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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여행을 부르는 문화유산 답사기] 7월 삼각산에서 건강과 기원을 만나다, 삼각산 흥천사와 평창 보현산신 스크랩



7월 삼각산에서 건강과 기원을 만나다  

삼각산 흥천사와 평창 보현산신각   



드디어 여름이 왔다. 장마와 태풍 그리고 찌는 더위와 휴가의 계절이다.

 가장 몸이 힘들 때 충전과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조상이 물려준 지혜이기도 하다. 

그 지혜의 흔적을 나누고, 시원한 휴식을 만나러 삼각산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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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사 전법회관>



육백년의 기원이 시작된 명당을 만나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은 조선을 말해주는 몇 가지 단어이자 풍경 중 하나이다. 

조선 육백년 내내 불교와 민간의 소소한 신앙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조선의 시작과 역사의 곳곳에서 그 생명력을 만날 수 있다.

 조선의 심장이었던 수도 한양의 시작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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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흥천사 극락보전>


고려시대 도선선사라는 분은 자연을 읽고 조화롭게 사는 법이 풍수를 처음 우리나라에 정착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고려사>에 도선선사의 <삼각산명당기> 일부가 남아 있다.  


“삼각산은 북을 등지고 남을 향한 선경으로서...

좌우에 있는 청룡과 백호는 세력이 서로 비등하여 내외의 인물과 보화는 이곳으로 모여들어 오로지 국왕을 돕고... 

삼각산에 의지하여 제경을 마련하면 9년 되는 해에 사해가 모두 와서 조공하리라.” 


그리고 태조의 멘토였던 무학대사는 조선의 도읍지를 찾아 순례하던 중 삼각산에 올랐다. 

북한산은 주봉인 백운대(白雲臺)와 함께 만경대(萬鏡臺), 인수봉(仁壽峯) 세 봉우리가 큰 삼각형으로 솟아 있기 때문에 고려 때부터 삼각산이라 불렸다. 

이 중 만경대에 오른 무학대사는 서남쪽을 내려다보고 도읍을 정했다고 전해진다. 

일명 국망봉(國望峰)이라고도 불리는 만경대는 남쪽으로 북악산과 연결되고, 

도성은 한양의 북쪽 주산인 북악산(北岳山)에 기대어 만들어졌다. 그야말로 조선의 사상과 정기가 서린 곳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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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사 극락보전 천수관음>


나라가 막 세워진 1395년(태조 4) 이성계의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가 세상을 떠났다. 

건국에 공을 세운 권문세가였던 만큼 1396년 능지(陵地)를 정릉(貞陵)에 정하여 조영(造營)하였고, 

그 원당(願堂)으로 능 동쪽에 170여 칸의 절을 세워 흥천사라 칭하였다고 한다. 

풍수에서 중요한 것이 집터와 묏자리를 잘 정하는 것이니 만큼 정릉과 사찰의 조성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흥천사는 조선 태조의 원찰로서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한양 도성 안에 위치한 최초의 사찰이라는 영광을 간직할 수 있었다.  



도심의 숲을 가꾸는 흥천사 興天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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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사 명부전>


흥천사를 가기 위해서는 아리랑고개를 올라야 한다.

 10여 년 전 이 고개는 건너편의 화려한 돈암동 유흥가와 다르게 작은 가게와 집들로 채워진 한적하고 소박했던 곳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런데 지금의 이 언덕은 거대하고 세련된 아파트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파트단지들은 다시 새롭게 길을 만들었고, 좌우 빼곡한 건물의 숲은 감히 사찰과 문화재를 상상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렇지만 고개 위로 이어지는 작은 언덕에 올라서자 돈암2동주민센터 주차장과 함께 시원한 나무 사이의 산책길과 그 너머의 멋들어진 사찰 지붕이 나타난다. 

그 놀라운 풍경의 전환이 놀랍다. 바로 한 걸음에 도심은 숲속의 사찰로 변해버렸다. 


그렇지만 반가움도 잠시, 주민센터 주차장부터 종루의 바로 앞은 거대한 공사장이 되어 있었다. 

그 너머의 흥천사는 각종 세파에 맞서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실 왕실의 원찰로서의 이름이 높았던 흥천사는 1504년(연산군 10) 12월과 1510년(중종 5)에 걸친 화재로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다.

