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뛰기링크

문화유산기자단

2015 고궁 야간 특별관람-겨울밤, 창경궁을 거닐다 스크랩





 



 



 



겨울밤, 창경궁을 거닐다



 



‘성대한 경사’ 창경궁(昌慶宮)



창경궁은 성종 15년(1484)에 대비전의 세 어른인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수리하면서 역사가 시작됩니다. 창경궁은 초기에 궁궐로서 독립적인 규모를 갖추긴 했으나 활용도가 높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1592) 당시 창경궁은 소실되었으나 임진왜란이 끝나고 궁궐을 복구하기 시작하여,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년인 1616년에 창경궁도 중건이 이루어 졌습니다. 하지만 창경궁은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순조 30년(1830) 대화재로 인하여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내전의 전각들은 대부분 순조 33년(1833)에 복구공사가 이루어 져서 이듬해에 지어진 것입니다.

창경궁의 가장 큰 훼손은 1907년 순종이 즉위했을 때입니다. 일제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창경궁의 전각을 헐고 식물원과 동물원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궁궐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궁궐이 갖는 상징성을 격하시켰습니다. 불과 순종 즉위 4년만에 일어난 일입니다.

위와 같이 창경궁은 성대한 경사라는 이름과 다르게 아픈 역사가 많이 담겨있습니다. 또한 창경궁은 왕실의 생활공간으로 활용도가 높아짐에 따라 내전이 발달하여, 소현세자의 죽음, 장희빈과 인현왕후, 영조와 사도세자와 같은 조선 왕실의 이야기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창경궁은 서쪽으로는 창덕궁과 접해 있고, 남쪽으로는 종묘로 통하는 곳에 입지하였으며, 조선왕조의 궁궐 중 유일하게 자연 지세에 따라 주요 전각이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내전의 주요 건물들은 남향으로 본래의 자연스런 배치를 이룬 궁궐입니다.



 



산책 그리고 창경궁



 



위 지도는 창경궁 배치도입니다. 창경궁은 크게 왕이 신하들과 정무를 보는 외전과, 왕과 그 가족이 생활하는 사적인 공간인 내전으로 나누어집니다. 밑에 사진을 보면서 배치도를 참고하시면 편하게 보실 수 있습니다.



창경궁



창경궁에 도착한 시간은 늦은 7시 30분이었습니다. 창경궁 겨울 야간 특별 관람 티켓을 받았을 때, 우리는 창경궁에 대한 기대감과 두근거림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창경궁 앞에는 카메라를 가져온 관람객, 연인, 가족과 함께 온 관람객 등 다수의 사람들이 들떠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창경궁



첫 번째 사진은 홍화문입니다. 창경궁의 중심 부분이 동향이기 때문에 정문인 홍화문도 동쪽을 바라보며 세워졌습니다. 홍화문은 성종 15년(1484)에 창건되었고,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광해 8년(1616)에 재건되었습니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좌우에 한 쌍의 십자각을 세워 품격 높은 대문 형식을 갖추었습니다. 창덕궁 돈화문이 5칸인데 비해 홍화문은 3칸의 작은 규모로서 창경궁의 소박함을 보여줍니다.



창경궁



경건한 마음으로 홍화문을 들어서자 다리가 보입니다. 옥천교입니다. 다리 난간 아래 홍예(무지개 모양) 사이에는 궁궐에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쫓기 위해 도깨비 상을 조각해 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옥천교는 말라버린 다른 궁궐의 금천과는 달리 극심한 가뭄이 아니면 항상 맑은 물이 흐릅니다.



창경궁



옥천교 뒤에있는 명정문을 지나 우리가 처음으로 본 것은 창경궁의 으뜸 전각 명정전이었습니다.



창경궁



명정전에 가기위한 이 길은 삼도(三道)입니다. 궁궐에는 삼도(三道)를 두어 왕궁의 격식을 갖추었습니다. 가운데 길은 어도(御道)라고 하여 왕이 지나다니는 길, 동쪽은 문관, 서쪽은 무관이 이용하는 길이었습니다.



창경궁



또한 사진에서 보이는 왼쪽 위 부분은 답도(踏道)라고 하는데 봉황으로 새겨져 임금이 지나다니며 당대에 봉황이 나타내는 태평성대를 이루어 보시라는 각성의 돌입니다. 물론 임금은 답도를 밟고 지나다니지는 않고, 가마를 타고 지나다녔습니다.



창경궁



창경궁



명정전은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정전(正殿)입니다. 명정전도 홍화문과 같이 성종 15년(1484)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광해 8년(1616)에 재건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현존하는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창경궁은 정궁으로서의 역할로 지어진 궁궐이 아닌 왕실 가족과 그에 딸린 인원을 수용하는 역할인 이궁으로서의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경복궁의 근정전과 창덕궁의 인정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명정전의 규모가 작습니다. 명정전은 단층구조로 지어졌지만, 2단으로 쌓은 월대 위에 세워져 있어 정전의 위용을 갖추었습니다.



