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뛰기링크

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반계의 풍경과 곰소의 시간을 만나다 스크랩



반계의 풍경과 곰소의 시간을 만나다 

-반계유허지, 내소사, 곰소항과 곰소염전, 채석강-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조선시대를 배우다보면, 왜란, 호란, 당쟁 등으로 참담해지던 마음이 어느 순간 확 뚫리던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중 하나가 조선 후기를 누비던 실학자들의 용맹한 철학과 그 실천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다산 정약용, 성호 이익, 연암 박지원 그리고 반계 유형원까지.

그중 반계수록의 자취를 찾아 부안으로 길을 떠나본다.

그곳에서는 아득한 시간을 쌓아올린 채석강이 있고, 생활의 보석을 만드는 염전이 있으며, 편안한 풍경의 내소사가 있다



100년을 앞선 평생의 저작. 반계수록


<반계유적지 입구>


곰소와 내소사를 향해 가다가 반계로를 만난 삼거리에서 잠시 우측 도로로 1킬로미터 정도를 들어가면

반계선생 유적지라고 쓴 안내판이 있는 마을 입구가 나온다.

변산의 주요 관광지로 향하는, 정해진 노선과는 사뭇 다르게 논과 밭과 마을이 사이에 있는 곳이다.

주차장과 쉼터가 있고, 그곳에서 잘 포장된 길을 따라 산을 올라야 한다.

잘 꾸며진, 농가 같지 않은 집들을 몇 채 지나면 중간에 나무데크로 만든 산책로도 있다.

의외로 쉽지 않은 길이고, 숨이 턱에 차오를 때쯤 중턱에 반계의 자취가 담긴 서재이자 서당을 만나게 된다.

다행인 것은 길이 제법 잘 다듬어져 그나마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올라가는 길의 불편함을 호소했던 불과 몇 년 전의 기행문을 본 듯한데,

그새 길이 포장되었으니 세상의 빨라진 속도를 새삼 느끼게 된다.


 <반계유적지 가는 길>


사실 이번 반계 선생을 만나기 위한 준비를 하면서 가장 놀랐던 게 바로 시간의 간격이었다.

우리 역사 교육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대부분 실학은 누구의 어떤 저작은 몇 년, 무엇을 만들고 행했나로 정리된 한 챕터로 만나게 된다.

실학자들은 두리뭉실하게 한 무리의 학자로 상상되었고, 같이 또는 같은 시대에 활동하는 모습을 그리게 된다.

그건 몇 년이라는 시험에 출제되는 숫자까지 외운 상태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알고 보면 실학자들은 같이 무리의 집단도 아니었고, 또 같은 시대에 살지도 않았다.

특히 반계 유형원은 다산 등의 실학자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무려 100년 전의 사람이었다.


<반계서당 전경>


유형원(1622~1673)은 지금의 서울 정릉에서 유흠(1596~1623)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2살의 나이에 부친이 광해군 복위설에 휘말려 옥사하여 조부인 유성민(柳成民)과 외가의 보살핌 아래 성장하였다.

세상을 보는 시선이 남들과 다를 수밖에 없던, 또 부조리한 현실과 타협하며 벼슬할 생각이 없었던 그는

나이 32세가 되던 때 조부상을 마치자 이곳 부안현 우반동(현재 보안면 우동리)으로 내려오게 된다.

조선 개국공신인 8대조 할아버지 유관이 공을 인정받아 나라로부터 받은 토지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형원은 우반동의 삶을 만족해하며 글 쓰고 공부하는 틈틈이 아이들 글 가르치면서 살아갔다.

그리고 52세 일생 동안 여러 분야 각 방면 실학 연구에 몰두하면서 방대한 양의 연구와 저작을 완성했다.

특히 자호인 반계(磻溪)’생각이 미치는 대로 수시로 기록한다는 뜻의 겸손한 표현으로

수록(隧錄)’이라 이름을 붙인 <반계수록>1652년 쓰기 시작해 49세 되던 해인 1670(현종 11) 완성하였다.

2613책인 <반계수록>은 토지제도를 다룬 전제와 교육과 선발에 대한 방법을 다룬 임관, 관리의 녹봉 체계를 다룬

녹제, 국가 체계를 다룬 직관, 군사제도를 다룬 병제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속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반계서당>


그렇지만 반계 생전에 반계수록의 내용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사본으로만 남아 있던 이 저작은 완성으로부터 100년 후인 1770(영조 46) 이 책을 보고 크게 감탄한

영조의 왕명에 의해 공식적으로 간행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놀랍지 않는가? 무려 백년의 시간이다.

비록 지금과는 그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지금으로 생각해보면

100년 전 대한민국은 6.10만세운동이 벌어지고최초의 영화인 아리랑이 개봉되었다.

