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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십시일반의 전통에서 대구경북 항일운동의 새바람을 보다 스크랩



십시일반의 전통에서 대구경북 항일운동의 새바람을 보다


-대구 이상화와 서상돈-

-영양 남자현-

-영덕 평민의병장 신돌석-



십시일반 (十匙一飯)이라는 말이 있다.

백과사전을 보면 열 사람이 한 숟가락씩 밥을 보태면 한 사람이 먹을 만한 양식이 된다는 뜻으로,

여럿이 힘을 합하면 한 사람쯤은 도와주기 쉽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풀이가 나온다.

우리는 유달리 이 말을 좋아하는 민족이기도 하다.

정이 많은 민족이라는 말도, 두레라는 풍습도 이와 함께 움직이는 표현이자 문화가 아닌가 싶다.

우리 역사에는 이를 보여주는 풍경이 적지 않다.

특히, 가장 어둡고 힘든 시절이었던 일제강점기는 십시일반으로 서로 힘을 보태고, 함께 이겨낸 시절이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 전통의 풍경을 찾아 대구와 경북의 골목과 옛길을 걸어본다.  



대구 삼일만세운동길과 시인 이상화 그리고 서상돈 고택

 

<대구 삼일운동만세길>


십시일반이라는 건 결국 가진 것을 하나씩 내놓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내놓는 게 재산이기도 하고, 재능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모습을 역사의 오랜 풍경을 간직한 대구의 골목에서 만나게 된다.

특히 요즘 대구는 근대의 풍경을 간직한 골목과 문화를 연결한 근대골목투어로 인기가 높다.

5개의 코스로 구성된 골목투어 중 2코스인 삼일만세운동길의 중간에서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유명한 시인 이상화와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인물인 서상돈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삼일운동만세길 청라언덕>


삼일만세운동길은 대구의 몽마르트라고 불리는 청라언덕에서 시작한다.

잘 자란 나무 사이로 아직 세련됨을 잃지 않은 옛 선교사의 저택이 언덕 위에 있으니,

시간이 느껴지는 좋은 풍경에서 출발하는 셈이다.

높은 솟은 건물이 옆을 채우고, 그 사이에서 좁은 계단은 아래로 급하게 내려간다.

계단이 끝나는 곳의 바닥에는 연도가 새겨져 있고, 태극기와 작은 조형물로 포토 존을 마련해 놓았다.

이제 도로를 건너면 계산성당이고, 길의 바닥, 건물의 벽 등 주변의 곳곳에 코스를 안내하는 지도와

이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역사의 흔적에 대한 소개가 안내하듯 이어진다

 길을 잃을 염려도 없고, 길을 잃더라도 그 안내를 보면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이상화 시인의 시가 새겨진 보도블록을 지나면 시와 사진으로 치장된 골목 입구가 나온다.

골목 벽면에는 이상화 시인의 사진과 함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쓰여 있으니, 이 골목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듯하다.

역시 짧은 골목의 끝에 이상화 시인 고택의 작은 담장이 나타난다.


<계산예가>


그곳은 근대문화체험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계산예가와 이상화 시인의 앞쪽에 있는 서상돈 선생의 고택이 마주하면서 둘러볼 수 있는 작은 공터였다.

사실 우리의 집과 동네를 만드는 방법은 근대 서구에서 길을 만들고, 구획별로 집과 공공기관을 짓던 전통과는 사뭇 달랐다.

사람이 터를 잡고 집을 지으면, 그 집과 집이 맞닿은 사이로 길이 생기며 간혹 공터가 생기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 골목길은 집으로 막히기도 하는 게 한국의 전통 골목길이다.

공터가 있다는 것은 이 터가 예전의 집과 집으로 만든 우리의 전통을 보여주는 곳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문득 만난 골목 안 공터에 반가움을 느끼며 먼저 대구의 근대 역사가 사진과 각종 조형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계산예가를 둘러보고,

바로 이어서 이상화 시인의 고택으로 건너가 본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는 곳으로~”로 시작하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안타깝고 서러운 마음이 이렇듯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는 걸,

또 이렇듯 가녀린 음율의 시가 이런 박력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던 시였다.

만나면 꼭 다시 듣고, 또 만날 때마다 새로워지는 경험을 전해주는 시이기도 하다.

문학의 향기는 짙고도 오래 간다는 말은 이걸 말하는 것이리라.

 

<이상화 고택>


이상화(李相和) 시인은 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정 사숙에서 큰아버지 일우에게 교육을 받았다.

1922백조창간호에 시 말세의 희탄·단조 單調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는데,

초기 시는 주로 감상과 낭만, 퇴폐와 병적 관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상화의 형은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한 이상정 장군이다.