창경궁



창경궁



 



위에 보이는 사진들은 국왕이 정무를 보던 문정전입니다. 왕의 공식 집무실인 편전이었던 문정전은 동향인 명정전과 달리 남향으로 지어졌습니다. 문정전 일원은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고, 1986년에 문정문, 동행각과 함께 복원되었습니다.



1762년 5월 13일, 문정전 앞뜰에서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시작했는데,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이 자신의 세력을 싫어한 사도세자에 위기감을 느끼고 영조에게 모략을 고했습니다. 결국 영조는 사도세자를 커다란 뒤주에 8일동안 가둔 다음 2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했습니다.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미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합니다.



 



창경궁



다음 사진은 숭문당의 모습입니다. 숭문당은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논하던 곳으로, 창경궁 창건 당시에는 없었고 광해군 때 재건하면서 세운 것으로 추정됩니다. 경사를 이용하여 뒤에는 낮은 주초석을, 앞에는 높은 주초석을 세운 누의 형식으로 되어있습니다. 앞에 보이는 현판은 영조의 친필 현판입니다.



창경궁



이번 사진은 함인정입니다. 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이용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1830년에 소실되었다가 1833년에 재건되었습니다.



창경궁



함인정을 지나 바로 볼 수 있는 건물들은 환경전과 경춘전입니다. 두 건물은 통명전, 양화당과 함께 창경궁의 내전을 이루는 침전입니다. 이곳을 중심으로 왕과 왕비의 일상생활과 생로병사가 이루어졌습니다. 환경전은 왕이나 세자가 기거했던 곳입니다.



창경궁



경춘전은 성종이 1483년에 인수대비를 위해 지은 침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탄생하고 많은 왕후들이 여기서 승하한 것으로 보아, 대비뿐 아니라 왕비의 세자빈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 볼 수 있는 건물은 순조 34년(1834)에 재건한 것입니다.



창경궁



지금 보이는 환경전 위의 잡상들은 불길한 기운을 막기 위해 지붕의 추녀 마루 끝에 앉히는 것들입니다. 잡상들은 서유기에 나오는 인물 및 토신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안쪽에는 용머리를 두고 3, 5, 7 등의 홀 수로 건물마다 다르게 늘어놓는다고 합니다.



창경궁



창경궁



지금 위의 두 건물은 내전의 중심 전각인 통명전과 양화당입니다. 월대 위에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을 가지고 있습니다. 통명전은 주로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하였지만, 중종과 명종비의 빈전으로도 사용되었고, 경종은 편전으로도 사용하였습니다. 양화당은 내전의 접대 공간으로 사용되었고,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환도하면서 머물렀습니다. 환경전, 경춘전과 마찬가지로 두 건물은 순조 34년(1834)에 재건한 것입니다.



왕비의 침전이었던 통명전에는 희빈 장씨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궁녀였던 장옥정은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고, 왕자를 출산하여 희빈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숙종은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서인이었던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킵니다. 하지만 서인들은 다시 남인들을 제거하기 시작했고, 왕비에 오른 장희빈도 정일품 후궁인 희빈으로 다시 강등됩니다. 그 후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바늘을 꽂은 인현왕후 모습의 꼭두각시와 동물의 시체를 왕비인 침전인 통명전 주위에 묻게 됩니다. 결국 장희빈의 행동이 발각되고, 사약을 받게 됨으로써 이야기는 끝납니다. 이 이야기와 함께 통명전을 감상하신다면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창경궁



마지막 건물은 후궁들의 처소였던 영춘헌과 집복헌입니다. 집복헌에서는 사도세자와 순조가 탄생했습니다. 정조는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를 총애해 집복헌에 자주 출입하면서 가까운 영춘헌을 독서실겸 집무실로 이용했다고 합니다.



 



밤 그리고 창경궁



창경궁



창경궁



창경궁



창경궁의 밤은 조명과 잘 어우러져 낮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전각 위로 보이는 현대의 건물들은 창경궁의 야경과 함께 어우러져 색다른 느낌을 연출해 내고 있었습니다. 현재와 과거가 구분된 것이 아니라 이어져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별과 함께 바라본 창경궁은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아름다운 창경궁의 건물들에 지지 않으려 더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았습니다. 서울에서 바라본 밤하늘 중에 가장 많은 별이 떠 있었습니다.



창경궁



영춘헌과 집복헌을 지나 따라 내려오니 청사초롱으로 밝힌 길이 있었습니다. 청사초롱은 너무도 아름다웠고, 왕과 함께 산책하는 느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창경궁



밤의 춘당지는 겨울밤, 창경궁 나들이를 끝맺어 주었습니다.



 



사진기자단사진기자단



 

댓글등록 비밀댓글

(0 / 300)

전체댓글수: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상업적 이용금지+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