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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사계의 땅에서 예학의 자부심이 만든 역사를 만나다 스크랩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with 이철호 작가



사계의 땅에서 예학의 자부심이 만든 역사를 만나다

-논산 강경과 죽림서원, 돈암서원 대전 우암사적지-



황산전망대에서 본 강경 젓갈전시관과 옥녀봉

<황산전망대에서 본 강경 젓갈전시관과 옥녀봉>


충청도 지역의 사람들을 우리는 예로부터 충청도 양반이라고 불렀다.

독특한 말투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조선시대 기호유학의 본거지가 바로 이 지역이라는 것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 듯하다.

기호유학은 학문으로는 율곡 이이, 우계 성혼의 학문을 계승한 학파이고,

지역으로는 경기, 충청(호서), 호남 지방의 유학자들이 중심이 된 학파이다.

특히, 논산과 회덕(지금의 대전)은 기호유학의 중심이라고 부를 만한데,

이는 연산의 김장생과 회덕의 송시열이라는 두 걸출한 유학자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근대의 풍경 사이에서 사계를 만나다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팔괘정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팔괘정>


강경읍은 서해에서 금강 물줄기를 거슬러 일백여리 가량 올라간 곳에 터 잡고 있어,

서해와 내륙을 연결하는 조선말기의 대표적인 포구시장으로 평양, 대구와 함께 전국 3대 시장 중 하나였다.

일제강점기 때인 1911년 철도가 놓이면서 강경의 영화는 더욱 크고 화려해졌다.

읍내에 일본인이 유입되고, 시내 중심가에 자리 잡았으며 지금도 홍교리, 중앙리에 당시의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일본으로의 미곡 반출이 중단되면서 강경의 영화는 저물기 시작했고,

1990년 완공된 금강하굿둑으로 수송과 어업의 기능을 상실한 금강과 함께 강경도 그 빛을 잃어갔다.

그렇지만 시간의 마법은 강경의 풍경을 다듬어 기억과 역사를 만나기 좋은 공간으로 꾸며 놓았다.

젓갈축제의 화려하고 짠내 나는 음식 사이에서 근대의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지난한 역사의 파도 속에서도 끈끈하게 자신을 유지했던 강경의 힘과 전통의 배경을 만나게 된다.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한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사계 김장생과 그의 제자 송시열의 자취가 담긴 유적이 그것이다.


강경 황산전망대

<강경 황산전망대>


강경읍의 한쪽 면은 금강과 맞닿아 있고, 강을 따라 황산대교까지 강변도로가 조성되어 있다. 그 도로에는 전설의 옥녀봉이 있고,

유명한 복 요릿집들과 함께 독특한 모습의 강경젓갈전시관이 있다.

그리고 황산대교로 올라서기 바로 전 홀로 솟은 황산과 전망대의 아래에서 금강을 바라보고 있는 죽림서원, 팔괘정, 임리정을 만나게 된다.


강경 임리정

<강경 임리정>


이이와 우향을 배향하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은 사계 김장생이 79세 되던 해에 건립한 서원이다.

뒤에 선생이 돌아가신 뒤 선생을 아울러 향사하게 되고, 이후 정암(靜庵)퇴계(退溪) 두 선생 및

우암(尤菴) 송 문정공(宋文正公)이 향사되면서 죽림서원(竹林書院)이라는 편액(扁額)을 하사받았다.

당시 죽림서원은 주자대전의 석궁을 그대로 모방하여 건축하여 이후 서원 건축양식의 전범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서원은 선현을 모시는 제향과 후학을 가르치는 강학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였는데,

이를 위해 서원 건축에서는 신위를 모시는 사당과 강학을 위한 재()가 한 공간 안에 배치되었다.

서원의 정문인 외삼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 건물이 강학공간인 헌장당이고, 왼쪽 건물이 유생들이 기숙하던 서재이다.

사당은 별도의 담을 둘러 분리하였는데, 내삼문을 열고 들어서면 신위를 모신 죽림사라 현판을 단 사당이 있다.


