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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단절의 역사를 간직한 기억의 공간, 서대문 형무소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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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뜻한 볕이 조금씩 따가워지는 6나보다는 주변을 생각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인왕산과 안산 사이의 서대문을 찾는다.

그곳에는 일제강점기였던 1908년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후 서대문 감옥으로 불리던 서울형무소가 남아 있다


비록 서울구치소로 불리던 1987년 의왕으로 이전하면서 역사 공원이 되었지만

아직도 생생한 단절의 상처와 이야기를 만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기도 하다.


<6월의 서대문 형무소>


"아름답기에 더욱 서글픈 서대문형무소"


 한이 많은 민족이라 하고그만큼 외침이 많았던 나라였다다행히 꿋꿋한 민족성 때문인지 아직도 우리는 한 나라한 민족을 외치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었던특히 수도를 빼앗겼던 시기도 있었다40여 년에 걸친 일제강점기와 그 이후 이어졌던 남과 북의 전쟁과 비극이 바로 그렇다

그중 일제강점기의 풍경은 서대문형무소에 무엇으로도 감출 수도 꾸밀 수도 없는 생생한 시대의 증언이자 기록으로 남아있다.


 서대문역사공원을 찾으면 먼저 독립문이 반긴다그리고 단단해 보이는 서대문형무소의 붉은 담장으로 이어지며

그 너머로 한참 공사 중인 상해임시정부기념관의 둥근 지붕이 보인다

안산 자락을 따라 길게 조성된 이 공원은 우리 근대 역사의 생생한 파노라마가 되고 있는 듯하다. 


높게 이어진 붉은 담장 사이에는 누군가 내려보다는 듯한 감시탑이 있고그 아래 아직 튼튼해 보이는 철문 사이 쪽문 입구가 나타난다

복원된 공간임에도 문턱을 넘어서면서 마음에 작은 떨림이 있는 걸 보면 철문과 앞과 뒤의 높고 긴 담장이 주는 위압감은 여전한 듯하다.


<서대문 형무소 담장>


 입구 정면에는 서대문형무소역사전시관이라는 간판을 걸고 있는 옛 보안과 청사가 있다서대문형무소의 역사 여행은 이곳을 통해 시작된다.

일층에서 이층으로 그리고 지하까지 각종 전시와 체험의 방이 이어지는데우리가 교과서에 봤던 

105인 사건의 이동휘 선생부터 도산 안창호백범 김구그리고 유관순 열사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장 무섭고 가슴 떨리는 사실은 그저 편하게 걸어가는 이 공간이

약간 조악한 듯하고 쾌쾌해 보이는 좁고 어두운 감옥의 조형물이 실제 그들이 갇혀 있었고 또 생을 마감하기도 한 곳이라는 사실이다


<독립운동가들의 수형기록표>


 특히 2층 전시실 한편에 위치한 독립운동가들의 수형기록표는 가슴을 아리는 슬픔과 기억으로 다가온다

그저 낱말과 글자와 빛바랜 사진으로만 남아 있던 그들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분노하고허탈해하고또는 삐딱하기도 하고 단정하기도 했다


그때를 살고 여기를 거쳐 갔던 그들의 표정과 감정이 그 작은 수형기록표에 생생히 되살아나 방을 찾은 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할머니할아버지 옆에 울고 웃으며 꿈을 가지고 살던 이들이작은 수형표로 남아 이 넓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그곳은 그들의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어간다


그중 이효정박진홍 두 젊은 여성운동가의 이야기가 있다

 일찍부터 수재로 소문났고사회에 눈을 떠 누구보다 열심히 사회운동을 하다 어느 순간 각각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사라졌던 친구이자 동기였다

그렇게 경찰서와 감옥을 떠돌던 그들은 1935년 4월경 이곳 서대문형무소 작은 감방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들의 반가움서러움그리고 각오가 사무치듯 다가온다그렇게 정보에 익숙해지고

무감해지고 굳어버린 나와 우리의 심장은 작은 떨림과 함께 각각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조금씩 깨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서대문 형무소의 내부 모습>


 보안과를 나오면 커다란 붉은 건물들이 담을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생각보다 상당한 규모인데

이것도 6개의 감시탑은 2개만, 100여 동에 달하던 건물 대부분이 사라졌고1,200여 미터의 담장도 1/4 정도만 남아 있는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감옥 창문에서 바라본 밖의 풍경>


 1908년 경성감옥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할 때부터 당시 조선 모든 형무소를 합친 것보다 더 넓은 규모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대체로 감옥이 번성한 나라가 제대로 된 사회일 리가 없으니일제는 그 시작부터 자신들이 하는 일이 온당하지 못함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 분노를 따라 당시의 옥사와 감방으로 들어가 본다길게 이어진 복도따닥따닥 붙어 있는 감방과 철문들 위로 유월의 환한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렇게 슬픈 공간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그래서 방마다 새겨진 독립운동가들의 깨끗한 초상이 더욱 안타깝다.


