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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시대를 넘는 나눔의 용기, 경북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스크랩



시대를 넘는 나눔의 용기, 경북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최초의 민간의료기관, 상주 존애원, 김천 최 송설당과 김천중고등학교, 경주 최 부잣집의 육훈과 육연-


날이 갑자기 쌀쌀해지고, 온기를 찾는 계절이 시작된 듯하다.

단지 기온만을 탓하기에는 요즘 시절이 수상하다.

사람과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고, 그 사이로 오해와 질투,

이기심만 바람처럼 지나가고 있으니 무서운 것은 더없이 멀어지는 듯한 사람들의 마음이 아닌가 싶다.

춥고, 멀고, 어려울 때일수록 주위를 둘러보고,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진정한 용기가 된다.

세상이 살만하다는 건 풍요가 넘쳐서가 아니라 함께하려는 마음 때문이라는 건 우리의 오래된 지혜이자 자랑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그런 용기가 필요할 때이고, 그런 용기는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들 듯이 다가오는 이야기를 통해 숙성되는 법이다.

그런 이야기를 만나기 좋은 우리의 이웃이자 자산을 찾아 경북의 마을을 다녀본다.



사람을 사랑하는 지혜, 상주 존애원


<상주 존애원>


전쟁은 우리의 삶을 가차 없이 짓밟는다.

특히 임진년부터 7년간이나 지속된 전쟁은 우리 역사에 쉽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주었다.

조선의 모든 고장과 백성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헐벗고,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경상북도 상주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임란의 주요 전투가 벌어진 고장이었기에 그 후과는 깊고도 참혹했다.


<상 원>


임진왜란 초기 거침없이 진격하던 왜군에 최초의 방어전이 펼쳐진 곳이 상주였다.

15924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조선의 조정에서는

순변사 이일(李鎰, 1538~1601)을 지휘관으로 하여 중앙군을 급파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군사가 없었다.

이일은 3일 후 겨우 60여 명의 군사만을 이끌고 서울에서 출발하여, 일본군이 상주 진격 하루 전인 423일에서야 상주읍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상주 역시 상황은 좋지 않았다.


상주목사 김해는 이미 산속으로 피신해버린 뒤였기에 이일은 공황상태에 빠져 있던 상주판관 권길과 상주호장(尙州戶長) 박걸을 독려했고,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 지역의 농민들과 이름 없는 백성들로 구성된 800여 명의 병사와 중앙군 등 900여 명의 병사는

북천 언덕 위에서 왜군 17,000여 명과 맞서 싸우다 모두 장렬히 순절하였다.

그렇지만 상주의 저항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육지의 이순신이라 불리던 임진왜란의 영웅 정기룡 장군 역시 상주 출신이었으며,

그와 병사들은 상주와 그 주변에서 계속 왜군을 괴롭히며 전적을 쌓아갔던 것이다.

그 슬픔과 승리의 흔적은 상주 북천임란전적지와 정기룡 장군 유적지 그리고 경천대에서 낙동강의 아름답고 장엄한 흐름과 함께 확인할 수 있다.

 

<상 원>


거센 저항은 또 그만큼의 그 후유증을 가져오는 법이다.

비록 왜군은 물리쳤지만 굶주림과 슬픔에 더해 질병까지 상주의 백성들을 괴롭혔다.

하지만 사람이 대단한 건 어려움 속에서도 이겨낼 지혜와 힘을 찾기 때문이고, 우리 민족은 또 나눔의 미덕을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간직하고 있다.

이 전통과 지혜는 상주 지역의 선비와 지역의 가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서애 유성룡의 제자이자 바른 소리의 대가이며, 의병활동까지 했던 우복(愚伏) 정경세가 최초로 의료원 설립을 발기하였다.

역시 류성룡의 제자이고, 형과 함께 의병활동을 하였으며 죽음 앞에서 놀라운 형제애를 보여줌으로써

중국까지 감탄시킨 형제급난도의 주인공인 창석(蒼石) 이준이 그에 호응하였다. 또한 율곡 이이의 제자로 의학에 조예가 깊었던 성람은 존애원의 주치의로 나섰다.

그렇게 상주지역 13개 문중이 모였고, 존애원을 설립하였다.


1599년에 공사를 시작했고, 1602년에 건물이 완성된 존애원은 자생적인 최초의 민간 의료기관으로

지역주민을 위한 의료활동과 더불어 경로 및 교육까지 그 활동영역을 넓혀나갔다.

