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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전쟁과 맞선 호남의 용기와 지혜를 만나다, 남원읍성 스크랩



전쟁과 맞선 호남의 용기와 지혜를 만나다

"이치전투와 남원성 전투 그리고 적성산사고"

 


호남을 간다는 건 우리나라의 가장 평화롭고 넉넉한 풍경을 만난다는 말이기도 하다

부드러운 산과 풍요로운 평야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 여정은 또한 덕유산, 대둔산, 지리산이라는 개성 강한 산들과 함께 한다는 즐거움이 있다

좋은 땅이 산 너머에 있으니 자연히 산은 긴 역사와 거친 전쟁에서 땅의 지킴이 역할을 독특히 해냈을 것이다

특히 임진년부터 7년간 조선을 휩쓸었던 왜란은 이 산과 주변 마을에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또 형용할 수 없는 감동

그리고 단단한 의기와 지혜를 보여주었다. 호남을 여행하는 건 산과 마을에 새긴 지혜와 감동을 조곤조곤 나누는 여행이기도 하다.

 

<대둔산>



전쟁의 방향을 바꾼 이치·웅치전투

 


1592년 갑작스럽게 바다를 건너 온 왜군은 부산과 진주를 거쳐 

임진왜란 개전 20여 일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평양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우왕좌왕하던 조정과 달리 처음의 혼란을 끝낸 조선의 의병이 각지에서 일어나고

특히 바다에서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 혁혁한 전과를 올리면서 왜군은 심각한 보급문제를 겪게 된다.

이에 왜군은 조선의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점령하기로 한다

한양에 주둔하던 고바야카와를 앞세워 먼저 용인, 청주, 영동을 거쳐 전라도 금산으로 진격해 점령하였다

그리고 전주성으로 진격을 하는데, 지금이야 길이 많아져 여정이 다양해졌지만 

당시 군대를 이끌고 전주를 가기 위해서는 웅치와 이치라는 험한 고개를 넘어야 했다.

 

<이치대첩비각>


금산성을 차지한 왜군은 76일 부대를 나눈다

총사령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본대는 이치를 넘어 전주로 향하고

아들인 고바야카와 타로가 이끄는 부대는 송치, 용담을 거쳐 웅치를 넘어 전주성에서 만나기로 한다

먼저 웅치에 도착한 왜군은 준비 중이던 조선군과 78일부터 10일까지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금산성에 있던 왜병들 역시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의병장 고경명과 격전을 치른다

두 전투 모두 아쉽게 패하고, 왜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제 이치만 넘으면 바로 전주성이었고 호남이 열리기 되었다

드디어 720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비롯한 본대가 15천명의 부대와 함께 이치에 나타났다

이치에는 웅치전에 참여했던 황박, 황진 장군과 권율 장군이 조선군은

15백과 함께 만반의 준비를 마친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을의 대둔산>



이치라는 지명은 내비게이션으로 검색되지 않는다. ()재 또는 대둔산휴게소라는 이름으로 검색을 하면

금산을 지나 대둔산을 넘어가는 작은 고갯길로 안내한다.

당시 왜군의 진격로를 따라 금산-진산을 지나 고개 길로 접어들기 바로 전에 우측에 작은 사당이 보인다.

권율 장군을 모신 사당 충장사와 이치대첩비가 있는 대첩비각이 모셔진 사당이었다.

깔끔하고 잘 정돈되어 있지만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위치에, 변변한 안내판 하나 보이지 않는다.

하긴 권율 장군은 임란의 영웅이자 행주대첩의 주역이 아닌가?

그 많은 기념 공간 중 하나라는 생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길을 나선다.

 

<대둔산 휴게소 짚라인>


길고 구불거리는 길을 2킬로미터 정도 올라가면 금산군 진산면과 완주군 운주면의 경계인 대둔산 휴게소가 나온다.

낡았지만 나름 깔끔한 2층 건물이 있고, 그 뒤로 넓고 시원한 숲길이 있는 여느 시골 휴게소와 같은 풍경이다.

