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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작가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창녕 우포늪과 가야고분에서 시간의 생명을 얻다 스크랩

작가와 함께하는 문화유산 여행(강희갑 작가,홍찬선 작가)




여행은 뜻하지 않은 선물을 얻는 재미가 있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갔는데 의외로 가슴 떨리는 소중한 보물을 발견하는 가슴 떨림을 경험한다. 
여행을 떠날 때 일정을 촘촘하게 짜지 말고 큰 얼개만 챙기고 세세한 것은 현지에 가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틈을 갖는 게 좋다는 말을, 창녕에서 실감할 수 있다. 
우포늪을 보기 위해 찾은 창녕에서 우포늪에 전혀 뒤지지 않는 역사의 현장을 맛보았다. 
신라 진흥왕이 창녕 지역에 있던 비화가야를 합병하고 세운 척경비(拓境碑, 국보 33호)와 다소곳이 서서 단순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술정리 동삼층석탑(국보 34호)가 주인공이었다.


보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화왕산 아래 목마산 기슭에 넓게 퍼져 있는 교동과 송현동 고분에서 벌어진 입을 다물기 어려웠다.

6.25전쟁 때 치열했던 낙동강전선 창녕-영산지구 승전비와 정조 때 세워진 돌다리인 만년교도 창녕의 숨겨진 맛이었다. 


새벽 6시.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오랫동안 벼르고 별렀던 우포늪을 향해 기어를 넣었다. 

수요일 이른 시간인데도 길이 조금 막혔다. 단풍이 한창이라 코로나19로 답답했던 가슴을 달래러 떠나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서울에서 3시간 남짓 달리고 다다른 우포늪. ‘이름은 헛되이 전하지 않는다’는 명불허전(名不虛傳)‘이란 말이 딱 들어맞았다. 


들어서자마자 ’꽤애꽥 꽤꽥‘ 소리가 한창이다. 

오리가족이 늪가에서 먹이를 찾다가 갑자기 나타난 침입자를 조심하라고 내는 경계음처럼 들렸다. 

한가롭게 헤엄치는 오리가족 사이로 큰고니인지 중대백로인지 그냥 백로인지 크고 하얀 새가 느긋하게 주의력 떨어지는 물고기를 노리고 서 있다.




우포늪 안내도

<우포늪 안내도>




우포늪은 한국에서 가장 큰 천연 늪이다. 인위적인 훼손이 거의 없는 내륙습지가 그대로 보존돼 각종 야생조류와 물고기들의 서식처가 되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늪지에 부들 창포 갈대 붕어마름 가시연꽃 등 500여종의 식물이 산다.


또 식물성 플랑크톤이 400여종이 서식해 800여종의 곤충과 30여종의 어류, 20여종의 양서류와 파충류 및 180여종의 조류에게 먹이감을 제공하는 생태박물관을 만들어 내고 있다.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시내인 토평천 유역에 형성된 우포늪은 현재 제방을 쌓아 우포(소벌) 목포(나무벌) 사지포(모래벌) 쪽지벌 등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전체를 다 돌아보려면 9.7km를 3시간30분 정도 걸어야 한다.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1km 30분으로 분위기만 맛볼 수 있다.




우포늪 조류

<우포늪 조류>




우포늪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희귀종인 텃새와 철새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원앙이나 왜가리, 해오라기 천둥오리 등은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지만 물닭이나 큰고니 노랑부리저어새 등은 쉽게 보기 힘든 귀한 새들이다.


특히 산업화로 인한 오염이 심각해기 전까지 쉽게 볼 수 있었던 따오기가 절멸됐다가 중국에서 1쌍을 기증받아 복원과 번식에 노력하면서 개체수를 늘리고 있다. 

털의 몸에 머리와 다리가 발갛고 부리는 검은색의 따오기를 아직은 쉽게 보기 어렵지만, 머지않아 우포늪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겨울에 망원경을 갖고 우포늪에 가면 따오기를 보는 보상을 받을 수도 있다.




진흥왕 척경비: 국보 33호

<진흥왕 척경비: 국보 33호>




신라 진흥왕이 창녕 지역을 신라 영토로 편입하면서 561년에 세운 비석이다. 1914년에 발견된 이 비석은 높이 3m(가장 낮은 곳은 1.15m)의 단단한 화강암에 27행 643자를 새겼다. 

