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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칼럼

[월간 문화재] 궁중여인열전 - 조선시대 왕비의 삶 스크랩

월간 문화재-문화유산채널뉴스-타이틀


조선시대
왕비의 삶
 
 

왕비는 어느 가문에서 배출되었나?

왕비는 왕의 처이며, 국모를 지칭하는 호칭이다. 대부분의 왕비는 계비를 제외하면 어려서 세자빈이나 대군의 부인이 되었다가 남편이 왕이 됨으로써 왕비가 되었다. 조선이 개국되고 ‘예무이적(禮無二嫡)’ 즉 ‘예에는 두 정처가 없다’는 주자성리학에 입각하여 왕이 둘이 있을 수 없듯이 왕비도 한 명밖에 두지 않았다. 왕비가 돌아갔을 경우에만 다시 계비를 맞을 수 있는 일부일처제가 정립되었다. 이에 왕비의 지위가 다처적 경향을 보였던 고려시대에 비해 올라가게 되고 후궁과 큰 차이를 보였다.

조선시대의 왕비는 연산군, 광해군 등 폐위된 왕과 덕종, 진종 등 추존된 왕들의 왕비, 폐비까지 포함하면 47명이었다. 이들의 가문을 살펴보면 ①청주 한씨 5명씩 ②여흥 민씨, 파평 윤씨 각 4명씩 ③안동 김씨, 청송 심씨, 경주 김씨 각 3명씩 ④청풍 김씨, 거창 신씨, 반남 박씨, 풍양 조씨 각 2명씩 ⑤안변 한씨, 곡산 강씨, 안동 권씨, 문화 유씨, 연안 김씨, 능성 구씨, 여산 송씨, 양주 조씨, 덕수 장씨, 함종 어씨, 달성 서씨, 남양 홍씨, 광산 김씨, 인동 장씨, 풍산 홍씨, 함안 윤씨, 해평 윤씨 각 1명씩이다. 많은 가문에서 왕비가 배출되었다.



월간문화재-문화유산채널뉴스-왕비의삶-열조현후도

어질고 현숙한 왕비들. 열조현후도列朝賢后圖. 첫번째.
중국의 어질고 현숙하기로 이름난 왕비들의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왕실에서 종종 이와같이 본받을 만한 왕비들의 그림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화첩은 두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화첩은 첫번째 그림으로 송나라 태조의 어머니 황태후 두씨가 아들 태조에게 백성을 위한 정치의 중요성에 대해 일깨워 주고 있는 장면이다.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최고의 자리, 왕비는 어떻게 되는가?

조선시대 왕비는 엄격한 심사과정인 삼간택을 통해 최종 결정된 뒤 육례(六禮)라는 복잡한 절차로 이루어진 가례(嘉禮)를 올림으로써 국모라는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실제 계비 간택을 제외한 왕비 간택은 단종, 헌종, 철종, 고종의 비 경우이고, 가장 정형적인 것은 먼저 세자빈에 간택된 뒤 세자가 왕위를 계승하면 왕비에 책봉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택군(擇君), 반정 및 정치적 요인에 의해 남편이 왕이 되어 종친 부인에서 왕비로 책봉되는 경우도 있었다.

간택은 왕실에서 혼례를 치르기 위해 후보자들을 궐내에 모아 놓고 왕 이하 왕실 어른들이 직접 보고 선발하는 절차였다. 먼저 예조에서 전국에 금혼령을 선포하면 처자를 둔 양반 집안에서는 조정에 처자단자(處子單子)를 자진 신고해야 했다. 단자의 형식은 첫줄에 후보자들의 성씨, 나이, 사주와 본관을 적었고, 둘째 줄에는 4조(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의 성명과 이력을 차례로 적었다. 간택 대상이 되는 처자의 금혼 연령은 대략 7세~30세까지였고, 실제 가례시 평균 연령은 국왕이 13세 전후, 왕비는 12세 전후였다.

간택은 세차례 즉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을 거쳤다. 초간택 후보자로 대략 30명 정도를 뽑고, 재간택에서 5~7명, 삼간택에서 3명 정도를 뽑았다. 간택 때에는 참석한 처자들의 행동거지를 살펴보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처자들의 밥상머리 예절이었다. 최종 한 사람을 뽑으면 금혼령을 풀었다.

