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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작가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백제부흥의 꿈을 공주와 임존성에서 만나다 스크랩

작가와 함께하는 문화유산 여행(강희갑 작가,홍찬선 작가)


 



공주는 아픔이 서려 있는 도시다. 첫 도읍지였던 위례성과 한강유역을 고구려에게 뺏기고 개로왕마저 전사한 뒤 새로 세운 수도였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475년부터 538년까지 63년이라는 짧은 동안만 지낸 뒤 사비(부여)로 다시 천도했다.

 

동성왕(24)과 무녕왕(25) 때 힘을 비축한 뒤 성왕(26) 때 신라 진흥왕과 힘을 합쳐 잠시 한강 유역을 수복했다. 하지만 국익 앞에선 동맹도 친구도 없었다. 진흥왕의 배신으로 한강을 다시 뺏긴 성왕은 군대를 돌려 신라 응징에 나섰다 오히려 전사했다.

 

웅진은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했을 때도 의자왕이 피신했다가 부하의 배신으로 포로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 1234년이 흐른 뒤인 1894년엔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이 많이 죽었다. 일제를 몰아내고자 일어섰던 농민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기관총 앞에 낙엽처럼 쓰러졌다.

 

공주는 충남 도청이 대전으로 옮겨가면서 또 역사에서 밀려났다. 그렇게 아파하던 공주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197175일 우연히 무녕왕릉이 발견되면서부터다. 백제부흥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예산 봉수산의 임존성과 함께 1500 여 년 전에 있었던 일을 보여주고 있다.

 



송산리고분: 사적 13호

<송산리고분: 사적 13>




공주시 중심지에서 서북쪽으로 1km 떨어진 곳에 웅진백제 때의 왕릉이 모여 있다. 북쪽은 금강으로 막혔고 남쪽이 트여 있는 구릉지역이다. 해발 75m의 동남향 구릉에 수십 개의 옛무덤이 흩어져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7~1933년에 1~4호 무덤과 5~6호 무덤이 발굴 조사되었다. 하지만 정확한 조사보고서가 남아 있지 않고,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도 제대로 전하지 않는다. 그때까지 도굴되지 않았던 것들은 상당부분 일제가 불법적으로 가져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175, 5호분과 6호분 사이의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무녕왕릉이 발견됐다. 백제 왕릉 가운데 무덤 주인이 밝혀진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무녕왕(武寧王)릉 발견으로 바로 아래 있는 6호분이 성왕의 눙이 아닐까 하는 추정이 나오고 있다.

 



무녕왕릉 지석; 국보163호

<무녕왕릉 지석; 국보163>




무녕왕릉은 무덤의 주인이 백제 사마왕으로 불린 무녕왕이라는 것을 명확히 밝혀주는 지석(誌石)이 발견됐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왕과 왕비의 지석 2개가 출토됐다.

 

왕의 지석 앞면에 백제 사마왕(斯摩王)62세 되던 해(523)에 죽어 묘에 안장하며 매지문서를 작성한다는 내용을 새겼다. 뒷면에는 주위에 네모나게 구획선을 치고 간지와 8괘를 배합해 방위를 새겨놓았다.

 

왕비의 지석에는 앞면에 “526년 왕비가 죽자 장례를 지내고 529년에 왕과 합장했다는 내용을 적고, 뒷면에 일만문의 돈으로 토지를 매입해 무덤을 만든다고 적었다.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국보가 12종목 17건에 이른다. 그야말로 백제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송산리고분 매표소에서 들어가면 모형전시관에서 무녕왕릉의 복원된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고마나루(명승 21호) 수신단

<고마나루(명승 21) 수신단>




고마나루는 공주의 옛 이름인 웅진(熊津)의 순 우리말이다. 고마는 곰의 옛말이다. 무녕왕릉이 있는 송산리고분에서 정지산유적지과 국립공주박물관을 지나 아름다운 솔밭을 넘어서면 만날 수 있다.

 

옛날 이 나루의 강 건너 연미산 동굴에 암 곰이 살고 있었다. 이 암 곰은 사람을 사랑해 나무꾼을 잡아다 남편을 삼고 자식 둘을 낳았다. 어느 날 나무꾼은 곰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배를 타고 도망갔다. 곰이 두 아이를 들어 보이며 돌아오라고 애원했지만 나무꾼은 듣지 않았다.

 

슬피 울던 곰은 두 아이와 함께 강물에 빠져 죽었다. 그 뒤 강을 건너는 배가 자주 뒤집혔다. 마을 사람들이 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나루터 근처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그것이 고마나루 숲속에 있는 <웅신단(熊神壇)>이다. 또 연미산이 바로 앞에 보이는 고마나루에는 금강의 수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인 <수신단>도 있다.

