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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인천의 공장카페에서 낡은 것의 새로움을 만나다 스크랩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with 이철호 작가



인천의 공장카페에서 낡은 것의 새로움을 만나다


-인천 중구 개항로 프로젝트- 

-인천 가좌 코스모40-

-인천 강화 조양방직-



중구 개항로

<중구 개항로>


인천은 대표적인 항구이자, 개항의 길목이다 보니 전통과 근대의 유적이 유달리 많은 도시가 되었다.

당연히 시간이 남긴 다채로운 기억을 만나기 좋은 도시인데, 요즘은 근대 산업의 공간을 새로운 문화의 거점으로 만들어서 더욱 인기가 높다.

낡음에서 새로움을 찾은 그 현장을 찾아 길을 가던 중 옛 기억이 하나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나고 자란 곳이 제법 큰 항구도시였기에 집에서 멀지 않은 수산센터의 낮고 넓디넓은 1층 건물은 고향을 생각하면 먼저 기억나는 곳 중의 하나였다.

새벽에 들어온 생선이 나무궤짝에 담겨 도시 곳곳으로 팔려나가던 건물은,

트럭이 세우기 좋은 높이에 소통을 위해 단단한 기둥만이 듬성듬성 채워져 있던 곳이었다.

왠지 삭막하면서도 새벽이면 활기를 되찾던 묘한 분위기의 그 건물에 대한 이야기를 간만에 고향을 내려갔다가 우연히 얻어 듣게 되었다.

도시가 차츰 현대화되면서 센터의 그 건물도 허물고 다시 세련된 유리 건물로 다시 만든다는 것이다.

요즘 그렇게 넓은 건물, 기둥만이 남겨진 텅 빈 건물을 만나기 쉽지 않고, 노동과 시간이 거칠게 입혀진 그 공간의

독특한 풍경과 분위기가 아까워 그대로 이용하지 왜 허무냐며 한마디 거들기도 했다.

그러자 동네 어르신들이 그 건물이 뭐 볼게 있다고 그대로 두냐면서 이상하고 철없는 아이를 보듯이 타박하는 것이었다.

 

빠르게 근대를 거쳐 온 대한민국에서 오래된 건물, 낡은 동네에 대한 시선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와 같았다.

그러던 것이 세대가 거듭되고, 문화에 대한 시선이 넓어지면서 점차 이전과는 다른 풍속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듯했다.

레트로 열풍이나 아날로그의 부활 그리고 라떼의 전성시대는 응답하라시리즈와 토토가등과 함께 우리 주변을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옛 산업의 흔적마저도 문화의 소품으로 이용할 정도로 우리가 다채로워졌다는 뜻이니,

그 현장을 본다는 것은 우리가 기억을 바라보는 시선의 첨단을 만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인천 근대의 도전, 개항장 프로젝트

  

근대의 유산이 젊음의 문화와 가장 잘 만나고 있는 곳이 바로 인천 중구의 개항장거리인 듯하다.

중구청을 주변으로 근대역사의 흔적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으며, 한쪽으로는 차이나타운을,

또 다른 한쪽에는 개항로의 다채로운 풍경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12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애관극장과 답동성당 사이를 가로지르는 개항로는

오래된 일상이 어떻게 현대의 문화이자 우리의 유산이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중구 답동성당

<중구 답동성당>


개항로의 터줏대감은 1889년부터 언덕위에 자리 잡고 있는 인천 답동성당(仁川畓洞聖堂, 사적 제287)과 지금은 애관극장으로 불리는,

1895년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극장이자 공연장인 경동 협률사라고 하겠다.

인천의 옛 이름이었던 제물포는 외국의 군대와 문물과 함께 종교가 처음 이 땅에 들어오고 자리 잡던 통로였다.

한국의 성당 중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 하나로

구한말 1897년에 처음 건립되고 1937년에 증축된 답동성당은 당시의 풍경을 말해주는 상징인 것이다.

건립 때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다움을 여전히 보여주는 성당은 당시의 화려한 문화와 종교적 위용과 함께 인천의 역사적인 건축물로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그 아래에 위치한 애관극장의 전신인 경동 협률사는 우리나라 최초 국립극장이라는 서울 정동 협률사보다

7, 1907년 문을 연 종로의 단성사보다는 12년이 앞서 세워진 곳이다.

부산 출신 사업가 정치국이 세운 이 극장은 청일전쟁(1894~1895) 중 지어진 창고를 개조해 만들었으며

이후 '축항사(築港舍)'로 이름을 바꿨다가 '애관(愛館)'으로 개명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조금 익숙한 외관과 다르게 그야말로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산증인 셈이다.


애관극장 

<애관극장>


이 두 터줏대감이 마주한 사이로 작은 도로가 지난다.

