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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칼럼

후백제 도읍 전주를 든든히 지켜준 금남정맥 스크랩



후백제 도읍 전주를 든든히 지켜준 금남정맥 




진안 주화산에서 부소산 북쪽 백마강 선착장 옆 조룡대까지 뻗은 산줄기가 금남정맥(錦南正脈)이다. 일 억 년 전 중생대 마지막 지질시대인 백악기 때 진안고원이 솟는 지각운동 때 생긴 산줄기이다. 금강과 만경강, 섬진강 분수령인 주화산에서 출발해 보룡재와 황조치, 연석산과 운장산, 진안 태평봉수와 백령산성을 지나 대둔산에서 충남으로 접어들어 계룡산을 거쳐 부소산까지 이어진다. 반면에 싸리재에서 서쪽으로 천호산과 미륵산을 거쳐 금강 하구 둑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실질적인 금남정맥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진안고원의 서쪽 경계인 금남정맥은 전북을 동부의 산악지대와 서쪽 평야지대로 갈라놓은 자연경계를 이룬다. 백두대간 산줄기 못지않게 상당히 험준해 보룡재 등 고갯길을 중심으로 내륙교통로가 선상으로 구축됐다. 진안고원의 서쪽 관문인 보룡재는 후백제 간선교통로인 백두대간 육십령로가 통과한다. 보룡재를 중심으로 동쪽에 소태정과 서쪽에 성산마을이 자리하고 있어 일찍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음을 뒷받침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산마을과 관련된 성()의 존재를 찾지 못해 매우 안타깝다. 금남정맥의 보룡재가 전략상 요충지였음을 방증해 준 곳이 진안 오룡리 고분이다.




진안 용담댐에서 바라 본 금남정맥 산줄기 모습으로 사진 속 중앙부가 운장산으로 전북 서부 평야지대가 한눈에 잘 조망된다.


진안 용담댐에서 바라 본 금남정맥 산줄기 모습으로 사진 속 중앙부가 운장산으로 전북 서부 평야지대가 한눈에 잘 조망된다.




금강 지류인 주자천에서 바라 본 금남정맥 고봉들로 진안 대불리 제철유적을 비롯하여 20여 개소의 도요지가 밀집 분포되어 있다.


금강 지류인 주자천에서 바라 본 금남정맥 고봉들로 진안 대불리 제철유적을 비롯하여 20여 개소의 도요지가 밀집 분포되어 있다.




금남정맥 보룡재 부근에 말무덤으로 불리는 한 기의 고분이 있다. 통일신라시대 때 만들어진 지상식 계통 횡혈식 석실분으로 전북 진안군 부귀면 오룡리 오산마을 부근에 위치한다. 봉분 가장자리에 직경 11m 호석시설이 둘러져 있으며, 벽석은 3단까지 수직으로 쌓고 그 위로 올라가면서 약간씩 내경되게 올리고 동벽에 잇대어 시상대가 마련됐다. 유물은 인화문이 새겨진 유개합 뚜껑편이 출토됐는데, 그 시기는 7세기 말엽 이른 시기로 편년됐다.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금남정맥 산줄기를 경계로 신라와 당나라 관할 영역을 한 자리에서 이해할 수 있는 곳이다.


진안 오룡리에서 동쪽으로 8.5km 떨어진 노래재[歌峙] 남쪽에 진안 환미산성이 있다. 금남정맥 보룡재 동쪽에서 발원한 부귀천이 진안 용담댐으로 흘러드는 곳이다. 금강의 지류인 부귀천과 정자천 사이 산봉우리 서북쪽 골짜기를 휘감은 포곡식 산성이다. 한성기 백제와 가야를 최단거리로 잇는 간선교통로가 환미산성 동쪽을 통과한다. 당시의 경로를 복원하면 서울을 출발 대전과 금산을 경유하여 교통의 중심지이자 전략상 요충지인 진안고원에 도달한다. 금남호남정맥 밀북치를 넘어 섬진강 상류지역에 자리한 임실 월평리 산성에서 그 방향을 동쪽으로 틀어 백두대간 치재를 넘어 운봉고원에서 낙동강유역으로 접어든다. 한성기 간선교통로가 통과하는 금강과 섬진강유역에서는 아직도 가야계 고총의 존재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금남정맥 명산인 운장산 동봉 표석으로 일 억 년 전 큰 호수였던 금남정맥 속 진안고원과 그 주변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금남정맥 명산인 운장산 동봉 표석으로 일 억 년 전 큰 호수였던 금남정맥 속 진안고원과 그 주변지역이 시야에 들어온다.




금남정맥 보룡재 부근 진안 오룡리 통일신라시대 횡혈식 석실분으로 진안고원을 지키기 위한 당시 신라의 의지가 담겨있다.


