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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충남, 소박한 기원이 만든 신비한 공간을 만나다 스크랩


-충남, 소박한 기원이 만든 신비한 공간을 만나다-

건강과 평안을 위한 문화유산의 지혜를 찾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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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암사 오르막길의 풍경>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한 기원은 무엇일까

서민이라면 아무래도 가난과 풍요에 대한 것이고, 부모라면 자식에 관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 그 소소한 바람이 모여 나라의 평안이 만들어지고

또 인간이 지금껏 살아올 수 있었던 힘이 되니 그만큼 소중한 기원도 없을 듯하다.

당연히 역사의 주요 현장과 그 주변에는 이런 소소한 기원과 신비한 전설을 간직한 공간과 상징이 적지 않다.

우리 고대사의 가장 드라마틱한 시간이 흘렀던 충남의 주요 도시는 

그래서 소박한 기원과 재미있는 신비를 만나기 좋은 지역이 된다.

 

 

아기를 점지해주는 천안의 향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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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의 향나무>


처음 우리 부부가 아이를 가졌을 때였다. 장모님이 어디선가 국산 호두를 잔뜩 구해오셨다. 호두가 아이를 똑똑하게 해준다면서

그때부터 천안을 지날 때면 호두과자와 함께 당시의 추억을 생각하게 된다

부모의 마음과 기억은 그런 듯하다. 아기가 처음 생겼을 때

기어 다니고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에 머무르면서 그 기억에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의 효도는 그때 다한다고 하지 않나.

 

그렇지만 이 놀라운 추억을 선사해줄 아이가 없을 때, 부부와 가족에게 아이는 더없이 절실한 바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국 곳곳에서 아이를 점지해주는 신령스러운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공간이 생길 수밖에 없는 애달픈 이유이다

그 절실한 기원의 청취자이자 마을의 흥겨운 친구로 오랜 세월을 버텨온 나무를 만나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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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입구 강둑위 쉼터>


안성에서 시작된 안성천은 안성과 평택을 지나 아산만으로 흘러간다. 그 안성천이 잠시 천안을 스쳐 가는데

그 잠깐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강변에 천안 성환 양령리와 향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안성천을 따라 강변둑과 작은 도로가 조성되어 있고,

작고 낡은 교회의 첨탑이 보이는 마을로 들어가는 길 사이에는 작은 쉼터도 마련되어 있다

그 쉼터의 바로 아래, 민가와 담장 사이에 익숙한 듯 한 그루의 향나무가 서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200여 년 전 대홍수 때 어디선가 떠내려 와다는데, 아마도 범람하는 안성천을 따라 이곳 마을에 흘러들어온 듯하다.

그저 마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나무였던 이 향나무는 언제부터인가 자식을 못 낳는 아낙네가 치성을 드리면 자식을 낳는다는 전설이 따라붙기 시작하면서 특별해졌다.

덕분인지 이유인지 향나무는 마을의 수호목이 되었고, 매년 정월보름에 나무에 모여 동제를 지내면서 지금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것이다.

 

마을과 사람들의 역사와 나무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가 흘러들어 온 게 1,200여 년 전이라고 하는데, 나무의 수령은 800년이다.

그리고 그 사이 950년 전에 대령이라고도 불리는 영통마을, 즉 양령2리에 처음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여산 송씨 문중인데

임진왜란 때 바다를 건너온 왜군과 처음으로 맞서다 순국한 동래부사 송상현이 바로 이 문중의 사람이다.

마을에서는 예부터 함께하는 두레가 행해지고, 농요도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

음력 정월에 오래된 향나무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제를 올리고, 농악놀이를 하면서 함께 어울리는 전통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놀이와 문화는 봄에 모내기 할 때나 가을 추수 때도 이어졌고,

마을의 농악대는 70년대까지 군, , 전국농악대회를 나가 우승까지 할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제 양령리는 한적한 여느 시골 마을이 되었다. 시대가 바뀌었고

아이를 점지 받기 위해 이곳의 향나무를 찾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나무 주변은 수풀이 무성하고, 주변을 둘러싼 집에서도 인기척이 들리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향나무만은 지난 800년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가지가 무성하고, 풍채도 당당하다.

크기는 높이 8.5미터, 근원부 줄기 4.2미터, 가슴놀이의 둘레는 약 3미터이며

나무 앞 작은 표지판은 이 나무가 1940년 인근 민가의 화재에도 불구하고 양호한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어쩌면 나무의 건강함과 당당함은 마을사람들의 기원을 한 몸에 받고, 그 흥겨움의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그저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닌 마을과 우리의 꿈과 상상을 지켜주며 어려움을 다독여주는 특별한 나무가 되는 것은 순전히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를 알려주던 은행나무와 쌀바위


 

상환의 향나무가 떠내려온 1,200년 전은 통일된 신라의 황혼이 시작되던 때이기도 하다.

