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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하늘과 화약의 이야기에서 과학의 시대를 보다 스크랩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with 이철호 작가



하늘과 화약의 이야기에서 과학의 시대를 보다

 

-경주 첨성대-

-경주읍성과 비격진천뢰-

-영천 최무선과학관과 천문대-

 


한때 동양 위인전을 기획해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자라고, 그 아이들이 닮고 싶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서관과 서점을 둘러봐도 교과서에 나오는 몇몇 유명한 인물을 제외하고는

동양에서 자신만의 길을 걸었던 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 적었다.

세계 최초의 병원, 의학의 아버지, 화약을 비롯한 세계를 제패했던 놀라운 발견과

발명의 기록을 만나기 쉽지 않은 환경에서 살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역사 속 놀라운 상상력과 기술의 현장을 만나보려고 한다.

비록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주지는 못해도 우리의 재능을 다시 볼 수 있는 뿌리와 시선을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별의 사랑하는 민족의 남겨진 상징, 첨성대 瞻星臺

 

21세기의 한국인은 그리스로마신화에 환호하고, <인터스텔라>, <그래비티>, <스타워즈>, <어벤저스> 등 우주를 배경으로 한

모든 영화가 연달아 히트한 유일한 국가로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이쯤 되면 취향을 넘어 누천년을 이어온 혈관 속에 별을 사랑했던 전통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보는 게 인지상정이라 하겠다.


경주 대릉원 황남대총

<경주 대릉원 황남대총>


별과 우리의 만남은 고대의 시간까지 흘러간다.

가장 생생한 고대의 이야기가 숨 쉬는 공간,

경주의 대릉원을 찾는 이유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은밀한 그 이야기를 들어보기 위해서이다.

사실 경주 대릉원 주변은 언제 봐도 놀라운 관광지이다.

사람들과 차가 쉴 새 없이 지나는 공원처럼 꾸며진 봉황대에서부터 길 건너 담장 속 대릉원에는

황남대총, 천마총을 비롯한 다양한 고분들이 조용히 쉬고 있다.

그 너머로는 넓디넓은 잔디 광장 가운데 첨성대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주변으로 연꽃과 유채꽃들이 가득한 꽃밭을 지나면 동궁과 월지가 나오고,

작은 동산을 넘어가면 문화의 공간이 인기 높은 교동과 경주 국립박물관을 만나게 된다.

슬쩍 지나는 고분 하나에도 놀라운 시대와 인물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고,

거기서 발견된 금관과 유물들은 그 기술과 숫자에서 세계에 비할 바가 없는 것들이다.

특히 짙푸른 하늘 사이로 별이 하나둘씩 떠오르고, 조명이 화려한 빛을 쏘아 올리면

고분과 첨성대는 신비한 세상으로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이끌어주는 듯하다.

그 주변을 거닐면 고대의 일들은 생생하게 살아나고, 상상은 일상이 되고, 별의 전설은 역사가 되어 다가오게 된다.


첨성대 낮

<첨성대 낮>


우리의 선조들은 북극성을 하늘의 구심점으로 삼아 1년 동안 계절에 따라 7개씩 천구의 적도 주변에

나타나는 별자리를총 28개로 구분하는 적도 28수로 하늘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여기서 宿는 잠자리를 뜻한다.

달이 약 28일 동안 궤도를 따라 지구 주변을 공전하는 동안 날마다 머물러 잠드는 각각의 하늘 자리를 일컫는 것이다.

1수에서 출발한 달은 약 한 달이 지난 사이에 28수를 지나 다시 1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1수 자리가 위치한 북쪽의 밤하늘에는 북두칠성과 토성이 있고,

하늘의 신이 천상과 지상을 오갈 때 이용한다는 사다리 삼태육성三台六星도 있다.

또는 15수가 있는 남쪽 밤하늘에는 은하수가 흐르고, 견우와 직녀가 서로 만나지 못한 채 생활하고 있다.

바라보면 무병장수하게 된다는 남극노인성도 보인다.

오랜 전설과 상상은 여전히 우리에게 생생하게 남아 있다.

고분 속의 벽화나 익숙하게 스쳐간 다양한 유물은 우리가 별자리를 꼼꼼하게 관측하고,

기록하고, 또 우리 삶을 그것과 동화시켜갔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양의 별자리 적도 28수가 신들의 세계이며, 이야기의 보물창고이며 농토에 기댄 우리의 삶을 안내하는 가이드라 할 수 있으니,

그에 따르면 첨성대는 그때를 보여주는 통로이자 학교이며 상징인 셈이다.


첨성대 야경

<첨성대 야경>

 

첨성대가 천문관측기구가 아니라 종교재단이라는 주장도 있고, 단순히 상징적인 탑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건 우리가 간직한 별의 기억은 언제나 상상이 넘치는 이야기의 세상과 닿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나오는 천문 관련 기록은 첨성대에서 천문을 관측했음을 말해주고 있는데,

첨성대를 세운 선덕여왕 대를 기준으로 천문기록의 양이 무려 4배나 늘었다고 한다.