존애원이라는 명칭은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남을 돕게 된다는 송나라 선비 정자(程子)존심애물(存心愛物)’에서 따온 말이니,

사랑을 사랑하는 지혜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 모인 13개 문중의 모임인 낙사계가 지금까지도 이어져 매년 음력 210일에 모임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을 넘어 이어지는 그 아름다운 용기와 지혜가 새삼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상주 존애원>


시골마을과 들판 사이 홀로 우뚝 서있는 존애원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크기를 가진 작은 한옥이다.

처마에 매달린 약포만이 이곳에 무엇을 하던 곳인지 알려주고 있는, 어찌 보면 허름하기까지 한 옛 건물이다.

그 가치와 용기에 비해 그 처우와 대접이 조금 홀한 게 아닌가 하는 섭한 마음을 누르고, 약포가 매달린 처마 아래서 주변을 둘러보면서 당시를 상상해본다.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이곳에 줄을 섰을 것이고, 의학에 조예가 있던 선비들은 병자들을 오가며 그들을 치료했을 것이다.

다른 선비들과 문중은 힘과 재물을 모아 약재를 대고, 구휼을 하였으며, 때가 되면 앞마당에 마을 어르신을 위한 잔치를 벌였을 것이다.

역사는 상상이 아닐까 싶다.


역사를 간직한 문화유산은 갈피없이 오가는 상상과 생각을 하나의 무대 위에 재구성해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존애원의 쓸쓸함은 여백이 되고, 상상의 무대가 되면서, 한가로운 처마 밑 후손과 아이들은 역사 속의 그들과 대화하고,

당시의 이야기를 자신의 생각으로 받아들이는 시간이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존애원은 화려한 장식이나 요란한 관광객 보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지금 이대로의 모습에 만족할지도 모르겠다.



 최송설당이 뿌린 미래의 희망


<김천중고등학교>


가장 소중한 용기와 지혜는 가장 힘겨울 때 나타나는 법이다.

임진왜란의 고통스러운 기억은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로 더욱 참혹하게 이어진다.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던 시절이었고, 그런 조선인을 위해 지식이나 재산 그리고 자신이 가진 것들을 아낌없이 나누던 이들이 있었다.

비록 총을 들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나눔은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지켜낸 또 다른 힘이자 지혜였다.

특히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의 교육과 진학은 서민들에게는 꿈이자 고통이었나 보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 아이들의 교육은 더욱 지난한 일이었을 것이다.

매달 20~30원이 필요한 도시 유학비용까지 감당해야 했던 김천 아이들은 일찌감치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천고보 기성회는 1924년부터 김천에 중등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지만 6년간의 노력에도 설립은 지지부진했다.

그때 최송설당이 1930225일 전국 일간지에 학교설립을 위해 전 재산인 302100원을 희사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렇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학교 설립은 의지와 돈만으로는 부족했다.

1930324일 경상북도 학무과는 설립위원회가 처음으로 제출한 김천보통학교의 설립 신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인문계고등학교가 아닌 실업학교로 전환하라는 요구가 거절 뒤에 덧붙여졌다.


<송설역사관 전시관 내 최송설당>


최송설당은 총독부에 강경하게 맞섰다.

민족을 일제 통치하에서 구해낼 지식인을 배출하려면 꼭 인문계 학교를 설립해야 했기 때문이다.

조선 총독부의 정책을 바꾸기 위해 총독의 아내까지 만나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총독부는 학교 설립에 필요한 평가액이 32만원으로 증액됐다며 또 다른 이유를 만들어냈다.

최송설당은 이에 또 한 번 놀라운 결단을 내린다.

마지막 남은 재산이자 자신의 집인 서울의 송설당을 팔아 부족한 금액을 추가 보시하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송설당의 평가액이 23000원이니 총독부로써도 이의를 제기할 명분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그로부터 7개월이 지난 19313, 총독부는 공식적으로 김천보통학교의 설립을 인가했다.

송설당이 설립의지를 공표한 지 꼭 1년만의 일이었다.


최송설당의 파란만장한 행적은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목표를 위해, 전체를 위해 나아가던 굳센 용기의 표상과도 같았다.