대략 서기 800년 전후인데, 당시의 신라는 혜공왕이 반란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780년 이후 20여 명의 국왕이 바뀌는 등 정치적인 혼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889년 전국적인 농민반란이 일어나면서 후삼국시대가 도래하였고,

935년에 결국 고려에 자신의 자리를 내주게 된다.

문득 아이를 점지하는 것과 새로운 나라가 도래하는 것은 같은 소원에 뿌리를 둔 게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천안에서 멀지 않은 부여에는 나라가 망하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함을 알려주는 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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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주암리 은행나무>


부여군 내산면의 작은 농로길을 따라 들어가면 작은 담과 지붕 사이에 우뚝 솟은 키 23미터

가슴높이 둘레 8.62미터의 웅장한 나무를 만나게 된다.

부여의 새로운 팔경 중 하나로 꼽히는 주암리 은행나무이다.

이 나무는 신라의 통일 이전인 배게, 사비시대부터 있었다고 전해진다.

한성에서 공주로 내려온 백제는 성왕 때인 538년에 수도를 한반도 최초의 계획도시인 사비성, 지금의 부여로 옮겼다.

그리고 당시 좌평(佐平), 지금으로서는 장관이었던 맹씨가 이곳에 은행나무를 심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니 이 은행나무의 나이는 1,000살이 훌쩍 넘는 것이다.

특히 이 주암리 은행나무가 놀라운 것은 나라가 망할 때를 알려준다는 전설 때문이다.

백제부터 신라 그리고 고려가 차례로 망할 때마다 주암리의 은행나무에는 칡넝쿨이 감아 올라왔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고려시대 승각사란 절의 주지가 암자를 중수할 때 대들보로 쓰기 위해 이 은행나무의 큰 가지 하나를 베어갔었다고 한다

하지만 주지는 급사하였고, 결국 사찰도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온 세상에 전염병이 돌 때에도 주암리만은 무사했었고,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은행나무의 덕이라고 여겼다

당연히 마을에서는 이 나무를 마을을 지켜주는 신령한 나무로 믿고 보호하면서 천년의 세월을 함께 해온 것이다.

천연기념물이기 때문에 놀라운 게 아니라 이런 놀라움의 전설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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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암사 와불과 쌀바위>


은행나무가 있는 내산면에는 또다른 전설의 주인공이 있다

저동리 미암사에 있는 쌀바위가 그것이다.

주암리 은행나무보다 더 앞선 시대인 백제 침류왕(384~385) 때였다고 한다

저동리 마을에 사는 한 할머니가 대를 이을 손자를 얻기 위해 뒷산에 위치한 큰 바위에 가서 날마다 기도를 올렸다.

어느 날 할머니는 여느 때와 같이 새벽 일찍 일어나 부처바위로 향했고, 제대로 먹지 못했던 할머니는 기도를 드리다가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이때였다. 하늘이 밝아지면서 금빛 찬란한 관세음보살이 나타났고, 할머니는 절을 올렸다.

그대의 정성이 지극하니 내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러 왔노라.”

관세음보살은 가지고 온 병에서 쌀 세 톨을 꺼내 큰 바위 옆에 심었다.

하루 세 끼 먹을 쌀은 이곳에서 나올 터이니 밥을 지을 때는 이곳에 와서 쌀을 가져가도록 하라.”


감사합니다하고 고개를 숙이다가 할머니는 잠에서 문득 깨어났다. 하도 꿈이 생생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때 바위 중앙 틈에서 뭔가 스르륵 나오는 소리가 들렸고, 할머니가 보니 바위 아래 구멍에서 몇 홉의 쌀이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닌가?

할머니는 그날부터 가족이 먹을 쌀을 구할 수 있었고, 가정에 웃음꽃과 함께 원하던 손자까지 얻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할머니는 문득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저 바위 구멍이 좀 더 커지면 혹시 쌀이 더 많이 나오지 않을까?”

다음날 할머니는 부지깽이를 들고 흰 바위로 올라 쌀이 나오는 구멍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그랬더니 쌀은 나오지 않고 이상한 핏물만이 나오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할머니는 후회했지만 그때부터 바위는 쌀을 내놓지 않게 되었다.

 

인간의 정성과 약함에 관한 웃픈 전설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아직도 그 전설은 화려하게 장식되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쌀바위가 있는 미암사를 오르는 언덕에는 금부처가 길에 줄을 지어 서 있고

층을 지어 높이 솟은 돌담 앞에는 기이하리만큼 높이 솟은 탑이 있다

그 담을 끼고 언덕을 더욱 오르면 갑작스럽게 놀랍게도 거대한 금와불이 눈앞에 나타나고

그 금빛 찬란한 와불의 다리 너머로 하얀색의 쌀바위가 담백하게 솟아있음이 보인다.

우화는 우리의 경망스러움을 비웃지만, 또한 이런 화려함과 계속되는 기원은 우리가 인간임을

우리가 바라는 대상은 그런 경망스러움마저 품을 정도로 넉넉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다.

