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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성에 깃든 역사의 기원이 빚은 아름다움 스크랩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with 이철호 작가



성에 깃든 역사의 기원이 빚은 아름다움

 

-남한산성-

-수원 화성-

-용주사와 융건릉-

 

 

요즘 지역을 다니다보면 공사 중인 곳이 적지 않다. 아니 오히려 공사를 하지 않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이다.

각 지역에서 내세울 수 있는 독특함, 특히 문화적인 유산을 새롭게 다듬고, 확산시키기 위한 공사가 많은 편이다.

그러다보니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 건축과 성이 새롭게 발굴되고 복원되고 있으며,

이름을 널리 알려진 성곽이나 문화공간은 확장하고, 새로운 것들이 덧붙여지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특징은 사라지고, 그곳이 그곳인 듯한 익숙함이나 무료함마저 전해주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낭중지추 囊中之錐라는 말처럼 고만고만한 성곽 중에서도 자신의 특별함을 숨기지 못한 곳들이 있다.

그 성곽들은 놀라운 역사의 변곡점을 간직하고 있으며, 조선의 왕이 머물던 행궁을 품고 있다.

그중 경기의 남쪽을 폭넓게 감싸고 있는 남한산성과 수원 화성을 찾아본다.

난공불락의 명성과 함께 가장 수치스러운 패배를 간직한 남한산성과 새로운 도읍지로서의 꿈을 간직했던 화성의 행궁은

그 이야기와 함께 여전히 우리를 감탄시키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단단하고 아름다운 슬픔의 시간, 남한산성

 

남한산성 성곽길

<남한산성 성곽길>


남한산성을 가는 길에 산성역 사거리에서 잠시 신호를 기다린다.

이 사거리만 넘으면 청량산의 숲속으로 이어지는 남한산성의 줄기에 들어서게 된다.

아래로 신도시였던 위례가 펼쳐지는데, 넓게 퍼진 아파트단지 너머로 홀로 하늘로 솟아 오른 롯데월드타워가 보인다.

파란 하늘보다 더 푸른 타워는 현대의 신전이자 성처럼 보인다.

문득 궁금해진다. 사람들은 왜 성을 쌓을까? 아마 두려움 때문이리라.

자연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은 하늘에 대한 경배와 함께 바벨탑과 같은 높은 신전을 쌓아 올렸다.

그러다 차츰 풍족해지면서 국가와 계급이 만들어지면서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도시와 성을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현대에는 성이 아닌 점차 마천루에 집중하기 시작하더니,

각 나라와 대륙마다 가장 높게가장 첨단의 성을 올리기 위해 경쟁이 들어가기도 했다.

점차 두려움에서 과시로 변해가는 것 같은데, 그 밑바탕에는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하릴없는 생각으로 타워의 높이를 따라가는 건, 지금 올라가는 남한산성과 행궁이 가장 단단하면서도

허망한 기원과 시간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면서 바뀐 신호에 따라 차를 출발시킨다.

 

남한산성 외삼문

<남한산성 외삼문>


산을 파고 들어가는 도로를 따라 한참을 구불거리며 올라가다가 터널을 지나면서

어느 순간 기와의 집들과 함께 각종 음식점과 카페를 알리는 간판이 가득한 마을이 나타난다.

그리고 산등성이를 따라 높고 넓은 기와가 산을 덮고 있는 나무 사이로 선명히 보인다.

이곳이 바로 남한산성의 동문이자 행궁이다.

둘레는 약 8,000m이고, 신라 문무왕 때 주장성(晝長城)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쌓았으며,

백제의 시조인 온조(溫祚)의 성이라고 전하기도 하는 곳이다.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에는 일장산성(日長山城)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1624(인조 2)에 왕이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로 하여금 성을 개축하게 하여 1626년 공사를 끝마쳤다고 한다.

그리고 임금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하는 경우 임시로 거처하였던 행궁(行宮)1688(숙종 14) 좌덕당(左德堂)을 세웠고,

1711(숙종 37)에 종묘를 모실 좌전(左殿)을 세우고, 남문 안에는 사직을 모실 우실(右室)을 두었다.