형의 영향으로 이상화 시인도 대구의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25년을 전후해서는 당대 현실에 관심과 함께 적극적인 참여를 하게 되는데,

1926개벽6월호에 발표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한 게 대표적이다.

당시 잡지 개벽은 이 시를 실었다가 문을 닫기도 하였다.

또 이상화 시인은 1927년에 의열단 이종암 사건에 말려들어 구금되기도 했으며,

1937년에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친형인 이상정 장군을 만난 이유로 5개월 정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7년 이후 교남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는데,

이때 "피압박 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학교에 권투부를 신설한 것을 보면 투옥과 감시가 시인의 의기를 꺾지는 못한 듯하다.

사진과 문갑, 서재 등으로 꾸며진 이상화 시인의 고택은 작지만 단정했다.

당시 시인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지만, 오랜 세월에도 잘 가꿔지고, 관리된 시인의 집은 이상화 시인의 엄정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서상돈 고택>


이상화 시인의 고택 정문 앞에는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인물인 서상돈 선생의 고택이 있다.

서상돈(徐相燉) 선생은 외세의 국권침탈에 맞섰던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이었으며,

4기 민중투쟁기에는 재무부과장 및 부장급 일원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활동은 1907216일 대구 광문사(廣文社)에서 그 명칭을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를 마친 뒤,

광문사 부사장으로서 담배를 끊어 당시의 국채 1300만환을 보상할 것을 제의한 것이었다.

그 취지에 공감한 회원들은 그 자리에서 2,000여 환을 갹출하였고,

이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국채보상취지서를 작성, 발표하였다.

 

당시 일본은 강제로 체결한 한일협정서를 바탕으로 대한제국에 강제적으로 차관을 들이고,

일본 고문들은 대한제국의 재정, 금융, 화폐 제도 등을 재편하면서 조선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대일 국채는 1,300만 원이 되었고, 이 금액도 1년 만에 1,840만 원으로 늘어났다.

국채보상운동은 2000만 국민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하지 않고 그 대금 20전씩을 거둔다면 1300만환을 모을 수 있으니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된 국채 1300만환을 갚아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자는 것이었다.

 

대구 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 등과 함께 전개한 국채보상운동은 <황성신문(皇城新聞)>·<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제국신문(帝國新聞)> 등의

민족언론기관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통해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비록 불안을 느낀 일제의 탄압으로 운동은 실패하고 말았지만, 그때 모인 자금은 그 뒤에 전개된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쓰였으며,

십시일반으로 전 국민이 참여한 독립운동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36년간 이어진 일제강점기였고, 그 긴 시간동안 비록 총을 들고 싸우지는 못했지만

당시 조선 사람들의 마음이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운동의 기록이라 하겠다.

 


독립운동에 성별이 무슨 상관

 

<남자현 지사 생가>


대구에서 조금 위로 오르면 청송이 나오고, 청송의 진보읍을 지나면 영양으로 들어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그리고 영양이 시작되는 첫머리에 남자현 지사의 생가가 있다.

남자현은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이며,

세대와 계층을 넘어 참여했던 항일 독립운동의 절박함과 광범위함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대표적인 독립지사이기도 하다.

3.1운동 때 거리를 가득 채운 사람들은 결코 남자, 성인들만은 아니었다.

유관순 역시 아우내 장터에 홀로 나온 여학생이 아니었다. 3.1운동뿐 아니라 이전에도,

이후에도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세대와 계층이 독립 운동에 계속 참여했으며, 그들이 독립 운동에 기여한 양태 또한 다양했다.

 

1895년에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이 발생한 후 각지에서 항일 의병이 일어났고그 중에는 여성 의병장도 있었다.

윤희순(1860~1935)은 강원도 춘천에서 시아버지를 따라 의병 투쟁을 하다가 여성 의병대까지 조직하였고,

1911년에는 일가족과 만주로 망명하여 노학당이라는 민족 학교, 그리고 조선 독립단 및 가족부대를 설립하기도 했다.

군인으로 재직한 여성들 또한 있었다.


평안도에서 태어나 만주로 이주한 오광심(1910~1976)19409월 중국 중경에서 창설된 임시정부 광복군에서 활동한 여성 광복군이었다.

평양 출신이며 상해로 망명하여 운남성 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한 권기옥(1901~1988)은 임정에 소속된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이자 공군 대령이었다.

부산 출신의 박차정(1910~1944)은 근우회 활동을 하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김원봉과 혼인을 맺었고 남경에서 조직된 민족혁명당의 핵심인물이 되었으며,

조선민족전선연맹 조선의용대에 소속되어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고 총상으로 사망했다.


<남자현 지사 동상> 


그리고 영양의 남자현(1872~1933) 지사가 있다.