삼간택에서 왕비나 세자빈으로 뽑힌 규수는 친영 때까지 별궁에 머물면서 왕실의 법도와 예절을 배웠다. 그 교육은 어린 신부에게 매우 엄하고도 힘든 것이었다. 또한 별궁에서 가례의 육례 가운데 동뢰연(同牢宴)을 제외한 수납채(受納采), 수납징(受納徵), 수고기(受告期), 수책비(受冊妃), 친영의(親迎儀) 등을 행하였다. 가례 때 친영행렬 모습은 반차도에 자세히 담겨있다. 반차도는 당시 결혼식 현장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최고의 기록 문화이다.



월간문화재-문화유산채널뉴스-왕비의삶-열조현후도2

어질고 현숙한 왕비들. 열조현후도列朝賢后圖. 두번째.
중국의 어질고 현숙하기로 이름난 왕비들의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왕실에서 종종 이와같이 본받을 만한 왕비들의 그림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 화첩은 두번째 그림으로 송나라 영종의 황후 고씨가 문병을 온 신하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소장처: 국립중앙박물관


왕비의 삶 엿보기

*내명부 관리: 왕비는 내전·중전 등으로 불리는 국모로, 궁중 여성들의 조직인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위로는 왕실 어른들을 섬기고 아래로는 내명부의 여성들을 지도하여 왕실의 권위를 지키고 궁중의 질서를 확립해야 했다. 내명부는 품계를 받은 궁중 여성들의 조직으로 후궁들과 궁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외명부의 모범이 되어야 했다. 외명부는 종9품부터 정1품까지 왕의 유모, 왕비의 어머니, 왕녀와 왕세자녀, 종친의 처와 문무백관의 처 등을 말한다. 왕비는 내명부를 초월하는 존재로 품계가 없었다. 왕비와 세자빈, 후궁들은 궁궐 내의 엄격한 위계질서 아래 있었으며 각각의 지위에 따라 요구되는 역할도 다르고 의식주 생활에 다 차등이 있었다. 왕비는 왕실 여성들의 질서를 위해 이를 관리, 감독하는 임무와 권력을 지녔다.

*아들 출산: 왕비에게 무엇보다 요구된 것은 대통 승계를 위한 아들을 낳는 일이었다. 대통승계가 가장 중요했던 만큼 왕비의 임신과 출산은 왕실의 최대 경사였다. 왕비가 임신 7개월에 이르면 산실청이 설치됐다. 출산을 주관하는 권초관은 정2품 이상 관직자 중에서 선발될 정도로 출산에 국가적인 관심이 쏟아졌다. 하지만 출산 이후 육아에서는 왕비 역할이 그리 크지 않았다. 유모와 보모가 육아를 전담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비의 출산력은 떨어지고, 방계 또는 후궁 소생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비가 아들을 낳지 못했다고 하여 쫓겨나지는 않았으며, 죽은 후에는 종묘에 모셔졌다.




월간문화재-문화유산채널뉴스-왕비의삶-경복궁 교태전 화계
경복궁 아미산 굴뚝.
경복궁 교태전 뒷편에 조성된 아미산 굴뚝은 교태전 온돌방 밑을 통과하여 연기가 나가는 굴뚝이다. 굴뚝 벽에는 덩굴무늬, 학, 박쥐, 봉황 등의 무늬를 조화롭게 배치하였고, 주변에는 화계를 조성하여 아름답게 꾸몄다. 
이미지 출처: 문화재청


*왕실 내전 행사·잔치 주관: 왕비는 궁궐 내전의 여러 행사를 주관하였다. 왕비의 큰 덕목 중의 하나는 내전의 크고 작은 잔치를 베풀고 행사를 주관하는 것이었다. 매년 왕이 외전에서 문무백관의 조하를 받고 잔치를 하듯이 왕비도 내전에서 정월초하루와 동지, 탄신일에 내·외명부의 조하를 받고 잔치를 베풀었다. 또 세자 책봉이나 혼인 등 큰 행사 후에도 내·외명부의 축하를 받고 잔치를 열었다. 단오, 추석 등 특별한 날에도 잔치를 하였다. 때로 흉년이 들면 왕실 가족이나 종친, 공신 등만 참여하는 작은 곡연을 했다. 또 풍정이라 하여 대비를 위해 잔치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노인을 공경하는 뜻에서 여자 노인들에게 양로연을 베풀었다. 양로연은 귀천을 따지지 않고 노인을 공경하는 행사여서 천인들도 참여하였다.

