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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제주의 해안도로에서 만나는 역사 풍경 스크랩



제주의 해안도로에서 만나는 역사 풍경

 

-관덕정과 김만덕기념관 그리고 사라오름-

-용천수 탐방길과 제주항일운동-

-해녀박물관과 해녀 그리고 우도-



아름다운 자연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신비의 섬, 제주.

하지만 우리에게는 파란만장한 역사와 독특한 문화를 간직한 곳이기에 더욱 소중한 곳이기도 하다.

그 역사의 흔적을 따라 제주의 해안도로를 달려본다.

기기묘묘한 해안선은 구비마다 제주의 삶과 시간을 그대로 새겨놓았다.

 

 

관덕정과 김만덕기념관 그리고 사라오름

 

<제주공항 옆 서해안로>


제주공항은 항상 붐비는 곳이고 연착도 잦은 편이다.

그러다보니 출국장에서 비행기가 오르내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때가 종종 있다.

그때마다 바다 위를 아슬아슬하게 오르고 내리는 비행기의 모습을 조마조마하게 보게 되는데,

활주로 끝이 바다로 이어지는 제주만의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 비행기가 지나는 제주의 서해안로를 따라가면 바다와 어우러지는 호텔과 카페 등 다채로운 문화공간과 함께

오랜 세월 제주의 관문 역할을 해온 제주시의 역사공간과 지표를 만날 수 있다.

땅과 바다 그리고 하늘로 갈라서지만 그 여정은 비슷한 경로를 가지는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옛날 중국의 황제가 수많은 배를 보고 저것들은 모두 어디로 향하느냐 묻자,

한 지혜로운 승려가 저 배들은 모두 명()과 리()를 향해 간다고 대답했던 우화가 떠오르는 풍경이라 하겠다.


<제주관아 입구와 관덕정>


수많은 배처럼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목적과 이유로 이곳 제주를 찾는다.

비록 공항과 항구에서 뿔뿔이 흩어지지만, 옛 역사의 흔적을 찾는 여정은 바다와 이어지는 제주의 번화가에서 시작되기 마련이다.

명과 리라는 오래되고 유일한 목적지가 만들어진 곳이 그곳이기 때문이다.

일단 그 시작은 중앙로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관덕정과 제주관아이다.

제주 시에서 보면 번화가 중 가장 공항 쪽에 위치한 제주관아는 조정에서 파견된 제주목사가 근무하던 곳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훼철되어 사라지고 오직 관덕정만 남아 있던 곳이었다.

지금은 제법 그럴 듯하고 세련되게 관덕정의 배경 역할을 하고 있는데, 1991년부터 발굴, 정비 사업이 시작되어 2002년에 복원된 것이다.

잘 꾸며진 테마파크와 같은 모습과 달리 복원 자체는 철저한 고증으로 자칠 없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복원된 관아보다 더욱 인상적인 곳이 바로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언제나 찾는 이를 반기는 관덕정이라 하겠다.

일단 130여 제곱미터(40여 평)에 이르는 당당한 넓이와 그에 어울리게 26개의 단단하고 둥근 기둥으로

지붕을 받치며 사방을 모두 개방한 모습이 인상적인 곳이다.

세종 30(1448)에 처음 세웠고, 이후 성종, 숙종, 영조 대에 걸쳐 중창하고

철종 원년(1850)에 재건한 건물인데, 그 건축 기법 자체는 17세기 양식이라고 한다.

관덕정 안에는 호남제일정이라는 현판 아래 대단히 크고 장중한 글씨체로 탐라형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아계 이산해 또는 정조 때 제주목사인 김영수의 글씨라고도 전한다.

섬이라는 곳이 대부분 그렇듯 제주 역시 지역 색채가 강한 곳이다.

그건 좋게 말하면 지역 내의 단합이 잘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관덕정>


섬에서 중요한 일이 생기면 너나없이 참여하는 전통이 있다는 것인데, 관아 앞 광장과 그 옆의 관덕정은 그 문화를 상징하는 곳이라 하겠다.