 


한량없는 품을 찾다, 무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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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량사 가는길>


쌀바위와 은행나무는 부여의 내산면이고, 그 바깥쪽으로 만수산과 함께 외산면이 자리하고 있다

인간의 경망스럽고도 소박한 꿈과 바람을 넉넉한 품으로 받아주는 자연휴양림과 사찰 무량사가 그곳에 있다.

 

아담하고 시원한 계곡과 짙푸른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들 사이로 걷다보면 우뚝 선 당간지주와 함께 천왕문이 보인다

그 당당한 모습을 눈에 담고 입구에 올라서니 문은 네모난 액자가 되고, 그 안으로 부도와 탑, 극락전이 한 줄로 쫙 늘어선 풍경이 펼쳐진다.

절묘하기 이를 데 없다. 안으로 들어서자 널따란 마당이 펼쳐지고,

왼쪽으로 승려들이 거처하는 요사채가, 오른쪽으로 종각과 커다란 느티나무가 집을 지키고 있다.

 

가장 먼저 석등이 반긴다. 언 듯 보더라도 그 선이 유려하고,

만듦새가 단단해 보인다. 상대석과 하대석에 풍성한 잎을 살짝 다문 연꽃이 조각되어 있으며,

지붕돌 위로는 연꽃 봉우리가 살포시 얹혀 있다

2.5미터의 높이로 뒤의 놓인 탑과 5미터 간격을 두고 그 키를 잘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두 번째로 만나게 되는 5층 석탑은 좀 더 듬직한 느낌이다.

 1971년 탑을 보수할 때 초층 몸돌에서 금동제아미타여래좌상, 지장보살상, 관세음보살상의 삼존상이 나왔고, 3층 탑신에서는 금동보살상이 출토되었다.

맨 뒤에 커다랗게 자리 잡은 극락전은 마치 거인처럼 우뚝 서 있다. 겉에서 보아도 그 규모가 남다른데,

안을 들여다보면 2층까지 뻥 뚫린 넓은 공간에 또 한 번 압도된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중창하여 

그런지 큰 시련을 겪은 후 새로운 희망을 담으려는 염원이 장중한 규모에서도 느껴지는 듯하다.

차례로 만난 모습이 절로 눈길을 끄니 석등이 보물 233, 5층 석탑이 185, 극락전이 356호로 셋 다 내로라하는 보물들이었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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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량사 극락전>


극락전 안에는 넓고 웅장한 실내에 넉넉히 채워주는 삼존불이 있다

가운데 5.4미터의 아미타불이 양쪽에 황금 왕관을 쓴 그보다 조금 작은 두 보살,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과 함께하고 있다. 흙으로 빚어 만들어서 그런지 금동 불상보다 따뜻하고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탁 트인 공간이 마음을 열게 하고 불상과 보살상들에 번지는 미소가 걱정을 물리치니,

이곳에 들어선 이들은 그들이 지닌 고통과 불안, 슬픔을 마음껏 쏟아내고 꿈을 빌며 안심하고 돌아섰으리라.

이곳엔 또한 1627년에 그린 괘불이 보관되어 있다. 평소엔 볼 수 없으나 큰 법회나 의식이 있는 날엔

 가로 6.9미터 세로 12미터의 큰 모시 천에 그린 괘불을 내어 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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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량사 풍경>


극락전 뒤 왼쪽으로 오르는 언덕을 따라가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오른쪽으로는 계곡을 건너 삼신각이, 왼쪽으로 언덕을 더 오르면 영정각이 있다.

이 영정각 안에는 한 선비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웃지도,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짓지도 않은 

그 선비의 얼굴은 조금은 침울하고 무언가를 아직 쫓는 듯 심각하다.

연갈색 비단에 검은 선과 검은 색채만이 담긴 흐릿한 얼굴이라 더욱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이 선비는 바로 조선 초를 호령했던 천재 김시습이다.

다섯 살 나이에 임금 앞에서 시를 짓고, 최초의 한문소설을 쓴 비범한 재주를 지녔으면서도 

그 재주를 펼치지 못하고 가슴에 쌓인 울분을 산천초목 아래 삭여야 했던 그는 쉰아홉의 나이로 무량사에서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죽은 뒤 3년이 지나 불교 예식으로 장례를 치른 뒤 그 사리를 모신 부도탑이 무량사 근처에 서 있다.

절을 돌아나와 주차장을 지나 왼쪽으로 난 극락교를 건너면 무진암에 닿는데, 그 여정에서 부도전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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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량사 부도탑>


가난과 자손은 바위에 빌고, 병과 나라의 안녕은 은행나무에 구한다. 그리고 갈 길 잃은 꿈은 무량의 뜰에서 안식을 찾게 되는 듯하다.

그렇게 우리의 소박한 꿈과 기원은 저마다의 길을 찾아 우리 역사와 함께 먼 길을 걸어온 것이다.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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