금남정맥 보룡재 부근 진안 오룡리 통일신라시대 횡혈식 석실분으로 진안고원을 지키기 위한 당시 신라의 의지가 담겨있다.




진안 환미산성은 동쪽과 북쪽이 산줄기 정상부를 따라 흙과 돌로 성벽이 축성됐다. 반면에 남쪽과 서쪽은 옥수수 낱알모양으로 잘 다듬은 성돌로 쌓았는데, 성돌 모양과 품()자형의 축성방법은 후백제 산성으로 밝혀진 전주 동고산성과 똑 같다. 성벽은 대부분 무너져 내렸지만 장대형 석재로 뒤채움 한 축성방법도 역시 후백제 산성과 상통한다. 지표조사 때 표면에 거친 선문과 격자문이 시문된 기와편이 다량으로 수습됐다. 진안 용담댐에서 전주로 향하는 간선교통로가 통과하던 노래재[歌峙]를 방어할 목적으로 후백제 때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후백제 도성인 전주의 방어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에 견훤에 의해 축성된 것이 아닌가 싶다.


금남정맥의 고봉인 운장산에 산성 및 봉수가 있다. 조선 중종 때 율곡의 친구인 성리학자 송익필(宋翼弼)이 서봉 아래 오성대에 은거하여 그의 자인 운장(雲長)을 따서 산 이름을 붙였다. 금남정맥 피암목재에서 서봉을 거쳐 상봉에 이르기 직전에 성벽과 망대가 있다. 망대 바로 아래 남쪽 기슭에 석문이 있고, 거기서부터 기슭을 따라 무너진 성벽의 흔적이 남아있다. 동쪽과 북쪽 기슭 성벽은 잡목이 무성하게 우거져 그 흔적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면담조사 때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 주민들이 서봉 정상부에 봉수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고 제보해 주었다. 전주를 비롯한 전북의 서부 평야지대가 한 눈에 잘 조망되는 곳으로 그 남쪽에 연석산과 보룡재가 있다.




사비기 동안 백제와 신라의 사행로가 통과하던 금남정맥 싸리재로 우측에 진안 태평봉수와 좌측에 왕사봉(王思峰)이 있다.


사비기 동안 백제와 신라의 사행로가 통과하던 금남정맥 싸리재로 우측에 진안 태평봉수와 좌측에 왕사봉(王思峰)이 있다.




진안 태평봉수로 1990년 학술발굴 및 전문가 고증을 받지 않고 복원이 이루어져 삼국시대 봉수터에 조선시대 봉수가 복원됐다.


진안 태평봉수로 1990년 학술발굴 및 전문가 고증을 받지 않고 복원이 이루어져 삼국시대 봉수터에 조선시대 봉수가 복원됐다.




진안고원 북쪽 관문이 장군봉과 왕사봉(王思峰) 사이 고갯마루인 싸리재이다. 진안고원에 속한 무주군과 진안군 일대에서 금남정맥을 넘어 전주와 고산 등 만경강유역으로 진출할 때 대부분 넘던 고갯길이다. 진안 태평 봉수와 왕사봉 사이 움푹 들어간 고갯마루에 작은 싸리재가 있다. 충남 부여와 논산 일대에서 금남정맥을 넘어 진안고원으로 진출하려면 꼭 넘어야 했다. 사비기 동안 백제와 신라의 사신들이 왕래하던 사행로(使行路)가 통과하던 큰 고갯길이다. 금남정맥 싸리재를 중심으로 그 양쪽에 산성 및 봉수가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당시 전략상으로 얼마나 중요했던가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진안 태평 봉수는 전략상 요충지로서 금남정맥의 중요성을 높였다. 금남정맥의 큰 고갯길인 작은 싸리재 동쪽 산봉우리에 있다. 전북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와 완주군 운주면 고당리 경계로 달리 대불리 봉수라고도 불린다. 금남정맥의 산줄기 정상부에 자리하여 완주 숯고개[炭峴] 봉수와 작은 싸리재 등 그 주변지역의 봉수와 고개들이 잘 조망된다. 1990년대 진안군에서 복원한 연대는 그 평면형태가 남북으로 약간 긴 장방형이며, 남쪽에 연대를 오르는 계단이 있다. 연대와 그 주변지역에서 격자문과 승석문이 시문된 삼국시대 토기편이 상당량 수습됐다. 삼국시대 봉수에 천 년 늦은 조선시대 봉수를 복원해 문화재 복원의 난맥상을 일깨워 준다.


