우리의 몫이 아닌가 싶다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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