종묘와 사직을 두고 있는 행궁으로 유사시 임시수도의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그밖에 관청으로 좌승당(坐勝堂일장각(日長閣수어청(守禦廳제승헌(制勝軒) 등과

군사기관으로 비장청(裨將廳교련관청(敎鍊官廳기패관청(旗牌官廳) 등을 두었다.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47일간 피난하였던 곳이며,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이 능행길에 머물며 이용한 곳이기도 하다.

 내행전 북행각 사이 재덕당

<내행전 북행각 사이 재덕당>


정조 22년에 광주 유수가 세운 2층 누문인 한남루를 지나 행궁을 들어선다.

오른쪽에 작은 못이 입구를 담고 있다. 행궁은 산능성이를 따라 점차 위로 올라간다.

먼저 유수의 처소로 사용되었던 28칸 규모의 외행전이 나타나고,

이어 임금의 침전으로 사용된 내행전그리고 광주유수가 집무를 수행하던 좌승당 일장각 등이 계속 나타난다.

계단을 오르면 작은 입구가 나오고, 그 안에는 또 다른 건물이 나온다.

뒤로 다시 계단과 문이 이어지는데, 조금씩 어긋나면서 계속 이어지는 전각과 입구의 기와와 처마가 계속 겹쳐진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지만 산속에 만들어진 대궐과 같은 풍성함이 그곳에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풍성하다 해도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머물기에는 너무 좁고 부족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병자호란 당시 약 10만의 청군은 163717일 압록강을 넘어 한성과 인조만을 목표로 내달렸다.

기병 중심이다 보니 그 진격속도가 워낙 빨라 소식을 들은 인조가 움직이기도 전에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혀버렸다.

결국 163719일 밤, 남한산성으로 향한 인조 옆에는 성 내부로 퇴각한 12,000의 군사와 수만의 백성들이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의 경험을 토대로 전략적 요지에 축성된 산성에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는 농성 전술을 구사하려 했던 조선군은

뒤늦게 남한산성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지만 청군의 별동대에 의해 각개격파 당했고,

가장 강한 군세를 가진 김자점이 움직이지 않으면서 결국 남한산성은 고립되고,

결국 왕인 인조조차 죽 한 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이어가는 상황에 이르렀다.

굶주림에 지친 군사들은 군마를 죽여 먹기까지 했으나, 결국 아사자가 속출하기 시작했고

사기가 극도로 저하된 인조는 224일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의 절을 올리게 된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남한산성 수어장대>


행궁 뒤로 남한산성을 오르는 길이 이어진다.

산길은 갈래를 치며 산성의 여기저기로 안내한다.

곧바로 오르면 남한산성을 둘러보는 수어장대가 우뚝 서있다.

산실에서는 고양이가, 하늘에는 까마귀가 찾는 이를 반겨준다.

드디어 오래된 소나무의 사이로 성곽이 보인다.

산의 굴국을 따라 유연하게 이어지는 성곽은 여전히 단단해 보였고, 아름다웠다.

그 성곽 너머로 멀리 롯데월드타워가 다시 보인다.

그 아래 촘촘한 건물과 마치 바늘처럼 우뚝 솟은 타워도 인상적이지만,

옛 송파나루 인근이었던 삼전도(三田渡)가 더욱 아른거린다.

잠시 성곽 길을 따라 위로 올라 수어장대를 둘러본다.

수어장대는 장수가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인조 2년에 지었으며,

원래 1층이었으나 1751년 영조의 명령으로 2층으로 지어 수어장대라고 하였다고 한다.

입구에는 청량당이라는 작은 사당이 함께 있었다.

성벽을 쌓을 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던 축성 담당자 이회장군을 위해 세운 사당으로

그의 두 부인과 실제로 셩벽을 쌓았던 벽암대사의 초상화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수어장대를 한 바퀴 돌아본다남한산성 주변의 도시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벽 아래는 가파른 벼랑과 같은 능선이 이어지고 있었고, 그 위의 성벽들은 빠진 곳 없이 촘촘하다.

전후좌우가 한눈에 보이니 방어에 최적인 천혜의 요새임을 군무에 무지한 이가 보더라도 확연해 보인다.

그러고 보면 성을 무너뜨리는 건 외부의 공격보다 내부의 불신과 두려움 때문이 아닌가 싶다.

 

 

꿈을 꾸었던 행궁, 일상의 보물이 된 화성

 

수원 화성

<수원 화성>


남한산성과 다르게 수원의 화성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 독특함을 자랑하는 곳이다.

