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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

[작가와 함께하는 문화유산여행] 천년 사찰 운주사와 승보사찰 송광사에서 가을을 만나다 스크랩

작가와 함께하는 문화유산 여행(강희갑 작가,홍찬선 작가)



 

구름이 사는 절(雲住寺)인가, 배를 운전하는 절(運舟寺)인가. 말로 아무리 들어도 한 번 직접 보는 것만 못하다는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은 화순 운주사를 가보면 그 말뜻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이 깊은 골짜기에 이렇게 많은 석불과 석탑을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아무리 해도 천년의 신비를 풀 수 있는 상상력이 부족하다.

 

운주사에 누워 있는 부처, 와불(臥佛)이 벌떡 일어서는 날 정말로 천지개벽이 일어날까. 북두칠성 모양으로 늘어서 있는 일곱 개 둥근 바위는 왜 그곳에 놓여 있는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을 가슴에 가득 담은 채 순천의 선암사와 송광사로 발길을 옮긴다.

 

단풍이 곱게 들기 전 선운사는 은목서와 금목서의 향기가 압권이다. 여름엔 무지개 돌다리 아래로 흐르는 계곡이 일품이고, 늦가을 아기단풍 고운 빛은 돌아갈 발길을 잊게 만든다. 송광사 삼청교 아래로 잔잔히 고여 있는 듯 흐르는 시내엔 물욕에 더렵혀진 마음을 씻고 고운 결을 되살리는 계기가 된다.

 



운주사 와불

<운주사 와불>




1900년 초까지만 하더라도 천불산 운주사 계곡에는 돌부처와 석탑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돌부처와 석탑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작품성이 뛰어난 것은 일제와 고관들이 쓸어가고, 못생긴 것들은 일반인들이 가져다가 집 지을 때 기둥 밑받침(礎石)으로 쓰거나 축대 쌓는 돌로도 사용했다. 그렇게 가져가고도 남은 게 현재 돌부처 93, 석탑 19개다. 부처가 1000, 석탑도 1000개였다는 전설이 깡그리 낭성만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게 남은 석불 가운데 운주사의 대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와불이다. 천불산 왼쪽 기슭에 누워있는 부처는 키(길이)12m, 폭이 10m나 된다. 와불은 한 분이 아니라 앉아 있는 부처와 서 있는 부처 두 분이 나란히 누워있다. 누운 상태로 조각한 것인지, 조각한 다음에 세우려 했던 것인지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운주사 칠성바위

<운주사 칠성바위>




와불에서 내려오다 오른쪽으로 좀 내려가면 바위 위에 세워진 칠층석탑이 나온다. 지대석이나 기단부 없이 그냥 바위 위에 7m나 되는 탑을 세운 모습이 신비롭다.

 

더 놀라운 것은 탑 아래 바위에 둥그렇게 다듬은 바위 돌 7개가 늘어서 있다는 사실이다. 그냥 아무렇게나 놓인 것이 아니라 북두칠성 같은 모습으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깔려 있다. 풀과 나무 때문에 돌 7개를 찾기도 쉽지 않고, 북두칠성 모습은 더욱 보기 어렵지만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보면 보인다.

 



운주사 전경

<운주사 전경>




운주사 대웅전을 지나 <석불군 마>를 왼쪽으로 돌아가면 석탑 2개가 있다. 그 옆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바위절벽에 새긴 마애불(磨崖佛)이 나온다. 5.16m에 이르는 거대함에 감탄하며 왼쪽으로 비탈길을 오르면 공사바위가 나온다.

 

운주사를 지은 도선국사가 이 바위에 앉아 천불천탑을 조성하는 공사를 감독하던 곳이라고 해서 불사바위라고도 부른다. 실제로 이 바위 위에 서면 대웅전에서 일주문까지의 계곡과 계곡 양 옆 비탈에 남아 있는 석불과 석탑이 한눈에 들어온다.

 



선암사 무지개다리(보물 400호)

<선암사 무지개다리(보물 400)>




운주사 석불이 잡아끄는 손을 뿌리치고 아쉽게 선암사로 향한다. 선암사 입구 주차장에서 고적한 나무터널 길을 새소리 들으며 느긋하게 걷다보면 아름다운 무지개 돌다리를 만난다. 조선후기 호암대사가 놓은 석교(石橋)로 무지개를 닮았다고 해서 홍교(虹橋) 또는 홍예교(虹蜺橋)라고 부른다.

