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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합천의 대장경과 연암 그리고 함양 스크랩



때론 도전이 필요한 때가 있다

합천의 대장경과 연암 그리고 함양 


-합천 해인사 대장경-

-함양 안의의 박지원과 안의초등학교-

-항일독립지사 사적공원과 허삼둘 가옥-

-광풍루와 남계서원-



살다보면 한번쯤 무모한 도전을 꿈꾸기도 한다.

누군가의 그런 도전은 철없는 행동으로 치부되거나, 반항아로 외면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끔 그 도전은 세상을 변화시키기는 촉발제가 되기도 하고, 오랜 세월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잔잔한 울림으로 남겨지기도 한다.

그 독특했던 흔적을 찾아 가야산과 지리산 사이의 길을 걸어본다.

그곳에는 평화의 염원을 담은 대장경과 함양에서 열하일기에 담긴 새로운 시대를 실험했던 박지원이 있다.



해인사가 품은 넉넉한 아름다움

 

<해인사 오르는 길>


가야산의 듬직한 자태를 구경하며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한참을 달리면 새롭게 조성된 대장경테마파크를 나오고 그 뒤로 한적한 마을이 이어진다.

가장 먼저 만나는 해인사성보박물관의 뒤로 다리를 건너면 산책로이자 해인사로 올라가는 자연탐방로가 시작된다.

가까이 흐르는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잠시 청량함을 만끽하다 보면 새롭게 조성된 부도탑군과 오래된 비석과 탑이 줄지어 있는 곳이 나타난다.

새로 조성된 오른편 공간의 맨 끝에 성철스님의 부도가 있다는 안내판이 작게 세워져 있다.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옛 부도와 길상탑을 구경하며, 그 옆 합천 반야사지 원경왕사비 사이의 안내판을 지나면 해인사 산문이 나타난다.

길은 산위로 오르는 듯 부드러운 경사를 이루면서 위로, 위로 계속 솟구치고, 좌우는 우람한 나무와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 중간에 일주문과 금강문이 살짝 몸을 비끼며 길과 세상의 경계를 만들어주고 있다.

몸은 조금 힘들지만 마치 떠오르는 듯한 풍경이 참으로 편안하고, 아름답기에 절로 발걸음이 앞으로 나아간다.

부지런한 보살님이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시작하는 모습을 뒤로 하고 산문 뒤 계단으로 올라서니 오색 등이 하늘을 장식하고 있는 경내가 나온다.

조만간 큰 불사가 있는지, 주변으로 트럭과 인부들이 쉴 새 없이 오가면 등을 걸고, 장식을 올리고 있었다.


<해인사>


분주함을 지나 또 하나의 계단을 오르자 또 하나의 광장과 거대한 불화 그리고 대웅전 등이 나타난다.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길과 아래의 광장 등을 생각하면 참으로 규모가 큰 사찰인, 층을 나누고,

건물들로 둘러싸고 있어서 광활하다거나 허전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곳 역시 좌우로 가득 간이의자가 쌓여 있다. 해인사의 아침은 참으로 부지런한 듯하다.

다행인 건 마당과 길은 오가는 이들의 바쁘지만, 전각들의 풍경과 그 안의 기원은 찬찬히, 조용히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마침 대웅전 뒤로 한 무리의 스님과 보살이 지나간다.

향을 올리는지, 무언가를 들고 줄을 맞춰 가다가 한 명씩 전각으로 들어가거나 길을 달리하면서 흩어진다.

그 중 한 보살을 따라 대웅전 뒤의 또 하나의 계단을 오른다.

독특하게 느껴지는 둥그런 문이 나타나고, 겹쳐진 대문과 전각의 입구 옆으로 촘촘한 창살로 벽을 장식한 긴 건물이 나타난다.

바로 장경판전이다. 전쟁을 피하고, 화재에도 버텼으며, 오랜 시간에도 대장경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는 곳이다.

또한 그 독특하고 경건한 아름다움으로 여전히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촘촘한 나무창살의 틈새로 대장경들이 보인다. 경판 쌓으면 백두산보다 높다는,

고려 인구 의 20% 동원된 불사의 결과가 거기에 차분히 줄을 지은 채 잠들어 있다.



방관 또는 염원의 사이의 도전팔만대장경 

 

<팔만대장경>


팔만대장경은 종이에 불경을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목판으로써 책이 아니다.

고려 고종 2338(12361251)에 걸쳐 간행되었는데, 두 번째로 만들어 졌다고 해서 재조대장경이라 했고,

판수가 8만여 개에 달하기 때문에 팔만대장경이라 부른다.