 



공산성(사적 12호) 금서루

<공산성(사적 12) 금서루>




웅진백제의 도성으로 추정되는 공산성(公山城)은 금강 남쪽 야산의 능선과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원래 흙으로 쌓았던 것을 임진왜란 직후에 돌로 다시 증축한 것으로 보인다. 성벽 둘레는 2.2km이고, 돌로 쌓은 곳이 1.81km, 흙으로 된 곳이 390m정도다.

 

남문인 진남루(鎭南樓)와 북문인 공북루(拱北樓)는 남아 있었지만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 있었다. 현재 공산성 주 출입구로 이용되는 서문인 금서루(錦西樓)는 복원된 것이다. 10월말~11월초에 금서루 앞 비탈에 흐드러지게 핀 들국화 향기 속에서 금서루 야경을 보는 멋은 일품이다.

 



공산성 쌍수정

<공산성 쌍수정>




공산성은 아픈 역사가 많은 곳이다. 의자왕이 당에 포로로 잡혀간 현장이며, 신라 말에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켰던 곳이다. 고려 때 망이 망소이가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들고 일어났다가 실패했다.

 

조선시대에는 쿠데타로 왕이 된 인조가 정치를 잘못해 이괄의 난을 초래한 뒤 피난한 곳이다. 인조는 공산성에서 가장 높은 이곳에 있는 두 나무(雙樹)에 기대, 난이 평정되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드디어 평정소식이 오자 자신이 기댔던 느티나무 두 그루에 통훈대부(通訓大夫, 문관 정3품 하계. 당하관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라는 벼슬을 내리고 이곳을 쌍수산성이라 불렀다.

 

그 뒤 영조 때인 1734년 쌍수가 있던 자리에 정자를 짓고 삼가정(三架亭)이라 했다. 고종 황제 때인 1903년 다시 정자를 세우고 이름도 쌍수정이라고 했다. 쌍수정 앞에는 인절미의 유래가 적혀있다. 인조가 피난했을 때 임씨 성을 가진 이곳 주민이 떡을 해서 바쳤는데, 그 맛이 아주 좋다고 해서 임씨가 많든 맛좋은 떡이라는 뜻의 임절미로 했다가 나중에 인절미가 됐다는 것이다.

 



우금치 동학혁명군 위령탑; 사적 387호

<우금치 동학혁명군 위령탑; 사적 387>




공산성을 나와 남쪽으로 2km 정도 가다 보면 이인면으로 가기 위해 넘는 고개가 우금치다. 이곳에서 가난한 효자가 병든 아버지를 살린 황금소가 나왔다고 해서 牛金티라고도 하고, 산적이 많아 해가 넘어가면 소를 몰고 넘지 말라는 牛禁티라고 부른다.

 

공주시 금학동과 주미동 사이에 있는 우금티는 공주 남쪽을 지키는 관문이었다. 1894년 갑오동학농민전쟁 때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수만 명이 일제에 의해 학살당한 곳이다. 천도교 공주교구에서 197311, 이곳에 동학혁명위령탑을 세웠다.

 

우금치에 터널이 뚫리기 전에는 차를 타고 가다 들리기 쉬웠다. 하지만 터널이 생긴 다음에는 잘 보이지도 않고 접근도 쉽지 않아 그냥 지나치게 된다. 뼈아픈 역사가 잊히는 것이 더욱 아픈 현실을 본다.

 



마곡사(麻谷寺) 전경

<마곡사(麻谷寺) 전경>




우금티의 아픔을 안고 마곡사로 간다. 공주시 사곡면 태화산(泰華山, 416.9m)에 있는 절이다. 신라 승려 자장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20186월에 봉정사 대흥사 등과 함께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창건 뒤 200년 동안 폐사돼 도적떼의 소굴이 됐다. 보조국사 지눌이 1172년에 왕명을 받고, 도덕떼를 굴복시킨 뒤 중창했다.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1651년에 다시 지어졌다. 대웅보전(보물 801)과 대광보전(보물 802) 오층석탑(보물 799) 석가모니불괘불탱화(보물 1260) 등이 유명하다. 영산전은 조선 중기 때 세워진 것으로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현판은 세조가 생육신(生六臣) 김시습을 만나러 왔다가 못 보고 돌아가면서 쓴 글씨라고 한다.

 

마곡사는 김구 주석과 인연이 깊다. 김구 주석이 젊었을 때 치하포(鴟河浦)에서 일본군 중위를 맨손으로 때려죽이고 인천감옥에 수감됐다가 파옥한 뒤 도피생활을 할 때, 마곡사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됐다. 그 때 김구 주석이 머리를 자른 곳(시내가 흐르는 바위)과 거의 매일 오르내리며 나라사랑을 생각한 군왕터를 가보면 가슴이 뭉클하다.