또 첨성대의 모양과 구조와 천문의 연관성은 항상 다시 들어도 놀랍기만 하다.

첨성대를 만든 365개 안팎의 돌은 1년의 일수를 나타내고, 꼭대기 우물 정()자 모양의 돌은 음력 한 달의 날수와 일치한다고 한다.

또 가운데 창문을 기준으로 상단 12단과 하단 12단으로 나뉘는데 이는 각각 112, 합치면 24절기에 말하는 것이다.

결국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역시 첨성대를 통해 하늘을 바라봤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첨성대 주변 공원과 고분 야경

<첨성대 주변 공원과 고분 야경>


또 우리에게 남겨진 기록은 하늘에 대한 우리 민족의 관심과 과학은 신라시대 뿐이 아니라,

시대를 넘어 계속되어 왔음이 기록이 알려주고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평양성 안에 9()9()가 있는데…… 그 못가에 첨성대가 있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평양의 첨성대 옛터가 평양부 남쪽 3()에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도 강화도 마니산(摩尼山) 정상의 참성단(塹星壇)의 기록과 터,

그리고 개성만월대(滿月臺) 서쪽에 첨성대라고 구전(口傳)되는 석조물이 전해오고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서운관(太卜監太史局을 합친 것)을 확충하여 간의(簡儀장영실과 이천 등이 만든 관측기)를 비롯한

천문기기를 10여 종이나 만들어서 설치하고 관측하였다고 한다.

조선의 유학자들 또한 천체의 운행에 관한 서적이 새로 나왔다고 하면 앞 다투어 중국에 건너가 구해오곤 했다니,

첨성대 이후로 별을 사랑한 우리 민족의 열정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처음 상상과 신화에 기반을 둔 점성학에서 출발한 천문학은 점차 과학의 힘과 기술을 더함으로써

일상에 점차 꼭 필요한 천문학이자 역학(曆學)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대를 사는 우리는 매일 밤,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도 밤하늘 속에서 두 번째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

남극노인성이라는 것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던 별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는 것 같다.

영천 천문대에서 한 교수는 말했다.

집집마다 하늘을 볼 수 있는 천체망원경을 하나씩 가진 서구와 달리

우리는 천체망원경을 하나 구입하기도 힘든 환경에 살고 있다고.

어쩌면 전통을 잊어버린 후손들의 불민함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점차 기울어지면서도 여전히 천년을 지키고 있는 첨성대는 고대의 임금과 전설 사이에서

별을 사랑했던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보여주는 상징이자 경종인 셈이다



경주읍성(慶州邑城)과 비격진천뢰

 

경주읍성

<경주읍성>


대릉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경주역이 있다.

예전에 아직 시골도시의 모습을 닮은 경주의 시장과 골목이 좌우로 뻗어나가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전 낡은 건물과 자유분방하게 가지를 치던 골목은 새롭게 단장되었으며, 도로는 좁지만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다.

그 잘 포장된 도로를 따라 골목을 들어서면 새로 쌓아 올린 게 확실한 깔끔하고 긴 성곽을 만나게 된다.

2030년 완성을 목표로 복원되고 있는 경주읍성이 바로 그곳이다.

사실 신라시대로만 기억되는 경주는 통일신라시대 이후 지방통치의 중심지였다.

고려시대에는 동경유수관(東京留守館), 조선시대에는 경주부아(慶州府衙)가 있었던 곳이다.

경주읍성은 역시 1012(고려 현종 3)에 축성된 이래 조선시대 태종과 세조 때 다시 지어졌고,

1597년 정유재란 때 성내의 객사가 불에 탔지만 1632(인조 10)에 허물어진 성벽을 중수하고

성문도 다시 세울 정도로 국가의 세심한 관심을 받던 곳이라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1746(영조 22)에 다시 개축된 경주읍성은 성의 둘레가 약 2,300미터였다고 한다.

읍성 내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을 모신 집경전(集慶殿), 관아 등의 건물이 있었다.

동서남북에 향일문(동문), 망미문(서문), 징례문(남문), 공진문(북문)이 각각 있었고,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해자도 갖추고 있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제대로 된 읍성이었고, 대단한 규모를 자랑했던 것인데,

시련에도 계속 자신을 높여가던 경주읍성은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동쪽 성벽 90미터 정도만이 남아 있을 정도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성벽 한쪽에 전시된 옛 유구들은 읍성을 거쳐 간 시간의 거셈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경주읍성 문루 

<경주읍성 문루>


경주가 관광객이 넘쳐나는 곳이고, 경주 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만 동성벽과 향일문 등이 복원되어

옛 모습을 조금씩 갖춰가는 경주읍성 주변은 그 번듯한 모습과 달리 한적하고 조용하기만 하다.