죽림서원 황산전망대와 팔괘정

<죽림서원 황산전망대와 팔괘정>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이이의 많은 제자 중 특히 김장생과 정엽이 유명했다고 한다.

그중 김장생은 유교 사상의 핵심인 예학을 이론적인 학문으로 성립시키려는 가례집람을 저술하여 조선 예학의 태두라 불리게 되었다.

단지 이론적인 정립뿐만 아니라 예에 관한 깊은 이해와 실천으로도 유명했는데, 그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하나 전해지고 있다.


사계 김장생이 일찍이 시골마을에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와서 여쭈어 말하기를

오늘 집안의 개가 새끼를 낳아 정결치 못하니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선생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와서 질문하기를 집안에 아이가 태어났으나 제삿날을 당하였으니 예를 폐할 수는 없는 것임으로 비록 제사를 지낸다 하더라도

또한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라고 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선생의 말을 듣고 이상하게 생각하니 선생이 말하기를 앞의 사람은 정성이 없어서 제사를 지내고자 하지 않고,

이 사람은 정성이 있어 제사를 지내고자 하니 예는 의식(儀式)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정성스러움에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사계 예학의 깊이를 말해주는 설화이기도 하지만, 예의 정신은 사라지고,

격식화, 형식화된 예만 남은 작금의 세태에 경종을 울리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그의 학덕이 유명해지면서 자연히 기호의 유학자가 그에게 배우기를 청하게 되니,

그의 아들인 김집을 위시하여 송시열, 송준길, 장유, 신흠 등 삼백 명이 넘는 문하 제자가 있었다.

그들은 당대의 학자이자 정치인으로 성장해 그 자취를 남기게 되니 이곳 강경은 그 뿌리가 되는 곳이라 하겠다.


임리정 오르는 길

<임리정 오르는 길>


죽림서원 옆으로 잘 다듬어진 짧은 계단의 언덕길이 있다.

그 언덕 위에는 1626(인조 4)에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이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건립한 임리정이 있다.

정면으로는 황산대교와 금강이 한눈에 들어오고,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황산전망대와 그 아래의 팔괘정이 보인다.

팔괘정은 우암 송시열이 스승 김장생을 사모하여 그 뜻을 기리고자 세운 정자이다.

그래서인지 임리정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구조와 규모를 지녔으며, 팔괘정에서도 역시 임리정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온다.

또한 팔괘정은 유명한 고전인 택리지가 쓰인 곳이라고 한다. 이는 이중환이 직접 택리지발문에서 밝히고 있다.


내가 황산강가에 있으면서 여름날에 아무 할 일이 없었다. 팔괘정에 올라, 더위를 식히면서 우연히 논술한 바가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산천, 인물, 풍속, 정치 교화의 연혁, 치란득실의 잘하고 나쁜 것을 가지고 차례를 엮어 기록한 것이다.” - 발문, 택리지



최초 신사참배 거부 선도기념비와 스승의 날 기념비


강경성결교회와 신사참배거부비

<강경성결교회와 신사참배거부비>


강경은 의외로 볼 것 많고, 먹을 것 많은 곳이다.

그 바쁜 와중에 오래된 서원을 들러야하는 이유는 이 작은 땅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일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황산전망대에서 강경읍내를 둘러보면 유달리 높이 솟은 교회의 첨탑들이 보인다.

그건 강경읍이 근대에 종교의 유입지로 김대건 신부 유숙성지 등 상징적인 건물과 공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중 한 곳이 유숙 성지 뒤쪽에 있는 강경성결교회인데, 교회 앞 마당에는 돌로 만든 커다란 비가 세워져 있다.

하단에 적힌바 그대로 최초 신사참배 거부 선도기념비' 이다.


