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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칼럼

백자 달항아리, 인간적인 자연스러움 스크랩

 백자 달항아리, 인간적인 자연스러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 선생은 이를 두고“넉넉한 맏며느리 같다”고 했다. 미술사학자 겸 고고학자였던 김원용 선생은“이론을 초월한 백의(白衣)의 미”라고 노래했다. 바로 백자달항아리(白磁大壺)를 일컬음이다. 

백자에는 조선시대의 유교문화와 선비정신이 담겨 있다. 유교는 반듯하고 검약한 삶을 추구했으며 선비들은 지조와 학문을 숭상했다. 이것을 대표하는 색깔을 찾으라면 아마도 흰색이 아닐까. 백자의 흰색은 따라서 조선 선비들과 유교정신의 깨끗한 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색이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은 조선백자의 전성기였다. 깨끗함과 당당함을 두루 갖춘 백자들이 나타나 조선백자 문화를 풍요롭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백자달항아리다. 가로 세로의 비율이 1대 1 정도인데 그 모습이 둥근 달덩어리 같다고 해서 달항아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항아리는 한자로 표현하면 호(壺)라고 한다. 달항아리는 높이가 40~50cm에 이른다.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백자 달항아리 특별전. ⓒ국립고궁박물관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백자 달항아리 특별전. ⓒ국립고궁박물관




달항아리를 눈여겨보면 몸통 한가운데 가장 불룩한 부분이 어긋나 있다. 그 부분이 약간 비뚤어져 있어 어깨 부위의 좌우 높이가 차이가 난다. 달덩어리처럼 완벽하게 둥그런 모습이 아니라 약간 불균형하고 뒤뚱스런 모습이다.

왜 그럴까. 커다란 항아리의 경우 흙으로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만든 다음 이 둘을 서로 붙여 완성했다. 그렇다 보니 접합 부위가 이처럼 약간 뒤틀린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것은 이 접합 부위를 깔끔하게 다듬지 않고 서로 어긋나게 그냥 내버려 두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 부분을 칼로 깎아 내 매끈하게 다듬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이것은 조선백자가 자연스러움을 추구했음을 의미한다. 완벽하고 인위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약간은 불완전하지만 인간적인 자연스러움을 중시했던 것이다.

아무런 무늬를 넣지 않고 이렇게 단순한 모양으로 백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대단한 용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치장을 하는것보다 치장을 자제하는 것이 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멋을 내지 않으면서 은근한 멋을 창조하는 것, 이것이 백자의 미학이다. 최순우 선생이“넉넉한 맏며느리 얼굴 같다”고 말한 것은 그래서 참으로 적확하다. 넉넉함과 여유로움, 자연스러움과 인간적인 분위기, 이것이 바로 조선백자의 특징이자 아름다움이다. 중국이나 일본 도자기에서 발견할 수 없는 조선백자만의 특징이기도 하다. 백자 달항아리가 조선백자의 정수(精髓)로 평가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환기의 <항아리> , 1955-56년, 캔버스에 유채, 65× 80cm, 개인소장


김환기의 <항아리> , 1955-56년, 캔버스에 유채, 65× 80cm, 개인소장




백자 달항아리는 근대 이후 많은 문인예술가를 매료시켰다. 대표적 인물은 김환기 화백이다. 그는 달항아리에 심취해 <항아리>, <새와 항아리>, <여인과 매화와 항아리>등과 같은 걸작을 많이 남겼으며, 달항아리를 이렇게 상찬했다.

 “나는 아직 우리 항아리의 결점을 보지 못했다. 둥글다 해서 다 같지가 않다. 그 흰 빛깔이 모두 다르다. 단순한 원형이, 단순한 순백이, 그렇게 복잡하고, 그렇게 미묘하고 불가사의한 미를 발산할 수가 없다. …싸늘한 사기지만 살결에는 다사로운 온도가 있다. …내가 아름다움에 눈뜬 것은 우리 항아리에서 비롯되었다.”

