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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칼럼

[월간 문화재] 대중문화 속 문화유산 - 민란의 시대에서 우리를 발견하다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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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의 시대에서
우리를 발견하다


영화 『군도』가 오늘날에 대해 말하는 것
 

영화 『군도』는 양반과 탐관오리들의 착취가 극에 달했던 조선 철종 때인 1862년 시작된 임술민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힘없는 백성의 편이 돼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는 의적 떼인 군도(群盜), 지리산 추설의 이야기다. 그로부터 약 160년이 지난 지금도 부정과 부패가 사라지지 않고 있는 만큼 이 영화는 시대를 넘어 오늘날 우리에게도 강한 메시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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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한 관료를 벌하는 의적단 ‘추설’.
추설의 조직적인 움직임은 “뭉치면 백성이요, 흩어지면 도적”이라는 구호를 반영하면서 사회적 약자가 연대할 때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다.
이미지 출처: 쇼박스(영화 『군도』 스틸 컷)


역사를 영화로 재현한다는 것

많은 영화가 역사의 다양한 지점들을 소재로 활용한다. ‘역사는 사실(fact)’이라는 관점을 택할 경우 영화라는 허구의 매체는 왜곡이라는 화두를 비켜 나갈 수 없다. 이로 인해 어떤 영화들은 비판받고 나아가서는 비난받기도 한다. 물론 영화가 역사를 소재로 삼을 때는 조심스럽게 살피며 다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어떤 경우에 역사란 무고한 이들의 아픔과 상처 그리고 피로 쌓아올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을 손쉽게 왜곡하는 영화가 있다면, 맹렬히 비판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 이전에 역사는 진정 변치 않는 사실이 맞는지, 역사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물어야 한다. 이것이 역사와 영화의 관계를 보다 명확하게 하는 방법이다.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현재’라는 개념을 유심히 봐야 한다. 현재는 언제인가? 바로 지금이다. 그런데 지금이라는 것을 명명하는 순간, 그 지금은 과거가 되고 새로운 지금이 도래한다. 이것은 현재의 운동성을 말해 준다. 즉 변화하는 현재와 고정된 과거가 대화를 나누는 것. 이것이 E. H. 카가 주장하는 역사다. 과거는 고정돼 있지만, 현재의 관점이 변함에 따라 과거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를 간명하게 요약하면 역사란 ‘변화’다. 변치 않는 사실이 아닌 것이다.

역사는 결국 관점의 역사다.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그 역사의 결들도 다르게 빛나는 것이다. 또한 역사라는 것은 한정된 시각과 언어로 표현되기에 수많은 여백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 여백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다. 상상이 없는 역사는 죽은 역사이기 때문이다. 단지 활자화된 역사서가 아닌, 그 순간에 존재한 수많은 이들의 들숨과 날숨을 상상해 봐야만 ‘지금의 역사’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상상의 방법론이라는 지점에서 영화와 역사가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스크린 위에 펼쳐진 진실한 허구들은 역사의 공백에 근거 있는 상상을 제공한다. 그리고 영화가 그려내는 상상들은 때론 무기력한 진실보다 더 강력하게 인간을 감응하게 한다. 영화 『군도』는 이 감응의 지점에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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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실록』.
『철종실록』에 임술민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발행한 『철종실록』의 영인 해제본으로 총 3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백성의 삶이 백성의 것이 되기 위해서

『군도』는 내레이션을 통해 “철종 13년인 1862년”이라는 역사적 기억을 상기시키며 시작된다. 흉년과 탐관오리들의 악행으로 인한 주검의 광경과 흙먼지로 둘러싸인 채 봉기하는 백성들의 모습이 충돌하며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1862년에 시작된 임술민란을 영화의 배경으로 떠올릴 수 있다. 임술민란은 농촌의 지식인과 농민들이 부패한 관료를 향해 일으킨 봉기로, 진주에서부터 시작되어 전라도·경상도·충청도 등지의 71개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군도』에서 등장하는 ‘지리산 추설’ 역시 이러한 봉기를 위한 집단이다.

추설의 활약상은 유쾌하고 통쾌하다. 이들은 탐욕에 가득 차 끝없이 자신의 배를 불리기에만 급급한 나주 목사 최현기를 벌한다. 물욕에 눈멀어 오합지졸이 된 관료나 포졸들과 달리 추설은 치밀한 전략을 통해 실수 하나 없이 응징을 진행한다. 이 응징의 과정에서 각각의 인물들은 확고한 개성을 드러내면서 현란한 액션을 구현한다. 추설의 조직적인 움직임은 “뭉치면 백성이요, 흩어지면 도적”이라는 구호를 반영한다. 사회적 약자일지라도 함께 연대한다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 주는 것이다.

