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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칼럼

[월간 문화재] 궁중여인열전 - 조선시대 공주의 삶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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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공주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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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옷.
조선왕조 때 공주ㆍ옹주가 입던 대례복(大禮服)
소장처: 국립민속박물관

 
공주는 누구일까?

한국여성들이라면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 부러워했을 공주라는 말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용되었다. 호동왕자를 사랑한 낙랑공주, 온달(溫達)에게 시집간 평강공주, 「서동요」의 주인공 선화공주 등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공주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공주는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인 국왕과 그 부인인 왕비 사이에서 난 딸을 말한다.

제도적으로 공주는 고려 문종 때의 관제에 따르면 대장공주와 함께 정1품이었다. 그 뒤 공양왕 때 도평의사사의 건의에 따라 국왕의 딸을 공주라 불렀으나, 조선 건국 초기에는 국왕의 딸과 후궁을 모두 궁주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태종대에 후궁과 국왕의 딸을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면서 국왕의 딸을 공주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서얼차별법이 생김에 따라 국왕의 딸에게도 적서의 차별이 적용되었다. 그 결과 왕비 소생인 적녀는 공주, 후궁 소생인 서녀는 옹주라 부르게 되었다.

공주는 왕과 왕비, 대군 등과 같이 지존의 신분으로서 품계를 초월한 무품(無品)이었다. 얼핏 생각하면 내명부에 속할 것 같지만 궁중에서 자란 뒤에 궁 밖으로 시집을 가기 때문에 외명부에 속했다.

조선시대 국왕에게는 공주가 없이 옹주만 있는 왕도 있었고, 아예 딸이 없는 왕도 있었다. 그 중 각 왕대 공주들을 보면 위와 같다.


월간문화재_문화유산채널뉴스_공주의삶_공주들

공주의 혼례와 상례

공주는 대부분 12~15세 전후에 결혼을 했다. 남편과 나이 차이는 동갑이거나 남편이 한두 살 연상이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공주가 연상일 때도 있었다. 혼인의 모든 절차와 준비는 종부시에서 주관해 국법에 따라 예로써 치렀다. 공주는 신분이 낮은 양반가의 아들과 혼인을 했기 때문에 ‘하가(下嫁)’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예컨대, 순조의 맏딸 명온공주는 7세에 공주에 책봉되었고, 14세에 김현근과 결혼했다.

명온공주의 가례 절차는 <국조오례의>의 ‘왕녀하가의(王女下嫁儀)’에 따라 진행되었는데 부마는 간택의 절차를 통해 선발되었다. 가례 절차로는 납채, 납폐, 친영, 동뢰연을 행했고, 가례 이후에는 공주가 시부모를 뵙는 공주현구고(公主見舅姑), 공주가 시댁의 사당에 절하는 공주현사당(公主見祠堂), 사위가 아침에 부모를 뵙는 서조현(壻朝見) 등의 예를 행했다.

명온공주의 가례가 진행되는 동안 순조는 행사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는 부마가와 대등한 위치에서 가례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명온공주의 가례는 종친 완성군이 주혼자가 되어 진행했다. 부마는 별도로 궁궐을 방문하여 처부모인 왕과 왕비를 비롯한 왕실 가족들에게 깍듯한 예를 올렸다. 명온공주는 가례를 통해 김현근의 부인이자 부마 집안의 며느리가 되었다. 공주도 여느 며느리와 마찬가지로 남편과 시부모에 대한 예를 갖추어야 했다.

공주가 죽으면 국가에서는 왕녀의 상장(喪葬)제도에 따라 염빈(斂殯)·예장(禮葬)·조묘(造墓)의 3도감을 설치하고 3일간 조회를 열지 않았다. 또 왕 이하 궁인들은 고기를 먹지 않는 등 정중한 예우를 표하였다.


월간문화재_문화유산채널뉴스_공주의삶_정소공주 태항아리
정소공주 태항아리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공주의 생활

공주는 왕실 가족으로 내명부·외명부와 함께 궁중의 잔치, 왕비의 시위(侍衛), 혼인 및 초상 등 여러 행사에 참석하였다. 「경국대전」에는 공주의 집이 50칸을 넘지 못하도록 정해져 있지만 대체로 공주의 집은 이 보다 훨씬 커서 수백 칸이 넘는 경우도 있었다.