강경 신사참배거부기념비

<강경 신사참배거부기념비>


신사(神社)는 일본의 민속신앙에서 출발하여 천황(天皇)의 조상이나 일본의 국가유공자를 안치한 건물로,

일본 제국주의, 군국주의의 상징이기도 하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화한 이후 신사를 곳곳에 설치하여 참배를 강요하였는데,

이를 최초로 거부한 곳이 바로 이곳 강경의 강경공립보통학교(현 강경중앙초등학교)였다.

강경공립보통학교는 기독교 계열 학교는 아니었지만,

신사참배 거부를 주도한 이들은 강경성결교회의 신자들였기에 이곳에 비가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192410월에 일어난 작은 사건은 총독부에 보고되고 조선일보, 동아일보, 기독신문등에 보도되면서

이후 다른 지역과 학교에서 신사참배 거부 운동이 일어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강경 스승의날 기념비

<강경 스승의날 기념비>


또 강경은 스승의 날이 처음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일찍부터 근대화의 물결을 경험했던 강경에 1936년 근대식 교육기관인 강경공립실과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지금은 강경고등학교로 된 이 학교는 1958년에는 강경여자중고등학교였다.

당시 학교에서 청소년적십자 활동을 하던 윤석란을 비롯한 단원들은 병환 중에 계신 선생님 위문과

퇴직하신 스승님의 위로활동을 매년 꾸준히 전개하고 있었다.

그 활동이 소문이 나면서 전국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1963년 청소년적십자 중앙학생협의회에서 524일을 은사의 날로 정하였고,

이듬해인 1964년에는 은사의 날스승의 날로 이름을 바꾸고,

날짜도 526일로 변경하면서 스승의 날기념식 개최를 전국 학생들에게 호소하였다.

1965년에 세종대왕 탄신일인 515일로 다시 변경된 스승의 날은,

1973년 정부의 방침에 따라 폐지되었다가 1982년 스승을 공경하는 풍토조성을 위하여 다시 부활되었다.

지금도 강경고등학교 입구에는 스승의 날 기념탑이 우뚝 솟아 당시 소박하고 정 많았던 학생들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교육의 붕괴를 누구나가 이야기하는 이때, 어쩌면 그런 소소한 활동과 교감이야말로 진정 우리에게 중요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걸어도 반나절이면 충분히 돌 수 있을 듯한 작은 강경읍이지만,

이렇듯 역사의 주요 장면에서 자신의 소신과 가치를 지키기 위한 행동을 주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이는 이곳에서 계승되던 예학의 가치 때문이 아닐까 문득 생각을 해보게 된다



성실의 표본 김장생돈암서원

 

논산 돈암서원 입구

<논산 돈암서원 입구>


예학을 집대성한 것으로 잘 알려진 김장생은 끈질긴 태도로 를 연구했고,

죽는 순간까지 를 수정하고 또 수정했다.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은 새로이 고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런 김장생이 말년에 관직을 모두 관두고 내려와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 바로 논산에 있는 돈암서원양성당이다.

 

돈암서원은 김장생의 아버지가 설립한 경회당과 김장생이 세운 양성당을 중심으로 후대에 와서 건립된 곳으로,

김장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것이다.

후에 김집, 송준길, 송시열이 각각 추가 배향되었는데, 대원군의 서원철폐 시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 하나이기도 했다.


돈암서원 한옥마을

<돈암서원 한옥마을>


당시의 위상은 현대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지금 돈암서원 일대는 역사유적지이자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차량의 출입이 통제된 입구에는 한옥마을이 조성되었고, 백제 솔바람 길을 따라 정려비,

사계의 묘소 등을 둘러볼 수 있는 트레킹 길이 돈암서원 뒤편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항상 배우고, 고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사계의 뜻에 따라

돈암서원도 시대의 변화에 자신의 가치를 나누고,발전시키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지금은 코로나로 뜸하기는 하지만, 돈암서원에서는 옛 과거제를 본뜬 백일장대회나 전통 음악과 강연을 개최하는 문화의 중심 역할도 마다하지 않는다.


응도당에 모인 작은선비들

<응도당에 모인 작은선비들>


마침 한 무리의 청소년이 교육을 받으러 온 듯하다.