1부두에서부터 배다리 헌책방거리까지 이어지는 이 거리가 개항로인데, 다양한 시간과 문화가 흐르던 곳이었다.

그렇지만 근대에서 현대로 시간이 급격히 변하면서 사람들이 떠나고, 무관심 속에서 건물을 방치되어 가자

이곳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일련의 작업이자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개항로 프로젝트라 불리는 이 발 빠른 움직임으로 원래 점집이 있던 자리는 메콩사롱이 되었고옛 이비인후과는 카페 브라운핸즈가 되었다.

그렇게 그 공간의 이야기와 시간을 그대로 간직한 채 새롭게 문을 연 이탈리안 레스토랑 마틸다,

동남아 비스트로 메콩사롱, 갤러리 플레이스막 등은 지역의 새로운 명소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것이다.


카페 브라운핸즈 외관 

<카페 브라운핸즈 외관>


낡은 노란색이 유난히 도드라지는 4층 건물의 단정한 창문들 사이에 브라운핸즈라는 상호와 함께 커피와 빵이 있다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병원 접수대가 그대로 남아 있고, 커다란 월중행사표’, ‘인천 로타리 클럽이라고 새겨진 벽거울, 금이 간 벽,

깨진 타일은 물론, 병원에서 사용하던 사무용품과 사물함이며 서류함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스티커까지 1층부터 4층까지 가득 채우고 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과 어우러지는 공간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는 식물들이다.

그 식물들은 부서진 벽과 벽돌 그리고 낡은 가구를 좀 더 생생하고,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브라운핸즈는 말 그대로 건물 전체가 시대의 흔적이자 이 거리의 역사이며, 동시에 그때와 지금의 문화를 연결하는 통로가 된 듯하다.

  


코스모40, 거리의 문화를 바꾸다

 

코스모40 외관

<코스모40 외관>


경제의 통로이자 다양한 삶과 산업의 현장이 가득했던 인천에는 개항로 프로젝트와 같은 문화적인 도전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인천 최초의 공장카페로 이름을 알린 카페 발로는 영화의 촬영지로 인기가 높고,

가좌동의 거리문화의 변화를 선도하고 있는 코스모40은 젊은 세대의 기호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코스모40이 있는 가좌3동 장고개길 일원은 아직도 시간이 멈춘 듯한 오래된 공장지대가 유지되고 있는 곳이면서도,

가장 이색적이면서 힙한 가좌 문화 역사의 길'로 발전하고 있는 곳이다.

 

인천 서구의 대표적 원도심인 가좌동의 변화는 지난 201810월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아직도 '건지골', '개건너', '신진말' 같은 옛 지명들이 건재한 가좌동에는 다양한 형태의 주거지와 함께

그 북쪽에 '코스모화학단지'라고 불렸던 대규모 공장단지와 공장지대가 공존하던 지역이었다.

그러다 2016년 코스모화학이 울산으로 이전하면서 그 부지가 다른 공장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는데,

그중 40번째 공장이었던 부지를 가좌동에 13대째 거주했던 한 터줏대감과 커피 브랜딩 전문가가 합심해 복합문화시설인 '코스모40'의 재탄생시킨 것이다.


사실 코스모40은 그 간판이 아니면 쉽게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자세히 보면 세련된 외관과 독특한 간판이 눈에 들어오지만, 회색빛 도심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공장이나 사무실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코스모40 3층 카페라운지 구관

<코스모40 3층 카페라운지 구관>


그렇지만 잘 단장된 주차장에서 건물을 보면 먼저 3층으로 한 번에 오르는 외벽의 긴 계단이 들어온다.

마침 그 아래에서 어떤 커플이 사진을 찍고 있다. 모델 같아 보이기도 하고, 아마추어 사진가들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철근과 무심한 듯한 벽 그리고 외골격이 선명하게 보이는 계단이 세련된 외부 스튜디오처럼 보이게 한다.

그 옆 유리문을 들어서면 건물의 중간쯤 투명 유리로 되어 외부를 볼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보이고,

공연장 등으로 사용되는 문화공간의 입구가 보인다. 메인홀로 사용되는 1~2층은 전시장, 세미나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진행하는 공간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카페 라운지인 3층으로 올라선다.

먼저 앞으로 길게 뻗은 카페의 공간이 보이고, 그 옆 통유리로 구분된 너머로 옛 공장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구관도 얼핏 보인다.


카페 라운지에는 커피, 맥주, 피자, 베이커리 등이 입점해 있다.

긴 통로를 지나면 자 모양으로 테이블이 세팅되어 있고, 그 위로 계속 새로운 빵이 올라온다.

보기만 해도 눈과 마음이 즐거워지는 다채로운 모양과 재료의 크로와상이 가득하다.

아무리 공간이 좋아도 카페는 본연의 맛과 스타일이 있어야 되는 법인데,

코스모40은 옛 공장이라는 공간의 특징에 더해 맛있는 크로와상으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고 한다.