남자현 지사는 의병으로 나갔던 남편이 먼저 죽은 후 1905년 을사늑약 때 부친을 도와 의병 활동에 가담했다.

3.1운동에도 참여한 남자현은 같은 해에 중국 요령성으로 망명하여 아들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시켰고,

자신은 서로군정서라는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하여 죽기 직전까지 무장투쟁 및 거사에 직접 투신하였다.

지금 내게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라를 잃고 남편을 잃고, 더 이상 잃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양반가의 할머니가 독립운동을 한다니 일견 우습게도 들릴 일이지만 현실은 그런 모양을 가릴 때가 아니다.

이 늙어가는 육신의 일부라도 흔쾌히 끊어 절규를 내놓아야 할 때도 있는 것이 아니냐? 이제 칼을 들었다.”

-남자현 지사, 아들 김성삼에게 보낸 편지(조선의 딸, 총을 들다, 46쪽 재인용)

 

<남자현 지사 생가>


진보읍에서 삼거리를 지나 언덕과 터널을 지나면 다시 사거리가 나온다.

직진하면 영양읍이 나온다.

옛 산골마을에서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산촌생활박물관과 민족시인으로 이름을 알린 오일도 시인의 고향인 감천마을이 그곳에 있다.

좌측으로 가면 잘 보전된 옛 전탑을 만날 수 있고, 우측으로 들어가면 음식디미방으로 유명한 장계향을 만날 수 있는 석보면이 있다.

석보면으로 가기 위해서는 논과 밭 사이의 도로를 한참 달리게 되는데그 중간에 홀로 서있는 한 채의 고택을 만나게 된다.

바로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독립운동사에 새긴 남자현 지사의 생가이다.

최근에는 유적지 조성공사가 한참이라 공사용 가름막도 처져 있고, 주변이 어수선하기도 하다.

생가 옆에 비석과 동상이 세워지고, 주변도 새롭게 꾸며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생가도 새롭게 다듬는 중인 듯한데, 낡은 대문 너머 대청마루 위에 남자현 지사의 흑백사진은 여전히 당당하게만 느껴진다.

강함은 결코 힘과 돈과 근육에서만 나오는 게 아님을 남지사의 담담하고 뚜렷한 눈빛이 말해주는 듯하다



 영덕, 평민의병장 신돌석

 

진보면에서 영양으로 방향을 돌리지 않고 직진을 하면 37번 도로를 따라 영덕에 다다르게 된다.

사실 누구를, 어디를 찾아가지 않더라도 영덕과 청송을 지나는 지방도로는 꼭 한번 돌아다녀볼 필요가 있는 곳이다.

지금은 영덕으로 가는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영덕과 청송이 예전과 같은 산골은 아니지만,

여전히 좁은 그 길 사이를 가득 채운 자연과 풍경은 놀랍도록 웅장하고, 농가와 어우러지는 풍경은 생생하기 짝이 없다.

지질유산으로 인정된 주왕산과 그 일대의 옆모습, 또는 본연의 자태를 그곳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돌석 장군 유적지>


영덕에 도달한 37번 도로는 7번 국도를 만나 본격적으로 위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길은 바다를 따라 해맞이공원을 지나 축산항으로 가기도 하고,

내륙 쪽 잘 빠진 도로를 달려 바다를 만나기 전 영해에 도달하게 하기도 한다.

영해에 도달하는 바로 전 도로 한편에 신돌석 장군의 유적지가 있다.

태백산 호랑이로 불리던 의병장 신돌석 장군의 생가를 중심으로 전시관 등을 조성한 것이다.

신돌석 장군은 구한말의 대표적인 의병장이면서 평민으로 이름이 높다.

이는 그가 일제와 전쟁을 벌인 시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맨주먹으로 일어선 의병장이지만

경상남·북도, 강원도, 충청도 등지에서 탁월한 유격전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전적 때문이기도 하다.

장군이 의병을 일으킨 시기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위해 무력을 앞세워

을사조약(乙巳條約)(‘을사보호조약이라는 이름으로 체결하였으나,

강제로 체결하였으므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고도 함)을 강제 체결하고(1905. 11. 17)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던 때였다.

민족의 저항은 당연했고, 여러 가지 형태의 항일운동으로 나타났지만

주로 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던 유림층과 사대부의 조직적인 저항이 가장 두드러졌었다.


당시 의병을 을사의병이라고 부르는데,

그중 가장 규모가 크고 치열한 항전을 벌인 의병진은 민종식(閔宗植안병찬(安炳瓚) 등이 주축이 된 홍주(洪州) 의병이었다.

민종식은 20세에 문과를 응시해 고종으로부터 직부전시를 부여받고 급제를 했지만,

을미사변으로 낙향했다가 을사조약에 항의해 의병을 일으킨 양반이었다.