어디선가 놀러온 듯한 가족과 아이들이 문루 주변을 오르내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먼지 하나 없어 보이는 이 성벽과 그저 지나는 차량 소리만 들리는 읍성의 주변은 사실 임진왜란 때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던 곳이며,

당시로서는 놀라운 신무기였던 비격진천뢰가 처음 세상과 왜군에게 그 선을 보였던 전장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경주읍성 유적

<경주읍성 유적>

 

1592414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421일에 이미 경주성에 이르렀다.

경상좌병사 이각은 먼저 퇴각해버리고, 성문 앞에 들이닥친 왜군의 위세에 압도당한 관군이 성을 포기하면서 왜군은 경주성을 무혈입성하게 된다.

그리고 경주성 수복을 위해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박진이 경주판관 박의장, 의병장 권응수, 정세아 등을 모아

1592820일 경주성 부근까지 진군했지만 사전에 움직임을 포착하고 있던 왜군의 매복과

포위공격에 제1차 경주성 전투라 불리는 수복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박진은 포기하지 않고 재차 성 탈환에 나섰다.

1차의 실패를 교훈삼아 밤 박진은 97일 경주판관 박의장을 선봉장으로 하여 병사들을 성 밑으로 보내 잠복시켰다가

비격진천뢰를 발사하여 포탄이 성 안에 있는 객사 뜰에 투하되도록 했다.

비격진천뢰는 선조 임금 때 군기시에 소속된 화포장이었던 이장손(李長孫)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제작한 것이다.

오늘날의 박격포와 비슷한 비격진천뢰는 인마살상용 폭탄이며,

대완포구로 발사하는데 사정거리는 500~600보 정도였다고 한다.

둥근 공 모양의 형태에 표면은 무쇠로 처리를 했으며, 내부는 화약과 철 조각(빙철) 등을 장전하도록 되어 있다.

적진에 떨어지면 잠시 시간이 흐른 뒤에 폭발하는데 이때 파편이 튀어나가 살상하도록 설계된 일종의 시한폭탄이다.

비격진천뢰를 성중에 터뜨리니 무수한 일본군이 불에 타 죽었다는 관감록의 기록은 바로 제2차 경주성 전투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나중에는 비격진천뢰의 폭발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목곡을 발명함으로써 더욱 강력한 공격무기로 개량하기도 했다.

비격진천뢰로 혼란에 빠진 왜군은 곧바로 퇴각을 하였고,

의병들은 경주성을 탈환함으로써 영천에서 경주로 통하는 적의 후방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별의 고장, 영천의 최무선과학관


최무선과학관 야외전시와 본관

<최무선과학관 야외전시와 본관>


조선시대 화약은 사용이 가능한 기술이자 무기였고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고려시대의 화약은 원나라만 간직한 미지의 기술이자 공포와 선망의 무기였다.

그래서 몽골에 대한 두려움을 가슴 깊게 간직한 주변의 국가들은 화약을 만드는 방법을 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또 그런 만큼 제국은 자신의 무기를 지키기 위해 더욱 문을 걸어 잠갔다.

그 금단의 과학이었던 화약은 조선을 거치면서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무기가 되었다.

활을 잘 쏘는 민족이던 동이는 귀신같이 포를 잘 다루는 군대를 청에 파견해 러시아와 만주 등지에서 용맹을 떨쳤다.

거북선의 놀라운 무용담도 이순신의 놀라운 용병술과 함께 다양한 화포와 총포류에 기인한 바가 적지 않다.

당연히 화약을 이 땅에 가져온 것은 바로 불을 가져온 프로메테우스에 비할만한 일인 셈이다.

그리고 그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별의 도시이기도 한 영천의 한 시골마을에서 만나게 된다.

하늘이 가장 안정적이기에 천문대가 있고, 매년 별빛 축제가 열리는 도시는 최무선이라는 놀라운 과학자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최무선과학관 야외전시장

<최무선과학관 야외전시장>


화약의 아버지이자 고려시대의 무관이며 과학자였던 최무선은 고려 말에 현재의 영천인 마단에서 태어났다.

그때의 마을 이름은 창수리였다고 전해진다.

당시는 왜구의 노략질이 극에 달한 시기였고,

왜구의 악행에 개경에 자주 계엄령이 내려졌으며 내지인 철원으로 천도론이 이야기 될 지경이었다.

그때 최무선의 아버지는 예성강 하구를 통해 개성을 비롯한 전국으로 운반되는 곡식을 책임지던 광흥창에서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배로 운반하여 관리들에게 봉급을 나누어 주던 관리였다.