충남 금산군 일대에서 전주로 향하는 길목에 백령산성이 있다. 금남정맥의 백암산 북쪽에 자리한 산정식 석성으로 달리 백령성(栢嶺城)이라고도 불린다. 충남 금산군 남이면 건천리와 역평리 경계인 선치산 동쪽으로 금산군 추부면을 거쳐 영동과 옥천방면으로 이어지는 전략상 요충지이다. 성벽은 거의 허물어졌으며, 서쪽 성벽은 높이 5.86.9m, 내벽 2.33m, 성벽의 너비는 4m에 이른다. 선치산의 산봉우리에는 봉수대가 있으며, 진악산의 관앙불봉(觀仰佛峰)의 봉수와 서로 연결된다. 후백제 견훤이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방어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충남 금산군 남이면 대양리에 경양현(景陽縣)을 설치하고 백령산성을 다시 고쳐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진안고원에서 전주로 향하는 길목인 노래재 남쪽 진안 환미산성으로 품(品)자형의 축성방법이 전주 동고산성과 똑 같다.


진안고원에서 전주로 향하는 길목인 노래재 남쪽 진안 환미산성으로 품()자형의 축성방법이 전주 동고산성과 똑 같다.




전북 완주군 운주면 금당리 삼거리마을 북쪽 탄현의 서쪽 산봉우리에 입지를 둔 탄현 봉수대를 알리는 등산로 안내판이다.


전북 완주군 운주면 금당리 삼거리마을 북쪽 탄현의 서쪽 산봉우리에 입지를 둔 탄현 봉수대를 알리는 등산로 안내판이다.




금남정맥 명산 중 명산이 대둔산이다. 한국 8경의 하나로 최고봉인 마천대(878m)를 중심으로 칠성봉, 장군봉 등 멋진 암봉과 삼선바위, 용문굴, 금강문 등 기암괴석과 수목이 한데 어우러져 산세가 수려하다. 우뚝 솟은 봉우리마다 독특한 형상이 담긴 곳으로 잘 다듬어진 조각품과 분재의 군락을 보는 것 같은 수석의 보고이다. 흙보다 돌멩이가 많은 산, 돌고 돌더라도 오르락내리락 하기보다는 가파른 비탈길이 심한 곳이다. 그래서 대둔산을 호남의 금강산이라고 격찬한다. 1977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대둔산은 운주의 안심사, 진산의 태고사, 벌곡의 신소운사 등의 유서 깊은 절도 있다.


대둔산 동쪽 기슭에 이치(梨峙)가 있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성을 지켜준 이치대첩과 관련된 역사적인 현장이다. 전북 완주군 운주면과 충남 금산군 진산면 경계로 달리 배꽃재라고도 불린다. 전주와 대전을 잇는 17번 국도가 통과할 정도로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이다. 임진왜란 때 3대 대첩의 하나로 전주성의 침공을 막고 호남 곡창지대를 사수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선조 25(1592) 임진왜란 때 왜군이 전주를 목표로 삼아 물밀 듯이 몰려오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전라도 절제사 권율 장군이 1500여 명의 병력으로 왜적 20,000명을 상대하여 통쾌하게 무찌른 곳이다.


전북을 동부 산악지대와 서부 평야지대로 갈라놓는 산줄기가 금남정맥이다. 진안고원의 서쪽 경계로 그 지형이 매우 험준해 일부 고갯길을 중심으로 교통로가 선상으로 발달했다. 백제의 웅진기부터 후백제까지 간선교통로가 금남정맥을 통과했으며, 당시까지만 해도 교통의 중심지이자 전략상 요충지를 이루었다. 삼국시대 때는 장수가야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뒤 백제가 한 동안 정치적 불안에 빠지자 이곳으로 진출하여 금남정맥을 따라 봉수를 집중적으로 배치했다. 후백제는 전주를 도읍으로 정하고 강력한 방어체계를 구축할 때 금남정맥을 넘어 전주로 향하는 길목을 지킨 산성들을 개축했다. 금남정맥은 후백제 도읍인 전주와 전주성을 지켜준 든든한 방어선이었다.




충남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 백령성 표석으로 견훤이 후백제 도읍인 전주를 지킬 목적으로 당시 개축한 것으로 전해진다.


충남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 백령성 표석으로 견훤이 후백제 도읍인 전주를 지킬 목적으로 당시 개축한 것으로 전해진다.




금남정맥 명산인 대둔산으로 동쪽에 권율이 승리로 이끈 이치대첩지와 서쪽에 완주 안심사, 북서쪽에 논산 개태사가 있다.


금남정맥 명산인 대둔산으로 동쪽에 권율이 승리로 이끈 이치대첩지와 서쪽에 완주 안심사, 북서쪽에 논산 개태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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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곽장근
작성일
2014-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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