 

선암사에서 정식명칙은 승선교(昇仙橋). 신선이 오른 다리, 신선이 이곳에서 하늘로 올라간 다리 등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단단한 화강암을 다듬어 높이 7m, 너비 3.5m의 다리를 아주 멋지게 만들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도 100년이나 지난 1698, 호암대사가 선암사를 중건할 때 100일 기도를 하며 관음보살이 나타나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시현하지 않자 낙담해서 벼랑에 몸을 던졌다. 바로 그 순간 한 여인이 나타나 그를 구하고 사라졌다. 호암대사는 그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보전을 짓고 관음보살을 모신 뒤, 절 입구에 무지개다리를 놓았다.

 



선암사 삼인당(三印塘) 연못

<선암사 삼인당(三印塘) 연못>




무지개 다리 앞에 있는 강선루(降仙樓, 신선이 내려온 누각)을 지나 일주문이 나오기 전에 달걀 모습의 연못을 만난다. 도선대사(827~898)862년에 만든 연못 안에는 섬이 만들어져 있다. 이 섬은 자리이타(自利利他, 자신뿐만 아니라 남을 위해 불도를 닦는 것), 밖의 달걀모양은 자각각타(自覺覺他, 스스로 깨달아 남도 깨닫게 함)을 표현한 것이다.

 

이 연못의 이름이 삼인당인데,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이라는 불교의 핵심사상을 담은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연못이다. 연못의 길이는 11m, 너비는 7m.

 



선암사 대웅전 앞 전경

<선암사 대웅전 앞 전경>




조계산의 동남쪽에 자리한 선암사라는 이름은 절 서쪽에 있는 커다란 신선바위(仙巖)에서 따온 것이다. 이 바위 위에서 신선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선암사 기록은 정유재란(1597) 때 모두 불타고 1707년에 새로 만들어졌다.

 

선암사가 세워진 신라 때부터 있던 것은 대웅전 앞의 두 개의 삼층석탑과 각황전 안에 모셔진 철불좌상 등이다. 각황전은 무우전(無憂殿) 후원에 있는 조그만 건물이다. 대웅전은 1828년에 다시 건립된 것이나 기단과 돌계단은 고려시대 것이다.

 

대웅전 석가모니불 뒤에는 화려한 석가모니 후불탱이 걸려 있어 대웅전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대웅전 뒤의 원통전은 관음보살을 모신 곳이다. 그 옆 장경전 앞마당에는 멋진 향나무 두 그루가 하늘 향해 쭉 뻗어 있다.

 



선암사 누운 소나무

<선암사 누운 소나무>




향나무를 돌아 나오면 큰 소나무 아래에 작은 물레방아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 종을 달아 놓았다. 안내판에는 작은 종을 울려 큰 소원을 비세요라고 적혀있다. 이 종에 정신이 팔리면 소나무를 볼 수 없다.

 

선암사에서 유명한 누운 소나무를 보지 않고선 선암사에 다녀온 것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선암사의 명물 가운데 하나다.이 소나무는 뿌리에서 큰 가지가 두 개 나와 하나는 하늘을 향해 크고, 다른 하나는 땅과 평행을 이루며 옆으로 크고 있다. 옆으로 큰 소나무가 바로 누운 소나무다.

 



송광사(사적 506호) 삼청교

<송광사(사적 506) 삼청교>




선암사에서 조계산을 너머 서쪽으로 걸어가면 송광사가 나온다. 등산로도 좋지만 시간에 쫓기는 사람은 자동차를 타고 송광사로 직접 간다. 송광사 입구에 지눌이 지팡이를 꽂았는데 싹이 났다가 지눌이 입적하자 함께 시들었다는 고향나무가 있다.

 

고향나무를 지나 왼쪽으로 돌면 송광사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다리가 삼청교이고, 그것과 이어진 누각이 우화각이다. 속세의 번뇌를 다리 밑으로 흐르는 시냇물에 모두 씻어 버리고 부처의 향기 나는 말씀을 듣는 자세를 갖추라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송광사 대웅전

<송광사 대웅전>




송광사는 처음에 신라 말 혜린 선사가 송광산에 길상사를 창건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고려 신종 때 지눌 선사가 조계종을 창시하고 정혜결사를 이곳으로 옮겨와 절 이름을 수선사로 고쳤다. 그 뒤 송광산 이름이 조계산으로 바뀌고 절 이름은 송광사로 변했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해 16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송광사는 승보(僧寶)사찰로 불린다. 부처님 진신사리가 있어 불보(佛寶)사찰인 통도사, 팔만대장경이 있어 법보(法寶)사찰인 해인사와 함께 한국의 삼보사찰로 통한다.

