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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단정한 아름다움에서 백제 인을 만나다 스크랩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with 이철호 작가



단정한 아름다움에서 백제 인을 만나다

 

-공주 송산리고분군-

-부여 정림사지-

-부여 궁남지와 백제왕릉원-

 

 

지역을 돌아다니면 다양한 문화유산을 만나게 된다.

그러다 각 시대의 유산이 자신만의 색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며,

또 그 특징이 그대로 지역이 간직한 문화와 풍경이 되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발견은 또한 자신만의 여행을 만드는 방법이기도 하다.

특히 공주와 부여는 은근한 듯 화려하고, 소박한 듯 섬세한 백제의 예술과 문화를 간직한 지역이다.

없는 듯 풍성한 유물이 거리와 골목 곳곳에 자리하고 있고,

무심한 듯 강렬한 그 유산은 백제인의 숨결과 아름다움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공주 무령왕릉과 송산리고분군

 

송산리고분군

<송산리고분군>


공주는 옹진시대의 백제를 상징하는 도시이다.

강가에 듬직하게 자리한 공산성은 한강에서 밀려와 절치부심하던 백제의 위기의식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백제의 왕들은 새롭게 기틀을 잡고, 화려한 사비시대를 준비하게 되는데

그 실존을 증명해주는 곳이 공산성에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송산리고분군이다.

웅진시대(475~538)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무덤들인데, 원래 17기의 무덤이 있었지만 현재는 무령왕릉을 포함하여 7기만 복원되어 있는 곳이다.

그곳에는 백제와 공주를 연결시켜주는 무령왕릉이 있다.


송산리고분군 무령왕릉 입구

<송산리고분군 무령왕릉 입구>


19716호분의 침수를 막기 위한 배수로 공사 중 발견된 무령왕릉은 백제 웅진시대를 밝혀주는 세기의 유물이다.

이 무덤에서 발견된 지석(誌石)사마왕(무령왕)이 서기 5235월에 사망, 5258월에 왕릉에 안치됐다.

왕비는 52612월 사망, 5292월 안치됐다고 기록돼 있다.

역사의 시간을 알려주는 유물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실존을 증명하며, 기준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무령왕릉의 지석은 백제 송산리 고분 가운데 정확한 피장자의 이름을 알게 되었으며,

그 당시 정치사와 매장풍습 및 매지권과 관련된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준 것이다.

다만 일반에 공개되던 무령왕릉은 훼손이 심각해 1997년 영구 폐쇄됐다.

지금은 무령왕릉 모형 전시관에 실물과 똑같이 재현된 무덤을 만날 수 있다.


 고분전시관 입구

<고분전시관 입구>


왕릉원으로 불리는 송산리 고분군의 입구는 분수와 각종 나무와 꽃 등으로 공원처럼 꾸며놓았으며,

전시관과 고분군으로 이어지는 길과 건물을 입체적으로 만들어 놓아 인상적이다.

작은 언덕을 돌아 올라가면 고분군 입구가 나온다.

입구를 들어서면 쉼터로 활용되는 한옥이 보이고, 갈림길은 오른쪽 전시관으로 이어진다.

마치 고분군으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꾸며졌는데, 의외로 세련되고 단정해 보인다.

전시관 내부 역시 다른 박물관과 유물전시관과는 조금 다른 듯한 모습이다.

유물이 전시되고, 연표와 설명 등이 이어지는 것은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중간에 무덤으로 들어가는 작은 입구를 만들어 놓아 보는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곳은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는 고분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곳으로, 안으로 들어가 그 모습과 분위기를 체험해볼 수 있다.


송산리 고분전시관 5,6호분 내부

<송산리 고분전시관 5,6호분 내부>


먼저 5호분과 6호분의 고분을 들어가면 돌을 정성스럽게 쌓아올려 마치 방처럼 만들어놓은 고대의 무덤을 실제 만나게 된다.

송산리의 고분들은 만들어진 형태에 따라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과 벽돌무덤[塼築墳]의 두 종류로 구분되는데,

5호분은 전자를, 6호분과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으로 터널형 널방 앞에 짧은 터널형 널길을 보여준다고 한다.

5호분과 6호분을 안을 둘러보며 단단하고 깔끔하게 쌓아올린 무덤의 기술을 느껴보고, 밖에서는 그곳의 유물과 사신도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특히 복원된 무덤 앞에는 무덤 내부에서 유물이 발견된 모습이 역시 재현되어 있는데,

유물에 빛이 들어가면 그 모습이 화면에 나타남으로써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더욱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둘러싼 유리벽 안에는 그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으니 순차적이고, 입체적으로 구성된 전시가 만족스럽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령왕릉을 만나게 된다.