김환기의 부인 김향안은 회고록『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에서 “수화가 사랑했던 것은 자기 팔로 안아서 한아름 되는 유백색 대호달항아리였다. …때로는 마당에 내다가 여섯 개의 각이 진 초석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다 뙤약볕을 피해서 그늘에 옮겨 놓고, 그 항아리들은 수화에게 있어서 살아 있는 생명체와도 같았다”고 기록해 놓았다. 김환기는“목화처럼 다사로운 백자, 두부살같이 보드라운 백자, 쑥떡 같은 구수한 백자”라면서 백자달항아리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자신의 작품에 그대로 구현했다. 형식이나 기법은 유화였지만 그가 담아낸 이미지나 내용은 한국의 전통, 한국의 정신이었다. 항아리, 여인, 나무와 해는 모두 한국적 정서, 한국의 이미지다.

김환기는 특히 최순우와 교유가 많았다. 백자달항아리에 대한 김환기 특유의 애정에 최순우가 한몫 한 것은 아닐까. 2011년 서울 성북 동 성북구립미술관에서‘그 시간을 걷다’라는 이름의 전시가 열린 적이 있다. 한국 근현대기, 서울 성북동 일대에 연고를 두고 창작혼을 불태웠던 문화예술인 16인의 흔적을 짚어 보는 전시였다. 문학 분야의 김광섭, 박태원, 이태준, 전광용, 조지훈, 한용운, 미술 분야의 권진규, 김기창, 김용준, 김환기, 박래현, 변종하, 송영수, 문화재 분야의 전형필, 최순우, 음악 분야의 윤이상. 이들의 초상사진과 다양한 관련 사진, 이들의 창작품과 친필 자료, 주고받은 편지, 영상물 등을 선보였다. 성북동 예인 16인의 낭만과 열정을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여기서 눈길을 끈 것이 최순우가 받은 엽서였다. 그런데 그 가운데 김환기가 파리에서 보낸 엽서가 가장 많았다. 지금도 많은 시인 묵객들이 백자와 함께 한다. 그리고 도처에서 수많은 도공들이 더 아름다운 백자를 위해 물레를 돌리고 있다.




백자 달항아리, 국보 310호,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백자 달항아리, 국보 310호,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백자 달항아리, 보물 143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자 달항아리, 보물 143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미술품 컬텍터인 이상준 호텔프리마 대표가 2007년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구입한 백자 달항아리


미술품 컬텍터인 이상준 호텔프리마 대표가 2007년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구입한 백자 달항아리




2007년 3월엔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백자달항아리 한 점이 127만 2000달러약 12억 원에 낙찰된 바 있다.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다가 경매에 내놓은 것이었다. 고가 미술품 구매자의 신원은 비밀에 부치는 것이 미술계의 관례였지만 이례적으로 구입자가 스스로 자신을 공개했다. 그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 호텔프리마의 이상준 대표이다. 낙찰 직후 서울로 들여와 호텔 로비에 전시를 했다가 지금은 자신의 집무실에 전시해 놓았다.

2005년 8월 15일 국립고궁박물관 개막 때 국내 최초로‘백자달항아리’전을 연 적이 있다. 당시 국내외에서 불러 모은 조선백자 9점이 전시되었는데, 국보 262호우학문화재단와 국보 309호삼성미술관 리움를 비롯해 보물로 지정된 달항아리 등과 영국 브리티시뮤지엄(일명 대영박물관) 소장품과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품을 선보였다.

특히 해외에 있는 달항아리들은 그 애틋한 사연으로 사람들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브리티시뮤지엄에 있는 백자달항아리는 원래 영국의 유명 도예가 버나드 리치(1887~1979)가 1935년 한국에서 구입한 것이다. 조선 도자기에 심취했던 그는 달항아리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가면서“나는 행복을 안고 갑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브리티시뮤지엄이 이 달항아리를 소장하게 된 것은 1997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컬렉터 가운데 한 사람인 한광호(전 한빛문화재단 명예이사장, 화정박물관 설립자)는 당시 브리티시뮤지엄에 100만 파운드를 기부했다. 브리티시뮤지엄은 그 돈으로 이 달항아리를 구입했고 이후 브리티시뮤지엄 한국실에 전시해 오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이어지고 있는 그 인연이 매우 흥미롭고 감동적이다.