*친잠례: 국왕이 친경(親耕)을 하듯이 왕비는 궁궐 내에 잠실을 설치하여 친잠례를 행하였다. 백성의 근본은 의식(衣食)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의식의 근원은 농상(農桑)이라고 여겼다. 농상은 식량과 의복을 넉넉히 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여 왕과 왕비가 모범을 보이기 위해 각각 친경과 친잠을 하였다. 세종 5년(1423) 기록에 의하면 경복궁에 뽕나무가 15,090주, 창덕궁에 1,000여 주가 있었다. 세종대 소헌왕후와 대비인 원경왕후가 친잠하였다는 기록은 있지만 구체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성종대 의례가 정립되었고, 성종 8년(1477) 3월에 창덕궁 후원에 채상단을 쌓고 왕비(폐비윤씨)가 외명부를 거느리고 친잠을 하였다, 친잠 후에는 내·외명부의 의례를 받고 수고를 치하하며 잔치를 열고 음식이나 물품을 내렸다. 매년 행해진 것은 아니었고 조선 왕조 말기까지 성종 계비 정현왕후 윤씨, 영조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순종 계비 순종효왕후 윤씨 등을 비롯한 몇 분의 왕비가 친잠례를 행하였다.




월간문화재-문화유산채널뉴스-왕비의삶-경복궁 교태전
경복궁 교태전.
왕비가 거처하였던 침전으로 중궁 또는 중전으로 불렀다.
이미지 출처: 문화재청



*제사: 조선 전기에는 왕비나 대비가 왕의 관을 모신 빈전(殯殿)이나 혼전(魂殿)에 드물게 제사를 지냈다. 조선 후기에는 망곡례(望哭禮)라는 의례를 통해 왕실 여성들이 혼전 의례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숙종대에는 왕비와 세자빈이 왕실혼례를 마친 후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가 모셔진 종묘를 알현하는 묘현례를 하였다.

*저술: 왕비들도 여가를 이용하여 책을 읽거나 수를 놓거나 글씨를 쓰는 등 취미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들이 남겨 놓은 작품은 편지글 몇 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그러나 아주 드문 경우지만 저술도 하였다. 소혜왕후 한씨는 『내훈』을 만들었고, 혜경궁 한씨는 『한중록』을 남겼다.



월간문화재-문화유산채널뉴스-왕비의삶-경복궁 교태전 내부
경복궁 교태전 내부.
이미지 출처: 문화재청



폐출될 수도,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왕비들의 궁궐 내 삶은 평탄치만은 않고 고단하고 위험하기조차 하였다. 엄격한 상하 위계질서 속에서 왕비는 왕과 왕실 어른에 대한 순종과 인내, 아랫사람에 대한 투기 금지와 내치(內治)의 실현이라는 유교적 덕목을 종신토록 잘 지켜야 했다.

왕비는 간택에서부터 의식주 생활의 세세한 부분까지 궁궐의 엄격한 예의와 법도를 따라 모범을 보여야 했다. 궁중 생활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인내가 요구되었다. 외척을 척결한다고 하여 친정 집안이 화를 당하기도 하고,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불행한 삶을 보내기도 하였다. 남편인 왕에 의해 태종비 원경왕후는 동생들이, 세종비 소헌왕후는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다. 또 폐비, 폐출 그리고 다시 복위를 겪는 등 기구한 삶을 산 왕비들도 있었다.

남편을 잘못 만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왕비들은 왕에게 버림받고 이혼당한 경우거나, 아니면 반정으로 쫓겨난 왕의 부인으로서 강제로 폐비된 경우이다.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는 심지어 죽임을 당했고, 중종의 첫 번째 부인 단경왕후 신씨는 중종반정으로 남편과 생이별을 당했으며, 숙종의 두 번째 부인 인현왕후 민씨는 폐위되었다가 다시 복위되었다. 반면에 연산군의 부인 신씨와 광해군의 부인 유씨는 남편이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남으로써 폐비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왕비가 되었거나 바로 왕비나 계비로 간택되었거나 아님 종친의 부인으로 살다가 왕비가 되었거나 왕비는 나라 안의 모든 여성을 대표하는 국모로서, 왕실의 안주인으로서 최고의 부귀와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그 이면을 보면 왕실 질서와 안녕을 위해 그 누구보다 인고의 세월을 참고 살아내야 했던 여성들이었다.




월간문화재-문화유산채널뉴스-라인(수정)
월간 문화재  2015. 10+11. 제372호 
<궁중여인열전>

글. 한희숙.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작성자
김태영
작성일
2018-06-20
조회
4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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