 그 후 현종 때 현재 자리에 새롭게 사찰을 조성해 새로 지은 흥천사라는 ‘신흥사’로 이름 짓고,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흥천사’로 다시 이름을 바꾸면서 

우리가 아는 흥천사의 모양이 갖추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다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사찰은 영광을 누릴 틈도 없이 쇠락을 거듭해 한때는 대처승의 거처로 전락했다고 한다. 

그나마 최근 스님과 사람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옛 영광을 짐작할 수 있는, 

현대적인 전법회관과 전통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현재의 모습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어쩌면 흥천사의 매력은 옛 영광을 복원하며 새롭게 미래를 개척하는 전통의 사찰이라는 그 정성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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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보전 뒷편 십이지신상>


비록 부침은 많았지만 조선시대를 대표한 사찰이었던 만큼 문화재가 즐비하다는 것은 흥천사만의 또 다른 자랑이기도 하다. 

극락보전에 모셔진 금동천수관음보살좌상은 보물 제1891호로 지정되었고, 흥천사 대방은 국가등록문화재에 등재되었다. 

극락보전과 명부전은 서울시유형문화재이며 그밖에 지정문화재만 25점에 이른다. 

그렇지만 흥천사의 경내를 한가롭게 거닐다보면 그런 유형의 문화재와 함께 진정한 보물을 발견하게 된다. 

번잡한 속세 사이에 자리 잡아 주민과 함께 어우러지고, 역사를 복원하는 거친 공사장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자신의 청정함과 고요함을 잃지 않고 있는 여유로움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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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사 범종>


먼저 만세루와 범종을 보고 있으면 칠이 벗겨진 현판의 아름다움과 함께 청량한 풍경소리가 마음을 넉넉하게 만들어준다. 

만세루 뒤편으로 돌아가 극락보전을 오르는 계단 앞 마루에 서 있으면 건물 사이로 흐르는 바람이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준다. 

그리고 길가의 석축 사이의 동자불의 미소와 잘 가꾸어진 나무와 정원 그리고 꽃을 만나다보면

 어느새 주변의 소음은 사라지고, 처마 위 아파트는 숲속의 그림자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 놀라운 경험과 넉넉해진 마음을 따라 관음보전 뒤편의 십이지신상과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난 작은 정원 그리고 소원을 들어주는 두꺼비상과 관음보살상, 

명부전을 지나 공사 중인 산신각으로 올라선다.

 높은 바위에는 한 외국인 부녀가 두 발을 쭉 펴고 시원한 풍경을 만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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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사 연꽃>


비록 건물은 공사용 천막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이곳에서 찾고자 하는 평화는 바로 그곳에 있는 듯하다. 

산신각을 내려오니 바로 옆으로 정릉으로 가는 길이 있다. 그 길가에 최초의 한옥 유치원이 있고, 단정하고, 예쁜 선원의 건물들이 이어진다.

 그 길 끝에 있는 삼각선원 입구의 현판에는 흥천사의 마음이 걸려 있다. ‘손잡고 오르는 집’이라는 글이 걸려 있는데,

 ‘행복해지려면 혼자서 말고 손잡고 오르라’는 조실 무산 큰스님의 세상과 사람에 대한 평소 가르침이 집약된 글이라고 한다.

 아마 이곳 흥천사에 만나야 하는 보물은 바로 이와 같은 마음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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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천사 산신각 앞 부녀>



북한산둘레길에 만난 산신각 



정릉 아래를 드라이브코스로 유명한 북악스카이웨이가 지난다. 

그 도로를 타고 터널을 지나면 서울의 대표적인 부촌이자 북한산둘레길이 지나는 평창동을 만나게 된다.  

평창동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총융청(總戎廳)의 군량창고였던 ‘평창’에서 비롯되었다. 한자로는 평평한 平 곳집, 창고 倉라는 뜻이다. 

그 이름 때문인지 시골의 골짜기였던 평창은 가장 부유한 동네로 성장하였고, 

북한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즐길 수 있는 북한산둘레길 중 평창마을길로 한몫을 차지하고 있다. 


가파른 언덕길과 좌우로 쉴 새 없이 꺾어지는 평창동 골목길은 

마치 시골마을길을 걷는 듯한 한적함과 북한산의 짙고 푸른 배경과 어울리는 세련된 저택들로 색다른 풍경을 만들어준다.

