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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동학농민군과 함께 걷는 길 스크랩



동학농민군과 함께 걷는 길

 

-고창 무장읍성-

-선운사와 전봉준 생가터-

-백산-

-전봉준 고택과 황토현전적지-


가을은 풍요의 계절이다. 그렇지만 인류는 풍요의 의미를 깨닫자마자 항상 부족함에 시달렸던 듯하다.

어떤 이들은 그게 삶이라면서 받아들이지만, 어떤 이들은 불편부당을 외치면서 과감히 행동하기도 했다.

가끔 그 행동은 시대의 외침과 어우러지면서 사회의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우연하게 시작된 필연적인 우리 역사의 현장 중 가장 격정적인 드라마를 만든 동학농민운동의 길을 따라가 본다.

동학은 최제우 교조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동학이라는 이름을 우리에게 알린 곳은 고창과 김제 그리고 부안에서의 봉기, 또는 혁명이었다.

세상의 요청을 자신의 외침으로 내질렀고, 그에 호응해 많은 이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길을 나섰고, 죽창을 휘둘렀다.

어쩌면 사람들에게 가장 새로운 사상은 바로 우리의 풍경에서 비롯됨을 그곳에서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다.



고창읍성에서 무장읍성으로

 

<고창읍성>


고창의 읍내는 야경이 아름답다.

읍의 중심을 둘러싼 성의 유려하고 단단한 곡선은 조명을 받아 더욱 화려해지기 때문이다.

그 조명 속에서 가을의 낭만과 따뜻함을 즐기기 위한 사람들이 성벽 위를 삼삼오오 걸으며 밤을 조단조단하게 채우고 있다.

호남의 곡창지대는 한반도를 풍요롭게 하는 지역이었기에 항상 도적들의 침입을 걱정해야만 했으며,

역사의 주요 시기에는 격렬한 방어의 진지가 되기도 했다.

고창읍성 역시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왜침을 막기 위하여 유비무환의 슬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으로 일명 모양성이라고도 한다.

이 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이자,

서해안을 노략질하는 왜구를 막는 서해안 일대의 전초기지로 축성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바깥의 도적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욱 무서운 게 안의 도적들이라 할 수 있겠다.

조선 후기는 각종 사회 혼란과 정부의 부패가 심해지던 시기였고,

그에 편승해 고부군 군수 조병갑의 횡포는 1894215(음력 110) 동학도들과

농민군들이 쟁기와 낫 등 농기구를 들고 집단으로 무장 시위를 벌이는 원인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부랴부랴 안핵사(按覈使) 이용태를 보내 이들을 위로하고 탐관오리 처벌을 약속하면서 동학군을 해산시켰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는 고부의 봉기를 동학도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동비들의 뿌리를 뽑겠다고 선언,

그 과정에서 동학과는 상관없는 전라북도, 충청남도 지역의 농민들까지 동학도로 몰아 역적죄로 처벌하였다.

이에 전봉준과 농민들은 태인 대접주 김개남, 무장(茂長) 대접주 손화중 등과 함께 모여 본격적인 봉기를 시작하는데,

그곳이 바로 고창 무장의 동학농민혁명 기포지이다.

 

<동학농민혁명기포지 기념비>


고창읍에서 기포지를 향하는 길은 고창의 문화 풍경을 스쳐가는 길이기도 하다.

고인돌유적지를 지나면 책마을이 있는 해리로 가는 길이 나오고, 또 복분자마을과 무장면의 한가로운 시골풍경이 이어서 스쳐간다.

그리고 멀지 않아 한적한 도로가 건너는 작은 개천가에서 공원을 하나 만나게 된다.

개천을 건너는 다리에 횃불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어 쉽게 눈에 띄는 곳이다.

공원에는 당시를 기념하는 비석과 농민군의 훈련장이었다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개천 쪽 입구에는 동학농민군의 진격로가 기록된 안내판과 함께 당시 동학농민군이 이곳에 모이게 된 내막이 상세히 적혀 있다.

갑오년 219일 공음면 신촌의 김성칠 접주의 집에서 전봉준, 김개남 등 13명의 지도자들이 모였을 때 무장현의 손화중(남접) 대접주가 동참하였고,

구적산 아홉 골에서 내려오는 물에 의해 연병장 같은 모래사장이 크게 조성되어 있는 이곳 기포지로 농민군을 모았다는 것이다.

지금은 모래사장도 격렬한 함성도 없지만, 세 명의 지도자와 고창의 세 개의 현을 상징하는 세 그루의 소나무가 가끔 찾아오는 이들을 반기고 있다.