특히 관덕정은 제주목 관아의 부속 건물로 다양한 행사,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했던 활쏘기 대회가 열릴 때 본부석 기능을 한 건물이다.

중요한 옥외 행사 때 관아 앞마당의 붙박이 차일같이 자리한 채 제주의 다양한 역사와 문화를 지켜봤던 것이다.

일제강점기까지도 제주 사람들의 살아 있는 광장 역할을 해오던 관덕정과 그 앞마당은 이제 한적하고, 작은 공간이 되어 있다.

비록 예전과 같은 활달함을 이제 기대하기 힘들지만, 입장권을 받는 관아 건물과 다르게 오가는 이들이 끊이지 않은 관덕정은 모습은

그래도 자신의 역할을 잊지 못하는 넉넉한 장승과도 같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최익현유배지 표지석>


관덕정과 관아를 지나면 본격적인 제주시의 옛 번화가가 시작되는데,

유배지였던 제주의 옛 모습을 알려주는 다양한 표지석들이 골목과 골목 사이에서 쉼 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게 독특하고 재미있다.

문득 잘 차려입은 정장 간판 아래 표지석을 가만히 보니 애국지사 최익현의 유배지 표지석이다.

이렇듯 제주를 거쳐 간 역사인물들의 이야기는 제주 도심에 오롯이 새겨져 있는데,

그 시간여행을 안내받을 수 있는 곳이 칠성로가 끝나는 산지천 옆 골목에 자리한 제주책방이다.

산지천은 바다와 만나는 곳이기도 하며, 앞으로는 탐라문화광장과 제주 동문시장이, 옆으로는 칠성로 쇼핑거리가 이어지는데,

그 주변으로 다양한 문화공간과 역사의 상징이 자리하고 있다.

제주책방 역시 그런 곳 중 하나인데, 기술적으로는 일식 건축을,

기능적으로는 제주 민가의 전통적 구성을 담고 있는 독특한 근대건축물로 제주시민을 위한 쉼터로 활용되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광해군 유배지로의 시간여행을 비롯한 도심여행을 위한 다양한 정보를 단정한 한옥의 대청마루에서 다리쉼을 하면서 얻을 수 있다.


<산지천과 김만덕 기념관>


제주책방의 건너편에는 그 유명한 제주의 거상이자 의녀 김만덕 기념관이 있다.

제주는 여성성이 강한 섬이기도 하다. 제주를 만든 이는 설문대할망이고, 어부의 안전을 지켜주는 바람의 여신은 영등할망이다.

제주에 남아 있는 전설과 신화에는 바리데기, 자청비 등 굳건하고, 지혜로운 여성이 많이 등장하는데,

의녀 김만덕은 현존하는 제주 여성의 표상인 셈이다.

기념관에는 김만덕의 일생과 지혜로운 치부와 쓰임의 과정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당시 78세의 노재상이었던 번암 채제공이 쓴 만덕전은 당시 그녀의 모습을 생생히 그리고 있으니 그 재인용을 통해 들여다보자.


 

 <김만덕기념탑 뒤편에는 김만덕의 일생이 새겨져 있다>


만덕은 성이 이고 탐라의 양갓집 딸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의지할 곳이 없어서 기생에게 의탁하여 살아가게 되었다.

점점 자라자 관에서 만덕의 이름을 기생의 명단에 올렸다.

만덕은 비록 머리를 숙여 기생으로 일했지만, 스스로는 기생으로 여기지 않았다.

나이 스무 살이 넘어서, 그의 사정을 관에 읍소하니 관에서 이를 불쌍히 여겨 기생 명단에서 삭제하고 다시 양민으로 돌아가게 했다.

만덕은 비록 집에 하인을 두었지만, 탐라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재화를 늘리는 일에 능해서 물건의 귀천을 때에 맞게 팔고 때에 맞게 저축하기를 잘하여, 수십 년에 이르러 자못 부자로 이름이 났다.

정조 19(1795)에 탐라에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죽어가기에 이르니 임금은 배에 곡식을 싣고 가서 먹이라고 명했다.

