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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인천, 전쟁의 기억을 평화의 노래로 가꾸는 도시 스크랩



"인천, 전쟁의 기억을 평화의 노래로 가꾸는 도시 "

- 팔미도등대, 월미도와 연안부두, 그리고 자유공원의 기억  



자장면, 차이나타운, 제물포, 인천상륙작전, 세숫대야냉면, 쫄면, 월미도, 영종도, 인천공항, 인천대교, 바이킹, 디스코 팡팡까지. 

인천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다양한 이미지들. 


그 생각과 이미지를 엮어보면 인천은 아련한 설렘과 감상을 전해주는 세계로 열린 관문이자 근대와 현대가 들어온 항구가 된다. 

순탄하지 않았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그렇지만 그 상처와 아픔마저도 보듬고 있는 도시를 찾아 인천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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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미도를 가는 유람선>


추억의 월미도와 평화의 나무


젊은 청춘들과 중장년 세대들은 인천하면 아무래도 월미도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짭짤한 바닷바람 사이의 신나는 음악과 놀이공원 그리고 다채로운 먹거리까지. 추억 속의 월미도는 모두에게 낭만의 공간이었다. 

지금도 힙합 가수의 유튜브 촬영이 이어지는, 아직도 화려한 청춘이 뛰노는 월미 문화의 거리를 등지고 좀 더 먼 기억의 흔적을 떠올리려 월미산 뒤편을 찾는다. 

월미산을 크게 도는 길은 제7부두와 갑문을 지나면서 해안을 바라보고 있는 한국이민사박물관을 만나게 된다. 


그 박물관 뒤로는 월미산을 오르는 잘 정돈된 길과 계단이 있고, 

조금만 오르면 월미산 둘레길이 나온다. 잘 자란 나무들은 시원한 터널을 만들어주었고, 

적당한 오르내림은 산책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길이다. 절로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그 푸른 길에는 월미도가 간직한 시간과 역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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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산 둘레길>


먼저 전망대로 올라보자! 높이 솟은 나무로 짙고 푸른 돔이 만들어져 있고, 그 사이로 전망대 건물이 솟아있다. 

투명한 유리로 둘러싸인 전망대 안으로 들어가면 위로 오르는 원형 계단이 나타난다. 


그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따라 계단을 오르면 월미도와 인천항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게다가 그 유리벽에는 세계 각국의 주요 도시가 거리와 함께 새겨져 있다. 자연스럽게 전망대를 오르는 공간은 인천과 세계를 함께 보는 공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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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산 전망대>


처음 월미도는 인천 앞바다의 한적한 섬이었고, 단지 시민들의 생활공간이자 한가로운 어촌마을이었다. 

그러다 1866년 천주교 박해에 항의하는 프랑스 함대가 들어오면서 월미도는 

서양의 지도제작자들에게 로즈 섬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당시 함대의 제독이었던 로즈는 인천에 진입하면서 월미도를 발견하고, 

거기에 마음대로 ‘로즈 섬 Rose Island’이라 부른 것이다.  

그리고 월미도의 원치 않는 세계화와 진짜 수난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프랑스 이후 일본과 청나라, 러시아는 차례로 조선을 침략하기 시작했고, 

제물포, 즉 오늘날의 중구 해안 일대를 자신들의 관문이자 발판으로 삼았다. 

특히, 밀물과 썰물의 수위차가 큰 제물포항에서 주변을 조망하기 좋은 월미도는 

커다란 선박의 운행과 연료 공급 그리고 전쟁의 기지로 다양한 가치를 선사해주었다.  

조선의 정부도 뒤늦게 그 가치를 깨닫고 1879년 월미산 정상에 포대를 설치했지만,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2월 9일 제0차 세계대전이라 불리는 러일전쟁의 서막인 제물포해전을 거치면서 월미도가,

그리고 조선이 일본에게 완전히 넘어가게 되었다. 이때 일제 인천부는

 월미도를 길이 1킬로미터의 제방 둑으로 육지와 연결하고, 월미산 중턱에 공원을 조성하였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월미도의 모습이 이때부터 갖춰지기 시작한 것이다. 


<둘레길에서 바라본 인천항과 등대>


안타까운 시절이었다. 스쳐가는 수많은 국가와 도시가 그 기억을 새록새록 더듬어준다. 그리고 지금의 전망대를 둘러본다. 

거대한 갑문과 질서정연한 선박과 항구 그리고 하늘로 솟은 거대한 빌딩과 아파트단지가 눈에 들어온다. 기나긴 식민지배를 거쳐 우리는 나라를 찾았고, 

세계가 부러워할만한 경제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렇지만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는 걸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전망대 아래, 그리고 월미공원 곳곳에는 ‘평화의 나무’가 조성되어 있다. 

해방과 함께 이 땅에 몰아친 한국전쟁은 ‘평화의 나무’의 시작이었다. 