아마 땅과 나무는 당시를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장읍성>


공원을 한 바퀴 돈 후 이제 동학농민군진격로로 이름 붙여진, 그래서 예향천리마실길의 9코스로 불리는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가 본다.

개천을 건너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밭과 언덕 사이 작은 도로를 따라 잠시 달리니 머지않아 무장면 면사무소 소재지가 나온다.

한산하고 작은 여느 시골마을이었지만, 읍내 중간 세워진 농협 하나로마트 너머 불쑥 높은 성곽이 나타난다.

무장읍성이다. 기포지에서 불과 7킬로미터 남짓한 길이다.

동학농민군은 무장읍성에서 3일을 머문 다음 백산으로 건너가 진정한 농민군의 대오를 이룬 셈이니

무장읍성은 봉기를 한 동학군이 첫 깃발을 세상을 향해 올린 곳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무장현 관아>


잠시 성안으로 들어가 본다. 성곽은 높고 튼튼하고, 안의 객사와 관아의 건물도 크고 단정하다.

2001년부터 시작된 무장읍성 복원으로 인해 읍성 안에는 객사를 중심으로 현감이 정무를 보던 동헌,

읍성의 정문인 진무루, 누각 건물인 읍취루와 연못도 좌우로 하나씩 잘 복원되어 있다.

한적한 시골마을과는 달리 제법 규모가 있고, 건물은 단정하고, 풍광은 수려하다.

그도 그럴 것이 무장은 이곳은 현재 고창군 무장면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서해연안 지역을 방어를 위해 현감이 파견되던 무장현이었다.

무장이라는 이름도 고려 때 왜적의 침입이 빈번하자 이에 대비하기 위해

따로 있던 무송현과 장사현의 두 고을 합쳐 앞 자를 따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무장 객사 동편에서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사창 터가 발굴되었고,

지난 2018년에는 읍성 터에서 임진왜란 때 위력을 떨친 신무기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11점 출토되기도 했다.

당시 읍성이 가진 위치를 말해주는 것들이다.

 

<무장객사>


현재 보는 무장읍성의 원형은 1915년에 발견된 <무장읍지>에 의하면 조선 태종 17(1417)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0,000여명을 동원하여 그해 2월부터 5월까지 만 4개월 동안에 축조된 것이다.

성의 가장 앞이자 중심에 있는 무장객사의 처마에는 송사지관(松沙之館)이라고 쓰인 대형 편액이 내걸려 있다.

조선 선조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장객사는 객사 한 가운데 정청은 임금의 궐패를 모셔놓고 관헌들이 매월 초하루,

보름 북쪽 궁궐을 향해 망궐례를 올리던 신성한 공간이라고 한다.

우측으로 선정비들이 줄지어 있고, 그 너머에는 정자와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연못 터를 발견하고, 그곳에 연못을 복원했더니 땅속에 잠들어 있던 연꽃들 발아해 연못을 채웠다고 한다.

정말 놀라운 생명력이 아닐 수 없다.

연못의 뒤쪽으로 관아 건물이 있다. 잠시 관아를 들리니 마당에 세워진 곤장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우리에게 이란 어떤 존재인지 무의식이 보여주는 광경이 아닌가 싶다.  



도솔암 마애불과 전봉준 생가터

 

<선운사 입구>


무장읍성을 나온 동학군은 바로 백산으로 달려간다.

그 길의 중간에는 선운사가 있는데, 그곳에서 농민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전설을 만날 수 있다.

갑오년 농민전쟁이 깃발을 올리고 전주로 향하기 1년 전 무장의 대접주 손화중(孫和仲)의 집에서는 도솔암의 비결을 꺼내보자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그 비결이란 선운사를 창건했다는 검단선사가 도솔암 옆 높이 30~40미터 정도의 절벽에 20여 미터 높이로

석불을 음각하면서 석불 배꼽에는 넣어두었다는 앞일을 내다볼 수 있는 비결이었다.

그 비결을 열면 한양이 망한다는 전설도 있었고, 함께 벼락살을 묻어놓아 함부로 거기에 손대는 사람은 벼락을 맞아 죽는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1820년 전라감사로 있던 이서구(李書九)가 관할 지역을 순시하던 중 마애불의 배꼽에서 서기가 뻗치는 것을 보고

뚜껑을 열어보니 책이 들어 있었는데 갑자기 벼락이 치는 바람에 '이서구가 열어 본다'라는 대목만 언뜻 보고 도로 넣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사람들이 더욱 신비해하던 경원해마지 않던 전설이었다고 한다.