 



송광사 약사전과 영산전

<송광사 약사전과 영산전>




송광사는 절의 면적과 전각의 수가 한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크다. 하지만 바람에 흔들리며 낭랑한 소리를 들려주는 풍경(風磬)과 대웅전 앞에 으레 볼 수 있는 석탑과 석등이 없다. 풍경소리가 스님들의 공부에 방해가 되고, 송광서 터가 연화부수(蓮花浮水) 형이어서 석탑을 세우면 가라앉기 때문이다.

 

대신에 곳곳에 독특한 볼거리가 많다. 대웅전 마당 왼쪽 끝에 아담하게 약사전(藥師殿, 보물 302)이 자리잡고 있다.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으로 한국에 있는 법당 가운데 가장 작은 건물에 약사여래를 모셔놓고 있다.

 

약사전 옆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영산전(靈山殿, 보물 303)이 있다. 영상전에는 석가모니와 팔상탱화를 안치하고 있어 팔상전이라고도 부른다.

 



송광사 비사리구시

<송광사 비사리구시>




송광사에 3가지가 없는 대신에 3가지 명물도 있다. 커다란 통나무 속을 파내어 만든 나무 밥통인 비사리구시와 지눌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그릇 세트인 능견난사(能見難思)가 그것이다. 원래는 500개였는데 지금은 29개만 남아 있다. 조선 숙종이 똑같은 그릇을 만들려다 실패하고는 능히 볼 수는 있어도 이치를 알 수 없다고 해서 능견난사란 이름이 붙었다.

 

나머지 하나는 똑같은 모양의 향나무 두 그루가 엿가락처럼 꼬여 있는 쌍향수(천연기념물 88)가 그것이다. 송광사에 딸린 천자암(天子庵)에 있으며, 키는 12.5m, 가슴높이 둘레는 3.98m3.24m에 이른다. 나이는 800살로 추정된다. 이 나무에 손을 대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대웅전 옆 승보전 벽에 놓여 있는 비사리구시를 본 뒤 화엄경변상도(국보 314)를 보려고 했으나 박물관이 공사 중이어서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화엄경변상도는 가로 270cm, 세로 294.5cm의 거대한 비단에 그린 탱화다. 1770년에 만들어졌는데 조선시대 화엄경변상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송광사 국사전: 국보 56호

<송광사 국사전: 국보 56>

 

국사전/ 如心 홍찬선

 

궁금한 것은 기어이 풀어야 한다

송광사 지도를 뒤져 있는 곳을

여러 번 확인했는데도

보일 듯 말 듯 숨바꼭질 하는 곳을

온 사람이 누군지 빼꼼히 내다보는

구멍을 통해서 가까스로 맞았다

 

대웅전 마당 한 구석에 있는

약사전과 영산전 뒤로

계단 위에 내려다보며 서 있는

불일문(佛日門) 왼쪽의

주먹만 한 구멍 덕분에

발로는 갈 수 없는 국사전을

나라의 큰 스님

열여섯 분의 영정이 모셔 있는

국보56호를

눈으로만 보았다

빛과 그늘의 조화로

그 속의 영정은 맛보기만 하고

 

정면 4칸 모습만 알고

사람 인자 닮은 맞배지붕과

우물 정자 모습 천장과

동갑내기 하사당은 그저

가슴으로만 안타까움 듬뿍 담아

아쉬운 발걸음 돌렸다





 



: 절이라면 종교적인 이유로 거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절은 수천 년 동안 한국인들과 호흡을 함께 하며 살아온 삶과 역사의 일부다. 천 개의 불상과 천 개의 탑이 있었다는 천년 사찰 운주사, 국사를 많이 배출해 승보사찰로 불리는 송광사, 아름다운 무지개 돌다리와 향기로운 은목서와 금목서가 맞이해주는 선암사. 전남 화순과 순천에 있는 이들 절은 호남의 빼어난 자연과 함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 종교에 앞서 역사와 문화로서 다녀볼 충분한 멋과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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