다른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 그 촘촘한 벽돌에서 느껴지는 섬세함, 그 규모와 크지 않은데 저절로 다가오는 웅장함은

왜 무령왕릉이 우리에게 소중한 것인지를 그 안에 서서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알려준다.

 

전시관을 나오면 자연스럽게 고분군을 둘러보는 산책길로 이어지게 된다.

멋들어진 소나무와 잔디공원 사이에 부드럽고 아담한 고분군들이 이어진다.

안에서 체험했던 5호분, 6호분, 그리고 무령왕릉인 7호분이 차례로 입구를 보여준다.

이 능선을 따라 산책하듯이 걷다 보면 다시 입구로 돌아오게 된다. 잘 조성된 시간의 길이며무엇을 봐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풍경이 그곳에 있었다.

백제의 후손임은 바로 이런 것에서 드러나는 게 아닐까 싶다.

 


퇴색되지 않은 아름다움에 매혹되다, 정림사지


정림사지 석탑

<정림사지 석탑>


헌칠한 키에 늘씬한 몸매

그러나 단정한 몸가짐에 어딘지 지적인 분위기,

절대로 완력이나 난폭한 언행을 할 리 없는

착한 품성과 어진 눈빛,

조용한 걸음걸이에 따뜻한 눈인사를 보낼 것 같은

그런 인상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 중에서

 

이런 완벽한 찬사와 묘사의 주인공은 바로 부여시내에 있는 정림사지 석탑이다.

예전에 부여에서 100가지 자랑거리를 선정하는 사업을 벌인 적이 있었다.

내심 한 도시에서 100이라는 완벽에 가까운 숫자가 가능할까라는 의심이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부여시내의 골목, 외곽 읍과 면의 주변 언덕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문화유산과 시간의 풍경들은 숫자의 불안감을 잊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낙화암과 무량사, 금동대향로와 창왕명사리감 등 놀라운 유물과 유적들 역시 감탄과 놀라움은 주었지만,

완벽한 묘사와 충격을 주는 것은 없었기에 세상에 그런 것이 있는가라는 의문을 담고 그녀를 만나러 갔었다.

두리번댈 것도 없이 시내 한복판에 살포시 서서 조용히 눈길을 드는 그녀. 그 눈길에 시선을 붙들린 채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담백한 우아미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 어떤 묘사나 찬사, 확인도 스르르 지워진 채 온 정신에 그 모습만이 가득 찬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녀의 이름은 정림사지 5층 석탑이고, 이 석탑은 이후 탑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온전히 바꿔 놓았다.


정림사지 석탑

<정림사지 석탑>


사실, 옛 사비의 흔적은 소탕되다시피 사라졌다.

텅 비워졌다가 다시 세워진 도시의 한복판에 정림사 석탑은 그 마지막 기억을 붙잡고 천년이 넘게 꿋꿋이 서 있는 것이다.

석탑이 오늘날까지 그 모습 그대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탑 한쪽에 허세로운 적의 장수가 새겨놓은 글귀 몇 자 때문이었다.

치욕스러운 글귀를 안았지만 굴하지 않고 버텨 결국 자신의 존재를 빛내게 된 것이다.

석탑의 1층 탑신에는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백제의 멸망을 이끌었던 나당 연합군의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하며 경망스럽게도 이곳에 그 흔적을 남긴 것이다.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이라는 글자 탓에 이 석탑은 백제 시대가 아닌 당 현종 5(660)에 건립된 당나라의 평제탑(平濟塔)’이 되고 말았다.

그 후 절은 불타 없어졌지만 탑은 그 오해 덕에 무사히 자리를 보전하고, 인고의 세월 수치를 견딘 끝에 제 이름을 찾게 된다.

1942년 발굴조사 때 대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라 새겨진 기왓조각이 발견된 것이다.

이 글귀는 대평 8년이던 고려 현종 19(1038) 당시 절의 이름이 정림사였음을 뜻한다.

또한 함께 발견된 유구와 유물들은 석탑이 공주에서 부여로 도읍을 옮긴 직후인 6세기 중엽에 만든 것임을 알려주었다.

1500여 년의 세월이 지나 다시금 제 이름을 찾게 된 탑은 아픈 세월을 묵묵히 담아낸 지순함으로 더욱 아름다움을 발한다.


정림사지 석탑

<정림사지 석탑>


당나라 장수마저 매혹한 그 아름다움은 놀라운 비례미에서 시작된다.

이 훤칠한 탑을 이루고 있는 중심 숫자는 바로 7이다.