인간의 84천 번뇌에 해당하는 84천 법문을 실었음을 뜻한다고 한다.

처음 시작은 11세기에 거란군의 침입을 막고자 고려 현종 대부터 선종 대까지 약 80년에 걸쳐 만든 초조대장경이다.

초조대장경이 고려 고종 19(1232) 몽골군의 침략으로 소실되자 다시 팔만대장경을 만들게 된 것이다.

 

고려 1236(고종 23) 피난지인 강화도에 대장도감을 설치되었고, 16년만인 1251년에 대장경이 완성되었다.

이 작업은 스님은 물론 왕족, 관료, 문인, 지식인,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들이 적극 참여한 범국가적인 사업이었다고 한다.

만드는 과정 역시 만만치 않았다. 먼저 지리산에서 벌목한 자작나무, 산벚나무 등을 바닷길을 따라서 강화도까지 운반했다.

이어 3년 동안 바닷물에 담근 다음 그늘에서 말린 후 큰 가마솥에 넣어 다시 쪄서 말린 후 옻칠을 해 판목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판목을 세로 8(24cm), 가로 2(60cm),

두께 12~3(3~4cm)으로 자르고 양쪽 끝에는 뒤틀리지 않게 각목을 붙인 후, 네 귀는 구리로 장식했다.

전국 각지에서 선발된 목수와 서예가, 불교인들이 이 작업을 담당했으며, <삼국유사>를 집필한 일연스님 역시 참여했다고 한다.

대장경 조성 책임을 맡은 수기스님은 초조대장경은 물론 송나라 및 거란의 대장경과 대조 비교하고 각종의 불교목록까지 두루 참조해

본문에서 빠진 글자, 틀린 글자, 잘못된 번역 등을 하나하나 고치고 보완했다.

그 정성의 깊이는 오탈자가 거의 없다는 걸로 확인이 된다.

팔만대장경의 경판 숫자는 2014년 조사를 통해 81352판으로 확인되었고,

새겨진 글자 수는 52729천 자에 달하는데 현대에 와서야 겨우 밝혀진 오탈자는 단 158자라고 한다.

8만 장에 달하는 경판의 서체가 모두 일정한 걸로 유명하다.

그건 글씨를 담당한 사람들의 글씨체를 모두 일정한 모양으로 다듬고자 거의 1년 가까이 훈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한 글자를 새길 때마다 세 번씩 절을 했다고 한다. , 이 작업을 하면서 절을 무려 15천만 번이나 했다는 이야기다.

 

<해인사 장경판전>


대장경만큼 놀라운 것이 바로 장경판전이다.

현재 장경판전은 조선 초 성종 19년인 1488년에 건립됐는데, 건물위치, 건물배치와 좌향, 판가(板架)구조,

경판 배열 등에서 통풍이 잘 되고 적당한 일조량, 목판 보존에 최적조건인 항온항습 상태를 유지하도록 설계돼 있다고 한다.

최적의 환기와 온도로 경판의 변형과 부식을 방지하는데 효과적이어서 현대 건축가들도 놀랄 정도라는데,

지금 보더라도 공간은 빛이 적당히 들어와 서늘함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듯 보인다.

이 모든 게 과학적 설계라는 말을 예전부터 들었던 터라, 새삼 우리 전통의 건축 기술과 자연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과학에 감탄을 한다.

20076월에는 고려대장경판과 제경판을 한데 묶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나,

역사가 단절되고, 그런 지혜와 기술마저도 찾을 길이 없다는 점은 또 그만큼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대장경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 하나가 문득 기억이 난다.

대부분 그렇듯 대장경은 처음 초등학교나 중학교 역사시간과 드라마를 통해 놀라운 정성에 감탄과 함께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전쟁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여 있을 때 종교에 기대어 방안에서 불경이나 새기고 있었다는 한탄과 함께

그 순진함과 대책 없음에 분노하기도 했던 듯하다.

그렇지만 지금은 당시의 물음과 비아냥거림 자체가 오히려 순진했던 게 아닌가 되묻고는 한다.

과연 그들은 그렇게 순진하게 세상을 바라봤을까? 그 물음에 답을 할 수는 없어도 사실 전쟁이 몰아치는 재난의 시기,

종교와 또 다른 무엇인가에 기대어 평화를 바라는 건 전 세계의 모든 이들에게 공통된 행동이며 이를 통해 집단의 일치된 힘을 이끌어내는 것은 또한 역사이다.