당시 발표한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1923)에 감명한 지금 청년들이 대학로에 모여 궐기를 하는 것이 감히 상상이 되는가?

반계의 저작은 그 100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많은 이들을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정조는 마치 100년 전에 살면서 오늘날의 일을 환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중략) 그 사람이 품은 생각은 실로 대단하였다라 하였다고 한다.

사회구조 개편이 절실한 시기 영정조 시대에 개혁의 방향과 대안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정리함으로써

정약용과 이익을 비롯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길잡이가 된 것이다.

반계가 남긴 지리서 <동국여지지> 13권과 우리나라 역사를 정리하기 위한 범례집 <동사례>

또한 뒷날 안정복이 <동사강목>을 저술하는 밑바탕이 되기도 했으며, 정조의 화성 축성 또한 반계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한다.

산 중턱에 조용히 자리 잡은 반계의 서당은 사실상 성호 이익과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실학의 큰 줄기를 만든 샘과 같은 곳이라고 하겠다.


<반계정>


유적지에 도착한 이들은 마을과 농토가 한눈에 들어오는 정자에서 먼저 땀을 식힌다.

농업에 대한 깊은 관심은 날마다 눈에 접하는 마을의 일상과 그들의 삶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정자의 바로 앞으로 작은 솟을대문이 열려 있다.

들어가면 한눈에 전체가 들어올 정도로 작은 곳이지만, 사람이 살지 않음에도 단정하고, 사방으로 열려 있어 시원하기 그지없다.

당시 이 작은 서재에서 반계는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것이다.

그가 칩거하며 <반계수록>을 집필하던 17세기는 서양에서 근대 사상의 여명이 열리고, 과학도 혁명기를 맞아 의식의 대전환을 이루던 시기였다.

반계는 실천적인 학문을 통한 개혁을 꿈꿨다.

당연히 그의 관심은 모든 분야를 포괄하였고, 농업개혁, 호적과 조운, 경상, 화폐,

시장, 과거제도, 교육, 지방행정 등 정치, 경제 분야를 모두 아우른 백과사전식 저작물인 <반계수록>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누군가는 수레도 몰랐던 그의 저작물에 대해 탁상공론이라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동의 속도와 범위가 지금과 달랐던 당시에는 그가 담을 수 있는 지식의 한계란 당연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작은 탁자를 넘어 세상과 100년 뒤의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사색과 탐구를 해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유적지는 적당한 산행과 함께하는 산책지이면서, ‘공부의 의미와 방법을 되새기기 좋은 곳이라 하겠다.

 

<반계고택지 반계유적비>


산을 내려와 다시 곰소로 향하기 전 잠시 마을을 둘러본다.

커다란 석비에 끌려 들어간 곳에 작은 공터와 비석, 그리고 몇 가지 안내판이 있다.

예전 반계 선생의 고택자리로, 밭이 되어 흔적도 없어진 곳을 다시 정돈하여 만들어놓은 것이다.

반계수록이 품고 있는 다양한 세상을 담을 수 있는 쉼터가 되기를 바래보면서 마을을 떠난다.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 곰소염전과 곰소항

 

<곰소염전>


길은 곰소항으로 이어지는데, 항구와 바다를 만나기 바로 전 도로 아래로 넓게 펼쳐진 독특한 풍경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최근 국가중요어업유산 지정된 곰소염전이다.

요즘 우리는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젊음을 간직한 사람을 흡혈귀나 뱀파이어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또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오뚝이와 같은 이들을 좀비라 부르기도 한다.

가끔 사람이 아닌 공간에서 그런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곰소염전이 바로 그런 곳이 아닌가 싶다.

20년 전, 10년 전, 그리고 최근의 모습까지, 한가로운 듯한 풍경도 그대로고, 여전히 질 좋은 소금을 생산해내는 명성도 그렇다.

요즘과 같이 한 달이 다르게 변해가는 시대에 그러하다는 게 무척 놀라운 사실이기는 하다.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천일염 생산지인 곰소염전은 조선시대에는 줄포만에서 곰소만까지 화염(바닷물을 끓여 만든 소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와 택리지 등 옛 문헌에도 조선시대부터 지역주민들이 소금생산으로 생업을 영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곰소염전은 일제말기에 만들어진 곳으로 해방 이후부터 천일염을 생산한 곳이다.

소금은 보통 3월 말에서 10월까지 생산되는데 5, 6월에 소금 생산량이 가장 많고 맛도 좋기 때문에 이 시기가 염부들에게는 수확의 계절이기도 하다.

특히 곰소 염전 앞 고창·부안 갯벌은 람사르습지로 보호되고 있어 다양한 갯벌생물과 염생식물 등이 서식하는 곳이다.

깨끗하고 드넓은 갯벌의 바닷물은 소금에 무기질과 미네랄이 더해줘 소금의 맛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곰소염전>


해가 질 무렵 혼자서 부지런히 염전을 오가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를 만났다.