왜구는 예성강으로 통하는 서해안 여러 항구의 쌀과 곡식을 노렸고,

그때마다 최무선의 아버지는 가슴을 칠 수밖에 없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자란 최무선은 일찍부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왜구를 제어하는 데는 화약만한 것이 없는데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 당시 화약 제조법은 중국의 국가 기밀이었고,

고려에서는 중국으로부터 약간의 화약을 얻어와 간단한 병기와 불꽃놀이에 쓰는 정도였다.

 

최무선은 오랜 연구 끝에 초석과 버드나무 숯 그리고 유황을 섞어 화약을 만든다는 것을 알아냈으나,

각 원료를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또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특히 가장 중요한 원료인 초석이 문제였다.

미치광이 소리를 들어가며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는 결국 더 이상은 혼자 힘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걸 절감했다.

그래서 최무선은 원나라 사람을 찾기 위해 예성강 하류 벽란도로 가서 무턱대고

배에서 내린 사람들을 붙잡고 화약 만드는 법을 아는지 묻고 다녔다.

그러기를 몇 년,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유명인사가 된 그에게 원나라 상인 한 명이 다가와

보름 후 화약을 만드는 관청에서 근무했던 이원이라는 사람이 벽란도로 올 것이라는 정보를,

그가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전해주었다. 몇 년간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이원을 설득하기 위해 최무선은 이원의 모든 것을 다 챙겼고, 생활에 어떠한 불편함도 없도록 노력하였다.

결국 이원은 점차 최무선의 정성에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결국 초석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때가 우왕 2년인 1376년이었고, 최무선은 이미 50세를 훌쩍 넘었을 때였다.

그렇지만 그가 얻은 지식과 그간의 실험을 토대로 화약 및 화기 제작을 담당하는 화통도감이 설치되었고

곧 대장군포, 이장군포, 삼장군포, 육화석포, 화포, 신포, 화통, 화전, 철령전, 피령전,

질려포, 철탄자, 천산오룡전, 유화, 주화, 촉천화 등 다양한 포와 화약을 이용한 화살 등이 개발되었다.

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하는데,

고려시대의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포대첩의 승리는 최무선에 의한 신무기 개발의 성과였다.

 

최무선과학관 상설전시

<최무선과학관 상설전시>


최무선과학관은 최무선 장군(경북 영천, 1325~1395)의 이야기를 기념하고,

미래의 주역인 어린이를 위한 기초과학 체험의 장 제공을 위해 2012년 만들어졌다.

영천의 한적한 시골마을을 한참 달리면 어느 순간 넓은 대지 위에 독특한 건물과 함께 다양한 무기들이 전시된 곳을 만나게 된다.

바로 최무선과학관이다.


먼저 만나는 야외 전시장은 마치 화포가 고려를 지켰다면,

이제 자신들이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에서 사용되었던

장갑차, , 팬텀비행기, 헬기, 수륙장갑차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아이들은 전시관 보다 헬기를 기웃거리고, 탱크 위를 둘러보면서 더욱 즐거워한다.

연못을 건너 전시관 들어가면 1층 시청각실에서는 최무선 장군의 화약무기 개발과 진포대첩에 관한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으며,

2층의 상설전시관에는 최무선의 생애와 그가 개발한 무기 등이 자세하게 전시되어 있다.

또한 스크린 터치를 이용한 퀴즈게임, 불꽃놀이체험과 시뮬레이션게임인 화포체험, 입체교구를 통한 창의과학 체험 등을 할 수 있는 체험실이 있다.


최무선과학관 상설전시 신기전

<최무선과학관 상설전시 신기전>


사방이 무기고 전쟁 이야기지만 심각하지 않게, 가볍게, 재미나게 둘러볼 수 있는 곳으로 꾸며놓은 듯하다.

인상적인 것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 벽을 장식하고 있는 우리나라를 빛낸 과학자 28인의 부조와 소개였다.

최무선, 세종대왕, 장영실, 허준 등 교육과학기술부가 선정한 인물이 과학이 결코 우리와 멀지 않았음을,

우리 아이들이 알고 또 배워야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음이 반갑기 때문이다.

지금도 대한민국의 국가대표는 양궁과 사격에서 놀라운 성적을 거두고 있으며,

수학과 과학 올림피아드에 나선 청소년들은 세계를 감탄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나 그 후보마저도 드물기만 한 나라가 되었다.

최근 대학 총장들이 수학과 기초과학에 대한 학습능력의 우려로 대입시험에 수학를 넣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지만,

대입경쟁률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학교 행정 쪽에서는 반대를 한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우리에게 과학이나 재능이나 역사가 없는 게 아니라, 그를 위한 환경과 알려고 하는 노력이 없는 게 아닐까 문득 생각해본다.

집집마다 천체망원경을 하나씩 사지는 않더라도 우리 과학자와 놀라운 성과는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한

노력만이라도 여행에 곁들여보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로 드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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