공주들은 재가나 개가를 할 수 없었지만 대부분 당시 일반 여성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하고 호화로운 삶을 살았다. 공주라는 신분 덕분에 늘 엄청난 특권과 경제적 혜택을 누렸으며, 웬만한 잘못을 저질러도 반역이나 불충에 해당되지 않으면 거의 벌을 받지 않았다. 세종의 둘째딸 정의공주는 14세에 안맹담과 결혼하여 20~30년간 세종의 태평시대를 평탄하게 지내고, 문종 단종대를 거쳐 세조대에는 왕의 누님으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공주라 할지라도 남편 집안의 정치적 입지나 친정의 처지에 따라 삶이 크게 좌우되었다. 시아버지나 남편, 또는 시가의 정치적인 이유로 가문이 몰락할 경우에도 공주들은 대체로 신분 보장을 받았지만, 왕권다툼이나, 부왕이 폐위될 경우에는 힘들었다.

예컨대 태조와 신덕왕후 강씨 사이에서 태어난 경순공주는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이방원에게 남편 이제와 방번·방석 등 두 남동생이 죽임을 당하자,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문종의 딸인 경혜공주는 동생 단종이 세조에 의해 쫓겨난 뒤 남편은 사약을 받아 죽고, 본인은 순천의 관노비가 되었다.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는 연산군이 폐위되자 시아버지로부터 이혼을 당하였다.

또 공주들도 남편의 축첩에 마음 아파하고 무관심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사는 일도 많았다. 태종의 딸 정선공주는 남휘와 결혼했는데 남편이 다른 사람의 첩을 빼앗아 첩으로 삼는 바람에 맘고생을 하였다. 남편과 사이가 별로 안 좋았던지 남휘는 그녀가 죽은 뒤에도 눈물조차 흘리지 않아 탄핵을 당했다. 그래도 반성하지 않자 세종은 그를 유배시켜 버렸다.



월간문화재_문화유산채널뉴스_공주의삶_숙명공주 왕실 한글편지 모음

숙명공주 왕실 한글편지 모음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드라마 <화정>으로 잘 알려진 정명공주

정명공주는 선조·광해군·인조·효종·현종·숙종 등 6명의 조선 국왕과 시대를 함께 하며 83세까지 장수한 선조의 유일한 적녀이다. 임진왜란 직후에 태어나 계축옥사,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두 번의 예송논쟁, 경신대기근 등 역사의 굴곡을 직접 겪기도 하고 거쳐 가기도 했다. 광해군대에는 어머니 인목대비와 함께 지금의 덕수궁인 서궁에 유폐되어 죽은 듯이 살아야 했고, 인목대비가 죽은 후에는 인조를 저주하는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핍박을 받기도 했으며, 이후 죽기까지 효종, 현종, 숙종대에는 종친으로서 최고의 예우를 받으며 호사로운 삶을 살았다.

그녀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를 보면, 그녀는 아들이기를 바라는 선조와 딸이기를 바라는 세자 광해군측의 엇갈린 기대 속에서 태어났다. 「계축일기」의 ‘왕자에 대한 기대가 컸던지 소식이 잘못 전달되어 대군 아기씨가 태어났다고 전해졌다. 실망한 광해군의 장인은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시 공주마마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그제야 반색하며 축하 예물을 올렸다. 얼마나 왕비 마마를 미워했으면 그렇게 했을까.’ 라는 내용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서인, 남인, 북인의 당쟁이 치열해지는 상황 속에서 탄생했다.