다만, 금산에서 올라오는 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앞에 집라인(Zipline)을 위한 기묘한 탑이 설치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색색의 헬멧을 쓰고 올라갔다가 나무 위로 시원한 비명을 남기고 건너편 숲으로 사라진다.

다른 휴게소에서 보긴 힘든 독특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고갯길의 뒤편으로는, 대둔산의 높고 우람한 정상이 올려다 보이는 곳에 비석 몇 개가 세워져 있다.

이치전투 유허비, 황진장군 전승 기념비와 임란 때 순국한 무명의 4백 의병을 기리는 비석이었다.

 

전주성과 전라도로 왜군의 진입을 막는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이치였기에 전투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고 한다.

조선군은 목책을 쌓아 왜군의 기마대와 조총부대의 진입을 막았고,

용맹함으로 이름 높은 동북현감 황진은 활과 칼로 왜장을 쓰러뜨리면서 아군의 기세를 높였다.

하지만 왜군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2, 3차에 걸쳐 계속된 왜군의 공격에

앞장서 싸우던 황진 장군마저도 부상을 당해 쓰러지는 지경이 되었다.



지친 조선군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대둔산 휴게소 짚라인>



하지만 권율 장군이 직접 전장을 돌아다니며 지친 병사를 독려하고

또 비겁하게 숨고 도망가려는 자들을 그 자리에서 징벌하면서 진지를 다시 굳건히 다져냈다.

결국 흔들리지 않는 조선의 진지에 왜군이 오히려 지치기 시작했다.

게다가 조선 의병의 부대가 금산성을 향한다는 소식마저 들려왔다.

사전에 계획된 조선군의 양동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결국 무수한 사상자를 남기고 왜군은 금산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다.

드디어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육전에서 최초로 승리를 거뒀고

이 이치전투는 왜군의 전라도 진입을 막아낸 왜란 3대 대첩 중의 하나로 칭송을 받게 된 것이다.

 

<권율장군 충장사>


하지만 의외로 이치전투는 알려져 있지 않다. 고개 입구 사당의 한적함도 그렇고, 휴게소 한편의 쓸쓸한 유허비 역시 당혹스럽다.

이는 현재 뿐만 아니라 조선 당시에도 비슷했던 듯하다.

권율 장군의 사위인 백사 이항복은 의하면 임란초기 조정이 어수선하여 공을 살필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또한 웅치와 이치 전투에 참여하였던 장군들이 모두 전사하여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는 것도 이유일 수 있겠다. 승자의 역사라고 하던가.

하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기억하고, 즐겨 찾고, 또 이야기를 전하면 당시의 이름 없는 영웅들은 다시 우리의 역사 속에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통해 우리의 역사와 공동체는 더욱 단단해지고 풍성해질 것이다.


 

남원읍성과 만인의총의 의기

 

 

남원은 춘향의 고향이다

당연히 남원 일번지는 광한루원이 되어 왔고

그게 아니면 추어탕과 돌솥밥 등 맛집을 거쳐 지리산을 향하는 중간 목적지로 사랑받았다.

지리산 백무동이나 칠선계곡 등 천왕봉으로 가는 짧고, 멋진 길이 남원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낭만은 바로 도시와 나라의 단단함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남원의 로맨스와 여유는 이 도시를 지켜낸 단단한 성벽에서 비롯됨을 남원읍성과 만인의총에서 알게 된다.

 

<남원읍성>


이치전투 후 권율의 승전보는 영민했던 하인 정충신

(향후 면천해서 장군이 돼 금남군이 된다. 광주의 금남로는 그에게서 비롯된다)

에 의해 의주로 전해졌다. 조선의 임금은 처음으로 승전보를 들었고, 백성이 싸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압록강을 건너 명에 의탁하자는 이야기는 사라지고, 드디어 기다리던 명나라의 지원군도 도착했다. 이제 전쟁은 달라졌다.