 



임존성: 사적 90호

<임존성: 사적 90>




충남 예산군 광시면과 대흥면, 그리고 홍성군 금마면이 만나는 곳에 봉수산(483.9m)이 있다. 산 모양이 봉황 머리가 같다고 해서 鳳首山이 된 이곳에 백제 멸망 후 마지막까지 부흥운동의 중심지가 됐던 임존성(任存城)이 있다.

 

산 정상 부근에 4km에 이르는 돌로 쌓은 테뫼식석성으로 성벽의 높이는 2.5m, 너비는 3.4m로 말을 타고 달릴 수 있을 정도로 넓다. 660년 나당연합군 공격으로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포로로 잡혔을 때 의자왕의 사촌 동생 복신과, 승려 도침 및 흑치상지가 3년 여 동안 백제부흥을 벌였다.

 

부흥운동 중에 일본에서 돌아온 왕자 부여풍 등과의 내분으로 흑치상지가 당에 투항한 뒤 이곳 지리를 잘 아는 것을 이용해 공격함으로써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남문 아래에 있는 대련사를 통해 올라가는 등산길이 가장 빠르다.

 



임존성 묘순이바위

<임존성 묘순이바위>




임존성 부근에 힘이 장사인 묘순이와 막동이라는 남매가 살고 있었다. 힘 장사는 둘이 함께 살 수 없어 하나가 죽어야 했다. 엄마는 대를 잇기 위해 아들을 살리기로 하고 남매에게 내기를 시켰다. 묘순이에게는 성을 쌓게 하고, 막동이에게는 쇠신발을 신고 서울을 다녀오라고 했다.

 

내기 기간인 석 달이 다 되었을 때 성은 다 쌓여 가는데 막동이는 올 기미가 없었다. 마지막 돌 하나만 놓으면 성이 완성되려 할 때 엄마는 묘순이에게 종콩밥을 갖다 주었다. 쉬면서 먹고 하라는 것이었다. 묘순이가 종콩밥을 입에 넣는 순간 목이 메어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 때 막동이가 돌아왔다. 감짝 놀란 묘순이가 마지막 남은 돌을 들어 올리려다 그 큰 바윗돌에 깔려 죽고 말았다.

 

임존성 남문에서 북서쪽으로 이어진 성벽을 따라가다 보면 성벽 중간에 툭 튀어나온 바윗돌이 묘순이바위다. 그 앞에 묘순이바위전설을 적은 안내판이 있다. 바로 옆에는 <임존성 백제복국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무녕왕릉 석수(石獸); 국보 162호.

<무녕왕릉 석수(石獸); 국보 162>




무녕왕릉을 지키라고 무덤 입구에 돌을 깎아 만들어 놓은 상상의 동물이다. 높이 31.5cm, 길이 48.5cm로 깜찍하게 생긴 진묘수(鎭墓獸) 한국에서는 처음 출토됐다. 머리에 쇠로 만든 뿔이 하나 있고, 몸 양옆에는 불꽃 같은 날개가 조각돼 있다.




무녕왕릉/ 如心 홍찬선

 

모든 것은 다 때가 있었다

천 사백 사십 육 년이나 땅 속 깊이 묻혀 있다가

천 구백 칠십 일 년에 우연히 곡괭이 끝에 걸린 것은

이제 때가 됐으니 세상에 나가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하라는 명령이었다

 

낮은 봉분이 일제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했다

공주 송산리 여섯 번 째 왕릉 뒤 조그마한

무덤은 아예 왕릉이라는 상상마저 지웠다

덩치가 커 일제의 눈에 띄었더라면

무녕왕은 없어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무녕왕이 후세를 위해 남겨놓은 기록은

단군처럼 그날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귀여운 석수(石獸)

무녕왕의 마음을 밝게 알아

천 사백 사십 육 년 동안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두 귀 활짝 열어

무덤의 비밀을 굳게 지켰다

 

키가 팔척이요 눈썹이 그림 같아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따랐던

무녕왕 사마(斯摩)

죽어서 들어갈 땅을 무단 점거하지 않고

땅값을 후하게 치러

지신도 감동해 그를 따듯하게 보호했다

 

나날이 쪼그라들고

다달이 잊혀 가는

백제가 더 이상 초라해져서는 안될 때

무녕왕은 배수로로 신호를 보내

어둠에서 밝음으로 멋지게 부활했다



 





: 공주는 발과 마음으로 봐야 보이는 곳이다. 눈으로만 보면 볼 것이 거의 없다며 심드렁하게 지나치기 쉽다. 공주를 찾는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발품을 팔면서 꼼꼼히 살피면 보이지 않던 역사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기를 알아보고 깨워달라는 손짓도 여기저기서 잡히는 듯하다. 예산과 부여 사이에서 백제역사를 증명하기 위해 1500년의 긴 잠을 깨고 부활한 무녕왕릉의 뜻을 헤아리면서 공주를 보면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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