북은 순식간에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고, 연합군의 참전으로 소강상태에 빠진 전쟁은 인천상륙작전으로 한순간에 역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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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상륙지점-녹색해안>


1950년 9월 15일 새벽, 유엔군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가 진두지휘한 전함 261척과 함께 미 해병 제1사단,

 한국해병 제1연대는 인천의 녹색해안(월미도문화거리), 적색해안(대한제분공장), 청색해안(경인고속도로 낙섬사거리)으로 상륙하였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1950년 9월 28일에 드디어 서울을 탈환하였다. 


이 놀라운 상륙작전은 함대의 안내를 위한 팔미도 등대의 점령과 95발의 네이팜탄 공습에서 시작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당시 월미도에는 수많은 민간인들이 살고 있었고, 전쟁과 포탄은 적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9월 10일부터 3일간 이루어진 폭격으로 월미도는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전쟁을 한순간에 바뀐 것과 달리 월미도의 놀라운 변화는 이때부터 천천히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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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상륙지 적색해안 기념비>


그 무서운 포격에도 몇몇 나무들이 살아남은 것이다. 가지가 잘려나가고, 줄기가 부러지고, 밑동이 갈라진 나무들이다.

그곳에서 다시 수많은 가지가 자라나기 시작했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큰 나무가 되었다.


각각 ‘치유의 나무’, ‘그날을 기억하는 나무’, ‘평화의 어머니 나무’, ‘영원한 친구나무’, ‘다시 일어선 나무’, ‘향기로 이야기 하는 나무’, ‘장군나무’로

불리는 일곱 그루의 월미 평화의 나무는 모두 전쟁의 상처를 이기고 다시 일어선 나무인 것이다. 

침략은 해방과 건설, 전쟁과 파괴는 생명과 힐링으로 다듬어진 놀라운 풍경을 여기 월미도에서 확인하게 된다.

그 나무와 함께 부르는 희망의 노래, 그 리듬이 담고 있는 파란만장한 역사는 인천을 나만의 방식으로 만나는 새로운 방법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최초의 등대 팔미도등대와 연안부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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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미도 유람선>


월미도와 갑문을 사이에 두고 연안부두가 있다. 인천에서 연안 섬들을 찾아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여객터미널이 있고, 

인천에서 가장 큰 어시장이 있는 장소이며, 팔미도 유람선과 각종 낚싯배가 출발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곳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이 있고, 러시아 전통인형인 마트로시카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사실 연안부두는 참으로 한국적인 곳이다. 올망졸망한 배가 그렇고, 나무 없이 넓게 조성된 공원과 높이 솟은 현대식 건물 그리고 주변의 어시장까지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다. 

그런데 연안부두 노래가 새겨진 기념비와 한국적인 부두 바로 앞에 난데없이 다가오는 러시아인형은 독특하기는 하지만 어색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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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부두 러시아 인형>


하지만 독특함과 의문에는 그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질문은 자연스레 러일전쟁이라는 거대한 전쟁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러일전쟁은 1904년 2월 9일 제물포항과 만주의 관문인 여순항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일본은 제물포항으로 함대를 파견했고, 러시아 순양함 바랴그호, 코레예츠호를 팔미도 해상에서 접전 40분 만에 반파시킨다. 


결국 두 척의 러시아 전함이 자폭하면서 제물포해전은 종료됐다. 그러나 그건 일제가 일으킨 세계대전의 거대하고, 잔인한 시작이기도 했다.

다만, 우리는 이 역사의 현장을 잊고 있었을 뿐이다. 러일전쟁 100주년이었던 2004년 러시아 정부가 우리에게 요청했고, 

우리는 기억을 되살려 이 한가로운 부두에 러일전쟁 전사자 추모비를 세우게 되었다.

이국적이고 독특한 조형물은 이제 우리 역사에 대한 질문이자 또 다른 기억이 된 것이다. 


하루 네 차례만이 있는 팔미도 유람선이 출발을 알려왔다.

여덟 팔(八)자와 닮았다 하여 이름이 팔미도라 불리는 이 작은 섬은 인천 연안부두에서 8.5해리(15.7㎞) 거리에 있다.

왕복 2시간이 걸리며 유람까지 3시간 동안 운행하는 팔미도 유람선은 요즘 코로나 때문에 평일에는 거의 운행을 하지 않고 있었다,

다행히 6월 가족 단체 관람객 덕분에 금빛의 유람선인 금어호가 오랜만에 평일 출항을 하게 된 것이다. 

유람선은 천천히 빨간 등대를 벗어났고, 수평선과 마주하는 인천대교가 육중하게 뒤로 물러섰다.


작기만 하던 섬이 점차 선명해지기 시작하다가 아름다운 해안과 각이 선명한 현대식 건물로 마중을 나온다. 

섬의 입구는 팔미도등대역사관이, 우측으로는 밀물 때는 하나로 연결되는 작은 섬이, 그리고 너머로 무의도와 영종도가 보인다.