조명 연합군이 위에서부터 밀고 내려왔고, 권율 장군과 각지의 의병들은 도처에서 승리를 하면서 왜군의 맥을 끊었으며,

바다에서는 여전히 이순신과 조선 수군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전쟁은 어느 순간 멈춰졌지만 승과 패가 없으니 

강화협상마저도 지지부진이었다. 결국 1597년 일본은 141,5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다시 침략하였다

정유재란이었다. 왜는 이전의 실패를 기억하고 밑에서부터

특히 전라도부터 우선 점령하고자 하였다. 왜군은 남해·사천·고성·하동·광양

구례를 거쳐 남원을 점령한 후 좌, 우군으로 나누어 좌군은 남쪽으로 우군은 충청도로 북진했다.


 <남원읍성 입구>


그렇게 남원은 전쟁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당시 남원은 읍성을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1597(선조 30) 5월에 크게 고쳐 쌓았고

조선·명 연합군도 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인 남원에 함께 주둔하고 있었다.

813일 구례를 거쳐 온 일본의 주력군이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방어사 오응정

남원부사 임현의 조선 군사 1,000여 명과 명나라 부총병 양원의 군사 3,000여 명이 지키고 있던 남원성을 포위하였다.

 14일부터 전투가 시작되었고, 다음 날인 15일까지 군관민이 합심하여 압도적인 다수의 왜군을 막아냈다


하지만 중과부족이었다


16일에 성이 함락되니 오직 명나라의 양원만이 50()를 이끌고 탈출하고

 당시 남원성에 있던 모든 장수와 군사 그리고 백성들은 성과 함께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세월의 흔적으로 남은 남원읍성>


명나라 장수가 탈출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결국 살고자 하는 이들은 살 수도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남원성에 있던 모든 이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무모한 용기일지도 모른다. 또 어떤 이들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의 지혜를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 자리에 남았기에 조선의 군대는 이보 전진을 할 수 있었다

왜군이 아래에서부터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동안 명나라 원군과 함께 전열을 정비한

 권율·이시언의 조명 연합군은 9월 직산에서 일본군의 북상을 막았고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한 이순신 역시 12척의 함선으로 300여 척의 일본수군을 명량에서 대파하였다. 1598년에도 각 지역에서 공격과 승전을 이어갔고

11월 노량해전을 끝으로 일본과의 7년에 걸친 전쟁은 도요토미의 죽음과 함께 왜군의 철수로 마무리되었다.

 

<남원읍성의 한가로운 성벽>


그 치열했던 현장은 이제 단 170여 미터 정도의 한가로운 성벽만으로 남아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성곽은 둘레는 8,199척이고

높이는 13척이었다고 한다. 성문 앞에 적을 방어하기 위해서 쌓은 옹성(甕城) 16곳과 성벽에서 바깥쪽으로 돌출시켜 쌓은 치첩(雉堞

1,016개를 두었으며, 둘레에는 깊은 도랑도 있었다.

그렇지만 조선 말기까지 남아 있던 성벽은 도시가 확장되면서 대부분 헐려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전쟁보다 도시화가 더욱 무서운 법이다. 지금은 성벽과 마을이 하나가 되어 한가로운 시골도시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주변은 새 단장 공사가 한창이지만, 성벽은 녹색 이끼와 풀로 자신을 깔끔하게 단장하고 있었다

성벽 아래에는 주변 주민이 만든 작은 텃밭도 있고, 성벽의 안쪽에는 작고 단정한 주택들이 풍경을 더욱 평화롭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어쩌면 이 한가롭고 아름다운 풍경 자체가 이 성벽의 단단한 역사를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의의총 내 충렬사>


성벽에서 도로를 따라 몇 백 미터만 가면 넓은 공원과 같은 만인의총을 만나게 된다.

