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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작가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죽어서도 나라 지킨 문무왕과 경주 최부자의 부자법칙을 만나다 스크랩

작가와 함께하는 문화유산 여행(강희갑 작가,홍찬선 작가) 




경주에 가면 마음이 급하다가서 봐야 할 곳은 많은데 시간이 촉박하다해뜨기 전 새벽부터 달뜨고 난 뒤 밤까지 쉬지 않고 다녀도 빠뜨린 곳이 많다. 1000년 동안 신라의 수도였으니 명실상부한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땅을 깊게 파면 유물이 나오고 큰물이 지면 뜻하지 않은 횡재를 하는데 맛집을 찾아다닐 여유가 없다.

 

경주는 공주와 부여만주와 평양(엔 가보지 못했지만)에 비해 유물 보존이 잘 돼 있다몽고군 침략 때 불탄 황룡사와 9층목탑지진과 임진왜란 등으로 무너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분황사탑 등 일부 유물을 제외하곤 보존상태가 좋다.

 

경주하면 불국사와 석굴암이 떠오른다그만큼 중요한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하지만 눈을 조금 크게 뜨면 보이지 않던 수많은 유물들이 자신만의 사연을 갖고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불국사와 양동마을 외에 다른 맛을 찾으러 떠나보자.

 



대왕암(사적 158호) 여명

<대왕암(사적 158여명>




석굴암 석가모니부처가 내려다보는 토함산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만든 대종천이 동해로 흘러드는 감포(甘浦앞바다에 아침 해가 뜨려고 한다봉길리 해수욕장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곳에 자리한 아담한 몇 개 바위 너머로 하늘이 발갛게 물든다.

 

죽어서도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 하니 나를 동해바다에 묻으라고 유언한 문무왕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대왕암시신을 묻은 수중릉이 아니라 화장하고 남은 뼈를 빻은 가루를 뿌렸을 이곳에 바람이 거세게 불고 바다가 울며 파도가 휘몰아친다문무왕의 혼백이 깨어나는 듯하다.

 



감은사지 동서3층석탑(국보112호)

<감은사지 동서3층석탑(국보112)>




대왕암에서 경주로 들어오다 오른쪽에 멋진 탑 2개가 서 있는 것을 보고 발길을 멈춘다감은사가 있던 절터에 절은 없어지고 탑만 남아 있다감은사는 문무왕이 왜병을 불법으로 물리치려고 짓다가다 마치지 못하고 훙()한 뒤 그의 아들 신문왕 때인 682년에 완성했다절 밑으로 대왕암까지 이어지는 물길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으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동서 탑의 높이는 13.4m에 이른다. 1959년 12월에 서탑을 해체하고 보수하는 과정에서 3층 탑신 위 사리공에서 사리장엄구(보물 366)가 창건당시 항태로 발견됐다동탑에서도 1996년에 해체수리 때 서탑과 비슷한 사리장엄구(보물 1359)가 발견됐다유물도 언젠가는 자신의 역사를 스스로 말할 때가 온다.

 



동궁(사적18호)

<동궁(사적18)>




문무왕 때인 679년에 지은 신라의 별궁으로 태자가 머물던 곳이다왕이 사는 월성(月城)의 북동쪽에 길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황룡사터의 남서쪽에 위치한다궁궐 안에는 중국 사천성 동쪽에 있는 무산(巫山)의 12개 봉우리를 본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다.

 

연못을 파고 월지(月池)라 부르고그 안에 해중선산(海中仙山)인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州)를 상징하는 3개의 섬을 만들고 꽃을 심고 새와 짐승을 길렀다조선시대에 안압지(雁鴨池)라고 불렸던 이 연못은 바다를 상징한 것이어서동궁의 중심 건물을 임해전(臨海展)이라 불렀다임해전은 군신들이 회의를 하거나 연회를 베풀고 외빈을 접대하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월지 연인

<월지 연인>




월지는 경주 시민은 물론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신라시대 모습으로 복원된 뒤 밤에 멋진 조명으로 아름다운 야경을 연출하고 있어 가족들의 나들이는 물론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유명하다아름다운 임해전과 해중선산(봉래 방장 영주산)을 배경으로 멋진 추억사진을 남기는 연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천안에서 온 20대 젊은 연인은 이날의 아름다운 기억을 오래오래 간직하면서 몇 년 뒤에 결혼해서 함께 살 것이라며 행복한 포즈를 취했다잔잔한 호수 속으로 비추는 임해전과 해중선산의 반영(反影)을 담으려는 사진작가들의 발걸음도 잦은 곳이다.

