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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칼럼

백제의 멸망을 지켜본 부여 주암리 은행나무 스크랩



 천연기념물 제320호, 부여 주암리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20, 부여 주암리 은행나무


1982.11.04 지정, 충남 부여군 내산면 주암리 148-3




우리나라에는 기념물이나 보호수로 보호 받고 있는 은행나무 고목이 8백여 그루에 이른다. 중국에서 들어왔으므로 모두 사람이 일부러 심은 나무들이다. 그래서 은행나무 고목은 나무마다 갖가지 사연을 갖고 있다. 아득히 백제 때 지체 높은 정승이 심었다고 알려진 부여의 은행나무 한 그루를 찾아가 본다.


공주-서천 고속도로 서부여IC에서 내려 보령으로 넘어가는 40번 국도를 잠시 달려가면, 20여 호 남짓한 전형적인 시골마을의 북쪽 끝자락에 마을을 보호 해주듯 감싸고 있는 은행나무 한 그루와 마주 할 수 있다.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의 주암리 은행나무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의 주암리 은행나무




나무는 나지막한 야산이 말굽모양으로 둘러 싼 남쪽 입구의 확 터인 넓은 공간에 자리 잡았다. 23m에 가슴높이 둘레 8.6m로서 장정 여섯 사람이 팔을 펼쳐야 안을 수 있는 굵기다. 가지 펼침은 동서 19m 남북 30m이며 남북이 긴 타원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숫자로 나타낸 규모는 이렇지만 실제 나무를 보면 거대하고 웅장함 보다는 갓 이발을 끝낸 것 마냥 껑충해 보인다. 사실 이발한 지가 얼마 안 됐다. 2000년대 초 전 알 수 없는 원인으로 급격히 생장이 나빠지자 모양보다는 나무를 살리기 위해 온통 가지를 잘라내 버렸다. 1916년 일제강점기에 조사한 자료를 보면 키가 34m나 되고, 광복이후 사진에도 가지 뻗음이 왕성하여 줄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은행나무는 고목이라도 일단 회복단계에 들어서면 복원은 굉장히 빠르다. 앞으로 10여년을 더 기다리면 아름다운 옛 모습을 거의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한층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겨울 은행나무


한층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겨울 은행나무




초여름의 주암리 은행나무


초여름의 주암리 은행나무




이 은행나무는 백제 성왕 16(538) 사비천도를 전후하여 좌평(佐平) 맹씨(孟氏)가 심었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따라서 나무의 나이는 15백년이 되는 셈이다. 이는 우리나라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중에는 가장 나이가 많다. 물론 지금의 나무 규모로 봐서는 그때 그 나무라고 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그러나 유난히 생명력이 강한 은행나무는 일부러 뿌리까지 캐내버리지 않은 이상 줄기가 죽어도 옆에서 새싹이 나와 어미를 대신한다. 좌평은 백제의 벼슬 등급을 나타내는 16관등(官等) 중 제1품으로서, 오늘날의 국무총리나 장관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이렇게 신분이 높은 관리가 심었다는 것은 이 일대가 당시로서는 역사적, 군사적인 의미가 있었던 곳으로 짐작된다. 여기서 남쪽으로는 좀 떨어져서 금강하구를 내려다보는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에는 건지산성(乾芝山城)이 있고, 북동 쪽 부여 가까이에는 임천면 군사리와 장암면에 걸쳐서 성흥산성이 있다. 모두 백제의 산성이다. 또 은행나무의 뒷산은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축륭봉(455m)이다. 일대는 부여에서 금강하구로 이어지는 기름진 땅을 지킬 수 있는 요충지로서 부족함이 없다.


오늘날 이 은행나무의 자람 터는 언제 찾아가도 한적하다. 잠시 눈을 감고 천오백년의 세월을 건너 띄어 본다. 마을 앞으로 펼쳐진 넓은 들에서 풍족한 수확물은 거둬들여 평화롭게 살아갔을 당시가 눈에 선히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6606월 당나라 소정방의 13만 군대는 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노도와 같이 의자왕이 있던 부여로 몰려갔을 것이다. 712일 사비성이 함락되고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나라가 멸망하면서 마을 사람들이 겪었을 처참한 고통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사라져 버린 비운의 고대 왕국 백제의 원혼들이 은행나무에 서려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잠시 숙연해 지기도 한다.


지나온 세월의 길이만큼이나 이 나무에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우선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이를 미리 알려주는 영험이 있다고 한다. 옛날 백제와 신라 및 고려가 망할 때는 물론 근세의 조선이 일제에 침략당하여 망할 때도 칡넝쿨이 은행나무를 감고 올라가서 나라의 멸망을 미리 알려 주었다는 것이다. 또 고려 말에는 산 넘어 은산면 각대리에 있던 숭각사 주지가 암자를 중수할 때 대들보로 쓰려고 은행나무 큰 가지 하나를 베어 가다가 돌연사를 했고 절도 망하여 폐허가 되었다고도 한다. 1894년에는 동편으로 뻗은 큰 가지가 부러진 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1906년에는 서쪽가지가 부러진 후에는 의병이 봉기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람의 일 만이 아니고 가축에게도 영험이 있는 나무였다. 1910년 소 돌림병으로 소들이 떼죽음을 당할 때도 이 마을은 무사하여 인근 마을에서 소떼를 몰고 와 은행나무를 한 바퀴 도는 행렬이 이어졌다고 한다. 조금 허풍이 느껴지지만 그 만큼 사람들이 소중하게 생각하여 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매년 음력 12일에는 마을사람 모두가 참여하여 마을의 무사안녕을 비는 행단제(杏亶祭)를 지내고 있다.




수세가 왕성하였던 80년대 말의 은행나무


수세가 왕성하였던 80년대 말의 은행나무








박상진프로필



작성자
박상진
작성일
2014-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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