그런 혼란의 시기에 1년간 서체를 통일하고, 오타가 거의 없는 이 엄청난 저작물을 만들어낸

그들의 곧고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은 당시 국가의 풍경과 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해인사 장경판전>


결국 사람인 것이다. 위기와 재난 앞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필요하고, 그런 사람들이 모이면 위기는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항상 같이 하기를 좋아하는 민족의 전통이 더해지면서 무모하고,

유치했던 도전은 세계유산에 선정되어 오랜 세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게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해인사에서 사람들을 발견하게 된다.

장경판전을 관리하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는 사진에 방해되지 않게 계속 피해주고, 어디서 어디를 찍어보라며 조언을 건네기도 한다.

밀려드는 관광객에 지쳤을 법도 한데, 여유 있는 그 모습이 대장경의 닮고 있는 듯하다.

친절함에 감사하며 판전을 내려오니 멀리 산문 안으로 스님 한 분과 함께 보살 한 분이 들어서며 소리치고 있었다.

○○! 오늘 생일이라며? 문딩이 말도 안하고!”

그 말에 호응이라도 하듯이 옆에 있던 스님이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왠지 마음이 따뜻해지는 풍경이었다.

산은 절을 품고, 사찰은 염원이 담긴 대장경을 보호하니,

그 안에 사는 이들도 그 편안하고, 넓은 마음을 함께 나누고 있는 듯하다



안의초등학교에서 연암이 보는 것

 

가야산을 벗어나 지리산 자락으로 넘어간다.

전라도 쪽 지리산의 관문이 남원과 구례라면 경상도 쪽은 아마 함양과 산청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 가장 북쪽 관문인 함양에서도 가장 높은 위치에 작고 탄탄한 안의면이 있다.

산삼과 바이오 그리고 각종 레포츠로 그 유명세를 더하고 있는 함양이지만, 조용하고, 또 한가롭기까지 한 고장이다.

이 조용한 마을 안의를 찾아가는 이유는 이곳이 바로 연암 박지원이 안의현(함양군 안의면) 현감으로 5년간 머물렀던 곳이기 때문이다.

사실 연암 박지원은 서울에서 나서 자랐고, 나중에는 황해도 금천(金川)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했다.

그가 연암인 이유도 그 때문인데, 그곳이 지금은 북녘 땅이다 보니 몇 년 전부터 몰아친 인문학 바람의 중심에 있는

<열하일기>의 자취를 만날 수 있는 곳은 그나마 이곳 안의 정도가 유일하다고 하겠다.


<안의초등학교 연암박지원사적비> 


<열하일기>은 금천에 머물던 연암이 청의 고종 70세 진하사절 정사로 북경으로 가는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간

1780625일부터 1027일까지의 일기이자 견문록이다.

이 속에 연암은 청나라의 번창한 문물에 대한 견문에 더해 낙후한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평소의 이용후생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생각만으로 끝난다면 당대의 실학은 그저 그런 탁상공론으로 끝났겠지만,

연암은 안의현감 시절에 자신의 생각을 하나둘씩 실험해보기 시작했다.

정조 12년인 1792년 안의현감으로 부임한 박지원은 솜씨 좋은 장인들을 모아 신기한 농기구, 화로에 바람을 불어넣는 풍구와 신식 물레,

수로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수차, 그리고 물레방아 등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가 시골에 가면 대표적인 풍경으로 보는 물레방아는 기록상으로 그때 처음으로 조선 땅에 등장한 것이다.

또 안의현감 때 집필하기 시작, 면천군수 시절의 경험을 더해 1799년에 농서인 <과농소초>를 완성하기도 했다.

거기에는 토지제도, 농기구, 수리시설과 파종에서 수확에 이르는 당대의 농사 이론이 망라되어 있다고 한다.

안의 땅을 가는 것은 당시의 실험의 흔적을 만나기 위함이기도 한데,

안타깝게도 다른 자취는 모두 사라지고 안의초등학교에 그를 기리는 기념탑이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졸업앨범 촬영 중인 안의초등학교>


마을을 흐르는 남강을 지나면 광풍루가 보이고, 그곳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면 무이산 산자락에 있는 안의초등학교를 만나게 된다.

코로나19로 학교 출입이 조심스러운 데, 낮은 담장에 기대어 주민인 듯한 사람이 학교 안을 구경하고 있다.

요즘 적막이 흐르는 학교와 다르게 유난히 소란스럽고 많이 아이들이 보인다.