스스럼없이 창고로 안내하며, 전국에서 제일 좋은 소금이라며 찾아간 이들 입속으로 한 움큼씩 소금을 안겨주는 모습이 너무도 정겹게 느껴진다.

항상 쓸쓸한 듯한 염전의 모습이 여전히 그 풍요로움을 자랑하는 것은 이런 인심과 부지런함 때문이 아닌가 싶다.

아저씨의 깊게 새겨진 주름을 보며 염전의 고달픔을 보다보니 어느덧 해가 져간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서해의 일몰을 보러 변산을 찾고, 대다수가 채석강에서 사람무리에 묻혀 일몰을 보려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바닷가의 일몰같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염전의 단정한 바닥에 반사되는 낙조의 아름다움은 결코 그에 못지않다.


<곰소항> 


곰소염전에 이어 바로 나타나는 곰소항은 염전과 다르게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곳이다.

곰소항은 줄포항이 토사로 인해 수심이 점점 낮아지자 그 대안으로 일제가 제방을 축조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이 지역에서 수탈한 각종 농산물과 군수물자 등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그때부터 지금까지 근해에서 나는 싱싱한 어패류가 곰소염전의 소금을 만나 다시 태어난 각종 젓갈로 유명한 곳이다.

게다가 곰소는 변산 팔경 중 제1경 웅연조대에 해당하며, 서해 앞바다에 펼쳐지는 어선들의 행진과 어선에서 밝혀대는 야등이 물에 어리는 모습,

강촌의 어부들이 낚싯대를 둘러매고 노래 부르는 모습으로 알려진 곳이다.

덕분에 주말이면 변산 관광과 더불어 젓갈 쇼핑을 겸하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거린다.

이런 관광객을 위해 곰소항은 상가건물 뿐만 주차장도 새로 만들고, 곰소항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공원까지 조성해 놓았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곳에서 보고 싶은 풍경은 갯벌 이에 한가롭게 쉬고 있는 어선들의 고즈넉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변한 듯 변하지 않는 내소사와 채석강

 

 

<내소사 경내>


내소사는 주변에 절 좀 다녀본 이들이 가장 아끼는 곳 중 하나로 언제나 꼽히던 곳이었다.

포장이 새로 깔리고, 오가는 이들과 상가가 많아지고, 울창하던 전나무 숲마저 듬성해지면서

예전과 같은 애틋함과 혼자 감춰두고 보는 맛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내소사 전나무숲>


내소사의 자랑은 두 가지라고 말한 적이다.

단지 두 가지 뿐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두 가지는 그 어느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것이기에,

다른 모든 것보다 가치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관리사무소의 경계를 넘어서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일주문을 들어서면서 하늘을 지를 듯 치솟은 전나무 숲길이 반기는 것이다.

저절로 숨을 크게 들이쉬게 된다.

600m에 이르는 전나무 숲이 주변 세상과 나를 완전히 격리시켜주는 것이다.

하늘로 뾰족하게 솟아있는 전나무를 쳐다보다가 어느 순간 산문이 보이고,

그 아래에로 찾아간 이들을 환영하듯 단풍나무들을 두 팔을 벌리고 늘어서 있다.

특히 아침녘에 이 내소사 길을 걸으면 마치 광고 속 주인공이 된 듯한, 이 세상이 아닌 다른 곳에 온 듯한 신선함을 느끼게 된다.

바로 이것이 다른 곳에서 느낄 수 없는 내소사만의 첫 번째 아름다움이다.

이 전나무 숲길이 불과 5~60년 전인 해방 이후에 조성된 것임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이다.

그렇지만 숲이 주는 시원함과 아늑함은 여전하다는 게 고마울 뿐이다.

 

<내소사 천왕문>


전나무 숲이 끝나면 좀 더 낮고, 편안한 느낌의 벚나무와 푸른 잔디가 길을 천왕문으로 안내한다.

양쪽으로 낮은 기와담이 길게 뻗어 있다. 예전과 달리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닿은 듯한 모습인데,

그래도 변산과 함께 어우러지는 대웅보전과 낮고 편안한 전각들은 내소사만의 단정하고도 소탈함 모습을 한껏 보여준다.

산문을 들어서면 중앙에 높이 솟은 느티나무와 좌우로 늘어 서 있는 아담한 절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바위산의 우람함 밑에 보이는 내소사에서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함이 슬며시 느껴진다.

무엇일까 하고 한참 제자리에 멈춰서 주위를 둘러보다 보면 눈과 마음이 너무도 편안해짐이 깨닫게 된다.

바로 그것이 내소사의 두 번째 아름다움이다.

지금이야 절집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저마다 화려하고 높이 솟은 조형물에 집착을 하고 있다.