고래가 뛰는 바다 팔백 리를 범선이 베틀의 북처럼 왕래했지만 때에 맞게 이르지 못했다.

이때 만덕은 천금을 내어 육지에서 쌀을 사니, 여러 군현의 뱃사공들이 때에 맞게 이르렀다.

만덕은 그중 10분의 1을 취하여 친족을 살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관청에 실어 보냈다.

굶주린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관청의 뜰에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남녀 모두가 만덕의 은혜를 칭송하며 우리를 살린 자는 만덕이다라고 했다.


<복원된 김만덕객주>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늘 검소하게 살면서 풍년에는 흉년을 생각해 절약하고,

편안하게 사는 사람은 고생하는 사람을 생각해 하늘의 은덕에 감사하며 검소하게 살아야한다는 생활철학으로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던 의녀 김만덕. 유교의 조선시대에 처음으로 부자의 사회적 책임을 다한 여성으로 기록되었고,

또 이를 기려 2015년에 기념관이 개관하게 된 것이다.

기념관 뒤편으로는 객주가 재현되어 있다.

김만덕을 생각하는 제주의 마음은 기념관에서 멀지 않은 사라오름 인근에 남겨져 있다.

그곳에는 만덕의 묘가 있고, 제주 내외 도민 17만여 명의 성금으로 세워진 20미터의 거대한 의녀반수 김만덕 의인 묘탑이 세워져 있다.

만덕의 묘 옆에는 은광연세라는 글이 새겨진 둥근 돌이 있는데, 제주에 유배를 온 추사 김정희가 만덕의 선행을 듣고 남긴 글이라고 한다.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뻗어나간다라는 뜻이다.

 


조천에서 구좌까지의 해안도로


<조천 용천수탐방로>


제주시내를 벗어나면 해안과 한라산을 지나는 다양한 도로가 기다린다.

그중 들락거리는 해안의 풍경과 함께 옛 골목의 정취가 남아 있는 조천 해안도로로 들어선다.

그곳에는 조천만의, 제주만의 골목과 시간의 풍경이 있다. 낮은 돌담 너머로 단정한 집들이 있고,

돌담 사이는 다육식물들이 뿌리를 내리며 빠져 나오고 있다.

그리고 역사문화와 함께하는 용천수 탐방길이라는 독특한 공간이 시선을 잡아 끈다.

용천수란 말 그대로 바위 사이로 솟아나는 물인 셈인데, 해안가의 바위 사이로 솟아난 물은 조천 사람들의 다시없는 생명수였던 듯싶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식수를 얻고, 빨래를 했으며 목욕을 했고, 마을 잔치를 위한 음식을 장만하였다.

남탕과 여탕으로 구분되었던 수룩물, 물이 맑고 풍부하여 먹는 물과 생활용수로 사용했던 절간물,

엉물 빨래터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고 제물을 태웠던 바위섬에 있는 물이라고 하여 제주자리물이라 불렀던 곳까지

다채로운 풍경과 이색적인 이름들이 구불거리는 해안선과 함께 이어진다.

바닷물 사이로 용암이 막 굳은 듯한 거친 검은 바위가 기묘한 문양을 그리고,

그 위로 구멍이 송송 뚫린 검은색 현무암으로 담을 쌓았다.

틈새로 물이 솟아나오기도 하고, 찰랑거리며 잘 다듬어진 돌들 사이를 오가기도 한다.

그 옆과 위로 시인의 집과 같은 북카페 등이 어우러지니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제주 해안만의 풍경이라 하겠다.


<만세광장 추모탑>


해안의 풍경이 어느 순간 드넓은 공원으로 변했다. 어느새 조천 만세광장에 다다른 것이다.

조천은 제주시 화북과 함께 제주의 오래된 항구로 육지와 연결되는 관문이었다고 한다.

제주로 부임하는 관리, 귀양살이 오는 유배객, 육지를 오가는 장삿배 모두 이 두 항구로 들어왔고 이곳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당연히 다른 지역보다 먼저 개명되고, 또 가장 먼저 3.1운동 당시

맨 처음 독립 만세의 함성을 외쳤다고 한다. 조천리 만세동산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하였는데, 그 넓이와 자태가 상당하다.