1자의 길이가 약 35센티미터인 고려척을 기준으로 지대석 너비 14척의 절반인 7척을 건립의 기본 척도로 써서

1층 탑신과 1층 지붕을 합한 높이가 7, 1층 탑의 너비 역시 7, 기단의 높이는 7척의 절반인 3.5, 기단 너비는 7척에서 3.5척을 더한 10.5척이다.

거기에다 2층과 5층의 합이 7, 3층과 4층의 합이 7척으로, 이 비례에 따라 선을 이어가다 보면 무수히 많은 원이 그려지게 된다.

늘씬한 비례에 더해 살포시 든 속눈썹처럼 갸름하게 뻗어 올라간 추녀 끝 곡선이 청초함과 부드러움을 한껏 드러내는 정림사 석탑.

실제 보면 그 비례와 균형이 주는 담백한 아름다움의 깊이는 아우라라는 기기묘묘한 단어를 명확하게 이해하게 해주는 듯하다.

 


가려진 아름다움과 사랑의 공간, 궁남지와 능산리 고분

 

능산리고분 설경

<능산리고분 설경>


겨울의 초입, 무엇 때문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부여군청을 잠시 들린 적이 있었다.

일을 마치고 건물을 나서는데 작고 예쁜 눈송이들이 하나둘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담배 생각이 나던지 배웅차 따라 나오던 군청 직원이 눈이 오면 부여에서 정말 아름다운 곳이 두 곳이 있다고 말을 하였다.

그곳이 어느 곳이냐고 물었더니 능산리 고분과 궁남지라는 것이다.

궁남지는 부여시내 아래쪽 공원인데, 너무 현대적인 느낌에 스쳐 지났던 곳이고, 고분군은 경주 고분의 여운으로 만남을 뒤로 미뤘던 곳이었다.

바로 인사를 하고 차츰 쌓이기 시작하는 눈길을 달려 먼저 능산리 고분군을 찾았다.


능산리 고분

<능산리 고분>

 

부여 동쪽 교외(논산 방향) 능산리 야산에는, 예쁜 가슴 같이 소담스러운 7기의 고분이 있다.

사비시대(538660)를 열었던 백제의 왕과 왕족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이다.

흔히들 왕릉하면 무령왕릉이나 경주의 대능원을 떠올리게 된다.

이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수학여행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평일에 차츰 굵어지는 눈 때문인지 고분군을 찾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입구부터 고분까지 오직 눈만이 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그 하얀 세상 끝에 소담스럽게 솟아오른 고분들이 아득하게 다가왔다.

고분의 둥그런 곡선은 작은 그늘을 만들어 온통 하얀색인 세상에 그 선만을 유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주변의 단정함 보다 더욱 눈을 잡아끄는 것은 고분들이 만들어주는 부드러운 곡선이라 하겠다.

경주의 대능원에서 보았던 웅장함과는 다른, 소박하지만 더욱 날렵한 곡선과 가까움이 그곳에 있다.

누군가 '백제의 곡선'이라 말했던가. 백제의 항아리, 아니면 백제의 기와나 석탑이나 향로에서

만났던 드러나지 않는 화려함을 간직한 곡선과 미려함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나중에 여름에 다시 찾았을 때 그 푸른 잔디 위로 솟은 고분의 단정한 아름다움은 여전했던 걸로 기억한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무덤은 앞뒤 2줄로 3기식 있고, 뒤쪽 제일 높은 곳에 1기가 더 있어 모두 7기로 이루어져 있다.

고분의 제일 위쪽까지 올라가면 7기의 고분과 함께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 고분을 처음 발굴했던 것은 일제강점기였지만, “관아동십리허유왕릉 官衙東十里許有王陵 관아 동쪽 10리에 왕릉이 있다.”

공주읍지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일찍부터 백제의 왕릉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알려짐은 원치 않는 손까지 초대하는 법이니, 안타깝게도 발굴이 된 시점에 모든 고분이 도굴된 후였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고분을 내려오는 길의 중간에 의자왕의 그의 맏아들 융의 가묘를 만나게 된다.

사비시대의 왕 중 가장 활달하고, 용맹했던 백제 의자왕은 나당연합군과 부하의 배신으로 당나라에 압송된 후 4개월 만에 병사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당나라는 의자왕 묘소에 비석을 세웠고, 당나라 수도였던 낙양 시는 부여군과 자매결연 하면서 부여 융 묘지석 복제품을 기증하였다.

부여에서는 1995년부터 당나라 북망산에 묻혔다고 전해지는 의자왕의 묘를 찾아 현지 조사를 벌인 뒤,

의자왕의 묘로 추정되는 북망산의 흙을 고란사에 봉안하였다가 이곳에 능을 마련하였다.