 

 


분황사 보전석탑: 국보30호

<분황사 보전석탑: 국보30호>




선덕여왕 때인 634분황사를 창건할 때 쌓은 석탑이다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높이는 9.3m. 현재 3층까지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동경잡기(東京雜記)에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허물어지고 그 뒤 분황사 중이 개축하려다 또 무너뜨렸다고 기록돼 있으나 정확한 근거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본인들이 해체수리했는데 현재 모습도 그때 모습이다분황사 경내에는 이 탑을 수리할 때 남은 석재가 보관되어 있어지금 모습이 창건 당시 모습이 아님을 추정하게 한다그 아픔이 언제쯤 풀어질까




황룡사지(사적 6호) 금당터

<황룡사지(사적 6금당터>




분황사 바로 건너편에 넓은 황룡사터가 있다진흥왕부터 선덕여왕까지 약100년 동안 지어진 사찰터다대웅전에 해당하는 금당에는 인도에서 보내온 구리와 황금으로 만든 금동삼존장륙상이 있었고조선시대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지금은 받침대만 외롭게 남아 있다.

 

황룡사 규모와 관련해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황룡사지에서 발견된 치미뿐이다치미란 기와 건축물의 지붕 용마루 끝을 장식했던 것으로황룡사 치미(국립경주박물관 소장)는 높이가 186cm, 너비가 105cm로 세계 최대이며 장식도 매우 화려하다황룡사 규모가 얼마일지 가늠해볼 수 있다이곳은 원효대사가 금강삼매경론을 연설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황룡사 9층목탑터

<황룡사 9층목탑터>




황룡사 9층목탑은 높이가 30층 아파트 높이인 80m였다고 한다주변 아홉 오랑캐의 침입으로부터 신라를 수호하기 위한 염원을 담은 탑이다탑의 한가운데서 목탑의 중심기둥을 받치던 심초석은 가로가 4m, 세로가 3m, 무게는 30t에 달했다바닥의 한 면의 길이가 22m에 이르고 64개의 주춧돌에 기둥을 세워 탑의 무게를 견뎠다.

 

놀라운 것은 이런 엄청난 규모의 탑에 사용된 쇠못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백제의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해 3년 동안 만들었다고려 때 침략한 몽고군이 불살라 1238년에 없어졌을 때까지 여러 나라 스님들이 그 모습을 보기 위해 경주를 방문했을 정도로 세계적인 보물이었다금동삼존장륙상 및 만파식적과 함께 신라의 3대 보물이었다.

 



첨성대: 국보31호

<첨성대국보31>




신라 때 9.51m 높이로 쌓은 천문관측소다삼국유사에 선덕여왕(재위 632~47) 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며 점성대 서남에 내물마립간 능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이는 현재 계림에 있는 내물왕릉과 첨성대 위치 사이의 관계와 잘 부합된다.

 

첨성대는 기단부와 그 위의 술병 모양의 원통부그리고 그 위의 정자석(井字石)의 정상부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원통부는 높이 30cm인 부채꼴 돌로 27단을 쌓아올렸다. 27단 높이는 8.08m, 원둘레는 가장 아래가 16m이고 14단은 11.7m, 27단은 9.2m. 13~15단의 정남에서 동쪽으로 약 16도 되는 방향으로 한 변이 95cm인 정사각형 구멍이 뚫려 있다.

 



경주 최부자댁(국가민속문화재 27호) 곡식창고

<경주 최부자댁(국가민속문화재 27곡식창고>




첨성대에서 내물왕릉을 거쳐 경주향교를 지나면 월정교가 나온다그곳이 교동이며 경주 최부자 집이 있다. 400년 동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한 집이다이곳은 신라 때 요석공주가 살았던 요석궁 터라고 전해지고 있다.