 

<조천 삼일운동기념탑>


먼저 거대한 애국선열추모탑이 보이고, 그 크기가 작아 보일 정도로 넓디넓은 광장이 펼쳐진다.

탑 사이로 창열사가 보이고, 옆으로 낮은 언덕이 조성되어 있다.

그 위에는 또 하나의 탑인 3.1독립운동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언덕에 탑까지 더하니 그 높이가 심히 창대하고,

그 위에서는 창열사 너머의 아득하고 파란 바다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마치 삼각점을 찍듯이 기념탑 오른쪽 위로 제주항일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가는 길에는 독립유공자비가 새빨간 글자와 함께 안내하듯 늘어서 있다.

기념관을 들어서니 아이들의 그림이 장엄한 부조와 조각상을 둘러싸고 있다.

2층의 다양한 전시물과 더불어 너무 장엄하고,

너무 극적인 항일운동의 순간들이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그림과 어우러져 보는 이들의 마음과 시선을 꽉 채워준다.

어쩌면 과도한 치켜세움은 새로운 세대에게는 부담일수도 있겠다.

유홍준 교수 역시 문화유적지에서 버스에 내리지 않던 학생들에게 분노에, 체념에 반성을 오가지 않았던가.

그보다 더 젋고 먼 세대들에게는 오히려 아이들은 재기발랄한 그림이 더 많은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듯하다.


<제주항일기념관>


조천을 떠난 길은 해수욕장이 유명한 함덕을 만난 뒤, 거대한 풍력발전기와 단단한 환해장성과 함께 김녕을 지나 곧 구좌읍 세화포구에 다다른다.

그곳에는 해녀박물관과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이 있다.

제주는 축복받은 자연이 있는 섬이지만, 삶이 풍요롭지만은 않았다.

예로부터 제주 아낙들은 척박한 자연 환경에 맞서 가히 초인적인 생활력을 발휘해왔다.

여인들은 숙명적인 '물질'을 시작해야 했고, 다행히도 제주,

특히 구좌와 우도 주변의 바다에는 소라·멍게· 해삼·전복·문어·다시마·미역 등의 해산물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그래서 구조와 우도 일대는 '제주도 해녀의 본고장'이라 불리며, 그 어디보다 해녀의 숨비소리를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산소탱크 없이 간단한 잠수복과 잠수용 오리발, 마스크를 착용하고 바닷물에 들어가 전복과 성게 그리고 조개 등을 채취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해녀들이 5미터 잠수 시에는 한 시간에 46번 정도, 그리고 10미터 잠수 시에는 한 시간에 28번 정도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한다고 한다.

이 고단한 과정에 잠수병과 관절 질환 등 웬만한 병 하나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고,

덕분에 제주와 우도의 깊이를 더해주던 숨비소리 합창은 점차 옅어져 가고 있다.


 <제주해녀박물관>


여름 제주를 찾은 적이 있었다. 제주의 7월과 8월은 태풍의 계절이다.

우도로 가는 배를 기다리다 태풍으로 모든 배편이 취소되어 하릴없이 섭지코지 입구의 수족관에서 태풍과 남겨진 시간을 피하고 있었다.

다른 곳의 수족관과 별반 다를 바 없던 시간은 거대한 수조를 유영하던 해녀의 모습에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높이가 한없이 높은 수조였기에 한없이 깊은 물속이었는데도

나이 육십을 오래 전에 넘긴 늙은 해녀가 부드럽게 들어가 자유롭게 노닐다 다시 위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해녀는 오직 일본과 제주에만 있지만, 그 능력은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차이가 난다는 말에 절로 수긍이 되는 풍경이었다.

그런 해녀의 일상을 그대로 전시하고 있는 곳이 해녀박물관이었다.