 <수감자 운동시설>


 밖을 나오니잘 정돈된 파란 잔디밭 위로 유치원생들이 올망졸망 줄을 지어 걸어가고 있다파란 하늘붉은 벽돌아이들의 옷이 너무 아름답다

그 아이들을 즐겁게 바라볼 수 있는 현재가 너무도 다행스럽고이런 평화와 나라를 지켜준 그들에게 너무 감사하고아직 당시의 상처를 완전히 치료하지 못한 시간이 부끄럽다

감옥을 간다는 것은 단순한 체험이 아니라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를 온몸으로 배우는 과정이 아닌가 문득 생각하게 된다.

 

"애국에 나이와 성별이 무슨 대수인가?"


<보안과 2층 사형장 전시실>


아이들이 걸어가던 곳 너머에 홀로 떨어진 건물이 한 채 있다사형장이다그곳에서 한 독립운동가를 만난다

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던진 평안남도 덕천 출신의 예순네 살의 강우규 선생이다


환갑을 넘은 노투사로 우리의 기억에 남겨진 선생은 만주에서 후학을 기르던 교육자였다한의사였던 선생은 1910년 국권이 일제에 넘어가자

 눈에 들어오는 것이 모두 보고 싶지 않은 사람보고 싶지 않은 물건들 뿐이라며 만주로 건너가 신흥촌을 세워 다음 세대의 교육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주에 3.1운동의 바람이 불어왔고그 중심에 있던 선생은 어느 날 영국제 폭탄을 구해 서울로 잠입하였다


 그리고 1919년 9월 2일 오후 5


경성역의 전신인 남대문 역에 그 폭탄은 터졌고아쉽게도 총독은 무사했지만 선생은 한 달 뒤 조선인 순사 김태석에게 붙잡히게 된다

스물다섯의 윤봉길 의사서른세 살의 이봉창 의사그리고 서른다섯에 나석주 의사 등은 조선의 의기를 보여줬던 젊은 열사들이다

거기에 환갑을 훌쩍 넘긴 강우규 선생의 이름이 더해졌다세월이 주는 귀감과 감동은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전시관 지하 재현 전시>


강우규 선생은 1년 뒤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 사형장에서 생을 마감했다향년 예순다섯 살이었다사형장에서 담담하지만,

 단단하게 내지른 일성은 선생의 의거가 일어났던 서울역 광장에 새겨져 있다.

사형대에 홀로 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담담해서 오히려 그 깊은 결의가 느껴지고 숙연해지는 한 마디는 2011년 세워진 동상 아래에 새겨져 있고

주먹을 불끈 쥔 선생의 모습은 이제는 문화역서울 284이라고 불리는 옛서울역사가 지켜보고 있다.


<옛서울역사와 강우규 의사>


 사실 서대문형무소와는 다르지만 옛서울 역시 근대의 상징이며일제강점기의 기록이다

처음 서울역은 대한제국기인 1900년 서대문과 인천의 제물포를 연결하는 경인 철도의 남대문 역사로 처음 건설되었다


그러다가 1922년 6월부터 1925년 9월까지 조선총독부의 일 년 예산보다 많은 비용으로 르네상스풍의 서울역을 건설하였다

조선을 지배하고수탈하기 위한 수단이며나아가 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발판을 만들고자신들의 권위를 과시한 것이다


비록 조선인을 위한 곳은 아니었지만서울역이 보여주는 근대의 놀라운 수송력과 변화는 이전과 다른 세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세계와의 교류가 시작되었고조선의 신흥 자본가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그리고 그 변화의 흔적은 서울역 주변에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서울로 7017 만리동 출구>


 문화역서울 284 좌측에 있는 서울로 7017(구 서울역 고가도로)를 따라 도로를 건너가면 만리동에 다다른다

그 언덕에는 손기정체육공원과 손기정기념관이 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함으로써 한국인 최초로 올림픽금메달을 획득했지만

꽃다발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린 서글픈 사진으로 나라 없는 설움을 되새겨 준 손기정


그는 "당시 한국인들이 개인적으로 명성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지요그러나 스포츠는 예외였습니다

베를린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나는 '꼭 1등을 하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습니다.” 