1811년 홍경래의 난 때 성을 빼앗긴 송설당의 증조부는 옥사하였고, 가족은 전라도 고부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송설당의 아버지 최창환은 김천으로 이사한 뒤 서당 훈장을 하면서 일생 동안 가문의 복권만을 꿈꾸며 살았다고 한다.

20대 후반에 이미 김천에서 내로라하는 부자가 되어 있던 최송설당은,

마흔두 살이 되는 1886년에는 서울로 삶의 터전을 옮겨 권문세가의 부인들과 교제를 하면서 불과 1년 만에 최송설당은 영친왕의 보모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고종에게 가문의 신원을 바라는 상소를 올려 1901년 최씨 가문을 복권시키게 된다.

최송설당이 어떻게 성장하였고, 또 치부를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다만 확인되지 않은 말을 옮기는 것만큼 실없는 일은 없으니, 그저 어느 인터뷰에서 남긴 말을 그대로 옮겨본다.

 

내 본가가 본래 몹시 빈한해서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어머니는 바느질품을 팔아 근근이 살았습니다.

바느질삯으로 그때 엽전으로 두 냥 반짜리 밭을 한 뙈기 얻었지요.

그래선 그것을 자본으로 삼아가지고 농사를 시작했더니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밭 한 뙈기가 논 한 마지기가 되고,

한 마지기가 두 마지기, 두 마지기가 닷 마지기 이렇게 늘어갑디다.

그래 그것을 붙잡고 이렇게 살아왔지요.”


 

<김천중고등학교와 송설역사관>


단지 부를 쌓고, 권문세가와 교류를 하는 것만으로 끝났다면 그녀는 구한말 사교계의 입지전적인 여성 중 한 명으로만 기억됐을 것이다.

그러나 최송설당은 전체를 생각할 줄 알았고, 또 그것에 인색하지 않았다고 한다.

1908년 의연금 4원 기탁을 시작으로, 1912년 김천 교동 주민을 구휼하기 위해 벼 50석을 희사하였으며,

1915년에는 경성부인회에 거금을 기부하였다.

또 김천의 금릉학원가 유치원에 기부금을, 김천의 청암사에는 많은 돈을 시주했다.

마지막으로 최송설당이 눈을 돌린 곳은 교육 사업이었다.

1930년 여든을 바라보는 최송설당에게 남아있던 30만원이라는 재산은

재단법인 송설학원松雪學園과 김천고등보통학교가 설립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되었다.


<최송설당 동상과 송설역사관>


당시 세워진 보통학교는 지금도 김천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꾼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또 최송설당은 단단한 동상으로 남아 학교 안에서 자라는 자신의 씨앗을 지켜보고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잘 정돈된 화단과 길이 있고,

체육관과 운동장을 지나면 멋들어진 소나무와 함께 최송설당 동상과 송설역사관이라는 독특한 건물을 만나게 된다.

최송설당의 행적을 기리는 기념관이자 그 뜻을 이어받은 송설장학재단의 사무실이다.

최송설당은 학교 설립과 동시에 모든 권한을 놓았다.

학교 설립을 위해 마지막 남은 재산까지 남김없이 내놓은 터였기에 학교 내 정걸재를 숙소로 삼았고, 학교재단이 매월 설립자를 위한 생활비를 지급했다.

또한 당시 김천보통학교는 설립자인 송설당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제작키로 하고 모연을 시작했는데,

전국 각지에서 성금을 보내온 개인과 단체가 무려 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193511월 열린 동상 제막식에서 최송설당은

재단에서 지급받은 생활비를 아껴 모은 돈을 학생들을 위한 특별 교실(과학관) 설립에 필요한 건축비용으로 사용하겠다고 발표하였다.

마지막 수중에 남은 돈까지 모두 학교에 보시하고 빈손으로 떠나겠다는 의미였다.


 

<송설역사관 내 최송설당 동상과 전시품>


기념관 안에는 최송설당의 동상과 당시의 행적이 담긴 기사와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이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미래를 위한 터전을 만들었던 이를 그 터전에서 자리는 꿈나무들이 기억하고 항상 마주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미래는 그저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임을 조용히 알려주는 것이다



 경주 최 부잣집의 육훈과 육연


 <최씨고택 안채>


나눔과 배려를 말하는 건 참으로 쉽다.

남의 희생을 가볍게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다.

남과 비교해 자신의 작은 손해라도 분노를 참지 못하는 이들 역시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된다.