16세 때 어머니 인목대비가 ‘서궁’으로 격하되어 경운궁에 유폐될 때 그녀는 옹주로 강등되어 함께 서궁에서 5년 동안 불운한 생활을 했다. 그녀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한석봉의 필법을 수련하는데 정진했고, 서궁에 유폐된 동안 <화정(華政)>을 비롯한 많은 서예 작품을 썼다. 정명공주는 역경 속에서 조선 최고의 여류 서예 작가가 된 셈이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하자 예조에서는 정명공주의 혼인을 서둘렀다. 21세의 정명공주가 아직 혼인을 못했기 때문에 부마 간택을 서둘러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랑감이 많지 않았다. 기한이 다 되도록 부마 단자(單子)를 올린 사람은 아홉 명밖에 되지 않았다. 부마가 될 만한 남자들은 이미 대부분 혼인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부마 단자 접수 기간을 늦추고, 나이도 낮추고 하여 간택한 사람이 3살 아래인 18세의 홍주원이다. 그와 사이에 7남 1녀를 두었는데 이는 조선의 공주 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자녀를 둔 경우로, 자손들도 크게 영달하였다.



월간문화재_문화유산채널뉴스_공주의삶_덕온공주당의

덕온공주당의
이미지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소장처: 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박물관


순조의 딸 덕온공주와 유품

덕온공주는 순조 22년(1822) 6월 10일에 탄생하여, 8세에 덕온공주의 작위를 받고, 헌종 3년(1837) 16세가 되던 해 남녕위 윤의선에게 하가하였다. 헌종 10년(1844) 5월 24일에 헌종의 계비 간택이 있었다. 덕온공주는 둘째 아기를 잉태하여 몸이 무거운데도 불구하고 창경궁 통명전에 참석하여 식사를 같이 했는데 그때 먹은 것이 급체하였다. 죽기 전에 아기는 낳았으나 아기도 곧 죽고, 공주도 세상을 떴다고 한다. 남편 윤의선은 재취를 못하였기 때문에 윤두수의 11대손인 윤용구를 장자로 입양하였다.

윤용구가에서는 덕온공주가 생전에 사용했던 유품들을 보관해 왔는데, 현재는 자라줌치노리개 1점, 댕기 4점 등 총 6건 33점이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월간문화재_문화유산채널뉴스_공주의삶_덕온공주유물

덕온공주유물
이미지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소장처: 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박물관



재혼이 금지된 공주의 남편, 부마(위)

공주의 남편은 부마(駙馬) 또는 의빈(儀賓), ‘ㅇㅇ위(尉)’라고 불렸다. 태조, 태종대의 부마들은 군(君)의 칭호를 사용했지만 세종대부터 ‘군’대신 ‘위’로 칭했다. 부마는 대체로 좋은 인품을 지닌 명문가의 자제로 10대의 어린나이에 간택을 통해 선발되었다. 이들은 의빈부라는 관서에 소속되었으며, 첫 벼슬로 종1품의 매우 높은 벼슬과 그에 해당하는 녹봉을 받았다. 부마가 죽은 뒤에도 공주는 계속 쌀·콩·보리 등을 봄과 가을에 받았다.

부마들은 조선 초기 태종의 부마 조대림이 중군총제가 되는 등 관직을 제수 받은 경우도 있었지만 세조대를 기점으로 국정운영과정에 참여하거나 행정관리가 될 수 없었다. 다만 왕실 가족으로 왕실의 예식이나 외교적인 관례에 참석하며, 왕실의 안정을 돕기 위한 울타리 역할을 하였다.

부마들은 양반들과 달리 부인이 죽어도 재혼이 금지되었다. 부마 중에는 부인이 죽자 재혼을 승인해 달라는 상소를 올린 이도 있었는데 한 번도 승낙된 적은 없었다. 세조의 부마 정현조는 의숙공주가 죽자 사족인 이씨를 재취하였는데, 이씨는 적실로 인정받지 못하고 첩실이 되었다. 그녀가 낳은 자식들도 모두 서자로 처리되어 오랫동안 후손들의 신분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렇듯 부마들은 운신의 폭이 좁았지만 왕실과 사돈을 맺으면 권력이나 재력을 얻는 등 이익이 많았기 때문에 줄을 대서라도 아들을 부마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부마들은 아버지와 형제들의 출세를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했으나 공주의 남편, 왕의 사위라는 점 때문에 정변이 발생할 경우 불행을 당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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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화재  2015. 12+2016. 01. 제373호
<궁중여인열전>

글. 한희숙.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작성자
김태영
작성일
2018-06-27
조회
4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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