세상이 혼란스러우니 사람들은 가장 먼저 비결을 떠올린 것인데, 모두가 걱정하던 것은 바로 벼락살이었다.

그런데 오하영이라는 도인이 "이서구가 열었을 때 이미 벼락을 쳤으므로 벼락살은 없어졌다고 하자 동학교도들은 그 일을 결행을 하게 되었다.

높디높은 곳에 있는 비결을 꺼내기 위해 대나무와 새끼줄을 엮어 부계(공중 계단)를 만들어 감실의 비결을 꺼낸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로, 당시 미륵비결을 꺼낸 현장에 있었던 동학교도 오지영이 쓴 '동학사' 에 자세히 기록하여 전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손화중은 검단대사(黔丹大師)의 비결록(秘訣錄)을 꺼낸 범상치 않은 인물로 알려져

사람들이 앞 다투어 동학조직에 들어갔고, 가장 큰 세력을 그가 함께하면서 무장에서의 동학혁명군이 보다 단단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도솔암>


동학농민군의 염원이 담긴 도솔암의 마애불을 보지 않을 수 없기에 늦가을 선운사를 찾는다.

동백섬과 여수 밤바다와 함께 절로 노래가 흥얼거려지는 곳이 바로 선운사였고언제나 사람들을 감탄시키는 사찰이기도 하다.

마침 가을의 손님 단풍이 몇 그루에 나무에 내려앉아 찾는 이들을 반기고 있었다.

입구에 선운사와 도솔암의 갈림길이 나오기에, 바로 도솔암으로 방향을 잡고 올라간다.

입구에 듬성듬성 보이던 단풍이 점차 많아지고, 다채로워지기 시작한다.

푸른 나무의 터널 사이로 붉고 노란 단풍이 화사하게 빛나고 있고, 청량한 계곡물소리가 단풍의 군무에 더해지고 있었다.

눈과 마음이 즐거워지는 길을 따라 계곡을 건너고, 길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점차 많아지는 사람들과 함께 갑자기 급해진 오르막으로 올라서니 도솔암이다.

어느새 3킬로미터를 걸어온 것이다.

맞은 편 산에서 차츰 색을 더해가는 단풍을 구경하고, 조금 위로 오르니 나한전과 그 너머의 마애불이 보인다.

놀라운 크기에 감탄하고, 소박하고 정겨운 모습이 감동을 한다.

자세히 올려다보니 배꼽에 선명한 자국이 보인다.

비결과 동학의 전설이 담긴 감실의 자국인데이야기가 남긴 여운 때문인지 그 흔적이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다.

 

<선운사>


약하기도 하고, 또 그래서 너무 강하기도 한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선운사로 터벅터벅 하산을 한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길옆으로 선명하지 않지만 화려하고 고운 붉은 색과

빛을 뿌리는 듯한 노란 나뭇잎은 주변 관광객들을 모두 모델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저마다 어디선가 본 듯한 포즈로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으니, 계곡은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그 웃음의 끝에 선운사가 있었다.

신라의 진흥왕이 왕위를 버린 날 미륵삼존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감동하여 세웠다는 전설과,

그보다 2년 늦은 557(위덕왕 24)에 백제의 고승 검단이 창건했다는 전설 위에 세워진 사찰이다.

가장 오래된 조선 후기의 사료들에는 진흥왕이 창건하고 검단선사가 중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는데,

전설의 사찰은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여전히 고즈넉하다.

오래된 듯한 전각은 화려하면서도 따뜻해 보이고, 그 위로 솟은 나무들에는 감이 탐스럽게 열려 있다.

 

<전봉준장군 생가터>


선운사를 나오는 길에 전봉준 생가터라는 표지판을 만날 수 있다.

서해안고속도로 바로 아래에 농가들 사이, 독특한 조각공원 옆 공터가 바로 그곳이다.

아무런 흔적도 없고, 설명도 없고, 단지 비석만이 남아 있는데, 옆에 자리한 농가의 허름함이 이 자리를 말해주는 듯하다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

 

<백산 동학정>


이제 길은 고창을 넘어 부안으로 넘어간다.

부안 IC를 나와 평야를 달리는데, 옆으로 작은 동산 위에 정자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모든 게 평평한 곳에 작게 솟았으니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다.

도착해보니 역시 그곳이 백산 또는 백산성이라고 불리는 동학농민군의 1차 봉기를 상징하는 곳이다.

 

4,000여 명으로 기포지에서 출발한 농민군은 동참자가 점점 늘어 8,000여 명이 넘어섰다고 한다.