이 희망은 호쾌한 질주로 이어진다. 추설의 조직원들이 말을 타고 벌판을 누비는 모습은 마치 1960년대 이탈리아의 서부극인 ‘스파게티 웨스턴’의 장면들을 떠올리게 한다. 기존의 미국 서부극이 문명과 야만이라는 뚜렷한 구도를 통해 문명화의 메시지를 던졌다면, 스파게티 웨스턴은 무법자들의 폭력과 암투에 초점을 맞춘다. 『군도』는 이와 같은 장르적 특성을 차용한다. 이를 통해 부패한 관료의 악행을 벌하는 엄숙주의를 벗어나 인물들의 악동 같은 짓궂음과 친근함을 부각하며 관객의 웃음을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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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으로부터 탄압받는 백성들.
『군도』는 명확하게 백성의 편이다. 물론 조윤이라는 캐릭터 역시 ‘절대악’으로 묘사되지는 않기에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카메라는 언제나 백성의 편에 더 가까이 있다.
이미지 출처: 쇼박스(영화 『군도』 스틸 컷)


하지만 계속해서 웃기만 할 수는 없다. 혼자서 무관 10명은 거뜬히 해치울 정도로 뛰어난 무예를 갖춘 데다 간악한 욕망까지 지닌 조윤이 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는 구휼미를 되갚지 못하는 백성들을 상대로 하여 그들의 토지문서를 담보로 잡고 쌀을 빌려준다. 문맹인 백성들은 차용증서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도 모르고 이내 자신들의 땅을 모조리 조윤에게 빼앗기게 된다. 이를 통해 조윤은 ‘땅귀신’이라 불리는 대지주로 거듭나고, 빚을 갚지 못하는 백성들을 노예로 부린다. 이 과정 중에 나주 관료들은 조윤에게 힘을 보태고 물질적 보상을 받는다. 그들은 아마 백성을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듯싶다. 지나친 물욕이 인간성을 상실케 한 것이다.

관객은 이제 추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난국을 헤치고 백성들의 땅과 쌀을 돌려주리라고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조윤은 만만치 않은 상대다. 상당한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 추설의 계획은 매우 치밀했으나 조윤은 그 이상으로 영민했고 무예도 출중했다. 결국 추설의 주요 구성원들 상당수가 목숨을 잃게 되고, 지리산 깊숙이 은폐돼 있던 그들의 본거지마저 들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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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관오리의 쌀과 재물을 백성에 돌려주는 추설.
관객은 이제 추설에게 의지하게 된다. 그들이 이러한 난국을 헤치고 백성들의 땅과 쌀을 돌려주리라고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쇼박스(영화 『군도』 스틸 컷)


나, 너 그리고 우리라는 추설

임술민란은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가지면서도 결과적으로는 농민들의 요구가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다. 『군도』 역시 조윤의 죽음 뒤에 또 다른 추설의 등장을 예고하면서 막을 내리지만, 그 이후의 결과들을 설명해 주지 않는다. 확고한 결과가 없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낄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

역사를 인과의 관계로 바라보면 농민의 봉기에 허무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이 역사는 현재와의 대화이자 변화다. 역사는 끝난 것이 아니라 항상 변화의 과정 중에 있는 것이다. 『군도』는 활자화된 농민봉기에 듬성듬성 나 있는 여백들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는다. 그 상상은 이미지화돼 스크린 위에 현장감 있게 펼쳐진다. 현장감은 허구에 진실성을 부여한다. 우리는 『군도』를 보며 관료와 대지주의 편에 서게 되는가, 아니면 추설과 백성의 편에 서게 되는가? 또한 영화가 재현하는 농민봉기의 과정을 긍정하게 되는가, 부정하게 되는가?

『군도』는 명확하게 백성의 편이다. 물론 조윤이라는 캐릭터 역시 ‘절대악’으로 묘사되지는 않기에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지만, 카메라는 언제나 백성의 편에 더 가까이 있다. 그들이 승리할 때 카메라의 시선은 뜨거워지고, 그들이 패배하면 시선이 서늘해진다. 이 시선은 카메라의 것인 동시에 관객의 것이다. 『군도』의 시선이 관객의 것이라면, 이 영화는 관객이 사는 동시대와 접속한다. 이에 관객은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과거와 대화를 나눠야만 한다. 대화가 꼭 언어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추설의 기막힌 작전을 보며 웃고 즐기고, 백성의 아픔을 보며 가슴을 졸인다면 그것 역시 감성으로 대화한 것이다.

『군도』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안의 추설과 백성들이 진지한 정의의 사도라서가 아니다. 그들 역시 우리처럼 서툴고 부족한 면을 지닌 한낱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도』는 백성들의 얼굴을 하정우·마동석·조진웅 등 스타들의 얼굴로 치환함으로써 이름도 없이 천시받았던 백정이나 노비와 같은 인간들에게 의미 있는 이름과 역할을 부여한다. 즉 영화라는 시공간을 통해 당대에 소외됐던 소수자들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백정·노비·승려·관료·지주 모두 다 같은 인간이다. 또 그렇다고 해서 다 같지만은 않은 개별적인 존재다. 결국 『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란도 액션도 아닌 인간의 존엄성이다. 우리는 서로를 ‘같고 또 다른 인간’으로 존중해야 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여길 수 있어야만 그 다음을 생각할 수 있다. 추설이 살아가는 방식은 그러했다. 그들이 봉기했던 이유 역시 인간이 인간을 짓밟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도처에 잠재적인 추설들이 부정과 부패를 지켜보고 있다. 그들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다. 나, 너 그리고 우리가 돼야 한다.



월간문화재_문화유산채널뉴스_라인(수정)
월간 문화재  2018. 06+07. 제388호
<대중문화 속 문화유산>

글. 김태환. 영화평론가.



 

작성자
김태영
작성일
2018-07-04
조회
3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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