비문의 첫머리에 신사(辛巳)년 2월에 세웠다는 내용이 있어 진흥왕 22년(561년)에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북산산 비봉과 함경도 황초령과 마운령에 세워진 비석 앞에는 ‘순수관경(巡狩管境, 관리하는 경내를 순시했다)’는 표현이 있어 ‘진흥왕순수비’라고 부르는데, 

이 비석엔 그런 표현이 없어 영토를 개척해 넓혔다는 척경비(拓境碑)라고 불린다. 

당시 신라의 6부 명칭과 지방의 유력자 직명등이 기록돼 있어 6세기 신라의 정치 사회 제도 군사 제도를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동삼층석탑: 국보 34호

<동삼층석탑: 국보 34호>




진흥왕척경비에서 가까운 곳의 술정리에 동삼층석탑이 있다. 언뜻 보면 어느 절에서나 볼 수 있는 탑처럼 수수하다.

국보34호라는 안내판을 보고서야 다시 쳐다본다.


8세기 중엽에 세워진 석탑으로, 목탑 요소를 모두 털어버리고 석탑의 전형을 완성한 시기의 것이라고 한다. 경주 불국사에 있는 석가탑(국보21호)과 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절제된 선의 아름다움, 긴장감 넘치는 직선미가 잘 드러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단순함과 절제미, 적정한 비례와 균형감도 맛볼 수 있다. 화왕산과 어울려 빚어내는 모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서삼층석탑: 보물 520호

<서삼층석탑: 보물 520호>




술정리 서쪽에 있는 삼층석탑이다. 동삼층석탑과 쌍탑이라고 불리지만 별개의 탑이다.  기단부의 제작과 전체적인 조각수법이 동삼층석탑에 떨어져 보물로 지정됐다.

이 탑의 북쪽 개울 건너 약100m 지점에 직교리 당간지주가 있고, 남쪽 200m 떨어진 곳에 영지(影池)라는 작은 연못이 있어 이곳에 매우 큰 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20년 10월21일 방문했을 때는 이 탑을 수리하기 위해 해체한 상태에서 탑은 전체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탑이 있던 자리에 안내판이 있고, 그 옆에 분해돼 정렬돼 있는 탑 부분품들만 볼 수 있었다.




송현동 마애여래좌상: 보물 75호

<송현동 마애여래좌상: 보물 75호>




송현동 가야고분 바로 아래에 있다. 커다란 자연 바위 앞면을 깎아 새긴 마애불(磨崖佛)이다. 바위 자체를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인 광배(光背)로 이용하고 있다.

석굴암 본존불 계열의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소라 모양으로 말린 머리카락(螺髮)이 없는 민머리(素髮)이나 부처가 지닌 지혜의 상징인 흰털(白毫)이 이마에 있었던 흔적이 있다.

둥근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단정하게 묘사돼 온화한 인상을 풍긴다.



교동(사적 80호) 송현동(사적 81호) 고분군

<교동(사적 80호) 송현동(사적 81호) 고분군>




아름다운 억새로 유명한 화왕산 아래 목마(牧馬)산 기슭에 엄청나게 큰 규모의 봉분이 수십 개 잇따라 있다. 

이 고분군은 창녕이 6개 가야 가운에 하나인 비화(非火)가야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밀양과 청도로 이어지는 24번 국도로 교동 고분군과 송현동 고분군으로 나뉘어지나 원래는 하나였다.

교동에 22개, 송현동에 8개의 큰 무덤봉분이 있다. 1900년 대 초까지만 해도 150~170개의 고분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제에 의한 조직적인 도굴과 발굴로 많이 사라졌다.

일제강점기 때 마차 20대, 화차 2량의 엄청난 유물이 출토됐지만 어디로 갔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송현동 15호 고분에서 2007년에 유골상태가 좋은 여자 유골이 발견돼 복원된 뒤 ‘송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창녕지구전승비

<창녕지구전승비>




진흥왕척경비 바로 옆에 창녕지구전승비(UN전적비)가 있다. 

6.25전쟁 때 북한군의 정예로 수도사단이란 별명이 붙었던 4사단의 공격을 미군 24사단과 2사단 19연대가 8월7일부터 9월15일까지 지켜낸 것을 기념하는 전승비다.