어떤 곳은 손바닥만큼 작은 절이 산을 넘어 하늘로 솟아오른 탑에 걸려 있듯 자리한 모습에 기가 질리기도 한다.

그런데 내소사는 더해지는 사람의 손에도 불구하고 그런 부자연스러움마저 부드럽게 품고 있음을 알게 된다.

거친 바위산에 전혀 거슬림이 없이, 화려하게 채색된 단청 없이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드러낸 대웅전은 무심히 지나쳤던 시선들을 다시 돌려세운다.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조화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그렇게 멀찍이서 대웅보전의 자연스러운 자태를 엿보다가 가까이 다가가면 아름다운 꽃창살을 발견하게 된다.

색이 없어도 화려함을 그 꽃문양들이 잔잔하게 알려주고 있는 듯하다.


 

<내소사 꽃창살>


내소사 원래 이름은 소래사였다고 한다.

다시 태어나 찾아온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백제 무왕 34(633)에 해구스님이 창건한 이래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성종 때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기까지도 소래사였다.

그러다 조선 인조 11(1633)에 청민선사가 중건할 때쯤에 내소사로 바뀐 것 같은데, 그 이유는 확실치 않다.

유홍준 선생은 강진과 부안의 자연과 인문은 신기할 정도로 비슷” 하다며

강진과 부안 모두에게 일번지의 영광을 저울질했음을 고백했었다.

부안에는 변산과 곰소바다가 있으며, 내소사와 개암사가 있다.

거기에 다산의 목민심서와 같이 반계 유형원의 <반계수록>이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변산과 부안은 우리 문화와 풍경을 만날 수 있는 일번지가 될 만한 소질을 간직한 곳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내소사를 나오는 전나무 숲의 중간쯤에는 직소폭포와 외변산으로 넘어가는 길이 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차를 이용하지 않았다면 잠시 그 길을 넘어가봐도 좋을 듯하다.

내소사 뒤편으로 보이는 바위산을 넘어가는 이 길은 힘들만큼 길지도 않으며, 아쉬움이 남을 만큼 짧지도 않은 길이다.

그리고 처음 바위 길의 험난함은 뒤에 이어지는 절경과 직소폭포 그리고 편안하고 눈이 즐거운 계곡길로 보상받는 인생과 같은 곳이기도 하다.

특히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오는 직소폭포는 보는 각도와 거리에 따라 느낌을 달리하면서 찾는 이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채석강>


이제 변산을 떠나는 여정을 시작한다. 나오는 길에 채석강을 들러본다.

피서철이 아님에도 해안으로 넘어가는 언덕에는 사람과 차들로 가득하다.

누구 말대로 그저 그런 해수욕장이 채석강을 만나 다채로워지고, 신비함을 가득 품게 되었다는데

그 모습을 찾아 사시사철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다.

사실 바다에서 조금씩 그 자태를 드러냈다가 다시 바닷물 속으로 사라지는,

층을 쌓아올린 바위들의 절묘한 그림은 보는 이들의 감탄을 절로 불러온다.

그렇지만 채석강의 신비는 시간을 타는 듯하다.

낙조의 아름다움만큼 서해 새벽안개와 어우러지는 채석강의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예전 새벽을 달려 아직 해가 뜨기 전의 채석강을 도착한 적이 있었다.

작은 둔덕 위에 각종 음식점도 여전했고, 그곳을 넘어 해변과 채석강으로 일행들이 하나둘씩 이동을 했다.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져가던 동료들그리고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와 희미하고 거대하게 나타나는 바위의 절벽들.

온갖 미디어가 범람하는 이때에도 존재를 실제 봤을 때의 감동은 바로 이럴 때 나타나는 게 아닐까 싶다.



<채석강>


채석강을 벗어나다가 문득 방향을 새만금으로 돌려본다.

그리고 그 아득한 방조제를 달려본다여전히 말이 많은 곳이다.

갈매기로 덮인 태양력 전지판의 인상적인 사진도 떠오른다.

그렇지만 흑백 TV로 보던 처음 이곳 바다를 막던 장면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놀라움으로 잊히지 않고 있다.

둑을 쌓으면서 점차 바다를 막아가던 양쪽의 제방은 드디어 바로 코앞에 다다랐다.

하지만 좁아진 바다의 물살은 포클레인과 덤프트럭의 분주함으로 감당하기 어려웠고, 거대한 폐선박을 사이에 걸쳐 가라앉히면서 둑은 완성될 수 있었다.

생방송으로 중계된 그 모습도, 그런 발상도 놀라운 일이다.

묘하게 그 기억이 반계수록의 놀라움으로 이어지는 듯하다.

그래서 이곳 변산은 변화의 다채로움을 말하기 참으로 좋은 곳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댓글등록 비밀댓글

(0 / 300)

전체댓글수: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