당시 남원성을 지키던 이들은 민간인 6000여명, 조선군 1000여명, 명나라군 3000여명이라고 전해진다

난이 끝난 뒤 시신을 합장했고, 1612(광해군 4) 충렬사를 세우고, 1964년 현 위치로 이전, 1979년에 걸쳐 완공돼 사적 제272호가 되었다

무덤이지만 기억을 위한 공원, 지나는 이들을 위한 쉼터와 같이 푸르고 광활한 풍경이다

잔디밭이 넓게 찾는 이를 반기고, 한편에는 만인의사 순의탑과 충의문으로 오르는 높은 계단이 자리하고 있다

계단 너머에는 충렬사가 단정하고 높게 세워져 있다. 건물이 높음은 그 뜻과 의기가 높음을 말하는 게 아닐까

충렬사의 계단 위에서 멀리 건물에 가려진 남원성을 바라본다

그들의 용기는 무모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땅과 백성을 지키는 아름다운 의기로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 될 듯하다.


<만인의 총 입구>


 

역사는 만들고, 지키는 것, 적성산사고

 


전쟁은 끝났다. 삶은 복원되고, 조선은 다시 재정비되었다. 그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역사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을 모은다고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지키고, 간직하고, 계승했을 때 

그건 역사가 되고 인간의 삶과 나라가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는 지혜가 되는 것이다.

 

<적성산고지>


왜란 때 역사를 기록, 보관하던 전국의 사고가 사라졌고, 그나마 전주 사고의 기록만은 몇 사람의 노력 끝에 보존될 수 있었다

왜란이 끝나고 다시 사고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고, 그중 하나가 이곳 적성산에 세워졌다.

적성산(赤城山)은 전라북도 무주군에 있는, 덕유산 연봉 중 하나이다. 마치 붉은 치마를 두른 듯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높이는 1,000미터 남짓으로 그리 높지 않으나 산세가 험하고 가파른 벼랑이 있는 바위산이다

천연의 요새와 같은 지형이기 때문에, 1610(광해군 2) 산성을 수리하고, 1614년 적상산성 안에 실록전(實錄殿)을 건립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4년 뒤인 16189월부터 실록이 봉안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실록은 4부씩 인쇄되어 정족산·태백산·적상산·오대산 사고에 보관하여 조선왕조 말년까지 계승되었다.

 

<적성산성>


지금도 적성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며 굴곡도 심하다

한걸음만 숲으로 들어가도 마치 깊은 숲속에 들어온 듯한 짙은 녹음을 만날 수 있으며,

정상 안국사 주변의 적성산성은 짙푸른 이끼와 함께 숲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둘레가 약 3킬로미터에 달하는 적성산성은 사적 제146호의 석축으로

 아래의 강과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벼랑과 함께 위태롭지만 단단하게 세워져 있다

이 산성 안에는 사고의 안전한 보관을 위해 1641년 선원각·군기고·대별관, 1643년 호국사 등이 건립되었고

성 안에 거주하는 별장·참봉·승려들에 의해 기록은 보호·관리되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 적성산사고는 없다. 1910년 조선의 주권을 강탈한 일제는 창덕궁 장서각(藏書閣)에 옮겨 보관하게 하였고

그마저도 이후 한국전쟁 당시 북한 측이 가져갔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사고지 역시 인공 저수지와 양수식 발전소가 설치되면서 선원각을 위치를 옮겨서 복원시켜 놓았다.

 

<적성산사고 표지판>


복원 중인 적성산사고지는 아직 주변을 정비 중이고, 적성산성과 마주보고 있는 안국사는 코로나로 인해 출입이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이 깊은 숲속까지 찾아와 기록을 필사하고, 그 보호를 위해 관리와 승병이 머물렀던 정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산과 나무와 자연이 천년을 가듯이 기록과 보존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나라와 민족을 유지시켜주는 힘일지도 모른다

풍경만큼 푸르렀던 당시의 의기와 지혜 그리고 노력을 다시금 호남의 깊은 산속에서 되새겨본다.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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