 그 때문인지 그 길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이들은 가벼운 복장에 백팩을 메고 지나는 도심의 산행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그 한가로움과 건강함을 만끽하며 지나다보면 어느 순간 거대한 바위와 나무를 만나게 된다. 


그 바위 옆으로 작은 돌계단이 이어지는데, 계단 너머 소나무들 사이로 바위와 작은 옛 건물이 얼핏 보인다.

 바위를 지나 작은 공터가 나오고 돌로 단을 쌓고, 바위에 기대에 있는 작은 제각을 만나게 된다.

 바로 전국에 몇 남지 않은 귀중한 민속자료(서울시 민속자료 3호)인 평창동 보현산신각 平倉洞普賢山神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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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각 뒷편 북한산 둘레길>


보현산신각은 일반 무속 굿 하는 곳은 아니고 보현봉 산신(山神)께 3월 1일, 9월 13일 일 년에 두 차례 제(祭)를 올리는 곳이라 한다.

 게다가 이 산신각은 남산신당이이라고 한다.

 산 아래 큰 굴(큰 골짜기)에는 남신을, 소단 굴(작은 골짜기)에는 여신을 모시고 같은 날 같은 제물과 정성으로 제를 올렸던 곳이었다.

 그렇지만 서쪽으로 5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여신의 산신각은 화재로 사리지고

 지금은 마을 사람들이 붉은 벽돌로 복원한 건물만 남아 있다고 한다. 

홀로 남은 산신각이지만, 보현산신각에는 특히 마음이 가게 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건 한양 진산의 깊고 좋은 터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게 첫 번째고, 우리가 상상하던 그대로의 산신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두 번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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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산신각>



먼저 산신의 모습은 그림으로 만날 수 있다. 

산신각 안에 산신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항상 출입문이 닫혀 있기에 그 그림을 현실에서 만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인터넷 등의 자료를 찾아보면  우리가 익숙하게 상상했던 것과 일치하는 산신의 모습이 발견할 수 있다. 

산신은 청색도포를 입고 관을 쓰고 왼손에 우선(羽扇)을 들고 있으며 뒤쪽 오른쪽에는 호랑이가 엎드려 있다.

 왼쪽에는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무릎을 꿇은 자세로 천도복숭아 3개를 쟁반에 받쳐 들고 있으니, 어디선가 본 듯한 산신의 원형이 이곳에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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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아래 기도터>


비록 산신은 만나지는 못하지만 산신각은 그에 못지않은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일단 잘 닦인 길과 단단한 주택들이 이어지는 마을 한가운데에 마치 신비의 숲처럼 숨겨진 산신각이니 발견의 재미가 쏠쏠하다. 

또 마을 내에 있으니 살다, 걷다 쉽게 찾고 쉬고 기원할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이 반갑다.

 게다가 풍요로운 마을을 일군 터이고, 영험한 산의 골에 위치했기 때문에 각종 무속과 기원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특히 신당 아래쪽의 거대한 바위에는 그 아래에 용궁이 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고 한다. 

지금도 용궁기도터라는 제단이 그 바위 아래에 조성되어 있다.

바위 옆 작은 계단을 내려가면 생각하지 못했던 공간이 열리고, 

그 바위틈에 촛불과 신상이 가지런히 세워져 있는데, 최근에 누군가 제를 지낸 흔적도 여기저기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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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 위쪽 산행길과 바위>


또한 신당 위쪽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천제단(天祭壇)이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이야기를 찾아 희미한 산길의 흔적이 따라 올라가본다. 

마침 지나던 동네 어른이 여기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아름다운 산길과 약수터가 있음을 알려준다. 

풀과 나무를 헤치며 잠시 오르니 그 크기를 짐작하기 어려운 거대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고 있고, 그 아래에 작은 제단이 보인다

. 이 산 곳곳에 산의 영험함에 기댄 작은 제단과 기원의 흔적이 있는 듯한데, 

그 거대한 바위 위에서 보는 평창과 북악의 풍경이 제법 그럴 듯하다. 세상의 시름을 그곳에 놓고 오는 것만으로도 작은 기원은 이루어지는 듯하다. 




글 이철호 작가



전)월간 러너스코리아 기자

전)격월간 연콘텐츠 기자

전)수원청소년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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