정약용의 이름을 불러내지 않더라도 현대적인 공법으로 지어진 최초의 성이고, 여전히 아름다운 그 자태도 인상적이다.

사실 수원 화성은 그 출발부터가 남달랐던 곳이다.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마련하게 위해 신도시 화성을 계획하였다고 한다.

정조는 1789(정조 13)에 사도세자의 무덤인 영우원(永祐園)을 수백 년간 수원도호부가 있던 화산(花山)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개명(改名)하고 수원 도읍을 새 장소인 지금의 팔달산 아래로 옮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수원부로 부르던 고을 명칭을 화성(華城)으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줄곧 수원은 화성이란 이름으로 사용되었으나 1895년 지방 관제개편 과정에서

다시 수원군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고 지금은 수원시로 불리고 있다.


 수원 화성

<수원 화성>

수원 화성은 당시의 최첨단 과학과 건축술을 동원해 29개월이라는 단기간에 건립되었다.

정약용은 화성을 상업적 기능과 군사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도록 평지이면서도 견고한 성을 쌓았다.

도시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행궁과 자로 잘 뻗은 신작로는 상업도시를 표방하고 있다.

성벽은 효율적 방어가 가능하게 옹성, 장대, 봉수대, 포루, 각루 등 성벽을 따라 40여개의 방어 시설물을 배치하였는데,

화력을 기반으로 당시 전투를 상정해 성벽위의 여장(성 위에 낮게 쌓은 담) 곳곳에 총구멍(총안)을 설치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했었다.

당시 화성 건설에 사용된 거중기는 정약용의 독창적인 설계로 만든 것으로 근대적 과학정신이 상징한다.

성벽은 화강암뿐만 아니라 화포의 강한 충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벽돌이라는 흙으로 만든 신소재가 함께 사용되었다.

화성 축조이후, 벽돌을 사용한 성벽이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당시 조선의 역량이 집중되었던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으로써, 한국의 세계적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화성행궁

<화성행궁>


그렇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화성은 도시의 일상이라는 점이다.

행궁 앞과 남문이라 불리는 팔달문은 수원시민들에게 문화와 생활의 공간이었다.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주변이 극장과 골목 그리고 음식점과 술집이 가득했다.

팔달문 너머로는 아직도 많은 이들이 찾고 있는 남문시장이 이어진다.

이제 드넓은 광장이 된 행궁의 앞은 청소년들의 치기어린 장난과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고,

이어지는 골목은 독특한 카페와 문화공간으로 채워지고 있다.

북문인 장안문은 수원을 벗어나기 위한 통로이자, 쉽게 오갈 수 있는 공원이었다.

창룡문은 월드컵경기장으로 가기 전에 만나는 고갯길이자,

활쏘기와 다양한 공연이 펼쳐지는 공원이자 문화공간이었다.

화성은 시민들에게 어릴 때부터 청소년 그리고 연인과 함께 거니는 청년기를 지나

건강을 생각하는 장년과 노년 때까지 함께하는 친근한 벗과 같은 존재였다.

결혼식의 야외 촬영은 북문과 서문의 공원에서 이루어졌고, 주말에는 행궁 앞에서 전통무예의 시범공연을 관람하였고,

여름밤에는 서장대에 올라 하늘의 별을 보던 곳이다.

수원에서 자란 이들은 화성에 기대어 살고, 함께 시간을 보낸 것이다.

이런 성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싶다.

 

 

정조의 효심이 이어지는 용주사와 융건릉

 

융건릉

<융건릉>


융건릉 隆健陵은 제22대 정조의 아버지 장조(사도세자)와 현경왕후를 모신 융릉,

정조와 효의왕후를 모신 건릉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건릉은 10세 때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아들의 무덤이고, 융릉은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한 아들의 무덤이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의 드라마와 교과서를 통해 너무도 많이 듣고 있다.

무엇이 사실인가를 알 필요는 없지만, 정조가 즉위 이후 당쟁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펼치며

신진 세력을 등용하는 한편 왕권의 강력함을 보여주기 위해 화성을 축조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또 아버지의 죽음에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즉위 초부터 사도세자의 복권에 공을 들여

아버지의 존호를 장헌으로 올리고, 1789년 묘를 옮긴 후 능호를 융릉으로 바꾸었다.