옆으로 다가가 주민과 같이 고개를 빼고 같이 들여다보니 마침 졸업사진을 찍는 날이었다. 선생님들 단체사진을 찍는데,

아이들이 조용할 리가 없다. 주변을 반원으로 둘러싸고 온갖 소리와 웃음을 날리고 있다.

한 선생님이 이 녀석들, 조용히 안 해!” 하고 소리를 가끔 지르지만,

소리치는 당사자의 얼굴도 웃고 있었고 그 소리에 맞춰 아이들은 더욱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닌다.

문화와 풍속이 달라진다지만 아이들의 정겨운 모습은 여전히 그대로인 듯하다.

그 따뜻한 풍경의 운동장을 내려다보는 교실 건물 앞 화단에는 전국 초등학교에 근무 중인 책 읽는 여자의 하얀 동상이 있고,

그 앞으로 학교 화단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옛 물건들이 하나둘씩 보인다.


옛 물건과 비석과 같이 이 고장에서 발견된 옛 물건들로 작은 향토전시관을 마련해 놓았는데, 그 사이로 연암 박지원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당시 연암이 안의에서 했던 다양한 도전이 이렇듯 오랜 시간 행복한 웃음으로 이어지는 듯해서 반갑기도 하다.

우리는 연암을 단지 도전적인 정치인으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그가 남긴 <허생전>, <양반전>, <호질> 등의 소설을 국어시간을 통해 배우면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 소설 속에는 신랄한 풍자로 위선적인 지배계급을 질타하기도 하고, 당대의 반청의식을 절제된 문장으로 잘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 무엇보다 그 글들이 개인적으로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생생한 현실과 함께 따뜻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하고는 한다.

그 마음으로 비석과 아이들이 뛰는 운동장 그리고 낮고 따뜻한 교실을 한눈에 담는데,

그 학교 너머 산중턱에 날렵한 처마의 건물이 보인다.


<안의 항일독립지사 사적공원>


그리 멀지 않은 듯 하여 잠시 학교 뒤 언덕으로 들어서니 먼저 항일독립지사 사적공원이라는 표석과 함께 높은 계단 위로 사당이 보인다.

신암사(愼菴祠)라는 이름을 가진 사당이 있고, 그 뒤의 언덕 위에 비석들은 줄지어 세워져 있다.

이곳 안의출신이자 안의에서 창의한 신암 노응규 선생과 그와 함께 했던 의병장들 그리고 무명 독립의사를 함께 기리고 있는 곳이다.

잘 단정한 모습도 반갑고, 그들을 함께 기리는 것도 놀랍다.

왜란, 호란을 거쳐 일제강점기와 독립운동으로 중세와 근대를 맞이한 우리 땅 구석구석에는

애국선열들의 이름과 이야기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어떤 이들은 높은 이름이 널리 알려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그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단지 그 무리 중 하나로 뜻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한 명의 의병장뿐 아니라 같이 한 의병장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싸웠던 이들을 기리고 있다는 것이

그들 모두의 힘으로 독립을 위한 전쟁이 시작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듯해서 무척 보기 좋았다.

의병전쟁에 나섰던 각각의 모든 이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듯 하기 때문이다.


<노응규 의병장 생가복원지>


좀 더 언덕을 오르니 신암 노응규 의병장 생가 복원지이라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

솟을대문 앞 표지판을 읽어보니 함양 안의 출신으로 진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구한말 경남과 진주의 대표 의병장

신암 노응규(愼菴 盧應奎, 1861~1907)선생의 생가를 복원한 곳이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문하였던 노응규 의병장은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의병활동에 투신하여 한때 1만에 가까운 병력을 모아진주성을 점령하는 등 영남 각지에서 일본군경을 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의 생가는 불타고 부형(父兄)이 피살되는 비운을 겪고 의병은 해산했지만,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다시 거병했다가 부왜들의 농간으로 일제 군경에 체포되었다가 고문과 절식으로 1907년 옥중에서 순국했다.

소개 글 말미에 선생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종증조부이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어 이채롭다.

 

<허삼둘 가옥입구>


여기 아니면 만나기 힘들었을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보고, 대문을 넘어 복원된 생가지를 둘러본다.

색을 칠하지 않아 더욱 정겨워 보이는 저택은 단정하고, 짜임새가 있어 보였다.

특히 그곳 대청마루와 담장을 따라 걸으며 보는 마을과 주변 풍경은 절경은 아니더라도

확 트인 마을과 산과 평야로 마음을 시원하게, 따뜻하게 해주는 것은 확실하다.

잠시 땀을 식히며 마음을 채운 후 다시 길을 내려와 안의초등학교를 지나다 왼편으로 길게 뻗은 담장과 기와가 보여 잠시 둘러본다.