 

경주 최부자집을 일으킨 최진립(崔震立)부터 약 200년 동안은 경주시 내남면 게무덤이라는 곳에서 살다가 최언경(崔彦璥, 1743~1804) 때 이곳에 터를 잡아 200년을 이어왔다.

 

최부자집 곡식창고 앞에는 쌀을 담는 뒤주가 놓여 있고 최부자집 가훈이 적혀있다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고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며찾아오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고흉년에 남의 논밭을 사지 말며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옷을 입고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이다.

 



선덕여왕릉(사적182호)

<선덕여왕릉(사적182)>




경주시 보문동 산79-2에 있는 신라 27대 선덕여왕릉은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사천왕사 위 낭산의 정상에 있다는 설명만 읽고자동차 GPS를 켜고 가면 근처에서 뱅뱅 돌다 찾지 못한다부근의 공터에 차를 세우고 걸어 올라가면 울창한 소나무로 둘러싸인 무덤이다.

 

무덤 주인이 선덕여왕이라는 것은 후대에 세운 안내판이 알려줄 뿐 다른 표식의물(表飾儀物)이 하나도 없다무덤 앞에 있는 상석(床石)은 후대에 설치한 것이다왕릉보다 더 크고 표식의물도 다양하게 많은 김유신장군묘와 비교해보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김유신장군묘(사적21호)

<김유신장군묘(사적21)>




태종무열왕릉은 마침 공사 중이라 문을 열지 않아 김유신장군묘로 갔다송화산(松花山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전망이 좋은 구릉 위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자리 잡고 있다김유신묘는 지름이 30m에 이르는 큰 원형 무덤이다봉분 둘레는 둘레돌(護石)을 두르고 그 외곽에는 바닥에 깐돌(敷石)을 깔았고돌난간(石欄干)을 두르는 등 매우 화려하다.

 

관리사무소도 없이 방치되다시피 놓여 있는 선덕여왕릉과는 달리 관리사무소도 별도로 있고 입장료도 2000원이나 받는다묘 입구에 세워진 신도비는 자물쇠로 꼭꼭 채워져 있다신라 흥덕왕 때 김유신이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됐다고는 하나선덕여왕릉과 자꾸 대비로 떠올랐다.

 



석굴암석굴 (출처: 문화재청)

<석굴암석굴 (출처: 문화재청)>

 

석굴암 갑질如心 홍찬선

 

석굴암 석가모니불이 하소연 하신다

유리벽에 갇혀 마스크 쓴 사람들보다

더 답답하다고토함산 너머 동해에서

떠오르는 햇살 본 지 너무 오래됐다고

 

석굴암 석가모니불 뵈러 간 나그네도

마찬가지로 아프다마이삭 하이선에

쓰러진 벼와 나무들에 짠해진 마음이

입장료를 6000원이나 받는 폭리에

사진 못 찍게 하는 갑질에 화딱지 난다

 

문화재 보호라고 했다

플래시 끄고 유리벽 바깥에서 사진 찍으면

석굴암 보존에 어떤 피해가 간다는 것인지,

석가모니불 앞에 놓여 있는 촛대와 목탁과

불경은 되고인자한 미소 널리 알리려는

사진은 안된다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되는데

 

석굴암 갑질에 석가모니불이 눈살 찌푸리신다

석굴암 갑질에 석가모니불이 가슴 적시신다

석굴암 갑질에 석가모니불이 다가서지 못하신다






 




여행의 묘미는 느슨한 계획에 있다고 한다하지만 경주는 촘촘한 계획이 필요하다수많은 문화재가 곳곳에 퍼져 있기 때문에 사전에 정보를 찾아 갈 곳을 정해 동선을 짜는 게 좋다경주로 떠나기 전에 경주의 문화재지도를 얻어 관련 정보를 알고 떠나는 게 바람직하다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안다는 말은 경주에서 특히 느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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