재일동포 컬렉터 정조문이 1955년 일본 교토의 골동상에서 수집한 백자 달항아리. 교토 고려미술관 소장


재일동포 컬렉터 정조문이 1955년 일본 교토의 골동상에서 수집한 백자 달항아리. 교토 고려미술관 소장


산산조각 났다 완벽하게 복원된 백자 달항아리. 일본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소장


산산조각 났다 완벽하게 복원된 백자 달항아리. 일본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소장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엔 파란의 세월이 담겨 있다. 2005년 전시 당시 이토 이쿠타로(伊藤郁太郞)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장은 그 사연을 이렇게 소개했다.


그곳에 항아리가 있었다. 일본 나라(奈良)에 있는 화엄종 도다이지(東大寺)에는 17개소의 탑두(塔頭, 큰 사찰에 있는 사원)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관음원이다. 관음원 주지는 가미쓰카사 가이운(上司海雲) 스님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항아리 법사라 부르곤 했다. 스님이 자신의 거처가 있는 정원에 항아리를 가득 모아 놓았기 때문이다. 항아리 가운데에서 가이운 스님이 가장 아낀것은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였다. 이 항아리는 관음원의 응접실에서 가장 중요한 곳에 놓여 있었다.(…)

1995년 7월 4일 이 달항아리는 하나의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날 대낮 관음원에 한 남자가 침입하여 객실에서 그 항아리를 훔쳐 산문으로 도주하려 했던 것이다. 이를 알게 된 주지 스님은 큰 소리를 지르면서 그 남자를 뒤쫓으며 경비원에게 알려 도움을 요청하여 전후에서 포위하듯 남자를 잡으려 했다. 항아리를 갖고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한 남자는 갑자기 그것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힘껏 땅바닥에 내동댕이쳤고, 항아리는 무참하게 산산조각이 났다. 남자는 그대로 구름 속 안개처럼 사라져 도망쳐 버렸다.

주지 스님은 남은 도자기 조각을 고고학자의 도움을 받아 작은 가루까지 솔로 쓸어 봉투에 담았다. 커다란 도자기 조각은 신문지로 쌌다. 셀 수 있는 파편만 해도 300조각이 넘었다고 한다. 

경찰 조사가 끝난 후,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의 거듭되는 요청에 따라 이 항아리는 파편인 채로 미술관에 기증되었다. 거의 2년에 걸친 검토 결과, 이 항아리는 가능한 한 수리 복원하여 형태만이라도 남겨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전문가를 불러 상담하였으나 좀처럼 맡으려 하지 않았다. 장시간의 설득 끝에 마침내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보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 후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그 전문가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수리 방법에 대해 내 의견을 듣고 싶다고 했다. 현재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미술관으로 옮겨 온 달항아리를 복원 전문가는 커다란 포장용 상자에서 한 손으로 꺼내 전시대에 올리려고 했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항아리는 원래 모습으로 눈앞에 놓여 있었다. 300여 편으로 조각났던 항아리는 수리한 흔적이 없었다. 믿기 어려웠지만 정말 대부분이 완전한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었다.

게다가 복원 전문가의 놀라운 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까지가 수리 중간단계입니다. 앞으로 두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디서 어떻게 보더라도 파손된 것을 알 수 없도록 복원하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자세히 보면 복원 수리한 흔적을 알 수 있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양쪽 다 가능합니다만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하는 것이었다. 그 시점에서도 완전하다고 생각한 항아리 모습에서 더 이상을 바라는 것은 지나치다고 판단한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자세히 보면 복원 수리한 흔적을 알 수 있도록 두 번째 방법으로 부탁합니다.”

한 달 후 미술관으로 돌아온 달항아리는 전보다도 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야말로 기적적인 항아리의 소생이었다. 미술관에서는 복원 완성을 기념하여 이 항아리 특별전을 열고 시민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 2000년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전시하여 필립 드 몽트벨르 관장과 아시아미술부 특별고문 웬펑으로부터 한국 도자의 대표작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았다. 많은 관람객들로부터도 경탄과 찬사가 쏟아졌다.


우리네 백자달항아리는 이렇게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세계 곳곳에서 그윽한 한국미를 발산하고 있는 셈이다. 참 고마운 일이다.




이광표 프로필

작성자
이광표
작성일
2015-01-19
조회
16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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