함양 안의에서 제법 유명한 허삼둘 고택이다.

특별히 다른 곳에서 보던 고택과 다를 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한편에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낮고 단단한 낮은 담장이 발과 시선을 잡아 끈다.

그리고 동네 사립문처럼 작고 열린 대문과 그 앞의 평상은 푸릇푸릇한 넓은 마당과 더불어 잠시 둘러보고 싶은 마음을 절로 일으킨다.

원래 입구는 솟을대문이겠지만, 이렇듯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와 같은 이런 편안한 풍경과 거리감은

마치 시골집에 놀러온 듯한 설렘을 전해주는 게 사실이다.

사실 허삼둘 고택은 여러모로 독특한 점이 있는 곳이다.

 

<허삼둘 가옥 안채>


함양 허삼둘 가옥(咸陽 許三家屋)1918년 진양갑부 허씨 문중의 허삼둘이 토호 윤대홍에게 시집와 지은 일제강점기의 가옥이다.

우리의 기억 속 그 시대는 남녀유별이 유독 심했던 시절인데 여인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붙린다는 게 조금 놀랍다.

게다가 그 안채의 평면구성이 한국에서는 거의 유일한 예라고 할 만큼 여성중심의 공간배치가 특이한 집이라고 한다.

난간을 둘러서 누집처럼 꾸민 ""자로 된 사랑채와 행랑채는 익숙한 모습이고,

사랑채 앞에는 심어져 있는 나무를 지나 안쪽에 ""자형의 안채와 ""자형의 안행랑채, 그리고 곳간을 만나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런데 안채, 그 중앙에 부엌이 있다.

부엌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방들과 대청이 겹집의 형태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부엌이 주택전체의 중심을 잡고 있으니, 이 집의 중심과 실세가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당당함에 절로 미소를 머금고 대문을 나서게 된다.

 

<안의 광풍루>


안의를 떠나면서 잠시 광풍루를 둘러본다.

광풍루는 1412(태종 12) 이안현감(利安縣監) 전우(全遇)가 지어 선화루(宣化樓)라 한 것을

1425(세종 7)에 김홍의(金洪毅)가 현 위치로 옮기고, 1494(성종 25)에 현감이었던 정여창(鄭汝昌)이 중수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옆 넓은 잔디밭을 통해 들어서니 높게 솟은 누각의 당당함이 먼저 들어오고,

그 뒤에 둥글게 세워진 비석들이 독특하다.

둘러보니 안의현을 거쳐 간 이들을 위한 선정비가 빼곡하니, 자연이 좋은 곳이기 보다 사람이 좋은 곳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현재 광풍루는 코로나 때문에 출입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름 바람이 산을 타고 내려올 때 잔잔히 흐르는 남강을 보며

이층 누각에 지는 해를 보는 것은 무척 낭만적이고 행복한 시간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아마 정여창이 꿈꾸던 풍경이 아니었을까 싶다.

 

<남계서원>


유학적 이상사회를 꿈꾸던 정여창은 도덕적 의지의 확립을 위한 사명의 담지자로 자처하면서

당대의 사화로 죽음을 맞이한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그의 흔적은 안의에서 멀지 않은 곳인 남계서원에서 만날 수 있다.

유네스코에서 세계유산으로 지정한 8곳의 서원 중 하나이기도 한 함양 남계서원咸陽灆溪書院

1552(명종 7)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정여창(鄭汝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곳이다.

1566(명종 21)남계(藍溪)’라고 사액되었으나, 1597(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으로 소실되었다.

1603년에 나촌(羅村: 현재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구라마을)으로 옮겨 복원하였다가 1612년 옛 터인 현재의 위치에 중건한 곳이다.

이 서원은 소수서원(紹修書院)에 이어 두 번째로 창건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일 정도로 중요시 되던 곳이다.

다른 무엇보다 위로 올라가면서도 단정함을 잃지 않는 건물과 구조가 단단하게 다가오고,

그리 높지 않은 곳임에도 주변을 한눈에 둘러보는 시원함이 인상적인 곳이다.


<함양 청계서원>


바로 옆에는 함양 청계서원(咸陽 靑溪書院)이 이어진다.

조선 연산군 때 학자인 문민공 김일손(14641498)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그의 스승을 비롯한 영남학파 학자들과 함께 조의제문사건에 연루되어 무오사화로 희생되었다고 한다.

규모는 남계서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단정하고 수려한 모습이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게 하는 곳이다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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