화성과 융건릉의 정조의 한과 꿈을 담고 있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곳이라 하겠다.


 융건릉

<융건릉>


아침 일찍 융건릉을 찾았다. 평일이었고, 어떤 부지런한 이가 개장 시간 전부터 옛 임금의 능을 찾아오겠나

하는 생각이 있었기에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으로 융릉과 건릉을 만나고 둘러볼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그렇지만 개장 20분 전부터 매표소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매표를 시작할 때쯤이면 주말 관광지처럼은 아니지만 제법 줄이 길게 늘어선 채 들어갈 수 있었다.

의외로 이곳은 관광지라기보다 주변 주민들을 위한 편한 공원이자 엄마와 아이가 함께 찾기 좋은 산책로가 된 듯하다.

앞서 가는 한 아주머니가 딸과 딸의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그 친근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 있는 나무와 풀에 놀라고, 조용하고 신선한 공기에 즐거워하고 있었다.

심산유곡에 가야 볼 수 있는 자연이 주는 생명의 기운이 도심에서 멀지 않은 이곳에 가득한 것이고,

이미 많은 이들이 이걸 알고 부지런히 찾고 있는 셈이다.

 

조선 왕조의 능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입구에 문이 있고, 좌와 우에 재실과 준비실이 있고, 가운데 사당이 있다.

사당 뒤로 부드러운 능선이 이어지고, 그 위에 솟아난 듯 커다란 능이 조성되어 있다.

능의 주변에는 각종 석물 신하와 동물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주변은 푸른 나무들이 에워싸듯 보호하고 있다.

여주의 능과 다르게 융건릉은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지만 훨씬 편안한 시간과 시선을 만들어준다.

특히 융릉과 건릉을 잇는 길은 수도권에서 손꼽히는 산책로로 많은 사람이 감탄을 하는 곳이다.

아침 일찍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용주사 대웅전

<용주사 대웅전>


수원 화성에서 출발해 융건릉을 가다보면 능에 조금 못미처 하나의 사찰을 만난다. 바로 용주사이다.

용주사는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도처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명찰이다.

대부분 산속으로 들어가 다시 한참을 올라야 하는 오래된 사찰과는 다르게

길가의 카페와 음식점 너머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또 하나의 장점이다.

게다가 가기 편하지만 높이 솟은 소나무로 인해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신선함은 다른 곳 못지않고,

작지만 전각과 탑이 보여주는 고풍스러운 유려함은 찾는 이들에게 여유로움을 전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용주사 龍珠寺는 신라 문성왕 16(854)에 갈양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

그리고 정조 임금이 즉위 13년을 맞던 해 전농동 배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갈양사터에 절을 새로 중창하여 용주사라 이름 붙여서 사도세자 묘의 능침사찰로 삼았다고 한다.

용주사는 정조대왕의 효성을 보여주는 사찰로, 수원 화성과 용주사

그리고 융건릉을 잇는 길을 효행길이라 부르며 기리고 있는 것이다.


 용주사

<용주사>


용주사는 그 오래된 명성을 자랑하지만 안을 거닐다 보면 담이 없고, 길이 없는 듯 느껴지게 된다.

사실 정해진 길은 짧다. 사천왕문을 지나고, 삼문을 지나고 나면 세존사리탑을 지나고,

이어 천보전 아래를 지나면 대웅전이 있는 마당으로 들어서게 된다.

대웅전 바로 왼쪽 옆으로 천불전과 시방칠등각 그리고 범종각이 이어진다.

원래 오른쪽은 호성전의 차지였지만, 얼마 전 화재로 공사가 한창이다.

지장전의 아래로 길게 길이 이어지고, 거기에 약수터와 작은 불상과 산신 등이 모셔져 있다.

그 주변으로 소나무 사이로 한가로운 산책길이 펼쳐지는데,

그 자유로운 공간이 용주사를 찾는 이들에게 여유로운 사색의 시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런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이 오히려 용주사를 더욱 아끼게 만드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화성의 놀라움과 친근함은 용주사의 소탈하고 고즈넉한 자연스러움으로 이어지고,

융건릉의 따뜻한 곡선과 시원하고 건강한 휴식으로 마무리된다.

이 여정은 우리가 간직해야 할 의 가치를 되새기며,

선조들이 꿈꾸던 새로운 세상의 현재를 사색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한듯하다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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