최후의 방어선이었던 낙동강전선은 다부동에서 경주 포항으로 이어지는 낙동강 동부지역은 한국군이, 창녕과 마산으로 이어지는 서쪽은 UN군(주로 미군)이 방어했는데, 낙동강돌출부인 창녕-영산전투가 가장 치열했다.

미군은 이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까지 끝내 사수해, 인천상륙작전을 펼 때까지 시간을 벌었고 결국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1959년 3월31일에 전승비를 세워 당시에 산화한 영령들을 위로하고 있다.



임진왜란호국충혼비

<임진왜란호국충혼비>




창녕읍에서 밀양으로 가는 길목에 영산이 있다. 영산은 중요무형문화재 25호인 영산쇠머리대기와 26호인 영산줄다리기로 유명한 곳이다.

나무소 싸움인 쇠머리대기와 줄다리기는 협동심이 필요한 민속놀이다.

이 지역은 북동쪽으로 영축산, 남동쪽으로 함박산이 둘러싸인 요충지여서 옛날부터 외침이 잦았고 주민들은 이런 놀이를 통해 싸움터에서의 협동심을 키웠다.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 곽재우가 왜군과 싸웠던 곳이어서 임진왜란호국충혼비가 세워졌다.



영산 만년교: 보물 564호

<영산 만년교: 보물 564호>




정조 4년인 1780년에 석공 백진기가 처음으로 세운 돌다리다. 

돌다리에는 교각을 세우고 그 위에 넓적한 판돌을 건너질러 만든 널다리(桁橋)와 교각 대신 다듬은 돌로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蜺)를 틀어 기틀을 만들고 그 위를 돌이나 흙으로 메운 무지개다리(虹蜺橋)가 있다.

만년교는 무지개다리이다. 만년교는 개천 바닥의 암반을 기초로 장대석 32개를 맞물려 반원형의 골격을 잡고, 그 위에 둥글동굴한 막돌을 허튼층쌓기로 쌓은 다음 맨 위에 흙을 얇게 깔았다.

다리 길이는 13.5m이고 폭은 3m이며 무지개(虹蜺) 너비는 11m이다. 만년교는 1892년에 중건됐다.




가야소녀 송현이

<송현이>




가야소녀 송현이/ 如心 홍찬선


역사는 글자로 기록된 것만이 아니다

말은 하지 못해도

스스로 기록할 수는 없어도

누군가 대신 써주지 않아도

온몸으로 있는 것 그대로 보여주는

생생한 역사가 펼쳐진다


송. 현. 이.

열여섯 이팔청춘 가야소녀는

이도령과 한창 사랑을 속삭일 나이에

천오백년 전 그날 비화(非火)가야에서

일어난 일 온 몸으로 증거 하려고

살은 흙으로 바뀌고 뼈는 그대로 남아

시간 건너뛰어 되살아났다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목마산 기슭에 자리 잡은

비화가야 시대의 교동과 송현동 고분에서

일제강점기 때 야만적인 도굴과 약탈을 피해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일제가 그날 저지른 만행을 고발하고

비화가야 때 저질러진 순장을 경고하려는 듯


키가 153.5cm로 작지 않았던

송현이는 목이 길고 허리는 잘록하며

넓고 평평한 얼굴에 금동 귀걸이를 하고

그날 웃으며 죽었을 것이다

내 비록 이렇게 웃으며 떠나지만

아주 먼 옛날엔 주인 따라 죽어

함께 묻히는 순장(殉葬)이 있었다는 것

알려주려 썩어 없어지는 것 막았을 것이다

물이 스며들고 곰팡이가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

굳센 뜻으로 견뎌냈을 것이다


역사는 글자로 쓰인 것만이 아니라

누군가 대신 기록하지 않아도

스스로 전할 수 있다는 것

박테리아도 이겨낸 굳센 뜻으로

알려주고 있다






 

창녕 우포늪과 가야고분 팁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창녕에 들어맞는다. 알지 못하면 보이는 게 없지만 알면 많은 게 다가온다. 

반나절 일정을 잡아 떠난 것이 후회돼 다음에 다시 꼭 오리라는 다짐을 한다. 


시내에 펼쳐진 유적지를 돌아보고, 화왕산에 올라 갈대를 감상한 뒤 부곡온천에 들러 피로를 풀어보면 좋겠다. 

넉넉한 일정으로 김해 고령 함안 합천 고성 남원에 있는 가야고분군을 둘러본다면 잊힌 가야문화를 다시 보는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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