부드러운 곡선과 시원한 풍경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분들에 비해 한쪽에 조그맣게 자리 잡은 의자왕의 가묘는 쓸쓸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주변의 아름다움에 그 무덤과 생애 그리고 사연에 대한 애틋함이 더욱 커진다.


 궁남지 설경

<궁남지 설경>


고분에 새삼 감탄하고, 다시 부여시내로 들어간다.

그 입구와 같은 남쪽에 궁남지가 조성되어 있다.

고분을 둘러보는 동안 눈을 차츰 그쳐가고 있었고, 연못과 길 사이에는 조금씩 눈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치 흰색 연꽃이 피는 듯한 둥근 원을 곳곳에 새겨놓은 눈과 궁남지의 조화는 고대의 연못을 재현한 듯 모습이었다.


솜털 같은 안개 사이로 청초한 흰빛을 내보일 때나 부드러운 석양빛을 담아 은근한 붉은빛을 풍겨낼 때나

궁남지의 연꽃은 그 자태만으로도 마음을 한껏 채우는 충만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아침은 그 고요함과 은은함이 머리를 맑게 하고, 저녁은 다가오는 어둠에 슬며시 등불을 밝히는 호젓함이 마음을 취하게 한다.

보통 정원 하면 경주의 안압지나 일본의 정원들 떠올리기 쉽다.

놀랍게도 궁남지는 백제 왕궁의 후원으로 안압지보다 40년이나 먼저(674)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정원이다.

왕궁의 남쪽에 있는 연못이라 하여 궁남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백제의 조경 기술은 삼국 가운데 가장 앞서 있었으며, 일본의 정원 문화가 탄생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고 전한다.

궁남지를 만들었던 백제의 건축 기술이 건너가 일본 정원 문화의 원류가 되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도 등장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도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무왕 35(634) 3월 궁궐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여 리에서 물을 끌어들였으며,

네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물 가운데에는 섬을 축조하여 방장선산에 비기었다.”

방장선산은 도교에서 말하는 이상향으로 삼신산(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상징한다.

궁남지의 형태를 방장선산에 빗댄 것으로 보아 축조 당시 이 같은 형태를 통해 불로장생 기원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무왕 393월에 왕과 왕비가 큰 연못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는 기록도 전한다.


궁남지 포룡정

<궁남지 포룡정>


연못 동쪽으로는 당시의 별궁으로 보이는 궁궐터가, 연못 주변에는 별궁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우물과 주춧돌이 남아 있다.

정원은 1960년대까지 자연 습지로 알려졌으며, 주민들에게는 마래방죽이라 불렸다.

그러던 이곳이 왕궁의 후원임이 알려지자 1965~1967년 대대적인 복원사업이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기와 조각과 주춧돌, 우물터가 발견되었다.

1971년에는 연못 안에 포룡정이라는 정자와 목조 다리를 조성했다.

어린 시절 서동이라 불렸던 백제 무왕이 이 일대에서 태어났다.

궁남지 못가에 혼자 사는 여인이 연못 속의 용을 보고 잉태했다고 전하는데,

용은 본래 왕을 상징하는 만큼 서동이 왕가의 후손임을 알리는 설화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로 연못 안의 정자 이름이 포룡정이 되었다.


 궁남지 연꽃

<궁남지 연꽃>


연꽃이 풍성해지는 시기에 다시 궁남지를 찾았던 적이 있다.

연못을 둘러싸고 둥글게 연꽃 밭이 펼쳐지는 이 정원에 들어서면 바깥에서 펼쳐지는 일상의 풍경 대신 두 눈 가득 연꽃이 들어찬다.

국내 최대의 연꽃 단지라 할 만큼 방대한 규모에 가득 찬 연꽃이 사방을 채우기 때문이다.

부지가 넓은 만큼 연꽃의 종류도 다양하다.

50여 종의 연꽃이 피어 있다고 하니 웬만한 연꽃은 이곳에서 다 볼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이곳을 더욱 유명하게 해준 것이 바로 서동과 선화공주의 설화이다.

서동은 왕이 되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연못을 파고 아름다운 정원을 꾸며 주었으니,

그 로맨틱한 사랑의 결실이 지금의 우리의 마음에까지 낭만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백제의 이야기에는 가슴 저린 이야기와 전설 그리고 역사가 새겨져 있고,

지금까지도 우리를 감탄하게 만드는 백제인의 섬세한 기술과 문화가 그 아래에 깔려있다.

옛 백제의 땅인 공주와 부여를 찾는 것은 그 문화를 찾아가는 슬기로운 시간 여행이자,

우리 핏속에 흐르는 예술가의 감성을 깨우는 여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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