그래서 백산에서 새롭게 본진을 꾸리게 되는데, 앉으면 죽산이요,

서면 백산이라는 말처럼 이 작은 산과 그 주변은 죽창을 든 농민군으로 가득 찼다고 한다.

1894년 음력 321, 백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전봉준을 동도 대장으로 추대하고,

비서에는 송희옥과 정백현, 영솔장에는 최경선, 총참모에는 김덕명과 오시영, 그리고 총관령에는 손화중과 김개남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동학농민군은 한양으로 진격하여 부패한 봉건지배층을 타도하고 외국침략자들을 내쫓을 것을 선포하였다.

이제 동학도들의 봉기나 농민들의 민란이 아닌 반봉건의 혁명이자 전쟁이 된 것이다.

 

<백산 오르는 길>


그 현장이었던 백산을 오른다. 백산은 높지 않다.

예전에 왔을 때는 황량한 시골의 야산이었는데, 이제 올라가는 길은 번듯한 계단으로,

동산 위는 정자와 기념비가 세워진 작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마을과 논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가로운 것은 다른 유적지와 다른 바가 없지만, 농민들의 모습과 그들의 땅이 보이는 곳이라 좀 더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더욱 묘한 느낌이 드는 곳이기도 하다. 풍요로운 땅, 달라진 세월이 한순간에 담기는 듯해서이다.

 

<전봉준 고택>


여기에 모인 농민군은 이제 정부군과의 전쟁을 준비한다.

특이하게도 전주로 바로 진격하지 않고 아래로, 아래로 유인을 하다가 황토현에서 정부군을 크게 물리쳤다.

바로 유명한 황토현 전투가 바로 그것이다.

그 현장을 찾아 백산을 떠난다. 그리고 그 길의 중간에 전봉준의 고택을 만날 수 있다.

고부관아도, 만석보도 없어지면서 최초의 공간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나마 전봉준이 살았던 고택이 남아 당시를 기억하게 해준다.

주말이라 어디선가 답사객들이 온듯, 마을의 공터에 커다란 관광버스가 주차해 있다.


<전봉준고택 우물>


공터 바로 앞 마을 골목길을 조금 들어가니 옛 우물이 있고, 그 너머로 비슷하게 생긴 초가집이 두 채가 나란히 있다.

오른쪽이 전봉준 고택이고, 왼쪽은 함께 보수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 한다.

작은 집이지만 관리는 잘 되어 있고, 찾는 사람들이 반가운 듯 마을사람들이 친절하게 이곳저곳을 안내해준다.

양반이었지만 농사를 지었던 전봉준이었다.

가난했던 삶, 그렇지만 꼿꼿했던 마음이 느껴지는 듯한 고택이다.

그리고 주변 마을사람들의 환대는 변함없는 시골민심, 함께 하는 마음으로 다가와 고택보다 더욱 반갑기도 하다.

그 마음을 품고 이제 황토현으로 떠난다.

 

<황토현전적지>


고택이 있는 마을을 떠나 몇 구비를 넘으면 황토현전적지가 나온다.

가장 높은 언덕 위에 동학농민운동기념탑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 언덕에는 다양한 전시와 조형물들이 세워져 있다.

기념탑 바로 아래에는 한옥으로 기념관이 새겨져 있고, 그 밑의 넓은 공간은 지금 동학공원을 조성하기 위한 거대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1894년 음력 46일 오후 2, 이곳 황토현에 동학군은 진을 치고 전라 감영군과 향병들을 상대로 치열한 접전을 벌이다 거짓으로 패퇴하였다.

그리고 47일 새벽 4, 동학농민군은 승리에 도취되어 있던 관군을 기습했고 전라 감영군은 전멸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기세를 모아 정부군을 격파하면서 전주에 무혈입성을 하게 되니, 높이 솟은 기념탑보다도 더 높고 대단한 전적지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외적인 화려함에 너무 기대는 것 같은 아쉬움은 남는다.

언덕과 기념관은 잘 꾸며진 곳이고, 앞으로 더욱 거대해지고 화려해질 것은 명확해 보인다.

쉬쉬하며 감춰두었던 자랑스러운 역사가 이렇듯 앞 다퉈 기념하고, 알리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다만 아쉬운 것은 멀리 고창의 시골마을에서 이곳 김제까지 다양한 역사의 현장에 농민의 이야기가 좀 더 담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사람과 삶의 이야기 속에 다져진 혁명의 이야기는 세대를 넘어 좀 더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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