<제주해녀박물관에 재현된 불턱의 풍경>


그런데 해녀의 옷, 작업, 그리고 물질 중 잠시 몸을 녹이던 불턱을 비롯한 전시를 보던 중

옆에 아빠와 함께 온 중학생 여학생이 문득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그런데 여기는 왜 온 거야?”

해녀박물관 2, 3층의 전망대를 나서면 바로 앞에 제주의 바다와 해안선이 펼쳐진다.

거기에는 해녀들이 쉬고기원하던 갯것 할망당과 용천수가 나오던 도구리통이 그대로 남겨져 있다.

그런데 갯것 할망당은 태풍에 그 흔적만 남을 정도로 부셔졌고, 이 사실을 거의 일 년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영상과 사진은 새로운 세대에게 너무 익숙한 매체이다.

이제 문화를 같이 공유하기 위해서는 좀 더 적극적인 방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문득 생각이 든다.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


해녀박물관을 나서 건너편 기념탑을 향한다

거친 파도를 헤치고, 삶의 꾸려왔기 때문인지 해녀들의 문화와 공동체는 마치 우리 민족과 어머니의 그것처럼 질기고도 질긴 것이었다.

그 시리도록 아름다운 흔적을 제주항일운동기념탑 그리고 세화포구 건너편에 있는 우도의 천진항에 해녀 항일운동기념비를 통해 만날 수 있다.

제주 해녀의 항일운동은 성산과 우도, 구좌의 해녀들을 중심으로 일제의 생존권 수탈에 항거하여 일으킨 운동이었다.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고순효, 김계석 5인의 해녀 대표에 의해 주도된 이 운동은 청년 민족운동가들과 연계하여

제주해녀항일운동을 단순 생존권 투쟁에서 항일운동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되고 있다.

1932112일 세화리 주재소 시위가 가장 크고, 대단했다고 했는데,

해녀들은 세화리 장날을 기해 다구찌 제주도사에게 요구 조건을 제시하기로 결의한 게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날 구좌면의 일천여 명의 해녀들이 집결하여 호미와 빗창을 휘두르며 세화리 주재소를 순시하던 제주도사를 포위하고

격렬하게 투쟁하여 해녀의 요구조건 8개 항목을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만세를 외치며 해산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무자비한 주동자 검거가 이어졌다.

이때부터 불붙기 시작한 해녀의 항일운동은 3개월 동안 제주 동부 지역에서 연인원 17,000명의 해녀가 참가한 국내 최대 여성집단의 항일운동이자,

최대의 어민 봉기로 이어졌다. 그 의기를 기리고자 2차 봉기의 집결지였던 이곳에 기념탑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우도해녀항일운동기념탑 천진항>


제주 성산포항과 종달리와 하도리 해안도로 맞은편 바다에는 거대한 소 한 마리가 머리를 내밀고 있다.

전설과 신화의 고향이자 태곳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섬, 우도이다.

성산항에서 배를 타고 우도를 가면 하우목동항과 천진항에 도착한다.

그중 천진항에 내리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게 해녀항일투쟁기념비와 해녀상이다.

거친 파도와 싸우며 강인하게 살아온 우도 잠녀들의 굳센 삶과 끈끈한 공동체 정신을 말해주는 역사적 상징이라 하겠다.

기념비에는 우도 해녀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 마을 출신 강관순이 지었다는 '해녀의 노래'가 기록되어 있다.

 

우도해녀가

 

우리들은 제주도의 가이없는(가엾은) 해녀들

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안다

추운 날 더운 날 비가 오는 날에도

저 바다에 물결 우에 시달리던 이내 몸

 

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 되면 돌아와

어린 아이 젖주면서 저녁 밥을 짓는다

하루종일 하였으나 버는 것은 기막혀

살자하니 근심으로 잠도 안 오네

 

이른봄 고향산천 부모형제 이별코

온가족 생명줄을 등에다 지고

파도 세고 물결 센 저 바다를 건너서

기울산 대마도로 돈벌이 가요

 

배움없는 우리해녀 가는 곳마다

저놈들은 착취기관 설치해놓고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해간다

가이없는 우리해녀 어디로 갈까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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