역사관 옆 계단을 오르니 등대로 오르는 길로 이어진다. 경사가 조금 심한 오르막은 곧 끝나고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광장과 함께 옛 등대관리사무소가 있다.

다시 오르막과 함께 바다를 내려다보는 그네의자와 전시물을 지나니 이내 작고 큰 하얀 등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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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미도 옛등대와 새등대>


앞쪽에 있는 높이 7.9m의 작은 등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이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3년 6월 1일 일본인 이시바시 아야히코에 의해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다. 

팔미도 유람은 바로 이 등대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섬은 매력적이고, 인천 유형문화재로 선정된 최초의 등대 역시 아름답다.

또 새로운 등대 뒤편에 조성된 팔미도 둘레길은 시원하고 푸른 나무들과 완만한 경사의 언덕이 어우러져 즐거운 산책과 사색을 절로 선사해준다.


길의 중간에는 바다를 향한 대포로 녹슨 기억을 되살려주는 안보교육장도 조성되어 있다. 하지만 등대는 이런 여유와 즐거움을 뛰어넘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마치 어둠을 밝히는 불빛처럼  가장 어두운 곳에서 묵묵히 기적을 만드는 감동적인 이야기와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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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미도 옛등대와 벽화>


1950년 당시 맥아더 장군은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상륙작전을 결심했고, 서울을 빠른 시간 내에 수복하기 위해 인천을 그 지역으로 선택하였다. 

암호명 크로마이트 작전이 수립되었고, 작전일은 9월 15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작전의 성공은 만만치 않았다.

상륙지인 인천은 적진이었을 뿐만 아니라 심한 조수간만의 차와 작은 섬과 암초로 제대로 접근조차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함대를 안전하게 안내해줄 등대가 필요했고, ‘트루디 잭슨’이라는 팔미도 점령 작전을 시행되었다.


이 작전에 따라 미국 해군 대위 유진 클라크(Eugene F. Clark)와 비정규군이었던 한국첩보부대 켈로KLO 부대의 연정 소령,

계인주 대령 등이 한국인 지원자와 함께 9월 10일 팔미도에 비밀리에 상륙, 무사히 등대를 점령하였다. 이 소식은 사령부로 전달되었고,

이들의 조용한 활약은 9월 15일 0시, 팔미도등대를 밝힘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의 ‘시작’과 성공으로 이어졌다. 전쟁은 영웅을 만든다.


하지만 그 영웅의 성공은 수많은 이름 없는 영웅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비록 2003년 새로운 등대에 자신의 역할을 넘긴 작은 등대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찾고, 

사랑하는 이유는 등대가 아직 그들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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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공원>


이제 월미도를 마주보고 있는 응봉산과 그곳에 있는 자유공원으로 향한다. 길은 차이나타운을 지나, 언덕의 좁을 길을 타고 제물포구락부에 다다른다. 

자유공원은 탑골공원보다 먼저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다.

1888년 조성될 당시에는 인천의 각국공동조계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각국공원’ 혹은 ‘외국공원’으로 불렸다고 한다.


최신식 당구장과 댄스홀까지 갖춘 제물포구락부는 그 중심에서 서구문화를 전파하는 사교의 장이었다. 

그리고 경술국치 이후 일본식 공원으로 바뀐 각국공원은 중구의 인천 신사 주변의 동공원과 함께 ‘서공원’이라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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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포 구락부>


또 각국공원이라는 그 상징성 때문에 3.1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1919년 4월 2일 각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 회의가 열렸고, 이를 바탕으로 4월 23일 한성임시정부가 정식으로 국민회의를 개최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공원’이라는 이름은 1957년 인천상륙작전 7주년을 기념하여 맥아더 동상을 세우면서 개명한 것이다.


당시 생각했던 가치를 대변했던 것인데, 공원이 가장 민감한 정치적 가치에 따라 이름과 조형물이 바뀌는 과정이 재미있고 독특하다. 

요즘의 자유공원은 그때에 비해 좀 더 개방적이고, 주관적인 듯하다.

어쩌면 그게 현재를 사는 우리의 모습이고, 역사를 대한 인천의 자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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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공원의 학도의용군 기념비와 통일목>


제물포구락부를 지나는 계단을 지나면 광장과 산책길이 나오고, 다시 한 단을 올라가면 높이 솟아 있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장군 동상과 인천상륙작전 기념비 양쪽에 통일을 기원하는 인천시민이 세운 나무와 비석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당연한 듯하지만, 같이 있으니 이렇게 이색적인 조화도 없다.


이런 자유로운 구성은 지금이 종전이 아닌 휴전상태임을 상기시키고, 분단과 전쟁의 기억은 결국 통일을 통해 해소됨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  

공원은 한가롭고, 오가는 길은 유월의 햇살 아래에서도 시원하기만 하다. 멀리 보이는 바다와 월미도도 정겹고,

또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바람은 한 공간에서 무리 없이 어우러지고 있다. 

결국 우리의 목표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였음을 인천의 역사공간은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준다.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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