작은 선비 옷을 입은 꼬맹이들이 제당에서 나와 응도당 건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정갈하게 관리되었지만 세월을 그대로 보여주는 서원의 건물과 옷자락을 나풀거리며 뛰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의외로 잘 어울려 보는 이들을 흐뭇하게 한다.

 


송시열과 우암사적공원

 

김장생의 제자 중 가장 유명한 이라면 송시열이 아닐까 싶다

송시열은 김장생으로부터 근사록, 심경(心經), 가례등을 배웠고, 1641년 김장생이 작고하자 그의 아들인 김집의 문하에서 배웠다.

정조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추숭되어 송자(宋子)로 격상되고,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된 유학자였다.

그리고 당파와 북벌 등 논란도 적지 않은, 당시 조선의 정치와 세파를 물러섬 없이 거슬러 올라가던 정치인이기도 했다.


우암사적공원

<우암사적공원>


우암 송시열의 흔적은 대전에서 만날 수 있다.

송시열이 효종 5(1654)에 세운, 구기자와 국화가 무성하여 기국정이라 불린 정자와 1683(숙종 9)에 지은 남간정사가 있기 때문이다.

송시열은 이 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의 학문을 완성시켰다고 한다.

그 두 건물과 더불어 송시열 문집인 송자대전판 등 문화재와 함께 1991년부터 1997년까지 16천여 평에

장판각, 유물관, 서원 등의 건물을 재현, 조성한 곳이 바로 우암사적공원이다.


대전 남간정사

<대전 남간정사>


공원을 들어서면 먼저 오른쪽으로 남간정사와 기국정으로 들어가는 작은 대문을 만난다.

들어서면 바로 앞에 기국정이 있고, 아래의 연못과 개울 너머로 남간정사가 보인다.

남간의 뜻은 양지바른 곳에서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말하며,

이를 위해 계곡에 있는 샘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이 건물의 대청 밑을 지나서 연못으로 흘러가게 하였다.

이는 한국 정원 조경사에 새로운 조경방법이라고 하는데,

주변의 풍성한 나무와 연못과 함께 마치 도원경과 같은 아름다움을 여전히 보여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암공원 명정문과 인함각

<우암공원 명정문과 인함각>


남간정사를 살펴보고 나와 좀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우암선생의 유물과 일생을 살펴볼 수 있는 유물관이 있다.

지금은 코로나로 문을 닫고 있다. 그 옆으로 홍살문이 보이고, 하늘을 바라보이는 길을 따라 멀리 명정문(明正門)이 보인다.

조선시대 서원의 형태를 재현해 놓은 곳이다.

서원 안으로 들어서면 단을 높인 마당의 정면에는 마음을 곧게 쓰라는 뜻의 강당인 이직당(以直堂),

우측에는 모든 괴로움을 참아야 한다는 뜻의 인함각(忍含閣),

좌측에는 모든 일을 명확하게 하고 마음을 맑게 하라는 뜻을 담은 명숙각(明淑閣)이 자리하고 있다.

그 뒤로 매사 심사숙고하여 결정하라는 뜻의 심결재(審決齋)와 선현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라는 견뢰재(堅牢齋)가 있으며,

가장 높은 곳에 새로 옮겨 지은 남간사가 자리 잡고 있다.


우암공원 남간사

<우암공원 남간사>


우암사적지에서 인상적인 것은 그 규모라 하겠다.

잘 조성된 산책길 사이로 돌로 만들어진 개울이 흐르고, 풍성한 나무와 화려하지만 단정한 전각은 좋은 쉼터를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 사이를 담소를 나누는 부부와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중년동호회가 천천히 오가고 있다.

어쩌면 강경에서 싹을 띄운 예학의 가치는 현실 정치에서 화려하게 꽃피고,

그 흔적은 선조의 덕이 되어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편안한 휴식으로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옛것을 기리는 우리의 마음은 그런 바람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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