라는 다짐처럼 그는 세계에 한국과 한국인을 알렸고


동아일보에서는 일장기를 없앤 사진을 실어 민족과 나라를 다시 알리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 기억과 분노와 자랑스러움을 간직하고자당시 그가 다녔던 양정보통고등학교가 다른 곳으로 이전하자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된 그 건물을 리모델링 해 손기정 탄생 100주년인 2012년 10월에 기념관으로 개관한 것이다.


<손기정 동상>


 체육공원을 지나 조금 더 오르면 작은 공원과 산책길이 있고꽃과 나무가 잘 정돈된 길 사이로 단정한 한옥이 한 채 보인다

만리동 정영국 가옥(萬里洞 鄭榮國 家屋)’이라 알려진 일제강점기의 건축물이며, 2006년 5월 1일 서울특별시의 민속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된 곳이다.

 1930년대의 경성은 서울역을 통해 새롭게 유입되는 사람들로 인한 인구가 급증했고일제는 신흥 부호와 중산층을 위해 여러 곳에 주거단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중 한곳이 이곳 만리동일제강점기 때는 봉래정 4정목(蓬萊町 4丁目)이었고

여기에 동명고무(활표 고무신)와 삼정광업을 운영한 신흥자본가였던 정영국이 도시형 한옥을 세워 입주한 것이 1936년이었다.

 이후 그는 미군정기에 보험회사 설립을 위한 자격을 획득하였고한국전쟁 이후 흥국생명을 창립하기도 하였다.


<만리동 정영국 가옥>


사실 북촌서촌 등 언제부터 한옥은 많아지고다채로워졌다그럼에도 이 작은 한옥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때 이후로 5대가 대를 이어 이곳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집이 필요하듯이 집도 역시 사람이 있어야만 그 가치와 생명이 보존되는 법이다처음 세워진 당시의 모습을 크게 개조하지 않고 유지하는 

이 주택은 일제강점기 당시 그들 신흥 중산층의 생활과 미의식을 알려주는 흔치 않은 곳이 된 것이다


비록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로 인해 기념관도 한옥도 속살 깊은 곳까지 보고 또 소통하기는 어렵지만 서울역과 서울로

체육공원 내 어린이도서관과 베를린올림픽의 부상이었다가 이제는 큰 나무로 성장한 월계수 

그리고 정영국 가옥 주변의 작은 공원은 서울과 우리의 근대 역사를 되새기는 잔잔한 시간을 만들어줄 수 있는 공간이라 할만하다.

 

<만리동 정영국 가옥>


"근대는 한강대교로노들섬은 미래로 나아간다."


 조선인의 의기는 결국 8.15 해방으로 이어졌다꽃길이 열릴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남과 북이 치룬 고통스러운 전쟁이 남아 있었다

그 깊은 상처는 아직까지 회복하지 못했고한강대교는 그 이후의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간직하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북은 물밀 듯이 밀려 내려왔고,


 남의 정부는 그들을 막기 위해 한강대교와 철교를 폭파하였다하지만 사람들은 아직 서울에 남아 있었고

하얀 옷과 하얀 보따리를 진 사람들은 엿가락처럼 부서져 앙상한 골격만 남은 다리의

 철근에 매달려 시커먼 한강을 건너는 장면은 전쟁의 압도적 참혹함을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가 되었다.


<노들섬에서 바라본 한강대교>


하지만 지금의 한강대교는 이전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입구에는 시민을 위한 카페가노들섬은 다양한 문화활동이 가능한 복합공간이 조성되었다

원래 강 위의 작은 모래언덕이었던 노들섬은 다리 건설을 위한 인공섬이 되고서울사람들이 사랑하는 유원지가 되었다

한강대교가 복원되면서 노들섬을 어떻게 활용할까 하는 고민이 시작되었다거대한 오페라하우스복합예술공간 등의 청사진이 발표되고철회되기도 했다.


 결국 2019년 9월 최대한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시민들을 위한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지금의 노들섬은 라이브하우스노들서가앤테이블뮤직라운지류식물도스페이스445, 다목적홀숲 등이 자리 잡은 독특하고 예쁜 문화공간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서울시는 2019년 등록문화재 제도를 시행하면서, 12월 25일 서울시 등록문화재 제1호로 한강대교를 선정하였다

1917년 세워진 한강 최초의 인도교이자 한국전쟁 당시 총탄 흔적이 남아 있는 근현대 역사의 산 증거이며산업화의 상징을 간직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노들섬의 잘 정돈된 화원과 깔끔한 가게들 사이로 낡은 듯 굳건한 한강대교가 한눈에 들어온다문득 생각해본다어쩌면 가장 참혹한 시간의 상징이며 

또한 가장 변화된 현재와 가고자 하는 미래를 보여주는 곳이 바로 이곳 한강대교이기 때문에 서울문화재 1호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닌가 하고.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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