또 다른 의병으로 전 참찬 최익현(崔益鉉) 의병진이 유명했다.

최익현은 의병전쟁 중 붙잡힌 다음 일본 쓰시마[對馬島]로 이송되어

일본인이 주는 밥을 먹을 수 없다고 단식 항거하다 아사 순국한 강직한 선비로 이름이 높았다.

이렇듯 유림과 관료들이 중심이 된 의병들의 봉기 사이에 경북 평해(平海영해(寧海) 일대에

일어난 신돌석(申乭石) 의병진은 그 존재가 독특할 수밖에 없었다.


<신돌석 장군>


신돌석은 평민 신분으로 의병을 모아 19064월 거병한 뒤 산남의진과 서로 호응하면서 동해안 여러 곳에서 항일전을 폈다.

한때 그 수가 3,000여명에 달했으며, 특히 규율이 엄하고 유격전술이 뛰어나 많은 전과를 올린 의병진으로 이름이 높았다.

중고등학교 역사시간에 신돌석 장군의 이야기는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을 듯하다.

그리고 평민이라서 함께하기를 거부했던 양반 출신 의병장 이야기가 곁들여지면서,

도저히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분노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시대의 편견이라는 게 이렇듯 무서운데, 또 한편으로는 당시로서는 당연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기록 속에 세대와 성별 그리고 계층의 차이는 여전하니 말이다.

 

신돌석 장군이 나고 자란 영해는 동해를 접한 경상도의 요충지로서 왜구의 약탈과 지방관의 수탈이 극심했고,

1871년 이필제(李弼濟)를 중심으로 한 농민봉기가 일어났던 지방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어려서부터 반봉건적 배경과 항일의식의 영향 하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9세인 18963월 영해의병에 가담하여 중군장(中軍將)으로서 의병 100여 명을 이끌었다.

의병 해산의 조칙이 내리자 고향에 내려와 기회를 엿보던 중,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의병이 전국 각처에서 일어나자 다시 가산을 털어 1906313일에 영릉의병장(寧陵義兵將)이라는 이름으로 거병하였다.

이후 영해·울진·원주·삼척·강릉·양양·간성 등 경상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태백산맥의 산간지대와 동해의 해안선을 오르내리며 기습전을 펼치는 등 크게 활약했다.

하지만 국내에서의 의병전쟁은 한계가 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신돌석 장군은 만주를 꿈꾸기도 했던 듯했다.

하지만 새로운 시작을 위해 엄동을 맞아 다음해 봄에 활동을 재개할 것을 기약하고

해산한 후 신돌석 장군은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한다.

눌곡(訥谷)에 있는 부하 김상렬(金相烈)의 집에 은신했다가 이들 형제에게 암살당한 것이다.

의병장의 최후를 보면 한 번의 실패나 패배 이후 다음을 도모하던 중 부하나 주변의 배신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쩌면 당시 신분제에 뼛속 깊게 새겨놓은 양반의 행태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라와 이웃마저도 쉽게 팔아넘기던 이들이 아니었을까.

더욱 안타까운 것은 지금도 그런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신돌석 장군 유적지>


19991118일 개관한 신돌석 장군의 유적지는 충의사, 동재, 서재, 외삼문, 내삼문, 기념관 등의 시설로 되어있다.

장군에 관한 각종 자료들과 함께 당시의 독립운동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과 자료를 수집·보존·전시하여

장군의 넋을 기리고 항일정신을 되새겨보는 역사교육의 전당으로 활용하고자 만든 곳이다.

또한 기념관 앞마당에는 의병대장신공유허비가 세워져 있으며, 인근에는 장군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신돌석 기념관>


그렇지만 시대의 편견을 뚫고 놀라운 전적을 세운 풍운아를 기리는 시설로는 조금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사실 평민 출신의 신돌석 장군은 다양한 전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일제의 역마차습격사건이나 어린 시절 호랑이를 때려잡은 일 등은 전설의 고향이나 신화 속 주인공처럼 흥미진진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놀라운 전술과 용맹 그리고 신분의 벽을 뛰어넘는 상상을 보여주기에는

유적지가 사대부의 기념관처럼 너무 점잖게 꾸며진 듯한 느낌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신돌석 의병만의 놀라움, 그와 함께 일어났던 많은 평민들의 용맹분투를 보여줄 수 있는 공간으로 좀 더 발전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건 또한 이곳을 찾는 이들을 위한 또 다른 배려이자 기회이기도 하다.

강구항에서 대게를 맛보고, 동해의 해파랑 길을 달리는 가족들은 해맞이공원의 독특한 풍광과 함께

시대를 넘나들던 영웅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즐길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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