그래서 기꺼이 자신과 자신이 가진 것을 남을 위해 나누는 이들을 우리는 존경하는 것이고,

그 선하고, 대단한 행동을 간직하고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 선한 용기와 지혜는 가끔 놀라운 보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 신라의 발상지이자 수도였던 경주에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수많은 신라시대의 유적들 사이에서 자신의 가치를 당당히 내세우며 수많은 사람들을 여전히 맞이하고 있는 경주 최 부잣집이 그곳이다.


<교동최씨고택>


경주 최부자17세손인 최진립과 그의 아들 최동량이 터전을 이루고,

손자인 최국선으로부터 28세손인 최준에 이르는 약 3백 년 동안 부를 누린 일가를 말한다.

최부자 집안의 풍요는 병자호란 때 왕명에 따라 공주 영장(3품 당상직)으로 군사를 이끌고 청군과 싸우다

용인 험천에서 전사한 최진립(1568~1636, 전라도수군절도사 등을 역임)의 공신 토지가 그 시작이었다.


<경주 최부잣집>


그 뒤에 손자인 최국선은 가뭄으로 민심이 흉흉해지던 시기 최씨 집안이 가진 모든 빚 보증서를 태워버리고,

8할을 거두던 소작료도 5할만 거두기 시작했다.

일찍이 경작이 잘 되어 늘어난 곡식이 있으면, 모두 소작인들에게 나눠주고,

땅 중에서도 가장 기름진 땅을 소작인의 땅으로 내어주도록 했던 선조의 가르침을 지켰던 것이다.

그 소문은 말보다 빨리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기현상이 일어났다.

고을에 팔려고 내놓은 숨은 옥토가 생기면 소작농들이 모두 최 부잣집에 달려와 정보를 알려주곤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멀리 울산에서까지 소작농들이 자기네가 경작하는 땅을 사달라고 간청을 할 정도에 이르렀다.

결국 최 부잣집의 옥토는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 땅의 소작료를 5할로 변함없으니 소작농들의 살림도 더불어 넉넉해졌다.

그렇게 최 부잣집은 청송의 심부자와 함께 영남을 대표하는 부자가문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요즘 유행하는 돈쭐의 원조가 바로 이곳인 셈이다.

그리고 이런 최씨 가문의 선한 행동은 가훈에서 비롯된 것임을 육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벼슬은 하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만 석 이상의 재산은 쌓지 마라.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

 

<최씨고택 입구와 가족>


조선왕조가 계속되는 동안 최부자 가문은 이 가훈을 목숨처럼 지켰고,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의 자금을 대는 사업을 벌여 독립을 앞당기는 일에 일조하기도 했다.

최진립의 12대손인 최준(1884~1970) 역시 독립운동가이자, 기업인, 사회운동가, 교육자였으며,

1947년에 대부분의 재산을 영남대 설립에 기부하고 마지막 최부자가 되었다.

그들 가문은 그와 함께 평범한 중산층이 되었지만, 그들 가문은 나눔과 용기를 상징하는 존경 받는 부자가문으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제는 최부잣집이 있는 교동마을은 경주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고택을 둘러보던 이들은 점차 많아지고, 마당과 후원과 안채는 오가는 가족과 사람들로 항상 붐비고 있었다.

한 부부가 마침 아이를 목말 태우고 최 부잣집 안내판 앞에 서서 읽고 있다.

부모는 아직 한글을 모를 듯한 아이에게 하나하나 읽어주면서 혼자 묻고 답하기를 하고 있다.

아이는 웅얼거리며 그 말들을 따라하고 있었다.

안쪽 건물과 후원을 둘러보던 가족들 사이에서 한 아이의 외침과 아빠의 즐거운 대답도 들려온다.


우리 외할머니도 최씨인데!”

그렇지!”


<최씨고택 창고>


선한 영향력이란 이렇게 오래가고, 폭넓고 따뜻하기까지 하다.

마당 한편에 자리한 창고에서 최 부잣집의 육연(자신을 지키는 교훈)을 가만히 읽어본다.

 

자처초연自處超然 :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대인애연大人靄然 : 남에게 온화하게 대하며

무사징연無事澄然 : 일이 없을 때 마음을 맑게 가지고

유사감연有事敢然 : 성공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고

실의태연失意泰然 : 실패했을 때는 태연히 행동한다

 

그 마음을 가만히 새겨듣는 것만으로도 옛것을 간직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하겠다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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