 

유리벽 옆 자리에 앉으니 구관 쪽에서 진행하고 있는 촬영팀의 모습이 보인다.

코스모40 등 옛 공간을 활용한 카페는 항상 이렇게 촬영과 임대가 진행되고 있으니 미리 알아보고 가는 것이 좋다.

모델과 사진가가 왔다 갔다 하는 사이로 옛 공장의 골격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온다.

천정에는 대형 크레인이 거칠고, 투박한 모습 그대로 달려 있고, 4층 커뮤니티 홀로 오르는 철로 된 계단과 난간이 그 주변을 감싸고 있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인테리어의 신관보다는 옛 모습 그대로 낡고, 거친 구관이 더욱 이용객이 몰린다고 하니,

이 공간에서 찾는 우리의 관심과 즐거움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코스모40 3층 카페라운지 야외정원

<코스모40 3층 카페라운지 야외정원>


카페의 뒤로는 작은 정원이 꾸며져 있다. 주변 공장의 굴뚝이 보이고, 4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그 위로는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을 받아 낡았지만 화려하게 빛나는 공장의 모습이 조용히 찾는 이들을 반기고 있었다.

공장의 굵직한 골격과 고철이 되어버릴 법 했던 폐공장의 자재들은 여기서 예술작품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누군가 그렇게 만든 게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기억과 풍경을 다시 활용하면서 공간과 문화를 새롭게 창작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코스모40에서 본 가좌동 공장지대

<코스모40에서 본 가좌동 공장지대>


코스모40은 오픈하자마자 전국적인 유명세를 떨쳤다고 한다.

공간도 특이하고 정겹고, 음식도 맛있지만거기에 더해 3년여 기간 동안 다양한 전시회와 콘서트,

디제잉 파티, 마켓, 스케이트보드 대회 등 문화 이벤트를 개최했기 때문이다.

비록 요즘은 코로나19 유행으로 적극적인 문화행사를 열지 못하고 있지만,

코스모40에서 시작된 문화와 예술의 활성화는 가좌동 공장지역으로 조금씩 확산되고 있다.

갤러리 카페 등이 새롭게 들어서고, 청소년센터와 상담복지센터도 개소하였으며,

가좌플레이그라운드를 개최하면서 문화예술마을로 점차 변하고 있는 것이다.

낡은 공간의 기억은 젊은 예술가를 불러 모으는 힘이자 창작의 발전소가 되어 있다. 전통의 보존, 기억의 가치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 비록 이곳들은 문화재로 지정은 되지 않았지만, 시간과 세대의 어울림 속에 가장 화려한 문화유산으로 남겨질 것이다.

 


강화 조양방직, 보존과 변화의 조화

 

조양방직 외관

<조양방직 외관>


강화도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 그대로 직진을 하면 오래지 않아 읍내가 나온다.

작은 마을인 듯 도로는 좁고 높이는 낮은데, 세련된 카페와 음식점이 적지 않게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세련됨 사이의 시간과 전통을 풍부하게 간직한 곳이 바로 강화읍내임을 잠시 둘러보면 알 수 있다.

읍내 중간에서 오른편 골목으로 들어가면 오래된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나온다.

고려궁지부터 성공회 한옥성당 등 고려와 조선 그리고 개항기의 풍경이 촘촘하게 그곳에 몰려 있다.

맞은편은 근대 이후 산업의 공간이다. 방직공장 등이 빼곡하게 들어서 전국으로 풀려나갔던 곳으로,

강화도 최초의 근대식 공장이었던 조양방직과 소창기념관과 소창거리 등 작고, 독특한 건물과 공장 등이 이어지는 곳이다.

특히 일제강점기였던 1933, 강화도 갑부였던 홍재용, 재묵 형제가 세운 조양방직은

1958년까지 강화의 직물산업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공장이었다.

다리도 없던 외딴 섬에 공장이 문을 열면서 강화도에 전기와 전화 시설이 들어왔다고 하니,

그 영향력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된다. 다만 조양방직의 영화는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설립 10여 년 만에 경영권이 넘어갔고, 그마저도 1958년에는 문을 닫게 되었다.

이후로 단무지 공장과 젓갈 공장 등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그나마도 1980년 이후에는 사용하는 이가 없어 거의 폐허가 되었던 곳이다.

그렇게 터와 골격만 남아 화려했던 시절을 추억하던 조양방직의 인생유전은 2018년 리모델링을 거쳐 카페로 재탄생하면서 새롭게 시작되었다.


조양방직 카페 내부에서 본 외부 공터

<조양방직 카페 내부에서 본 외부 공터>


읍내를 관통하는 도로가 끝이 가까워질 즈음 왼쪽으로 작은 도로로 이어지고,

그곳에서 바로 골목으로 안내하는 표지판을 만나게 된다.

그 안내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면 옛 공장의 철문과 담벼락이 보이고

그 너머로 낡은 버스의 지붕과 여기가 공장이었음을 보여주는 녹슨 기자재 등이 얼핏 나타났다 사라진다.

공장의 뒤편은 주차장이고, 담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에 '신문리 미술관, 조양방직'이라고 쓰인 철제 간판과 대문이 있다.

입구에 서서 보니 오른편으로 작은 건물이, 왼편으로 커다란 공장의 본관인 듯한 건물이 보이고

그 사이로 좁지도 넓지도 않은, 다양한 소품으로 채워진 광장이 보인다.

길을 안내하는 듯한 여러 안내판을 보면서 먼저 옆 건물에 들어서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US ARMY'라고 쓰인 번호판을 단 낡은 버스, 부서져 가는 타자기와 아코디언, 오래된 목마와 낡은 재봉틀,

빛바랜 영화 포스터와 흑백사진 등 다양한 소품들이 옛 건물의 낡은 벽과 창문과 어우러져 새로운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작은 건물은 공터로 다시 통 빈 작업장과 같은 건물로 이어진다.

그 건물을 나서면 다시 처음 입구에서 봤던 광장과 본관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카페가 나오고,

주문을 하고 바로 이어진 예전의 공장 건물로 드디어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감동한다. 그 광활함이라니...


조양방직 작은 전시장

<조양방직 작은 전시장>


방직기가 가득했을 공장은 텅 비었고, 나무기둥과 지붕만이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예전에 썼을 법한 재봉틀은 그대로 탁자가 되었고,

어디선가 수집되어 온 나무와 여공들의 작업대는 길고 긴 탁자가 되어 넓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면장갑을 비롯한 각종 소품과 그림은 화려한 조명 아래 새로운 모습으로 벽을 장식하고 있었고,

이어지는 통로에는 당시를 보여주는 흑백사진이 이 공간의 역사를 이야기해주듯 전시되어 있다.

실용적이고 단순한 건축은 시간의 보살핌에 따라 독특한 문화를 보여주는 곳이 되었고,

다양한 노동을 위한 시설은 소통과 문화를 위한 소품이 되었다.

그 사이로 기발한 예술품과 장식이 이어지니 그 모습을 보고, 상상하고,

나누다보면 공장을 거니는 것 자체가 역사와 창작의 산책로가 되는 듯하다.


조양방직 작은전시장 옛기계실.

<조양방직 작은전시장 옛기계실.>


길은 다시 밖으로 이어진다. 다리미의 손잡이를 활용한 작은 문을 나서니 또 다른 건물이 준비를 하고 있다.

그곳에는 추억의 소품들이 가득한데, 구석의 방에는 텅 빈 공간에 홀로 남겨진 신발과 함께

거대한 남근상이 옛 보일러실의 둔탁한 기계 사이의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아빠와 함께 온 아이가 오래된 장난감과 구슬이 쌓인 통 앞에서 문득 물어본다.

아빠, 언제 가?” 아빠의 세대에게는 이 모든 게 기억을 재생시키는 소품들이지만,

아이들에게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예술품의 전시장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든 든다.

아이들과 이 추억을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 요즘 유행하는 <오징어게임>처럼 당시의 놀이와 시간을 체험해보는 게

하나의 방법일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면서 다시 공터로 나온다.


조양방직 카페내부

<조양방직 카페내부>


이제 조양방직은 주말이면 3천여 명의 방문객이 찾는 강화도의 명소가 됐다.

모습은 바뀌었지만, 잊힌 강화의 직물 산업 역사를 재조명하고 관광객을 끌어들이면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도시재생의 모범 사례로 꼽히면서 그와 비슷한 산업공간을 재구성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조양방직 옆 골목 역시 그런 곳 중의 하나이다.

예전 60여 곳에 달했던 강화의 직물산업과 공장이 빼곡했을 골목은 이제 한가로워졌다.

1970년 중·후반부터 합성섬유를 생산하는 대구로 중심이 옮겨가면서 강화의 직물 산업은 쇠락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소규모 공장 10여 곳만이 남아 그 명맥을 잇고 있는데, 강화는 당시의 흔적을 모아 소창거리라는 이름으로 꾸며놓았다.

소창이란 줄무늬 또는 바둑무늬를 나타내거나 흰색으로 된 거친 면직물로 예전에는 기저귀, 침구 등으로 정말 많이 쓰였던 것이다.

소창거리는 당시의 산업뿐만 아니라 우리를 키웠던 어머니의 모습까지 추억할 수 있는 곳이라 하겠다.

조양방직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당시의 기계와 풍경을 모아 소창박물관으로 꾸며 놓았으니,

함께 둘러봄이 아이들과 추억을 공유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될 듯하다.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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